클리블랜드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클리블랜드(Cleveland)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도시이다. 카이어호가군의 군청 소재지로 인구는 약 38만 명으로 오하이오주에서 콜럼버스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도심은 오하이오주 북동쪽, 이리호의 남쪽 호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펜실베이니아주와의 경계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다.[1]
개요
클리블랜드는 오하이오주 북부, 이리호 연안에 있는 주 최대의 상공업도시이다. 클리블랜드 도시권 인구는 약 206만 명으로 오하이오주 3위 도시이다. 19세기 초에 마을이 생긴 이래 일찍부터 제분업 등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1827년 오하이오 이리운하 1구간이 개통될 무렵부터 급속히 발전하여 1836년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지리적으로 수송 교통의 십자로에 해당하며 그 가장 중요한 시설이 항만인데, 이 항만은 세계 70개국 140개소 이상의 항구와 이어져 있으며 오대호 연안 주요항의 하나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는 1796년 쿠야호가강 하구에서 만들어졌고, 호수의 수운을 이용하여 제철 원료인 철광석, 석탄, 석회석을 쉽게 얻을 수 있으므로 제철을 비롯한 자동차, 조선, 석유 정제 등이 왕성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석유와 철강 산업 등이 쇠퇴하면서 쇠락한 중서부의 오대호 지방도시의 하나가 되었고, 인구도 많이 줄어들어 2010년 인구는 40만 명 정도로 전성기 때의 인구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중공업의 쇠퇴와 함께 클리블랜드의 산업은 금융, 보험, 법률, 의료분야의 서비스 산업으로 다양하게 변화했다. 기후적으로는 냉대 습윤 기후에 속한다. 1월 평균기온은 -3°C 정도이며 북쪽에 오대호 중에서는 작지만 그래도 바다처럼 큰 이리호가 있어 눈이 많이 온다. 평균 강설량이 68.1인치로 오대호 지역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다. 최난월인 7월 평균기온은 23°C 정도이다. 클리블랜드는 2014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6위에 선정될 정도로 치안이 매우 좋지 않다.[2]
역사
첫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전에 치페와, 이리, 이로쿼이 인디언들이 클리블랜드 지방에 살고 있었다. 1796년 코네티컷 대지 회사의 감독자 모지스 클리블랜드가 코네티컷의 정착자들을 이끌고 현재의 클리블랜드가 된 대지로 데려왔다. 1795년 코네티컷 대지 회사는 현재 클리블랜드 지역을 포함하는 웨스턴 리저브 지역을 매입하였다. 1800년대 초반 동안에 더 많은 뉴잉글랜드의 정착자들이 그 지역에 왔다. 클리블랜드는 1810년 카유로가 카운티의 소재지가 되었고 1814년 마을로서 합병되었다.
1825년 이리운하의 개통이 노스웨스트 준주로 제조품들을 싣고 가거나, 동부로 가는 원료들을 위한 값이 싼 교통을 마련하였다. 운하는 클리블랜드가 상업의 중심지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36년 오하이오주의 입법부는 클리블랜드를 도시의 특허로 승인하였다. 당시만 해도 도시는 약 6,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1800년대의 마지막 절반 동안이 클리블랜드는 상업에서 공업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1851년 도시에 첫 철도가 생기고 주도 콜럼버스와 연결하였다. 1852년 슈피리어호에서 들어온 철광석이 처음으로 클리블랜드 항구에 들어왔다. 미네소타주에서 들어오는 철광석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들어오는 석탄의 선적이 도시가 기관차와 다른 철강 제품들을 생산하는 주요 도시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50년과 1870년까지 클리블랜드의 인구는 17,034명에서 145,281명으로 늘어났다. 도시는 또한 펜실베이니아 석유의 정재소가 되기도 하였다. 1870년 존 D. 록펠러가 클리블랜드에서 스탠다드 석유 회사를 결성하였다.
1880년대와 1890년대 동안 도시의 재빠른 산업 번창은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정착자들을 끌어들였다. 대다수는 헝가리, 리투아니아, 폴란드나 러시아에서 왔다. 1900년 381,768명의 사람들이 클리블랜드에 살았다.
톰 L. 존슨의 시장으로서 첫 기단 동안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클리블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잘 통치된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존슨은 경찰국을 향상시키고 낮은 교통비를 도시에 가져왔다. 그는 집주인들보다 더 높은 비율에서 상업적 재산의 부담스러운 주인들의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1900년대 초반의 자동차 산업 발달은 클리블랜드에서 위대하게 철강 제조업을 원조하였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에 도시는 연합국을 위한 전투기, 군함과 탱크를 생산하였다. 1930년 전쟁이 클리블랜드의 인구를 900,429명으로 늘이는 데 도움을 준 후에 철강업이 재빠르게 번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도시는 다시 군사 용품들을 생산하였다. 남부에서 온 거대한 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포함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클리블랜드에 와서 도시의 국방 산업들에 직업을 찾았다. 1950년으로 봐서 클리블랜드의 인구는 914,808명으로 치올랐다.
1950년대 동안에 외곽에서 사는 경향이 발달하면서 수천명의 백인 중류 집안 시민들이 도시의 외부에 새롭게 지어진 지역들로 이주하였다. 1960년으로 봐서 클리블랜드의 인구가 876,050명으로 떨어졌다.
도시는 1960년대에 심각한 인종적 문제를 향하였다. 1966년 7월에 호크 지역에서 일어난 5일 간의 폭동에서 4명이 사망하였다. 1967년 칼 스토크스를 시장에 선출한 후 인종적 긴장이 감소하였다. 민주당 소속의 스토크스는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첫 흑인 시장이었다. 그는 1971년까지 시장직에 있었다. 1968년 7월 글렌빌 지역에서 또 다른 폭동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클리블랜드의 인구는 드라마적으로 쇠퇴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도시는 산업이 쇠퇴하거나 외곽들 혹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수천개의 직업을 잃었다.
1970년대 동안에 클리블랜드는 엄격한 재정적 어려움들을 마주쳤다. 1978년에는 1930년대 대공황 이래 대부금의 부족이 생긴 첫 주요 도시가 되었다. 1979년 투표인들은 자금을 모으는 도움을 주는 데 도시의 소득세를 늘이는 데 찬성하였다. 클리블랜드는 도시의 지도자들과 8개의 은행이 지불 기한이 넘은 기부금을 다시 낼 수 있는 동의서에 도달하면서 1980년 부족으로부터 나왔다.
1980년대에 클리블랜드는 도시의 재정적 어려움으로부터 회복하는 일을 하였다. 도시의 수고는 복귀된 도시라 불리는 데 이끌어졌다.
국고 안정을 이루는 것을 도우는 데 도시 정부는 도시 직업들의 수백개를 소거하고 투표인들은 또 다른 소득세 향상에 찬성하였다. 정치적 안정을 향상시키는 데 투표인들은 시의회의 회원을 33명에서 21명으로 줄이고 시장과 시의회원들의 임기를 2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데 찬성하였다. 제조업의 수가 지속적을 떨어졌으나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클리블랜드의 인구가 1980년대 동안에 감속되었고 1990년에는 인구가 대략 500,000명으로 떨어졌다.
호안 지역을 포함한 다운타운 지역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많은 재개발 계획들의 무대였다. 이 계획들은 타워 시티센터에서 거기에 많은 소매상과 오락 시설들의 개발, 플레이하우스 스퀘어를 주요 예술 단지로 수리, 스포츠 경기장들을 포함한 게이트웨이 컴플렉스의 개발을 포함한다. 노스 코스트 항구 계획은 호안을 항구, 공원, 운동장과 2개의 박물관으로 변형시켰다.
클리블랜드의 경제 복귀에 불구하고 학교 시스템이 근심의 근본으로 남아있었다. 1995년 재정적 문제의 세월 이후에 도시의 학교 시스템은 주 통치의 아래에 놓였다. 그러나 1997년 오하이오 주지사는 1998년 정식으로 지배를 시작한 클리블랜드 시장에게 법안이 책임을 주는 법률에 서명하였다. 학교 시스템의 목적은 주립 시험에서 학생들의 득점을 향상시키고, 부모들의 관련을 줄이고 학교 안전을 향상시키는 것을 포함하였다.
2000년 도시의 인구가 1990년으로부터 약 5%나 쇠퇴하여 478,403명이었다. 클리블랜드는 그 결과로서 스카이라인을 새로운 레이블 뉴 아메리칸 시티로 바꾸면서 2000년대에 나왔다. 그러나 인간 논쟁들이 지속적으로 인종적 관계, 공공 학교들의 개혁과 실업자들을 위한 직업 훈련을 포함한 주의를 필요하였다. 2001년 투표인들은 카운티의 행정관이자 전 주 입법자 제인 L. 캠벨을 도시의 첫 여성 시장으로 선출하였다.[3]
교통
클리블랜드는 이전부터 이리호를 필두로 중서부 지역의 수운 및 철도 교통, 항공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도시가 많이 쇠락한 지금도 여전히 교통의 요지로 중요시되고 있다.
도시권의 중심 공항인 클리블랜드 홉킨스 국제공항은 원래 컨티넨탈 항공의 주요 허브였으나, 컨티넨탈이 근거리인 시카고에 허브가 있는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되면서 편수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시카고 등에서 연결되는 항공편은 지금도 많다.
도시 내 교통도, 대중교통이 불편하기로 유명한 오하이오주의 도시 중 가장 대중교통이 잘 정비된 도시로, 오하이오주 전체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깔려있는 도시다. 클리블랜드 지하철은 2개의 경전철과 1개의 중전철 노선을 가진 그럴싸한 지하철 시스템이다. 중전철인 레드 라인(Red Line)은 시 동부에서 출발, 다운타운을 거쳐 시 서쪽의 클리블랜드 홉킨스 국제공항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 1955년에 개통한 유서 깊은 노선이며, 미 전역에서 최초로 공항과 다운타운을 직접 이어주는 단일 노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경전철인 블루 라인(Blue Line)과 그린 라인(Green Line)은 클리블랜드 동남부에서 출발하여 쉐이커 스퀘어(Shaker Square)에서 합류, 다운타운 북부의 암트랙 역을 거쳐 이리호에 접한 항구까지 운행하는 노선이다. 모든 노선은 지상에 있고, 다운타운의 타워 시티 센터(Tower City Center) 역과 그 전후 구간 몇백미터 정도만 지하에 있다. BRT 역시 존재하며, 특히 클리블랜드의 BRT 헬스 라인(Health Line)은 미국 내는 물론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BRT 중 가장 성공적인 도입 사례로 손꼽히는 시스템 중 하나이다. BRT가 있는 다른 북미 도시들로는 미국 여러 곳들과 멕시코의 몇몇 도시들이 있다.[4]
문화
클리블랜드는 전성기 문화시설과 사회사업의 확충에도 공을 들였던 도시이다.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가 위치한 유니버시티 서클(University Circle)은 특히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이 있으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있는 세브란스 홀이 자리잡고 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 5대 관현악단으로 명성이 높다. 이 도시에서 창립된 스탠다드 오일의 투자자인 루이스 세브란스(Louis Severance)가 알려져 있는데, 그는 한국에도 10000달러를 기부하였고, 그의 이름을 기려 오늘날까지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 병원이 이어지고 있다. 루이스 세브란스의 자녀들도 자선사업가로 활동하여, 아들의 기부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공연장은 세브란스 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유니버시티 서클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는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클리블랜드 자연사 박물관(Cleveland Museum of Natural History), 클리블랜드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Cleveland, MOCA) 등이 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70여개의 전시실에 45,000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스톤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과 함께 미국의 5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대부분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피카소의 청색시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생 등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전시실에 공개되어있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클리블랜드〉, 《위키백과》
- 〈클리블랜드〉, 《나무위키》
- 〈클리블랜드〉, 《요다위키》
- 〈클리블랜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