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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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Thailand)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사이에 걸쳐 있는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타이 왕국이고, 태국어로는 랏차 아나짝 타이(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줄여서 쁘라텟타이(ประเทศไทย)라고 한다. 7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한다. 수도는 방콕(Bangko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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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수도: 방콕
- 면적: 513,120km2
- 인구: 7,007만 8,198명 (2022년)
- 공용어: 태국어
-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단일제, 의원내각제
- 국와: 마하 와치랄롱꼰
- 총리: 쁘라윳 짠오차
국호[편집]
태국(泰國)이라는 명칭은 타이(태국어: ไทย)를 중국어에서 '타이'라고 발음되는 한자 '泰'로 음역한 것으로, 타이 왕국(泰王國)의 준말이다. 태국의 정식 국호는 태국어로 쁘라텟타이(태국어: ประเทศไทย →자유의 땅)이다. 영어권에서는 타일랜드(Thailand)라고 표기하고 있다.
1939년 6월에 국호를 시암(태국어: สยาม 사얌[*], Siam, 음역어: 섬라(暹羅)/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타이로 고쳤다가, 1945년 9월에 다시 시암으로 되돌렸다. 1949년 5월 11일에 국호를 다시 타이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현재 태국 영토에는 대략 2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가장 초기의 쌀 재배 유적은 기원전 2000년 즈음의 것이며, 기원전 1,25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청동기에 진입하였다. 특히 태국 북서부에 있는 반 치앙 유적지는 현재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 생산지로, 당시 태국 지역의 높은 문명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국은 약 기원전 500년 정도에 철기 시대로 진입하였으며, 기원전 2세기 즈음에 태국에 세워진 푸난 왕국은 동남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6세기에는 몬족들이 드바라바티, 하리푼자야 등의 왕국들을 세웠으며, 크메르인들은 9세기 경에 앙코르를 중심으로 크메르 제국을 세웠다.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장악하여 번성한 말레이계 왕조인 탐브랄링가는 약 10세기 즈음에 생겨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은 인도의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푸난 왕국부터 크메르 제국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인도식 문화와 전통이 동남아 전체로 뿌리깊게 스며들어왔다.
현 태국의 주요 민족인 타이족을 언급한 첫 중국 문헌은 기원전 6세기의 것이다.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떤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라오스, 태국, 미얀마, 인도, 중국에서 건너온 다양한 민족들이 5세기에서 8세기 사이동안 섞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타이족은 약 11세기 즈음에 당시 몬족과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던 현재의 태국 영토로 이주해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서로 융합되며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수코타이 왕국[편집]
크메르 제국과 파간 왕국이 13세기 초에 쇠퇴하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수많은 도시왕국들이 생겨나며 경쟁하였다. 한편 타이족은 끝없이 뻗어나가며 현재의 인도 동북부에서부터 현재의 라오스와 말레이반도로 이주하였으며, 13세기 즈음에 이르자 이미 드바라티와 라보 왕국 등 대부분의 동남아 영토들까지 세를 뻗치고 있었다. 다만 동남아 현지 문헌에서 타이족들의 이주를 기록해놓은 공식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230년대 후반 경, 타이족 계열의 지역 토후였던 씨인트라팃이 크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238년에는 스스로 수코타이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현재 태국 역사학계는 수코타이 왕국을 첫 타이족 계열의 왕국으로 치고 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대왕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으며 영토를 급격히 늘려나갔다. 다만 이때까지만 하여도 수코타이 왕국은 중앙집권식 국가가 아닌, 여러 제후국들이 모여 만들어진 느슨한 집합체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편 람캄행 대왕은 현재의 타이 문자를 고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재 태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코타이 왕국의 마하 타마라차 1세는 태국에 처음으로 상좌부 불교를 들여오기도 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지역 왕조의 후계자인 망그라이가 1292년에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왕국을 세웠다. 그는 주변 지역들을 통합하였고, 란나왕국은 약 200여 년간 주변 일대를 다스리게 된다. 란나왕국은 메콩강까지 이르는 정치 동맹을 구축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수많은 인구를 거느리며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한편 짜오프라야 분지 하부에서는 롭부리, 아유타야 등의 도시들이 11세기에 건립되었다.
아유타야 왕국[편집]
아유타야왕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으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라보왕국에서 처음 발흥하였으며, 초대 국왕인 우통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시켜나갔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 아유타야의 국왕과 느슨한 조공 관계로 엮인 형태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군대와 정략결혼을 반복하며 세를 불려 나갔고, 15세기에 이르자 크메르 제국을 공격하고 수도인 앙코르를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아유타야는 크메르를 몰아내고 지역 강국으로 떠올랐으며, 기존의 수코타이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아유타야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보로마트라일록카낫 국왕은 왕국에 처음으로 봉건제를 도입하였고, 이 봉건제는 20세기까지 이어지며 ‘사끄띠나’라고 불리는 태국 특유의 계급제도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말라카 술탄국을 꺾는데에는 실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아유타야 왕국은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유럽과 교류를 가졌다. 포르투갈의 사절이 1511년에 왕국에 도착하였고, 당시 왕이었던 라마 티보디 2세에게 군사를 공물로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이 연이어 도착하였다. 그러던 중 몬족이 아유타야 왕국으로 하여금 버마의 따웅우 왕조와 전쟁을 벌이도록 하였고, 1540년대부터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1570년에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가 함락되면서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중흥군주 나레쑤언국왕이 1584년에 다시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버마의 봉신국으로 남았다.
아유타야 왕국의 국왕들은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유럽 열강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특히 나라이국왕의 재위기에 동남아를 여행한 유럽 여행가들은 아유타야 왕국을 중국과 인도와 함께 아시아의 최강국들 중 하나로 묘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다만 지나친 서양과의 친화정책은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낳았고, 결국 1688년에는 나라이 국왕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기도 했다. 다만 이후에도 서양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원만하였고, 프랑스 선교사들도 활동을 계속하며 선교하였다.
아유타야는 나레쑤언 국왕이 버마에서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이전의 피해를 회복하고 황금기에 들어섰다. 아유타야 왕국은 18세기의 두 번째 사반세기동안 예술, 문학 등을 눈부시게 꽃피웠으며 교육을 중점으로 두어 다양한 문화 발전 정책을 펼쳤다. 또한 1715년에 캄보디아 지역의 통치권을 두고 베트남과 일부 전쟁을 벌인 것만 제외하면, 외교적으로도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런 황금기도 결국 끝을 맞았고, 피비린내나는 계승 전쟁이 일어나며 내분이 발생했으며 장관들과 왕자들이 서로 죽고죽이는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왕국이 약해지는 도중, 1765년에 4만 명에 달하는 버마 군대가 아유타야를 침략하였으며 14달에 걸친 공성전 끝에 마침내 1767년 4월에 수도 아유타야가 함락되며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하였다.
톤부리 왕국[편집]
버마가 쳐들어와 수도 아유타야를 함락시키고 왕국이 멸망한 직후, 태국은 정치적 대혼란에 휩싸였다. 버마 군대는 아유타야에 주둔을 계속하였으며, 그와중에 5명의 지방관들이 서로 국왕을 자처하고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 중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던 딱신 장군이 점차 내분 상태의 태국을 통합하여나가기 시작하였고, 짜오프라야 강으로 함대를 보내 톤부리를 장악한 이후 같은 해에는 아유타야를 점거하고 있던 버마 군대도 수도가 점령된지 약 7개월 만에 모두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딱신 장군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였고, 톤부리를 임시 수도로 삼아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전쟁을 벌여 버마 세력을 란나 지역에서 1775년에 쫓아내었고, 1778년에는 비엔티안을 함락하였으며 1770년대에는 캄보디아에 태국에 종속된 왕조를 세우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톤부리 왕조 말기에 딱신 장군의 ‘광기’에 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세력이 딱신 왕을 몰아냈고,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짜오프라야 차크리 장군이 딱신 왕과 아들들을 죽였다. 차크리 장군은 이후 1782년 4월 6일에 라타나코신 왕국을 건국하며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는 짜끄리 왕조를 세우게 된다.
짜끄리 왕조[편집]
라마 1세가 즉위한 이후, 라타나코신 왕국은 성공적으로 버마의 침략을 이겨냈으며 버마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라마 1세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기도 하였다. 1821년에는 영국의 존 크로퍼드가 시암(태국의 이전 국명)을 방문하여 새로운 무역 조약을 맺으려 하였고, 1826년에는 시암은 영국과 버니 조약을 맺었다. 한편 라오스의 아누웡 국왕은 영국이 이 과정에서 시암을 침공할 것이라고 오해하였고, 1826년에 반란을 일으켜 시암을 공격하려 들었다. 그러나 영국은 시암을 침략하지 않았고, 오히려 라오스는 처참하게 진압당했으며 대다수의 라오스 왕족들이 강제로 방콕으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했다. 시암은 베트남과도 여러 차례 전쟁을 치루었고, 이 전쟁에서 베트남에 우위를 거두며 캄보디아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였다.
19세기 후반, 시암은 여러 식민지들을 세워 민족적 구성이 다른 영토들까지 한꺼번에 통치하려 들었다. 몽꿋 국왕은 다가오는 서양의 제국주의 위협에 대해 인지하였고, 이후에는 영국 정부에 사절을 보내 긴장을 완화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후 시암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영국은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링 경을 보내 보링 조약을 시암과 맺었으며, 이후에도 여러차례 시암과 강제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기 시작하였다. 한편 몽꿋 국왕은 말라리아로 일찍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아직 어린 라마 5세가 왕위에 올랐다.
라마 5세는 왕실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예제, 농노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고, 중앙집중적인 정책들을 많이 내놓았다. 1870년대와 80년대에는 북부에 있던 보호령도 모두 왕국으로 편입시켰으며, 영토를 동북쪽과 남쪽으로 뻗어나가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현재의 각기 부처와 비슷한 12개의 '크롬‘들을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근대화 개혁들을 실시하며 국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태국을 사이에 두어 완충 국가로 만들기로 합의하면서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세력들에 의하여 식민화가 되지 않은 국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프를리스(Perlis)·트렝가누(Terengganu)·클란탄(Kelantan)[1]을, 프랑스에게는 메콩강 왼쪽 연안의 라오스를 떼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빠따니라 불리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은 오늘날에도 태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치외법권 같은 불공정한 조약들도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였다.
한편 시암은 연합국 측이 이전의 불평등조약들을 개정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에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시암은 승전국이 되었으며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관세의 자유, 그리고 치외법권의 폐지 등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입헌군주정[편집]
1932년에는 피분송크람 장군과 태국인민당의 주도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 쿠데타로 인하여 국왕은 실권을 잃고 명예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라마 7세는 강제로 헌법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로 인해 시암은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체제가 바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대공황의 바람이 시암에도 몰아닥쳤고, 쌀 가격이 폭락하고 경제가 급하강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후 1933년에 쿠데타 세력들을 몰아내고 전제군주정을 되돌리려는 또다른 쿠데타가 터졌으나, 실패하였다. 라마 7세는 지속적으로 정부와 갈등을 겪으며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반강제로 퇴위하였다. 라마 7세가 퇴위한 직후, 정부는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난다를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라마 8세이다.
이후 태국 인민당의 군부 출신 인사들이 점차 시암의 정치계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피분송크람 장군은 1938년에 총리직에 올랐고, 정치적인 탄압과 동시에 반왕실 정책들을 펴나가며 독재 체제를 굳혔다. 송크람 정부는 반중, 반프랑스, 서구화 정책을 펼쳤고, 1940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태국’으로 바꾸었다. 1941년에는 비시 프랑스 정부와 무력 충돌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 일부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의 침공을 받았고, 일본과 싸울 여력이 없었던 송크람 정부는 개전 직후 휴전을 선언했다. 일본군은 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하였고, 12월 21일에는 군사 협정을 맺어 일본이 태국이 서구 세력들에게 잃어버린 영토 수복을 도와주는 대신에 세계대전에서 일본 편, 즉 추축국 편에서 싸우기로 합의하였다. 태국은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송크람의 독재와 일본의 간섭에 맞서 국민들이 자유타이운동(Free Thai Movement)를 벌였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일본이 완벽히 패망하며 세계 대전이 끝났다. 다만 승전국 측이었던 연합국들이 태국의 선전포고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간신히 패전국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1946년 6월에 젊은 라마 8세가 수상쩍은 총기 사고로 인하여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라마 9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태국은 1954년에 공산주의에 맞서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1957년에는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동안 태국 정계를 지배해오던 태국 인민당을 쫒아낸 이후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신적인 왕실의 권위에 힘입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가면서 권력을 굳혔다. 타나랏 장군은 태국의 인프라와 교육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으며, 1961년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직후에는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어 미국의 태국 보호를 확인받기도 하였다.
이시기 태국 사회는 급격한 서양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수많은 농촌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방콕 등 대도시로 모여들었으며, 도시민들에 비하여 자신들이 소외받았다고 느낀 농촌의 농부들은 점차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한편 이시기에는 경제 발전이 급격히 이루어지며 방콕 등의 대도시에서 막대한 양의 중산층이 생겨나기도 했다. 1971년 10월에는 타놈 끼띠카쫀 총리의 독재에 맞서 대중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국왕이 직접 개입하여 끼띠카쫀 총리를 몰아내고 법학자 출신의 사냐 다르마삭티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며 1932년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사례를 남겼다. 이후 태국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의회 민주주의를 맛보았는데, 이 얼마 되지 않은 민주화 시기를 태국 현지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핀 시기(ยุค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เบ่งบาน)’라고 칭한다.
현대[편집]
사이공이 함락되며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안그래도 불안정했던 태국 사회는 갈수록 흔들렸으며 극우 세력들은 좌파 계열의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6년에는 탐마삿 대학의 학생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날 쿠데타가 일어났고, 태국의 민주정부가 쫒겨난 자리에는 극우세력이 득세한 정부가 들어서 언론인, 관리,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극우 정부는 반공을 내세우며 독재를 정당화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하며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쿠데타로 인하여 그나마 더 온건한 성향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197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우호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난민 문제, 국경 분쟁, 경제 문제들이 연이어 겹치며 악재에 시달리자, 쁘렘 띤나술라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였다. 쁘렘 총리 시기는 종종 ‘반-민주주의’ 시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양원제로 구성된 태국의 의회들 중 하원은 모두 민주 선출제로, 상원은 모두 임명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기에는 국왕이 점차 정사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에는 처음으로 태국에서 선거를 통하여 뽑힌 총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1991년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수찐다 끄라쁘라윤 장군은 자신이 총리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혔으나, 1992년 대선에서 비리를 저지르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이때도 라마 9세가 또다시 정국에 개입하며 국민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수찐다 총리는 그날로 사직하였다. 1997년에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는 40여 년에 이른 경제성장을 끝내버렸다. 정부는 IMF에게 구제 금융을 받았으며, 이는 수많은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포퓰리스트 정치인 탁신 시나와트라가 이끄는 정당이 이에 편승하여 인기몰이를 하였고, 탁신 총리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하였다. 한편 2004년 인도양에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며 태국 남부를 대대적으로 덮쳤고,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일어나며 탁신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게 증폭되었다. 이후 탁신 총리의 2기 집권기에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2006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며 탁신 총리도 쫒겨났다. 군부 세력은 군정을 설치하였고, 이 군정은 대략 1년 정도 지속되었다.
2007년에는 탁신 전 총리와 연합한 태국 인민의 힘 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인민의 힘 당은 민주당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고, 이후 탁신계 인사들이 정부에 줄줄이 재등용되는 것에 반대한 세력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2011년 총선에서도 탁신계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탁신의 누이인 잉락 시나와트라가 새로운 총리로 당선되었다. 반대세력들은 탁신의 친척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시위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잉락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미루려 들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이를 저지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2014년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고, 쁘라윳 찬오차 장군의 주도하의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결성되어 현재까지 태국을 통치해오고 있다. 쁘라윳 총리는 시민권과 정치권을 제한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들을 엄격히 단속하는 탄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야당과 반대 세력들은 ‘단속 캠프’로 보내지고 있다는 설도 있어 논란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다. 한편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라마 9세가 201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라마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2019년에는 군부가 3월에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하였고, 쁘라윳 총리는 군부를 지지하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직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2020년 들어서는 코로나 19 사태와 함께 내려진 비상 봉쇄령에 반발하며 2020년 태국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지리[편집]
동남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태국은 자연 환경에 따라 크게 북부, 중부, 동북부 및 남부로 구분되며, 그 지역마다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인다.
북부는 높은 산악지대로 미얀마, 라오스와 접경한다. 비교적 시원한 기후이다. 남북방향의 높은 산맥이 줄지어 있으며, 태국 내 최고봉인 도이 인타논(2,576m)도 이 지역에 있다. 산맥 사이에 치앙마이·치앙라이·난·람빵 등 작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 골짜기를 이용한 교통로가 예로부터 발달되었다. 주변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전통적 관개수리체계가 발달되어 태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집약적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코끼리들이 숲에서 일을 하고 겨울철 딸기나 복숭아와 같은 과일을 재배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동북부(이싼)는 거의 전역에 코랏 분지가 펼쳐져 있으며, 강우량이 적어 농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에 있고, 경제적인 빈곤이 문제가 되는 지역이다. 태국 중부 동쪽 끝은 페차분 산맥과 동파야디옌 산맥으로 갑자기 막힌다. 이 산맥들은 역사적으로 태국 중부와 태국 동북부를 갈라놓았는데, 산맥 서쪽은 가파른 산지이자 무성한 삼림지역이고 동쪽은 큰 대지로 태국 전국토의 약 1/3을 차지한다. 메콩강에 접하고 있기도 하다. 기복있는 저지대는 논으로 만들어지고, 고지대는 소림(疎林)으로 덮였지만 인구증가에 따라 소림지역도 논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벼농사 외에 밭농사와 축산도 이루어진다.
중부에는 짜오프라야강이 형성한 광대한 짜오프라야 삼각주로 불리는 풍성한 평지가 퍼져,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수한 벼농사 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짜오프라야 강은 국내 제일의 하천으로 중부의 교통의 대동맥이면서 생활과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태국 중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짜오프라야 삼각주는 구델타와 신델타로 나뉜다. 구델타는 예로부터 육지로 만들어진 땅이며, 장대한 자연제방과 습지로 인해 깊은 물에서도 잘 견디는 부도(浮滔)라는 벼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신델타는 아유타야로부터 해안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이며, 완전한 평탄지로 좀체로 물이 빠지지 않는다. 19세기 말부터 물길이 가로세로로 파여져 벼농사 경작지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취락도 형성하였으며 오늘날 태국 제1의 곡창지이다. 품질 좋은 과일도 이곳에서 많이 재배된다. 태국 중부 서쪽 끝은 다우나산맥으로 미얀마와 국경을 이룬다.
남부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며, 대부분 산지이나 시암만쪽 동편에는 해안에 잇닿은 소규모 해안평야가 몇 곳에 형성되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파라 고무나무가 펼쳐져 있고, 최근까지 주석 채굴이 활발했다. 어업도 중요하다. 또, 우기가 중부보다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태국 정부는 남부에 말레이 반도 대운하 계획을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 검토 중이다.
그리고 동부 해안 지대는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며 서부는 수력 발전을 하기에 알맞은 서쪽의 산악지역과 계곡이다.
기후[편집]
다른 여러 동남아시아 나라와 마찬가지로 열대몬순 지대에 속한다. 수도 방콕에서 가장 더운 4월 평균 기온이 섭씨 29.5도이며, 가장 시원한 12월 평균 기온은 섭씨 25.3도이다. 연교차는 4.2이다. 이러한 단조로운 기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게 몬순이다. 5월부터 10월까지 남서몬순이 부는 우기이며, 연간 강우량의 거의 전부가 이 시기에 쏠린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몬순이 불어 아시아 대륙의 건조한 대기의 영향을 받아 건조기가 된다.
정치[편집]
1932년 이전까지만 해도 태국은 절대군주정이었다. 현대 태국의 전신들 중 하나였던 수코타이왕국에서는 국왕을 다르마, 즉 우주의 섭리에 따라 세계를 통치하는 절대자로 묘사하였고, 이 전통이 지역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불교와 합쳐지며 국왕의 권위가 지금까지도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특히 명군이었던 라마 5세가 지방분권적인 제후국들로 나뉘어 있던 태국을 중앙집중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국왕의 권력은 강력해져만 갔다. 다만 1932년 6월 24일, 태국 인민당이 무혈쿠데타에 성공하며 권력을 국왕에게서 빼앗아 입헌군주정의 기틀을 닦았다.
태국은 1932년 이래 무려 20번이나 헌법을 개헌하였다. 가장 최근의 개헌은 2017년에 있었다. 워낙 헌법이 자주 바뀐 만큼, 국가 체제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완전한 군부 독재체제에서 입헌 민주주의까지 다양한 체제를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태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쿠데타가 많이 일어난 국가이며, 1932년부터 2009년 사이의 83년 동안 55년을 군부 출신 인사들이 태국을 지배했을 정도로 군부의 입김이 강력하다 가장 최근에는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2014년에서 2019년까지 태국의 권력을 휘어잡았다.
태국의 정치는 크게 입헌군주정의 틀 안에 짜여져 있으며, 세습 군주가 국가 최고수반의 자격을 가지며 현재의 국가수반은 2016년 10월에 즉위한 라마 10세이다. 헌법에 의하면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며 태국군의 최고사령관, 그리고 태국 불교의 최고지도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후계자를 선정할 권한이 있으며, 왕실 내탕금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나, 왕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경우가 상당히 잦으며 모든 헌법에도 국왕의 정치권을 암묵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처럼 국왕의 권위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태국에서 국왕을 모욕하는 행위는 무례죄로 처벌될 수 있다.
경제[편집]
태국은 신흥공업국 중 하나이다. 태국은 2017년 기준으로 PPP로 환산하여 1조 2360만 달러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2번째로 거대한 경제국가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부의 분배도에서는 중간 정도이며, 1인당 GDP로 비교했을 시에서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다음으로 약 4위 정도이다.
태국은 인근의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신흥경제국들의 경제적 받침돌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2014년 3분기의 조사 결과, 태국의 실업률은 약 0.84% 정도로 매우 낮다고 한다.
태국은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약 매년 12.4%라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 성장을 이룩해왔다. 그러나 1997년에 태국의 통화인 바트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1.9% 추락하였고 취약한 금융 부문의 실태가 드러나면서 정부로 하여금 변동환율제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총리는 결국 사퇴를 강요당했고, 내각은 경제 위기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바트는 1978년부터 1997년까지 약 25 정도였으나, 1998년 1월에는 56으로 최저점을 찍었고, 그해 태국 경제는 10.8% 감소하면서 아시아 금융위기를 대대적으로 촉발하였다.
태국 경제는 1999년부터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에는 수출 호조에 힘입어 4.2%라는 성장률을 보이며 이전의 정체기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다만 2001년의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하여 2001년에는 약간 성장률이 2.2%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바트 약세와 내수 증가, 그리고 탁신 총리 주도의 대규모 국책사업들로 인하여 아시아 내에서는 가장 양호한 경제 실적을 냈다고 평가받는다. 이덕분에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매년 5~7%씩 높은 성장률을 내었다.
2005년에서 2007년까지는 성장률이 주춤하며 4~5% 정도로 내려갔다. 미국 달러의 약세로 인하여 태국 바트화는 날로 값이 올라갔고, 2008년 3월에는 달러가 거의 33바트까지 내려앉았다. 다만 이 때문에 1인당 GDP는 증가하여 2001년과 2011년 사이에 특히 수도권인 방콕 지대의 1인당 GDP가 이전 7,900달러에서 13,300달러 정도로 치솟았다고 한다.
2010년도 들어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며 태국 경제 성장률은 4에서 5% 사이를 맴돌았으며, 이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며 외국 투자자들이 태국에 투자를 꺼리면서 태국 경제는 제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농업[편집]
농업은 태국의 주산업이며 그 중에서도 도작(稻作)은 국민생활의 기초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인 동시 제1의 수출품이기도 하다. 태국은 세계 제1위의 쌀 수출국으로서 매년 도정미 650만 톤을 수출한다. 농업은 태국 GDP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쌀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곡물이다. 태국은 메콩 강 유역의 나라 중 가장 높은 경지율(27.25%)을 보인다.[9] 이 중 55%는 쌀 경작지이다. 주산지는 많은 소작농이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중부 삼각주지역이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산물이 고무와 옥수수인데 역시 수출된다.
수산업[편집]
수산자원으로는 담수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천, 운하, 호수에서 잡히는 어류는 국민의 필요 불가결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고 있다. 연안의 해양어업은 별로 발달해 있지 않다.
공업[편집]
전에는 경공업이 약간 발달했을 정도로 외국 공업제품의 시장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공업화를 이룩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자동차 생산량이 많은 국가이고 컴퓨터, 통신기기등 전자산업도 발달했다. 제조업은 주로 외국기업의 기술에 의존한다.
2012년 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245만 대로 전년 대비 68.3%의 성장률을 보임과 함께,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가에 진입하였다.
태국의 전자산업은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성장을 해온 산업으로 600억 달러의 생산에 달하고 있으며 최근 자동차 산업의 성장 전까지 태국의 제1의 수출산업이었다. 다만, 핵심부품의 생산이나 원천기술 개발 능력은 부족하여 대부분이 OEM이다.
유통과 무역[편집]
화교의 활약이 없으면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화교가 유통기구를 독점하고 있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미국·네덜란드·싱가포르·홍콩·일본 등이다. 수입도 크게 달라져 소비재수입이 크게 줄고, 공업생산용 원재료·자본재·원유 등이 두드러지게 늘었다. 주수입 상대국은 미국·사우디아라비아·싱가포르·말레이지아·일본 등이다. 공업화에 필요한 원재료와 자본재수입이 급증해 농산물 수출액을 넘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언제나 적자이다. 특히 대일 무역적자가 커져 해마다 무역마찰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역수지적자는 관광수입과 외국으로부터의 송금과 민간투자·정부차관 등으로 메워진다. 특히 관광수입 증대와 더불어 아랍산유국으로부터 보내져 오는 노동임금이 많다.[
관광 산업[편집]
태국 관광업은 태국 전체 GDP의 약 6% 정도를 차지한다. 2013년에는 동남아 전체에서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찾은 국가였으며, 12조 바트에 달하는 외환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며 가히 엄청난 양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 외에도 관광업으로 인해 생기는 부가적인 이익까지 포함하면 태국 GDP의 20.2%를 차지할 정도로 관광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한다.
아시아계 관광객들은 주로 방콕 일대를 주로 찾고, 아니면 치앙마이 등 역사 유적들을 관람하기 위하여 태국을 찾는 경우가 많다. 서양 관광객들은 방콕 뿐만 아니라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섬들과 해변들을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특히 태국 북부 지역은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숲으로 덮인 풍광들이 많아 인기가 좋다고도 한다. 다만 태국의 치안이 마음놓고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기에, 태국 정부 측에서는 독립적인 관광경찰들을 창설하여 주요 관광지 지역에 배치해놓는다고 한다.
태국은 전세계에서 5번째로 의료관광이 활성화된 나라로, 2018년에만 250만 명의 사람들이 의료 목적으로 태국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성전환수술로도 이름이 높으며, 성형수술에도 조예가 깊다고 알려져있다.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태국을 방문한 의료 관광객들의 90%가 성전환수술을 위해 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주요 자원[편집]
주요 자연 자원으로는 주석, 천연 고무, 텅스텐, 천연 가스, 탄탈럼, 목재, 납, 물고기, 석고, 갈탄, 형석, 경작지, 쌀, 카사바, 안티몬 등이 있다.
인구[편집]
타이족이 75%로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태국 주류에서 벗어난 여러 인종이 태국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 중국계가 18%, 기타 말레이족, 크메르족, 몽족, 고산족 등 나머지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타이족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도 거주하고 있으며, 태국의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작용함에도 여전히 엄격한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화교 또한 태국 사회, 특히 방콕 주변에서 특징적인 요소이다. 태국 사회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룬 화교는 정치나 경제 권력을 가진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태국의 전 수상 탁신 친나왓이다. 그는 2001년부터 정권을 잡았으나 2006년 9월 19일 쿠데타로 축출당했다. 소수 민족으로는 화교 이외에도, 크메르족, 몬족, 말레이족, 산간부족(먀오, 야오, 라와, 리소, 무소, 카렌, 이코)이 있다.
언어[편집]
태국의 공식언어는 태국어이다. 태국어는 인근의 라오어, 하이난과 윈난 산악 지방에서 사용되는 소수 민족들의 언어와도 굉장히 비슷하다. 태국 정부에서는 정부 주도로 태국어를 모든 국민들의 공용어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모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태국어를 국어로 선택하여 가르치고 있다. 참고로 태국어를 적을 때에는 크메르 문자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태국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한다.
태국 정부는 2011년에 약 62개의 언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태국어를 제외하면 태국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북동부 지방에서 사용되는 라오어이다. 종종 지역 방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주로 옛 란쌍 왕국에 속해있었던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와 가까운 남부 지방에서는 케란탄-파타니 말레이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화교들이 워낙 많은 탓에 중국어도 자주 사용된다.
태국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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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지역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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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도시 지도[편집]
태국 지형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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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 〈태국〉, 《위키백과》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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