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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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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위치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위치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폴란드어: Województwo świętokrzyskie)는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주이다.[1]

개요[편집]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의 면적은 11,672㎢이며 인구는 1,196,557명(2021년)이다. 북쪽으로는 마조프셰주, 동쪽으로는 루블린주, 남동쪽으로는 포드카르파츠키에주, 남쪽으로는 마워폴스카주, 남서쪽으로는 실롱스크주, 북서쪽으로는 우치주와 접한다. 주도(州都)는 키엘체(Kielce)이다. 1개 도시군과 13개 군, 102개 그미나(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폴란드의 16개의 주중 두 번째로 작은 규모이다.

주 이름은 이곳을 지나가는 시비엥토크시스키에산맥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시비엥토크시스키에는 폴란드어로 "성십자가"(聖十字架)를 뜻한다. "홀리 크로스(Holy Cross)"라는 영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도인 키엘체는 인구 20만 명에 달하고 이외에 오스트로비에츠, 시비엥토크시스키(Ostrowiec Świętokrzyski)와 스타라초비체(Starachowice) 등 몇몇 도시들은 인구 6만 명 내외의 작은 도시이다. 주도인 키엘체는 다른 지방 주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시와 인근이 시비엥토크시스키에 산맥에 인접하여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암석층을 갖는 도시이다.

키엘체에서 동쪽으로 62km 떨어진 작은 도시 오스트로비에츠 시비엥토크시스키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줄무늬 부싯돌(striped flint) 광산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에도 줄무니 부싯돌이 채굴되어 낙천주의의 돌(stone of optimism)로 불리며 이를 활용한 장신구와 보석산업이 활발하다. 키엘체 남부의 작은 도시 부스코즈드루이(Busko-Zdrój)와 인근은 광천수 매장지로 19세기부터 스파리조트로 유명한 지역이다.[2]

자연환경[편집]

1999년 지방정부 개혁으로 인근 3개의 주에서 일부를 분리하여 새롭게 구성되어 지리적으로 대표적 도시인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의 약 3분의 2가 자연환경 보존지역으로 유럽연합(EU)이 실행하는 환경보존 프로그램인 《NATURA 2000》에 지정되어 생태 네트워크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폴란드의 대부분 지역과 달리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가 포함된 남부는 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이중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시비엥토크시스키에산맥(Świętokrzyskie Mountains)은 최고 고도가 614m에 불과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오랜 5억 년 전에 형성되어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관광과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역사[편집]

본 지역은 11세기 이후 폴란드의 영토였으며 14세기에는 무역로로 번영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통치를 거치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999년 지방정부 개혁으로 인근 3개의 주에서 일부를 분리하여 새롭게 구성되었다.

산업[편집]

산업은 기계, 건축자재, 건설이며 석회석이 풍부하여 폴란드 전체 생산량의 약 60%를 점하고, 본 지역에서 생산된 시멘트는 우수한 품질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농업 역시 중요한 산업으로 감자, 과일과 채소를 주로 재배하며 시리얼과 유가공품은 우수한 품질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철도 운송망이 열악하고, 산업기반이 별로 없어 여타 제조업은 취약하다.

주요 도시[편집]

키엘체[편집]

키엘체는 폴란드 중남부에 위치한 시비엥토크시스키에(성 십자가라는 뜻)주의 주도(州都)이다. 석회석을 비롯해 구리 · 납 · 철의 매장량이 풍부한 지역이어서 광업과 금속제련업이 발달했다. 키엘체에서 150km 북쪽에는 폴란드 수도이자 최대 도시 바르샤바가, 100km 남서쪽에는 제2의 도시 크라쿠프가 있어서 두 대도시를 잇는 교통 요지로 꼽힌다.

키엘체에는 서기 5~6세기까지 켈트족이 거주했으나 슬라브족이 켈트족을 쫓아내고 정착지를 만들었다. 11세기 무렵부터 사냥꾼들이 시비엥토크시스키에 산맥에서 잡은 짐승들의 모피와 고기를 곡물 · 생필품과 바꾸는 장터 역할을 하며 발전했다.

12세기 초에는 크라쿠프 주교의 영지가 되어 나무로 된 교회와 주교관 등이 건설되었다. 1171년에는 석조 교회가 지어졌으며, 1229년 교구 학교가 문을 열었다. 당시 키엘체는 폴란드 최초의 왕조인 피아스트 왕조(960~1370)의 치하에 있었다. 키엘체라는 이름은 1213년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13세기 중반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이내 복구했고, 1295년 특권을 가진 도시로 인정받아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5세기에 들어 풍부한 지하자원을 활용한 야금산업이 번창했다.

키엘체는 1655년부터 5년에 걸친 스웨덴의 침략 시기 스웨덴군의 약탈과 파괴 · 방화로 황폐화되었다. 1789년에는 주민들이 독자적으로 대표를 뽑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키엘체가 속한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18세기 후반 주변 3개국에게 3차례에 걸쳐 국토를 분할당했다. 키엘체는 1795년 3차 분할 때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년) 기간이던 1809년 키엘체는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대공국에 편입됐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러시아가 지배하는 폴란드 왕국에 귀속되었다.

키엘체 등 러시아에 편입된 옛 폴란드 지역에서는 11월 봉기(1830~1831년), 1월 봉기(1863~1864년) 등 러시아에 저항하는 무장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봉기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러시아는 강력한 탄압과 함께 러시아 동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모든 폴란드계 학교를 폐쇄하고 키엘체를 군사 요새도시로 만들었다. 공공장소에서 폴란드어를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키엘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성립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다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나치 독일 점령하에 들어갔던 제2차 세계대전 중 키엘체는 반독일 레지스탕스(저항군)의 주요 근거지였다. 키엘체에서만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트레블링카 수용소 등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는 44년 간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하다 1989년 민주화되었다. 과거 석회석 광산으로 유명했던 키엘체는 민주화 이후 제철 · 화학공업 등 중공업에 더해 상업 · 교역의 중심지로도 부각되고 있다.[3]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편집]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는 폴란드 동남부 도시로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에 속해 있다. 카미엔나강 유역에 있으며 도시 북쪽은 이우자 구릉 지대, 남쪽은 오파투프 고지대이다.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의 주도 키엘체와 라돔, 스타라호비체 등과 함께 야금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올드 폴란드 산업 지대의 일부이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이곳에 사람이 거주했다. 14세기 문서에 마을 이름이 처음 언급된다. 1613년 도시 특권을 인정받았다. 당시 폴란드 왕국 산도미에시주의 일부로, 폴란드 거물 정치가이자 갑부인 야누시 오스트로크스키(1554~1620)의 소유였다. 이후 많은 폴란드 귀족 가문이 도시를 번갈아 소유했다.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는 18세기 말부터 폴란드산업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탄 · 철광석을 바탕으로 카미엔나강 골짜기에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다.

1837~39년에는 클림키에비츠 제철소가 완공됐는데 이는 러시아의 속국이던 당시 폴란드 왕국(의회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제철소였다. 1884년에는 철도가 부설됐다.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는 '피의 일요일'(1905년 1월) 사건으로 촉발돼 총파업 · 무장투쟁 등으로 전 러시아 제국을 뒤흔든 1905년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폴란드 사회당은 1905년 12월 27일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에서 '오스트로비에츠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고 2주간 지역을 통치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파견한 2개 보병연대에 진압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시내 공장지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새로 독립한 폴란드 영토에 편입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인구는 3만 명까지 늘어났다. 제2차 대전 중 독일에 점령당했다가 1945년 폴란드령으로 복귀했다.

전후에도 공업도시로 계속 발전했다. 1970년대에는 새 야금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기가 쇠퇴해 철강공장은 스페인의 CELSA그룹에 매각되었다. 도시는 1998년까지는 키엘체주 소속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1999년부터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에 속하게 됐다.

17세기에 지어진 미카엘 대천사 대성당, 성 스타니슬라우스 교회 등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 근교의 볼거리로는 크셰미온키 고고학 보존구역과 바우투프 공룡공원이 유명하다.

시에서 북동쪽으로 8km 거리의 크셰미온키 보존구역은 기원전 3900년~기원전 1600년 신석기 · 초기청동기 시대에 부싯돌을 채취하던 광산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크셰미온키 선사시대 부싯돌 광산지역)에 등재되었다. 크셰미온키 보존구역은 영국 그림 동굴, 벨기에 슈피네스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부싯돌 광산 유적으로 꼽힌다.[4]

스타라호비체[편집]

스타라호비체는 폴란드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에 있는 공업도시이다. 비스와강의 지류인 카미엔나강 유역에 있다. 숲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해발 252m 지점에 시가지가 위치한다. 1998년까지는 키엘체주 도시였으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1999년부터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소속 도시가 됐다. 스타라호비체군(포비아트 : powiat)의 군청 소재지이다.

스타라호비체는 15세기에 정착지가 형성됐다. 16세기 이 지역에는 스타제호프스키 가문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있었다. 도시명도 가문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장간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의 소유권은 1817년까지 인근 브옹호츠크 수도원에서 온 시토 수도회가 갖고 있었다. 인근 마을이자 현재 스타라호비체와 통합된 비에즈브니크는 1624년 마을 권한을 획득했다.

1789년에 시토 수도회 수사들이 근대적 방식의 용광로를 제작하면서 스타라호비체의 야금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일대는 1815년 러시아 황제가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의회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스타라호비체의 용광로도 이 해에 폴란드 왕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도시의 야금산업은 더욱 발전했다. 이 즈음 폴란드 신부이자 지리학자 · 철학자 · 작가인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1755~1826)가 세운 산업발전 계획에 따라 카미엔나강 연안에 야금공장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그 중심은 스타라호비체의 야금공장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8년 폴란드는 123년 만에 독립했다. 폴란드 정부는 금속산업 중심지인 스타라호비체에 무기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1920년 스타라호비체 광산회사 협회가 폴란드군에 무기를 생산 ·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새로 설립된 스타라호비체 무기공장은 대포 탄약, 37mm 대전차포 등을 생산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스타라호비체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나치 독일군에 학살당했다. 한편으로 스타라호비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최대 반독일 저항군(레지스탕스)인 아르미아 크라요바(AK)의 중요한 활동 거점이었다.

전후 스타라호비체는 공업도시로 계속 발전했다. 1948년에는 트럭 제조회사 FSC 스타가 새로 출범했다. 그러나 폴란드가 1989년 민주화되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스타라호비체 경제는 침체기를 맞았다. 실업률도 증가했다. FSC 스타는 2009년 독일회사 만(MAN) SE가 인수했다. 스타라호비체는 시내에 특별 경제구역을 만들고 세금 인하 등 투자 유치 노력을 하고 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위키백과》
  2. 두산백과: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유럽지명사전 : 폴란드 키엘체〉,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폴란드 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폴란드 스타라호비체〉,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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