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강감찬(姜邯贊)은 고려의 문관 출신 장군으로 거란의 제3차 침략(1018~1019) 때 귀주대첩으로 소배압의 군대를 대파하여 거란의 고려 침공 의지를 꺾었다.
개요[편집]
- 강감찬은 옛 이름이 강은천(姜殷川)이고, 금주(衿州, 서울특별시 금천구·관악구 일대) 출신이다. 5대조는 강여청(姜餘淸)이고, 아버지는 고려 태조(太祖)의 신하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었던 강궁진(姜弓珍)이다. 《고려사(高麗史)》 강감찬열전 말미에는 그의 탄생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사신이 인가(人家)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마침 그 집에서 강감찬이 태어나 기이하게 여기고는 개경(開京, 개성시)으로 데려와 길렀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落星垈)가 강감찬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983년 12월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와 좌집정(左執政) 이몽유(李夢游) 등이 주관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직접 참석한 복시(覆試)를 거쳐 장원으로(甲科) 급제하였다. 장원 급제 당시의 이름은 강은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고, 1009년에는 지공거(知貢擧)로써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1]
- 강감찬은(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다. 본관은 금주(衿州)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1019년(현종 10년)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졌다. 1020년(현종 11년)에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가 되었고 1030년(현종 21년)에 문하시중이 되고 1031년(현종 22년)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체구가 작고 외모가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해어져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국가대사가 생길 때마다 정책을 결정지으며 나라의 우뚝한 기둥이자 초석 역할을 하였다. 당시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하며 나라 안팎이 무사하자,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
- 강감찬은 고려의 문관이자 장군이다. 현종을 보좌하였으며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상원수로서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는데, 찬(贊)의 오기로 보인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 84년간의 긴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제3차 여요전쟁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대첩의 의의가 엄청나다 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당시는 고려 금주)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다.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이곳의 마을버스 회사명도 각각 은천운수, 인헌운수다. 매년 10월에는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다.[3]
- 강감찬은 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다. 강감찬의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4]
현종 시기 강감찬[편집]
- 1011년 1월 거란군이 철군한 뒤, 강감찬은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임명되었고, 6월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가 되었다. 1012년 6월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인택(李仁澤)이 강감찬을 여러 차례 제소하자[論訴] 현종이 이인택을 파직하였다. 이후 중추사(中樞使)로 승진하였고, 1014년 7월 현종에게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고 예관(禮官)이 의주(儀注)를 정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며, 1016년 12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개령현(開寧縣, 경상북도 김천시)의 토지 12결(結)을 군호(軍戶)에게 지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계속된 전쟁으로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군인전(軍人田)이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1018년 5월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다. 현종은 직접 직첩(告身)에 '1010년에 오랑캐가(거란) 침입하여 한강(漢江) 근처까지 왔는데, 강공(姜公, 강감찬)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나라가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매우 영화롭게 여겼다고 하는데, 강감찬에 대한 현종의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말년과 평가[편집]
- 귀주에서 승리를 거둔지 2개월 후인 1019년 4월 강감찬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궤장(几杖,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로 공적이 있는 원로대신(元老大臣)에게 주는 물건)을 하사하며 3일에 한 번만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1019년 11월 강감찬은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이 되었고, 식읍(食邑) 300호(戶)를 받았고, 12월에는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칭호가 더해졌다. 1020년 6월 강감찬이 다시 사직을 청하자 현종은 이를 허락하며 특진(特進) 검교태부(檢校太傅) 천수현개국자(天水縣開國子)로 삼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 사직 후 강감찬은 별장으로 돌아갔다. 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강감찬은 정치에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았는데, 개경에 성곽이 없으니 나성(羅城)을 쌓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이 축조되었다. 1030년 5월 현종은 강감찬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1031년 5월 현종이 세상을 떠났고, 덕종(德宗)이 즉위하였다. 1031년 6월 덕종은 강감찬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특진(特進) 검교태사(檢校太師) 시중(侍中)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로 삼았다. 1031년 8월 강감찬은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덕종은 강감찬을 애도하며 부의를 매우 후하게 보내고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3일 동안 조회를 멈추고 백관에게 강감찬의 장례에 참석하게 하였으며, 그를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이후 1033년 10월 덕종이 대승(大丞)을, 1067년 3월 문종(文宗)이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을 강감찬에게 추증하였다. 문집으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을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평에 따르면 강감찬은 외모가 왜소하고 볼품없었으며, 청렴하고 검약하여 낡은 의복을 입었으나 조정에 나가서는 얼굴에 엄정한 빛을 내고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위엄을 보여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생가[편집]
-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곳이다. 1974년 8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산에 위치하며, 강감찬이 태어난 고려 시대에는 금천(衿川)이라고 불린 곳으로, 원래 여기에는 그의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사리탑식(舍利塔式)의 삼층탑이 있었다.
- 이곳을 낙성대(落星臺)라고 부르게 된 연유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마침 이 고을을 지나던 중국 사신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관원들을 시켜 그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보도록 하였더니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는 것이다. 1964년 탑을 보수하고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973∼1974년에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안보(安保)의 의표로 삼게 하고자 출생 유적지를 정화하여 낙성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 경내에 새로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원래 이곳에 있던 석탑을 옮겼다. 그리고 그 옛터인 여기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이곳이 강감찬이 탄생한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안국사[편집]
- 안국사(安國祠)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사당으로,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 안국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의 출생 지역인 낙성대(落星垈)에 건립하였고, 사당 주변을 공원화하여 낙성대공원을 조성하였다.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는 장군이 출생하던 날 출생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이름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 안국사는 낙성대공원의 연못 뒤쪽에 있으며 길이 409m의 사괴석(四塊石)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에 기념 휘호석과 관리사무실이 있으며 안국문(安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잔디와 수목으로 깔끔하게 조경한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좌·우측에는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와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원 안쪽의 낮은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안국사)이 나온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면적 237.6㎡의 정면 5칸·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귀주대첩[편집]
- 1019년 3월 16일 고려-거란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강감찬(948~1031, 향년 82세)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일어났다. 귀주대첩은 제3차 고려-거란 전쟁(1018년 12월) 시기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 20만 명과 소배압(출생연도 미상~1018)이 지휘하는 거란군 10만 명이 귀주(평안북도 구성)에서 격돌한 대규모 전투다. 고려군은 이 전투에서 거란군을 완전히 격파해 고려-거란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강대국 거란의 패배와 고려의 승리로 동북아시아 질서가 재편됐다. 동북아시아는 고려를 중심으로 재편됐고, 인접한 나라들이 고려를 우러러봤으며 서로 고려와 왕래하기를 청했다.
- 강감찬과 거란군의 첫 격돌 장소는 강동6주 중 한 곳인 흥화진(평안북도 의주) 인근 위치한 강인 삼교천이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진군 경로를 예측해 삼교천에 매복작전을 계획했다. 거란군은 강감찬의 예측대로 삼교천을 건너려 하자, 매복한 고려군은 일제히 거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강감찬은 귀주에선 회심의 일격을 날려 고구려의 살수대첩, 조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우리 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3대 대첩’이라 불리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낙성대공원[편집]
- 낙성대공원(落星垈公園)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있는 공원으로 강감찬 장군을 기려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이 태어난 낙성대에 있는 공원으로, 낙성대를 보존하고, 강감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하였다. 1973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6월 10일에 공원 조성이 완료되었다. 면적은 3만 1,350㎡이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된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붙은 이름이다.
- 낙성대공원으로 들어서면 강감찬 장군의 기마청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데 말을 탄 채 칼을 빼들고 앞으로 돌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동상 주변에는 배드민턴 등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공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강감찬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로 안국문(외삼문), 삼층석탑, 내삼문,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 그리고 본건물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마다 10월에는 공원에서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추모제인 낙성대인헌제(落星垈仁憲祭)를 연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강감찬〉, 《위키백과》
- 〈강감찬〉, 《나무위키》
- 〈강감찬(姜邯贊,948~1031)〉, 《두산백과》
- 〈강감찬(姜邯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강감찬, 귀주대첩으로 거란 물리치고 동북아를 재편하다〉, 《인천투데이》, 2024-03-16
- 최수문 기자, 〈(역사의 향기/한국인像)<18> 강감찬〉, 《서울경제》, 2016-12-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