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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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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

고려 광종(光宗)은 고려의 제4대 왕(재위 949∼975)이다.

개요[편집]

  • 고려 광종은 고려 제4대 왕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이며 정종의 친동생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개혁정책을 통해 많은 치적을 쌓았다.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넷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함을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1]
  • 고려 광종은 고려의 제4대 국왕이자 황제이다.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 신명순성왕후 유씨(劉氏)의 셋째 아들로서 요절한 왕태, 정종의 동생이다. 후는 대목왕후 황보씨(皇甫氏)로 태조와 신정왕후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이복형인 혜종의 딸이다. 949년 3월 동복 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광덕·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후주로부터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처음 과거를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였고, 민생안정과 백성구휼에 힘을 썼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호족 세력 약화와 황제권 강화라는 목적과도 맞닿아있었는데, 과거 시험으로 선발된 관료들과 후주에서 귀화한 관료들을 통해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황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복 제도를 새로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불교 장려에도 관심을 갖고 사찰의 중건과 중수를 지원하였다. 973년 함경남도 장평진, 박평진과 고주에 성을 쌓았고, 신도성을 수축하였다. 974년(광종 25년) 양주의 자재암의 중수를 명하여 각규대사가 중창케 했다. 974년 국사 혜거가 76세로 사망하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그러나 탄문도 975년 3월 병으로 76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975년 여름 갑자기 병환이 나서 그해 5월에 몸져누웠고, 며칠 뒤 개경 황궁의 정침(正寢)에서 붕어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묘호(廟號)는 광종(光宗)으로 하고 대성(大成)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헌릉(憲陵)이다.[2]
  • 고려 광종은 고려의 제4대 국왕이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며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대성대왕(大成大王)이며,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연호는 광덕(光德) (949년 ~ 953년)과 준풍(峻豊) (960년 ~ 963년)이다. 즉위 후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의 통치 기반을 다졌으며, 후대 조선까지 이어지는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는 등 왕조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호족 세력들과 융화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재위 중반부터는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 시행, 고려의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세력들을 중용하는 등의 방법들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철저히 누르는 한편 모든 권력을 왕에게로 집중시키는 전제화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재위 후반부에는 아예 무차별적인 숙청을 통해 임금에게 맞서거나 호족들이 의심을 산 사람은 무조건 처형해버리는 공포정치를 행하여 후대에 비판받기도 한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형 혜종과 정종이 모두 짧은 재위로 인하여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 한 상황에서 광종이 20년 넘는 치세 동안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국 이래 2대 ~ 3대 군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듯 고려는 4대 국왕인 광종이 그러한 기틀을 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광종보다 앞선 국왕이었던 혜종과 정종은 광종의 형제였고, 재위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광종을 실질적으로 고려의 2대 내지 3대 국왕으로 볼 수 있다.[3]

고려 광종의 생애[편집]

  • 광종은 즉위한 후,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950년(광종 1)에는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광종 2)에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963),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968).
  • 광종은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호족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私兵)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 광종은 958년에 후주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960년에는 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옥이 가득 차 임시 감옥을 두었으며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노비안검법[편집]

  •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정책. 956년(광종 7)에 실시하였다. 신라 말·고려 초에 전국의 대소 호족들은 각각 토지와 노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식시켜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호족에게 노비가 증대된다는 사실은 곧 호족의 세력이 비대해져 왕권에 대한 위협도 증대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태조 때부터 호족의 노비소유에 대해 제한을 가하려 했으나 호족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편의에 좇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지향했던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본래 양인으로 고려의 통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된 자들과 호족들이 스스로의 세력을 믿고 강제로 노비화시킨 자들을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 노비안검법의 시행은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바로 찾아준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는 호족들의 사유물로 그들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의 세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족의 사병(私兵)으로도 이용되던 노비의 수효가 격감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호족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신장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안검의 대상이 된 노비는 주로 노비 자신들의 신고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처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대목왕후(大穆王后)는 이 법의 폐지를 간곡히 간했으나 실패하고, 광종 때에는 계속해서 강행되었다. 경종 이후 호족과 귀족관료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이때 해방된 노비의 환천이 다시 이루어졌다.

관복 제정[편집]

  • 960년 광종은 직접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하였다. 이미 956년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959년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였다. 960년 3월 지체 없이 관복 제도를 확정했다. 당시의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은 확정되지 못했다. 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 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하였다. 관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

대중국 외교 정책[편집]

  • 고려 광종은 변방을 수축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성곽을 보수, 중건하는 한편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951년 후주에 사신을 파견, 귀환한 뒤 951년 12월 후주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후주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952년 봄에는 광평시랑 서봉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953년 후주에서 사신으로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 후주 세종으로부터 광종을 특진 검교태보사 지절 현도주 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使大夫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받았다. 955년 대상 왕융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광평시랑 순질을 후주에 보내어 공제의 즉위를 경하하였고, 956년 후주는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로 봉하였고, 이때부터 후주의 복식과 제도를 도입,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라 하게 하였다. 959년 봄 좌승 왕긍과 좌윤 황보위광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해 가을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 후주에서도 959년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냈고, 그해 겨울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 960년 후주의 시어 청주수 쌍철, 고려에 왔고 쌍기를 좌승으로 임명하였다.

군제 개혁[편집]

  • 호족들에게서 노비들을 석방, 해방시킴으로써 사병들의 수를 축소시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호족들의 사병을 완전히 몰수할 생각을 했지만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반발이 계속되었으므로 사병 몰수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960년(광종 11년) 초 고려 광종은 그의 정책에 반발하는 호족, 공신세력의 숙청을 계획하였다. 광종 11년부터는 새로운 왕권 강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훈구 대신이나 호족세력을 본격적으로 축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와 이울러 호족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황제권을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제도적 조처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 고려의 건국 이래 병권 장악의 최고 기관으로서 유공호족들의 아성이었을 순군부(循軍部)가 군부로 개편되었고 시위군(侍衛軍)인 내군(內軍)이 왕권강화를 뒷받침하는 장위부(掌衛部)로 개편되었다. 또한 물장성(物藏省)이 보천(寶泉)군으로 바뀌어 왕성시위군졸의 증가에 따른 군수를 담당한 것은 모두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다. 또한 궁궐에 병력을 증원하여 이중, 삼중으로 호위하는 동시에 군부 내 호족세력을 대폭 해임, 파면함으로써 호족세력의 군권 강화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한 암살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961년 황궁을 증축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자신의 5촌 당숙 왕육의 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고려 광종에 대한 평가[편집]

  • 고려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통하여 신진세력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도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혜종과 정종은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강력한 세력기반에 의지하여 왕권을 부지하였으나,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쌓아 황제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광종은 고려 초기 황제권강화를 위하여 가장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둔 황제로 평가된다.
  • 고려 광종이 과거제도를 본격 도입, 정착시켜서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의 길을 확립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분적 제약이 많던 신라 시대에도 최치원 등 육두품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신문왕이 국학을 설립하고(682년),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788년) 유학을 진작시켜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광종에 의해 과거제도가 본격 도입되지 않았다면 시험에 의해서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이다. 과거제로 인해 더 이상 호족들은 권력을 세습할 수 없었으며, 광종은 과거를 치른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 고려 광종은 독자적 연호와 황제 칭호 사용으로 고려를 황제국으로 상승시켜 동북아시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아울러, 개국 초기,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해 국가체제 정비와 새로운 정치질서를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그가 도입한 과거제는 1894년 갑오개혁 전 구한말 조선까지 이어지는 등 후대 왕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광종(光宗,925~975)〉, 《두산백과》
  2. 광종〉, 《위키백과》
  3. 광종(고려)〉,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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