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물탄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물탄
물탄 위치

물탄(우르두어: مُلتان, 영어: Multan)은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3천년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곳이다. 인구는 182만 명으로, 파키스탄의 5대 도시 중 하나이며 펀자브 남부의 주요 문화, 종교, 경제 중심지이다.[1]

개요[편집]

물탄은 파키스탄 동부, 인더스강 지류 치에나브강의 좌안에 있는 도시이다. 툴람바(Tulamba) 유적의 발굴조사로 알렉산더 대왕 원정 이전의 B.C. 4세기부터 기원 16세기까지 연속한 문화층이 명백하게 되었다. 7세기에 현장이 방문한 무라삼부노국(茂羅三部盧國)을 이에 해당시키는 설이 있다. 712년 아랍의 무장 무하마드 이븐 카심에게 침략을 당했고, 이어 가즈니의 마흐무드에게 정복된 후 이슬람의 도시가 되어 무굴 제국(1526~1857)의 일부가 되었으며 1849년에는 대영 제국에 점령되었다. 교통의 요지이며 농축산물의 집산지이다. 말 시장이 있으며 면직물, 견직물, 양탄자, 도자기, 피혁제품, 의료기구 등이 제조된다. 시가지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유적, 사원이 많으며 성채는 공원, 스타디움, 박물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무굴 제국 이전의 인도, 이슬람 건축의 유구가 많다. 특히 갸스 우딘 투구라크의 명으로 세운 루쿤 이 아람 묘묘(1320~24)는 8각평면으로, 8귀에 각각 미나레트를 달고 대 돔을 얹은 제2층의 8귀에도 작은 돔형이 놓여 있다. 인도 아시아 대륙에서 이란 양식을 사용한 것 증 가장 오래된 묘로 주목되고 있다. 현대건물로는 시청과 니시타르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등이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물탄은 펀자브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560km²이다. 가장 가까운 중요한 도시들은 데라가지칸과 바하왈푸르이다. 물탄은 파키스탄 중부의 다섯 강이 만든 굽이에 위치해 있다. 수틀레지강은 바하왈푸르에서, 치에나브강은 무자파르 가르에서 분리된다. 도시 주변 지역은 과수원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평평하고 충적평야로 감귤류와 망고 농장으로 사용된다.

물탄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남부 힌두쿠시 산맥의 연장선에 있는 술라이만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술라이만 산맥의 가장 잘 알려진 봉우리는 3,487m에 있는 쌍둥이 봉우리인 타흐트-에-술라이만(Takht-e-Sulaiman) 또는 "예언자 솔로몬의 왕좌"(Throne of Prophet Solomon)이다.

물탄은 매우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가진 더운 사막 기후(쾨펜 기후 구분 BWh)를 특징으로 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186mm이다. 물탄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더운 날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 기록 온도는 약 52°C이고 최저 기록 온도는 약 –1°C이다.[3]

역사[편집]

현지 전설에 따르면 노아의 증손자가 세운 도시라 한다. 동시에 힌두교 전승에서는 힌두 성인 카샤파가 세운 도시로, 마하바라타 시기 카토크 왕조가 다스리는 트리갸르타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또한 인도의 대표 축제인 홀리의 기원지로도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는 인더스 문명기인 기원전 3천년 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아리아 민족의 유입 후 그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500년경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일대를 정복할 무렵, 당시 지명은 카샤푸라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하에서 일대는 아라코시아 사트라프에 편성되었고, 몇몇 그리스 인들이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카스파투로스로 나온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5만 원정군이 다가올 무렵 일대에는 말리 (물루) 족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인 말리 원정에서 9만의 말리족 군대는 맹렬히 저항했다. 당시 라비강의 하중도에 입지했던 카샤푸라는 말리족의 최대 도시였고, 공성전 도중 알렉산드로스는 과감히 성벽을 넘었다가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마케도니아 군은 성을 함락한 후, 남녀노소 모두 학살하였다. 그후 말리족은 항복했고, 인도 사트라프에 편성되었다.

헬레니즘기 일대의 중심지는 남쪽 인더스의 알렉산드리아 (현 우치)로 이전되었다. 다만 카샤푸라 역시 재건되어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카스페이라로 기록되었다. 그후 마우리아 왕조, 인도-그리스 왕국, 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굽타 왕조를 거쳐 5세기 중반에는 에프탈 유목민들이 펀자브 남부를 침공했다. 토라마나의 에프탈 군은 격전 끝에 카샤푸라를 함락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철수했다.

시간이 지나며 도시의 이름은 말리 족의 땅이란 뜻인 말리스탄 혹은 물라스타나푸라로 바뀌었고, 축약되어 '물탄'이 되었다. 바르다나 왕조를 거쳐 7세기 중반, 신드의 아로르에 기반한 브라흐민 왕조의 차크가 일대를 정복했다. 차크는 아타쿠르를 물탄 총독으로 봉하여 북방 왕조들에 대한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641년 물탄을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화려한 태양신 사원에 5천축 모두에서 순례객이 와서 보배를 바친다고 기록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의 시스탄 태수인 무할라브 이븐 아비 수프라는 664년부터 종종 펀자브로 침투하여 많은 포로와 함께 귀환했다. 이는 이슬람과 힌두 문명 간의 첫 충돌이었다.

711년 신드를 정복한 우마이야 조의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은 712년, 라자 다히르 치하의 물탄을 포위했으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포위는 장기화되었다. 원정군이 물자가 바닥나 철수가 논의될 무렵, 미상의 주민 하나가 접근하여 도시의 보급로인 지하 수로의 존재를 알려주며 이곳을 막아버린다면 물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대로 행하였고, 식량이 바닥나자 물탄의 유력자들이 협상에 나서 항복하였다. 수비대는 전부 처형되고 그 처자식은 노예로 팔렸으나, 나머지 주민들은 인두세를 내는 조건 하에 기존 삶을 영위했다. 동시에 태양신 신전은 수입의 1/3을 바쳐야 했다.

물탄에는 수천의 아랍인들이 정착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카슈미르 및 라자스탄 등지로 원정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한세기 이상 이슬람 제국의 지배가 이루어지던 9세기 중반, 압바스 왕조가 약화되자 신드주 역시 지방 분권이 이루어졌다. 남부의 아로르에 합바리 왕조가 들어선 것처럼, 물탄에는 쿠라이쉬 가문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납비흐 부족이 855년부터 총독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물탄은 아랍어로 '전방의 황금 저택'이란 뜻의 파라즈 베이트 앗-다합이라 불렸다.

915년 인더스 유역을 답사한 아랍 역사가 알 마수디는 그의 저서 '황금 들판들'에서 물탄이 이슬람 변경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하며 인근에 12만 개의 도시가 있으며 호라산에서 인도로 가는 이슬람 상인들의 집합지라고 기록하였다. 비슷한 시기 이란인 지리가 에스타크리는 물탄이 만수라의 절반 크기지만 인구는 더 많다고 기록하였다. 만수라와 물탄 모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통용되었고, 후자는 호라산과의 잦은 교류 덕이었다. 이러한 다양성 덕에 물탄 상인들은 이슬람권 각지에 진출할 수 있었다. 힌두교와 이슬림의 공존도 계속되어 아미르들은 수입의 원천이자 힌두 군주들의 침공을 피할 구실인 태양신 사원을 유지시켰다.

'세상의 경계' 서적에 따르면 10세기 중엽, 물탄의 무납비흐 아미르는 일시적으로 라호르도 점령하며 펀잡의 패권을 잡았으나 곧 카슈미르의 힌두 샤히에게 빼앗겼다. 당시 무납비흐 왕공들은 물탄 시내 대신 외곽의 궁성인 잔드라와르에 거주하며 일주일에 한번 금요 예배 때만 코끼리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959년, 순니 압바스 칼리파를 인정하던 무납비흐 공국은 서아시아에서 축출된 쉬아 카르마트파의 공국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이스마일파 신도였던 지항 (Jhang) 태수 우마르 빈 하프스의 영향으로 일대에 쉬아 교리가 퍼지고, 파티마 왕조가 후원자로 나서며 가능했다.

파티마 칼리파 알 무이즈가 파견한 다이 (선교사) 잘람 빈 샤이반은 이슬람과 힌두를 혼합하던 기존의 다이를 대체하고 물탄을 장악했다. 혹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카타라 라지푸트 왕공을 옹립했다고도 한다. 한편, 이슬람 정복 후 2세기 이상이 흐른 10세기 중반 까지도 물탄과 우치는 창조의 신 비슈누와 태양신 수리야를 따르는 힌두교도들의 순례지로 이어졌다. 힌두 순례자들의 방문을 불쾌하게 여겼던 잘람은 965년경 알 무이지의 서신을 받은 후, 태양신 사원과 아디트야 신상을 파괴하고 사제들을 죽였다. 동시에 순니 금요 사원도 파괴되었고, 둘의 폐허 위에 쉬아 금요 사원이 세워졌다. 985년 잘람이 사망하자 아랍계로 추정되는 바누 라위의 셰이크 하미드 로디가 집권했다. 991년 가즈니 왕조의 사북티긴이 물탄을 침공했으나 곧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 물탄은 가즈니 조와 프라티하라 왕조 간의 완충지였다.

그러던 1005년, 사북티긴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가 남하하자 997년 조부 하미드를 계승한 아미르 아불 파테흐 다우드는 힌두 샤히의 마하라자 아난다팔라와 연합하여 맞섰다. 하지만 힌두 샤히 군이 패배하자 마흐무드는 물탄을 포위, 7일만에 함락하였다. 그후 많은 이스마일파 신도가 살해되었고, 아미르 다우드는 20만 디르함 금화의 연공 납부 및 순니로 개종하는 조건 하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마흐무드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 샤히의 왕자 니와사 칸을 물탄 총독으로 봉하고 회군했는데, 후자가 다우드와 함께 공모하여 자립하려 하자 1007년 재침하여 응징하였다.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은 마흐무드에 친서를 보내 화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1010년, 마흐무드는 3번째로 물탄을 공격해 다우드를 폐위한 후 감금하였다. 이로써 물탄을 완전히 정복한 그는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이 세웠던 순니 금요 사원을 복구하였다.

11세기의 학자 아부 만수르 알 바그다디에 의하면 가즈니 지배기에도 물탄에는 이스마일파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다만 마흐무드의 침공 직후 내분이 일어나 그중 일부가 드루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한편 알 비루니에 의하면 가즈니 조의 치하에서 기존에 번영하던 물탄의 경제력은 쇠퇴했고, 1030년 마흐무드의 사후 물탄은 제국에서 분리되어 재차 이스마일파 공국이 들어섰다.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살해된 이들을 대체할 신규 다이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1088년 아프간에서 이주해 온 수피 성인 샤 가르데즈는 도시를 복구하고 많은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재차 번영하게 된 물탄에 대해 12세기의 아랍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해자로 둘러진 성채 (시타델)를 지닌 큰 도시로 묘사했다. 그 무렵 물탄 출신의 시인 압둘라흐만은 현존하는 유일한 이슬람 관련 아파브람사어 (중세 힌디어) 작품인 산데쉬 라사크를 집필하였다.

1175년, 고말 고개를 넘어 펀잡에 진입한 구르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고리는 펀잡을 점령하며 2세기에 걸친 이스마일파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 직후 이스마일파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1178년 무함마드 고리는 물탄을 거점 삼아 구자라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3세기 초엽, 구르 왕조가 붕괴된 후 물탄은 델리 술탄국 하의 주가 되었다. 1210년 첫 델리 술탄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의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물탄은 나시룻딘 카바차의 펀잡 왕국에 속하였다. 1217년,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라호르를 상실한 카바차는 물탄을 수도로 삼고 신드 및 마크란에 대한 지배를 이어갔다.

그러던 1221년 호라즘 제국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군을 피해 펀자브를 침공, 코카르와 동맹한 후 카바차를 격파하였다. 이에 카바차는 그에게 복속했다가 이듬해 반기를 들어 물탄을 회복했다. 1224년, 몽골군이 물탄을 포위하자 잘랄웃딘은 북인도를 떠났다. 몽골군은 40일간 포위에도 도시가 함락되지 않고, 카바차가 우치와 바쿠르 (수쿠르)에서 원군을 대려오자 역시 철수하였다. 한편, 1225년 벵골을 정복하며 자신감을 얻은 일투트미쉬는 호라즘과 몽골의 연이은 침공으로 약해진 카바차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손쉽게 라호르를 접수한 그는 부관 아이테무르에게 물탄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3개월의 포위전 끝에 우치를 점령했다. (1228년 5월) 물탄을 버리고 바쿠르로 도주한 카바차는 아들 바흐람을 보내 평화 협상을 청했으나, 무조건의 항복이 요구되자 인더스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이로써 물탄은 공고히 델리 술탄국령이 되었다.

몽골의 침공으로 도래한 혼란기를 틈타, 호라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구르 왕조의 잔당을 토벌하고자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 중부로 이주시킨 카를루크 튀르크 부족이 자립하여 카를루그 왕조를 세워다. 몽골군이 파괴한 바미안과 가즈니에 기반한 카를루그는 1236년 물탄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그후 몽골 제국에 복속하였다. 1241년에는 라호르를 함락한 몽골군이 재차 물탄을 포위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1246년, 살리 바하두르 노얀 휘하의 몽골군은 마침내 물탄을 함락하고 나아가 우치를 포위했으나 술탄 기야스 웃 딘 발반에게 격퇴되었다. 1249년에는 나시룻딘 무함마드 휘하의 카를루그가 물탄을 점령했으나, 셰르 칸의 델리 군대가 수복하였다.

1254년에는 물탄 및 신드의 총독 이즈웃딘 발반 쿠슐루 칸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했다가, 1257년 술탄 발반에게 진압되었다. 이라크의 훌레구에게로 도주한 이즈웃딘은 1258년 초엽, 살리 바하두르 노얀의 몽골군과 함께 돌아와 물탄을 함락하고 성벽을 허물었으나 시리아 및 이집트 침공을 우선시 하던 훌레구는 술탄 발반과 협상한 후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술탄 발반은 라호르 ~ 물탄 ~ 우치에 이르는 라비 강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1279년에 무려 5번째로 물탄을 침공한 몽골군은 대패하였다. 이후 델리로 직행하던 몽골의 침공 루트는 1304년과 1305년 물탄으로 돌아왔지만, 총독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가 격퇴하였다. 물탄에 대한 몽골의 마지막 침공은 1327년이었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이 쇠퇴하며 침공은 멈췄다.

1545년 셰르 샤의 사후 수르 제국은 쇠퇴하였고, 물탄은 잠깐 자치를 누리다가 1557년에 악바르 대제가 보낸 바이람 칸에게 점령되며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는 물탄 수바흐 (주)를 신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드까지 정복하여 인더스 유역을 석권했다. 물탄 수바흐는 면적으로나 인구로나 제국의 최대 행정구역 중 하나였고, 1세기 이상 이어진 안정 덕에 다르 알 아만 (평화의 땅)이라 불렸다. 무굴 시기 물탄은 상업 외에도 목화 재배 및 면직물 생산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화폐 주조 및 타일 생산으로도 유명했다.

두라니 지배기 까지만 해도 물탄은 서북 인도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유지했지만, 점차 쇠퇴했다. 1756년 나와브 알리 모하마드 칸 카크와니는 나디르 샤가 허문 물탄의 성벽을 재건하였고, 이듬해에는 알리 무함마드 칸 모스크를 세웠다. 1758년, 마라타 제국의 락후나트라오가 일시적으로 물탄을 점령했으나 1760년 아흐마드 샤가 수복한 후 옛 나와브 자히드 칸의 아들 슈자 칸을 나와브로 봉하였다. 다만 물탄은 이미 펀잡의 대부분을 장악해가던 시크교도들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시크교도들에게 물탄은 창시자 구루 나나크가 자주 방문한 곳으로, 의미가 컸다.

1848년 6월 초엽, 에드와르데스의 1만 2천의 영국군이 체납 강을 건너 물탄에 접근했다. 물라즈가 배치해 둔 선발대는 포격 후 보병과 기병을 전진시켰으나, 마침 영국측이 반 콜트란츠의 인도-영국 혼성군이 화력을 앞세우며 등장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폭격으로 이미 큰 피핼 입은 물탄 군대는 영국측 파슈툰 기병대가 돌격해오자, 5백여 전사자와 대포 6문을 상실하고 철수했다. 승전 소식에 커리에는 동인도회사 벵골군을 보내 물탄을 포위하게 했고, 시크 장군 셰르 싱 아타리왈라에게 돕도록 했다. 셰르 싱의 부친 차타르 싱이 반란을 준비 중이라는 정치 요원들의 경고에도 커리에는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차타르 싱의 부관 준디알 싱에게도 포위를 돕게 했다. 뱅골군 (8천 보병, 공성포 32문, 기병포 12문)과 보조병 (기병 4천, 보병 8천), 바하왈푸르 지원군 (2천 기병, 5500 보병), 시크 지원군 (3천 기병, 1천 보병) 등 2만 6천여 병력이 물탄을 포위했다.

중세와 근세 내내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영했던 물탄은 18-19세기 반복된 전란으로 상인들이 신드의 쉬카르푸르로 떠난 후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1848년, 8만이던 인구는 영국군의 파괴 후 반감한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회복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공공해질 수록 물탄의 중요성은 하락했다.

1890년대 ~ 1920년대에 걸쳐 물탄을 비롯한 펀자브 남부에는 관개 수로가 복잡하게 세워졌고, 많은 '운하 마을'들이 들어섰다. 수로 건설 후부터 인구는 빠르게 늘어 1921년 8만 5천에서 1931년 12만, 1941년 14만으로 늘었다. 1946년부터는 인도-파키스탄 분리에 따라 힌두 및 시크 주민들이 인도로 떠났고, 인도령 편잡 등지의 무슬림들이 이주해 그 자리를 채웠다.

파키스탄 성립 후 물탄은 대도시긴 했지만 카라치, 라왈핀디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남부 펀잡 (물타니) 정체성은 무시되었고, 엣 성채는 방치되어 초목만 무성했다. 시내 도로도 비포장이 많았고, 상하수도 역시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탄의 인구는 1951년 19만, 1972년 54만, 1998년 120만으로 계속 늘었다. 21세기 들어서는 현대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4][5]

바하우딘자카리야대학교[편집]

바하우딘자카리야대학교(Bahauddin Zakariya University)은 파키스탄의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메인 캠퍼스는 펀자브주 물탄시에 위치한다. 1975년 설립되었다. 학교명에 포함된 바하우딘 자카리야(1170~1262)는 이슬람 수니파 학자이자 시인이다. 학술부문은 8개 단과대학 아래 60여 개의 학과로 구성됐다. 농학과 임학 분야에 강하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254위, 아시아 대학 중 381위, 파키스탄 대학 가운데 9위를 기록했다.

바아우딘 자카리야대학교는 1975년 목화 등 농산물의 집산지인 물탄에 8개 학과로 설립되었다. 개교 당시 이 대학교의 목표는 이 지역의 농업 문제를 해결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1979년 학교명을 물탄대학교에서 바하우딘 자카리야대학교로 변경했다. 1989년에 농업 단과대학을 설치했다. 1994년 공학 · 기술대학을 개설했다. 1996년 상업학과를 개설했다. 같은 해 컴퓨터과학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7년 전기공학과, 1999년 정보기술센터를 설치했다. 2004년 통신시스템공학의 학부와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같은 해 기계공학과 섬유공학, 농학, 건축공학과를 개설했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물탄〉, 《위키백과》
  2. 물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Multan", Wikipedia
  4. 물탄〉, 《나무위키》
  5. 물탄〉, 《요다위키》
  6. 바하우딘자카리야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국가
인도 도시
남아시아 도시
남아시아 지리
남아시아 문화
남아시아 주변 지역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물탄 문서는 아시아 도시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