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법흥왕(法興王)은 신라의 제23대 왕으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개요[편집]
- 법흥왕의 재위 기간은 514∼540년이다. 성은 김(金),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11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간행한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성이 모(募), 이름이 진(秦)이라고 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법흥(法興)이며, 건원(建元, 536〜550)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다. 《삼국유사》에는 어머니는 영제부인(迎帝夫人), 왕비는 사축부인(巳丑夫人)이나 파도부인(巴刀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540년(법흥왕 27) 가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법흥(法興)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이 죽은 뒤에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경주시 효현동의 선도산(仙桃山) 기슭에 위치한 법흥왕릉은 사적 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흥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으며 딸을 동생인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에 외손자이자 조카인 삼맥종[三麥宗,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함]이 왕위를 계승하여 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으로 즉위하였다.[1]
- 법흥왕은 신라의 제23대 임금이다. 연호는 건원(建元). 매금(寐錦)이라는 단어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등 기록에 등장하는 신라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충주 고구려비에는 매금이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나온다. 주로 고구려, 일본 등 외국 기록에서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매금의 의미에 대해 "신라의 왕명이다", "신라 밖에서 신라의 왕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등의 의견이 대립했으나, 1988년 1월 발굴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법흥왕을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이라 부르는 대목이 발견됨에 따라 법흥왕 때까지 신라 스스로 사용한 칭호임이 밝혀졌다. 매금이 마립간 또는 이사금의 동일 명칭이라면 지증왕 대에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왕으로 이미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법흥왕 대까지는 고유어 계통 칭호와 합쳐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했으며, 이는 신라에서 기록 상으로 전하는 최초의 연호다. 538년에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교서를 내렸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가 조금씩 체제를 갖추어 갔음을 알 수 있다.[2]
- 법흥왕은 신라의 제23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원종(原宗) 또는 모즉지(牟卽智, 另卽智), 모진(募秦)이다. 별칭으로는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모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대성법왕(大聖法王), 모태왕(募泰王) 등이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지증왕과 연제부인(延帝夫人)의 아들이다. 그의 자는 법공(法空)이며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눌지 마립간 때 승려 아도 또는 묵호자에 의해 들어온 불교를 공인 및 신라 전국에 장려함으로써 통치체제를 개혁하고 신라의 국민 사상을 통일시킨 명군(名君)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 문헌상으로는 최초의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품관 별로 지정하는 등 왕권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중국식 시호를 최초로 받은 신라의 군주이며, 마립간 또는 매금이라는 칭호는 그의 대에도 잔존, 사용되었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생 입종 갈문왕의 아들로 조카이자 외손자가 되는 삼맥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비 보도부인과 함께 경주 흥륜사로 물러나 불교 승려로 출가해 있다가 그해 여름 7월에 붕어하였다. 그의 시호는 법흥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는 뜻에서 법흥왕이라는 시호가 붙게 된 것이며, 성법흥왕, 법흥성왕이라 부르게 되었다.[3]
법흥왕의 업적[편집]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법흥왕은 키가 7척에 이르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514년 지증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 관료체제를 정비하여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517년(법흥왕 4)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1명의 영(令)을 두어 통솔케 하였다. 그리고 19명의 감사지(監舍知)를 두어 각 지방에 설치된 군영들을 지휘, 감독케 했으며, 524년(법흥왕 11)에는 각 군영에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었다. 520년(법흥왕 7)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관리의 복색은 붉은색과 자주색 등으로 등급을 표시했는데, 태대각간(太大角干)에서 대아찬(大阿湌)까지는 자주색 옷을 입었으며, 아찬(阿湌)에서 급찬(級湌)까지는 붉은색 옷,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는 푸른색 옷, 대사(大舍)에서 선저지(先沮知)까지는 황색 옷을 입었다. 531년(법흥왕 18)에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를 신설하고 이찬(伊湌)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국정을 총괄케 했으며, 536년(법흥왕 23)에는 강화된 왕권을 나라 안팎에 내보이기 위하여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건원(建元) 원년으로 하였다. 538년(법흥왕 25)에는 지방관들에게 가족을 데리고 임지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 법흥왕은 외교와 국방에 힘을 기울여 아라가야와 금관가야 등을 병합하고 신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518년(법흥왕 5) 주산성(株山城)을 쌓았으며, 521년(법흥왕 8)에는 중국의 양(梁)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이듬해에는 가야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내 결혼시켰으며, 524년(법흥왕 11)에는 직접 남쪽 국경을 순행하며 가야국의 왕과 회견하였다. 이 해에 과거 사벌국(沙伐國)이 있던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이등(伊登)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532년(법흥왕 19)에는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 세 아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항복해오자 금관가야의 옛 땅을 그에게 식읍(食邑)으로 주고 상등(上等)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해 아라가야(阿羅伽倻)를 정벌하여 그 지역에 군(郡)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 법흥왕은 528년(법흥왕 15)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꺾고 불교를 공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흥왕 자신도 불교를 숭상하여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노년에는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함께 출가하여 묘법(妙法)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켰다. 이러한 법흥왕 때의 치세로 신라는 국력이 크게 융성하여 이후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법흥왕 때에는 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미지악(美知樂)'이라는 악곡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원[편집]
- 삼국시대 신라의 제23대 법흥왕의 연호이다. 법흥왕 때에 사용된 신라 최초의 연호이다. 법흥왕은 536년(법흥왕 23)에 연호를 칭하여 건원원년(建元元年)이라 하였다. 법흥왕은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첫 임금으로서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고, 붉은 색,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527년에는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531년에는 나라일을 총괄하는 상대등(上大等)을 두었으며,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양(梁)나라와 통교하면서 독립왕조에는 연호가 있음을 알고 536년에 건원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였다. 건원이라는 말은 처음으로 연호를 정한다는 뜻으로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꿀 때까지 15년 동안 사용되었다. 한 나라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칭하는 것은 그 나라가 정치적으로 독립국임을 입증하는 표증이다. 536년에 제정된 건원은 신라 최초의 연호였고, 신라가 중국의 여러 나라와 대등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경주 법흥왕릉[편집]
- 경주 법흥왕릉(慶州 法興王陵)은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신라 법흥왕의 능이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 면적이 7만 2,689㎡이다. 539년경 조성되어,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을 이용하였으며, 규모는 크지 않고 표식의물(表飾儀物)도 없다. 다만 봉토(封土) 밑 주위에 드문드문 자연석의 일각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의 경우와 같이 여기에도 봉토 밑에 어떠한 호석(護石)시설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주변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나,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의 능묘로서는 매우 빈약하다. 기록에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법흥왕을 장사지냈다 하였는데, 지금의 효현동에는 애공사터라고 전하는 3층 석탑이 1기 있고, 법흥왕릉은 이 탑의 북서쪽에 있다.
- 경주 법흥왕릉은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을 법흥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편집]
- 신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거나 널리 퍼지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 수용을 선포한 것으로, 흰 피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에는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고유 토착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중국과 가까워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 법흥왕은 신라의 토착 종교와 관련된 7개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 유명한 것이 흥륜사,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이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 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7세기에 활동하게 되는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 많다. 법흥왕 재위 당대인 535년에 남겨진 울주 천전리 서석 을묘명은 안급이(安及以)라는 이름의 승려와 그의 일행이 왔다 갔다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하여 불교를 중흥시킨 성스러운 대왕으로 높여주고 있다. 불교를 밀어준 왕이다 보니 불교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에 대한 평가[편집]
- 법흥왕은 말년에 사실상 출가해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 했고, 540년 7월 붕어하여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법흥왕릉은 법흥왕의 업적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신라왕릉의 크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게 매우 작은 편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법흥왕의 본인의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진흥왕이 되었다.
- 법흥왕은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및 성군이다. 부친 지증왕에 이어서 삼국 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섰던 6세기 초반의 짧은 평화 기간 동안 강도 높은 내정 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 강화, 탁기탄과 금관가야,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가야 국가들을 병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조카인 진흥왕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도 이때 쌓아둔 국력이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증왕과 함께 내정 개혁으로 신라의 향후 400년을 결정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임금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법흥왕〉, 《나무위키》
- 〈법흥왕〉, 《위키백과》
- 〈법흥왕(法興王,?~540)〉, 《두산백과》
- 〈건원(建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뿜뿌, 〈신라 법흥왕의 업적〉, 《네이버블로그》, 2017-03-0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