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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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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

부뚜막(鐵製爐)은 부엌 아궁이 위에 흙과 돌을 쌓아서 솥을 걸어 놓은 곳을 말한다.[1]

개요[편집]

인간은 불을 발견하면서 음식을 익혀 먹게 되고, 물도 끓여 마시게 되었다. 세계 각지의 움집터를 보면, 집의 중앙에 불을 피우던 자리가 있으며, 여기서 물을 끓여 마시고 음식을 익혀 먹었을 것이다. 그 후 풀이나 나무를 땔 수 있는 화덕이 필요하게 되면서 중앙에 위치했던 화로가 벽으로 이동하였고, 솥을 걸기 위한 화덕으로 변하였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부뚜막이 되었다.

부뚜막은 솥이나 냄비 등을 올려놓고 가열하기 위한 시설로, 옛날부터 화로와 함께 취사용으로 사용하였다. 돌이나 흙을 쌓아서 위에 솥을 걸도록 만들었으며, 보통 부엌에 고정시켰다. 전면에 건초나 장작 등의 연료를 넣기 위한 구멍이 있다. 화덕은 불꽃과 연기가 솥의 밑부분에만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열효율도 좋지 않고 연기도 가득 차는 데 비해, 부뚜막을 온돌의 아궁이와 연결하면 여열(餘熱)을 이용한 난방도 가능하고 연기도 제거하기 쉽다.

이와 같이 부뚜막을 온돌의 아궁이와 연결하면, 방바닥의 높이보다 부엌바닥이 낮아지므로 부엌의 높이를 높이기 위하여 근래에는 온돌 아궁이와 분리한 개량 부뚜막을 만들게 되었으며, 연료도 연탄을 사용함에 따라 부뚜막도 연탄용으로 개량되고 있다. 도시가스나 프로판가스가 보급된 후로 부엌에서의 부뚜막은 거의 사라진 실정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도 부뚜막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부뚜막의 신이 일가의 행복과 안전을 가져다 준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상세[편집]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의 화덕은 움집 중앙부에 꾸며졌으며, 주위에 돌을 쌓은 원형 내지 타원형이 대부분이었다. 무문토기 문화기에는 연기가 쉽게 빠지도록 이를 움 한쪽에 설치하였으며 한쪽을 터놓거나 바닥에 돌을 깔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 후기에는 난방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한 집에 2개를 마련한 일도 있다. 이와 같은 화덕이 오늘날의 것과 비슷한 부뚜막으로 발전한 것은 고구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로 추측된다. 서기전 1세기를 전후한 초기 고구려 유적에서 철제와 도제의 부뚜막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무덤 벽화 가운데 부뚜막이 그려진 예도 몇 가지 있다.

이들 고구려 시대 부뚜막을 그 기능으로 보아 다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랴오양(遼陽) 삼도총 벽화무덤의 부뚜막 그림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뚜막 모형처럼 아궁이와 고래 그리고 굴뚝이 일직선상에 설치된 것으로 이것은 오늘날의 부엌 부뚜막을 연상시킨다.

둘째는 안악 3호 무덤 및 약수리 벽화무덤 그림처럼 고래와 굴뚝이 수평으로 나란히 놓여서 불길이 직각으로 꺾여 들어가는 구조로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아궁이는 하나뿐이지만 부뚜막에 2개의 솥이 놓인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수평구조는 2개의 솥에 동시에 열을 가하기 위하여 고안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랴오양 삼도총 벽화에 나타난 부뚜막을 제외한 나머지 그림이나 출토품에 굴뚝이 달린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오늘날의 것처럼 난방을 겸한 것이 아니라 조리용으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을 방고래 앞에 설치하였다면 굴뚝이 함께 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4, 5세기 무렵까지 고구려의 구들 시설은 방의 일부만을 덥히는 외골구들(캉)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뚜막은 부엌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왔다. 이곳에 조왕신을 모셨으며 사람이 걸터앉는 것을 금하였다. 또, 주부는 언제나 부뚜막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으며 청결 여부로 주부의 살림솜씨를 가늠하는 것이 예사였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높이 50㎝, 너비 1m 내외로서 이에는 용가마·가마솥·중솥·옹솥 따위를 걸어둔다.

용가마는 큰 가마솥으로 물건을 삶아 건져내거나 국물을 자주 퍼내기 편리하게 아가리가 벌어졌으며 뚜껑도 나무로 반쪽씩 만들어서 여닫는다. 곳에 따라서는 이를 두멍솥이라고도 한다. 가마솥은 큰일 때 밥을 많이 짓거나 소의 여물을 삶을 때 쓴다. 중솥은 크기가 중치인 솥으로 가정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다.

옹솥은 작고 오목한 솥으로 국 따위를 끓이는 데 쓴다. 흔히 여물을 삶는 솥(이를 여물솥이라고도 한다.)은 노인이 쓰는 사랑채 부뚜막에 따로 걸며 근래에는 무쇠솥 이외에 양은솥 한 두 개를 거는 일이 많다.

방에 불을 땔 필요가 없는 여름철이나 혼사 등 큰일을 치를 때에는 뒤란이나 부엌 곁에 임시 부뚜막을 설치하여 음식을 만드는 일이 있는데 이를 '한데부엌' 또는 '딴솥'이라고 한다.

앞에서 설명한 고구려 유적 출토품 가운데 철제 및 도제 부뚜막은 이처럼 임시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재래의 부뚜막은 난방구조상 방바닥보다 훨씬 낮추어 설치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으나 근래에는 온돌 아궁이와 분리한 개량 부뚜막이 나왔으며 연탄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부뚜막도 연탄용으로 바뀌는 추세에 있다.[2]

한국 고대 부뚜막의 기원[편집]

쌀과 같은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 사람에게 부뚜막은 가장 소중한 시설의 하나다. 부뚜막에는 토기의 솥이 걸쳐지고, 솥 밑에는 토기를 받히는 돌기둥이나 다른 토기가 거꾸로 세워졌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부뚜막은 무려 100 여기 이상을 헤아리지만, 부뚜막의 구조가 제대로 살펴지게 되었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부뚜막은 집자리에 시설되는 고정식과 토기나 철기로 된 이동식의 두 가지가 있다. 고정식 부뚜막은 철기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동식 부뚜막은 고정식보다는 조금 늦게 고분의 부장품으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이동식 부뚜막이 사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만, 고정식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출토되는 이동식 부뚜막은 숫자도 그리 많지 않지만, 부뚜막에 걸쳐있는 토기에서 불에 그을린 자국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동식 부뚜막의 대부분은 저세상에 가서도 굶지 말라고 부장품으로 무덤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가면 진열되어 있는 토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부분이 그을렸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부뚜막에 걸쳐 사용되었던 토기의 몸통에는 그을린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구분이 선을 긋듯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부뚜막은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 의해 멸망하는 고조선(위만조선)의 유민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철기문화와 함께 남쪽으로 전파되었다. 남해안의 가야지역에 부뚜막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이다. 대체로 기원전후가 되면 가야지역에도 부뚜막 시설을 한 집자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합천 저포리유적, 진주 대야리유적, 김해 부원동유적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하다. 가야지역의 부뚜막은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로 전해진다. 기원후 1세기 말 경이 되면 큐슈(九州) 북부지역에서도 부뚜막이 출현하기 시작한다.[3]

고구려 부뚜막 아궁이 방향이 다른 이유[편집]

철제 부뚜막 모형

온돌방이 너무 뜨거우면 방바닥 위의 멍석이나 침구도 온전하기 힘들다. 구들돌 위의 흙바닥도 너무 마르면 갈라진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다. 부엌 옆 광에 쌓아 놓은 장작도 한 달에 쓸 양을 열흘 만에 다 써버리는 불상사도 일어난다. 땔나무를 모으기도 쉽지 않은데, 연료도 지나치게 많이 쓰고, 음식은 만들다 태우고, 방바닥에 올려둔 침구도 누렇게 그을리는 지경에 이른다면, 누가 온돌방이 좋다고 하겠는가.

이런 문제점을 잘 알았기에 고구려 사람들은 초기의 ‘一’ 자 쪽구들을 설치할 당시부터 부뚜막 아궁이 방향이 굴뚝일직선을 이루지 않도록 설계했다. 만약 아궁이와 굴뚝이 일직선이 되면 통풍이 잘 되어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고구려 사람들은 부뚜막 아궁이가 굴뚝으로 이어지는 내부 통로와 90° 방향으로 꺾이게 구멍을 내서,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도 통풍이 원활하지 않게 해,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없게 한 것이다.

고구려 무덤에서는 부뚜막 모형이 여러 차례 출토되었다. 도제이든, 철제이든 고구려 부뚜막 모형의 아궁이는 굴뚝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90° 꺾인 방향으로 열려 있다. 또한 부뚜막 위의 구멍이 하나라서 그 위에는 솥 하나만 올릴 수 있다. 솥을 올린 자리에서 굴뚝까지 사이의 공간은 비어 있는데, 이곳이 주택에서는 고래가 뚫리고 구들돌이 놓인 뒤, 그 위에 흙바닥을 올린 자리, 곧 온돌이다.

이와 달리 중국 한~당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부뚜막 모형의 아궁이 방향은 하나같이 굴뚝 쪽과 ‘一’자를 이루게 뚫려 있다. 말 그대로 통풍이 잘되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의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불이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중국식 부뚜막 위에 뚫린 구멍은 여럿이다. 불이 잘 타오르니 부뚜막 위에 구멍을 여럿 뚫고 솥이며 냄비를 여럿 올려놓아도 한 번에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궁이 불의 기운이 바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부뚜막에 올린 요리용 도구들과 굴뚝 사이에는 거리도 없다. 이런 구조의 부뚜막은 열을 난방용으로 쓰지 않는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부뚜막〉, 《두산백과 두피디아》
  2. 부뚜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우리나라 고대 부뚜막의 기원〉, 《네이버블로그》, 2005-04-06
  4. 고구려 부뚜막은 아궁이 방향이 다르다고?〉, 《네이버블로그》, 2023-05-2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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