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잣집
판잣집(板子(ㅅ)집, Shack, Shanty)은 판자로 사방을 이어 둘러서 벽을 만들고 허술하게 지은 집을 말한다.
개요[편집]
판잣집(板子-)은 판자로 지은 집이다. 작은 쉼터 또는 거주지의 한 유형이며 종종 설계 및 건설에서 원시적이거나 초보적이다. 오두막과 달리 판잣집은 사용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여 손으로 건설한다. 그러나 오두막은 일반적으로 시골이고 천연 재료(진흙, 바위, 막대기 등)로 만들어지는 반면 판잣집은 일반적으로 버려진 건축 잔해, 용도가 변경된 소비자 폐기물 및 기타 신속하게 얻을 수 있는 유용한 폐기 물건과 같이 청소한 인공 재료로 구성된다. 비용이 거의 또는 전혀 들지 않고 작은 주거지로 만들어졌다.
또한, 판자촌(板子村)은 판잣집이 모여있는 마을이다. 대도시에서 판자촌과 같은 무허가 빈민촌이 발생하는데, 이탈리아 등의 유럽국가와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모두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판자촌은 이를 여러 가지 범죄 등의 사회문제의 온상이 되는 슬럼(slum)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로 이농민들이 일시적으로 값싼 주거지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상반되게 주장되어 왔다. 판자촌은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극단적인 경우, 판자촌의 인구가 도시의 인구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2013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약 7분의 1인 10억 명 이상 이 판자촌에 살고 있다.
판자촌의 집들은 종종 널빤지, 양철, 플라스틱판 조각들로 지어진다. 보통 도시 주변부에 조성되는 판자촌은 비공식적이고 도시 계획을 따르지 않아, 제대로 된 위생시설, 전력 또는 통신 체제를 갖추지 못한다. 판자촌은 보다 정리된 거주지에서는 갖추어져 있는 치안, 의료, 소방 시설이 결핍되기 쉽다. 판자촌의 화재는 소방서의 부재 외에 정규 도로의 부재로 소방차의 진입이 어렵고,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데다가 집을 지은 재료들이 불이 붙기 쉬운 것들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판자촌은 범죄와 질병의 발생 비율이 높다.[1][2]
특징[편집]
판잣집은 판자로 사방을 이어 둘러서 벽을 만들어 지은 집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허름한 경우가 많다. 이게 모여서 마을을 이루면 판자촌(shantytown)이 된다. 판자는 간단한 목재 가공품이며, 제대로 된 단열재를 쓴 집이 아니기 때문에 여름에는 열기가 그대로 들어오고 겨울에는 온기가 집 내부에 감돌기 힘들다. 부식 등 외부의 위협에 취약하다. 판자촌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땅에 허락 없이 집을 세워서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때는 대한민국 법률상 일단은 불법이다. 그러나 토지의 점유권에 관한 여러 가지 판례가 존재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좀 더 넓은 범위의 점유권을 허용하는 프랑스의 경우 이러한 '빈집 점령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지어진 집에 들어가 사는 건 불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허락 없이 집을 지으면 무조건 불법이다. 지어진 집의 경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뿐이지만 집을 짓는 경우에는 아예 땅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실은 일제강점기 '하꼬방'(はこばん, 箱版)의 순화어에 해당한다. 일본어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상자 판떼기집 정도가 된다. 일제 당국의 산미증식계획 및 식민지 조선의 산업화는 결과적으로 농촌사회에서 빈민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무작정 상경해서 달동네에 모여들어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외국에서 흔히 '슬럼'이라고 불리는 빈민촌의 형성과정과 동일하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류의 가건물은 오두막 내지는 가가(假家)라고 불렀다. 이 가가에서 생긴 말이 바로 가게이며 장사꾼들이 가가를 짓고 난전을 열던 데서 유래하였다.[3]
서울의 판자촌 역사[편집]
서울특별시의 판자촌은 현재의 남산 갈월동 일대와 명동 뒤편으로 넓게 퍼져 있었고 청계천에도 청계 8~9가까지 이들 판잣집이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몰려들며 이들의 규모는 아현, 미아리, 용산까지 넓어져 산으로 올라가 '달동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도 판잣집 집락촌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 이런 곳에는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동네가 많다. 이렇게 우후죽순 들어서고 규모가 커지던 서울의 판자촌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서울역 맞은편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 도동(현재 동자동)이었다. 양동 및 도동은 악명 높은 사창가이자 판자촌으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이외에 서울 도심부 달동네는 실상 모두 판자촌이었다. 정부에서 아무리 단속해도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로 몰려온 사람들이 무허가 판잣집을 짓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 고도성장기에 이촌향도 현상이 본격화 하면서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주택공급은 인구증가 폭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교외지역에 판자촌, 비닐하우스촌도 계속 늘어났다. 이 때문에 주거개선 사업은 대한민국 정부의 최우선 정책사업 중 하나로 와우아파트, 시범아파트 사업, 소공동 개발, 여의도 개발, 심지어 강남 개발(당시는 영동 개발)까지도 명목은 '주거환경 개선사업'이었다. 서울 도심부 판자촌은 서울 외곽으로 토지를 불하해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며 철거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마을이 당고개역 인근에 있는 당현천마을, 양지마을, 합동마을, 희망촌, 그리고 중계본동 백사마을 등이다. 한 가구당 7~8평 남짓의 땅을 불하해주기로 하고, 무턱대고 대충 토지정리만 해놓은 빈 땅에 서울 판자촌 주민들을 실어날라 텐트 하나 주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당시 증언들을 보면 4가구에게 할당된 30~40평 정도 되는 땅을 백묵으로 선만 긋고 각 가구에게 텐트 하나 주고 알아서 집 짓고 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의 부작용이 제대로 나타난 것이 바로 광주대단지사건이다. 어쨌든 이 정책을 통해 서울 도심 판자촌은 상당 부분 철거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및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처에서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허가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렇게 되자 음지에서 불법적인 건설 사업이 활성화되었다. 서울 강남3구 및 관악구 외진 곳에 비닐하우스 등을 이용해 무허가 판잣집을 건설하고 철거민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현재 강남3구에 존재하는 판자촌이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노원구 상계동 재개발 사업도 일대의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상계동 올림픽. 노원구 하계동, 공릉동 일대에는 그 뒤에도 이런 무허가 주택들이 난립해 있다가 1990년대 초반에 모두 철거되었다. 한때 여기저기 난립해 있던 강남3구 판자촌은 재개발과 철거를 진행하면서 몇 곳으로 정리되어 갔다. 관공서에서 다른 판자촌으로 이주시켜줬다는 증언도 존재하며, 자발적으로 다른 판자촌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다.
서울 강북지역 판자촌은 이런 저런 개발을 통해 현재는 판자촌 형태에서는 벗어났다. 반면 서울 강남지역 판자촌은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편이다. 서울의 중심이 종로에서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강남 부유층 거주지가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강남3구 외진 곳에 있던 판자촌도 더 이상 개발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온갖 투기꾼들이 판자촌 판잣집 매매에 꼬이기 시작했다. 현재 강남3구에 위치한 판자촌은 더 이상 규모가 늘어나지 못하게 감시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유도하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강남3구 판자촌이 현재까지도 계속 방치된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서울시에서는 1982년 이전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에 대해서만 그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있다. 이유는 계속 무허가 건물에 대해 소유권을 인정해주면 아무 데에나 적당히 판잣집 짓고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는 행태가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남3구 판잣촌은 대체로 1981년 이후에 형성된 곳들이다.
- 강남3구에서 부유층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과거 오지, 버려진 땅에 가까웠던 판자촌들이 갑자기 가치 좋은 땅으로 바뀌었다. 즉 재개발이 이루어질 경우에 판자집 하나의 가치가 갑자기 수십억원대 아파트가 되는격이다. 그래서 기존 원주민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꾼과 브로커들도 한몫 잡겠다고 판잣집을 사들여서 투기에 기어들었는데, 이 때문에 단순히 판자촌 거주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전해 살 수 있도록 보상해주는 문제가 아니게 되어서 아사리판이 벌어지게 된것. 은마아파트가 오래되었음에도 현재까지 재개발이 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이와는 별개로 판잣집의 형태도 진화했다. 과거에는 나무 판자 등을 모아 만든 말 그대로 '판잣집'이었지만, 비닐하우스의 보급으로 인해 비닐하우스로 집을 짓고 사는 형태로 발전했고, 단열재가 들어간 조립식 패널 등을 이용해 리모델링되는 경우도 있다.[3]
기타[편집]
판잣집은 경제가 발전하고 특히 주택 200만호 공급사업의 일환인 1기 신도시 사업이 비교적 성공리에 마무리되며 거의 사라졌지만, 의외로 지금도 드문드문 남아 있다. 특히 부촌이라고 알려진 서울특별시 강남구 및 서초구 변두리에 이런 판자촌들이 숨어있다. 구룡마을, 재건마을 등이 그 사례로 여기에는 20세기 개발사의 일그러진 단면이 숨어 있다. 그 외에도 중소규모 도시의 외곽이나 도서 접경지역 등에서도 보인다. 반면, 정부의 협조 하에 자체적으로 판잣집 주민들이 다시 모여서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도 화성시 두레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다. 판자촌을 재현하여 관광코스로 조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 이미지의 청계천 판자촌 테마존이 이에 해당한다.[3]
대중문화 속의 판잣집[편집]
- 1980년대 후반 이전까지 한국만화에서는 만화 검열제 시절의 심의규정 때문에 삭제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못사는 나라라는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까봐 우려됐기 때문이었다. 물론 판자집이 등장하는 만화들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민중만화라고 해서 당대에는 비합법출판물로 분류되었다.
-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등장인물인 난장이가 직접 집을 지었다. 결국 해당 판잣집은 철거반원에 의해 철거된다.
- 최일남의 《노새 두 마리》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다.
- 이범선의 《오발탄》에서 주인공인 철호 가족이 전후 해방촌의 판잣집에 거주한다.
-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주인공 권기용이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잃고 경찰로부터 감시당하는 이유가 광주대단지사건의 주동자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 트로피코 시리즈에서는 제대로 주택공급이 안 되면 국민들이 알아서 판자집을 짓고 산다. 범죄율을 올리는 골치거리지만 달리 말하면 당장 주택이 모자라도 어떻게든 판자집을 짓고 살 수는 있다는 것이라서 주택공급이 다른 문제들보다 해결 우선순위가 밀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무 비용 없이 철거할 수 있고 그냥 다른 건물을 그 위에 지으려고 하면 자동으로 밀려버리는 등 철거 자체는 쉬운데, 어차피 어딘가에는 살아야 해서 금방 근처 다른 곳에 판잣집을 지으니 해결책은 어떻게든 주택공급을 해주는 것이다. 트로피코 특유의 막장국가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적당한 위치에 이쁘게 지어진 판자집들을 방치하는 유저도 있다.
- 스타크래프트 2: 공허의 유산 이후에 아이어를 수복했지만, 아직도 반이 넘게 가건물에서 살고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