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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일) 13: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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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Charlotte)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메클렌버그군의 군청 소재지로,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면적은 808km², 인구는 약 87만 명으로 미국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남부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샬럿 대도시권의 인구수는 266만 명으로 미국에서 23번째로 큰 대도시권이다. 샬럿은 미국의 주요 금융중심지 중 한 곳인데,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금융도시이다.[1]
개요
샬럿은 피드몬트산맥 기슭에 위치하며 윈스턴세일럼, 그린즈버러와 함께 주 제일의 상공업지구를 형성한다. 샬럿은 2004년부터 2020년까지 80만 명 이상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이 수치는 미국 1위이다. 1780년 샬럿을 점령한 영국군 사령관 찰스 콘월리스 후작은 시민들의 적대적 태도를 보고 말벌의 소굴(a hornet's nest of rebellion)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도시의 별명이 됐으며 농구 구단 샬럿 호네츠의 이름의 유래다. 1849년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발생하기 전에는 이 곳이 금 생산의 중심지였고 조폐창도 있었다. 남북전쟁기에는 남군의 해군기지였다. 1837년 개설된 조폐국 지소는 1861년까지 영업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보존되어 있다. 목화거래의 중심지이지만 면방적, 직물, 기계, 화학제품, 식품가공, 인쇄 등의 공업도 활발하며, 특히 1890년대에 들어 미국 3대 금융중심지의 하나로서 상업, 은행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미국 뿐 아니라 독일, 일본, 영국 등 외국의 유수한 건설, 기계, 약품회사 들이 입지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부근에 잭슨 대통령과 포크 대통령의 출생지가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Top10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본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주해 와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업타운(다운타운)에서 고층빌딩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 샬럿에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본사와 웰스 파고 동부 본사가 이 도시에 있다. 금융산업 이외에도 식품 및 제조업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2018년 11월에 미국의 다목적기업인 허니웰이 본사를 이전해왔고, 과일 및 과일 음료 등으로 유명한 Dole이 아일랜드의 토탈 프로듀스와의 합병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본사를 이전해왔다.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코카콜라의 샬럿 공장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샬럿은 NBA 팀인 샬럿 호네츠, NFL의 캐롤라이나 팬서스, MLS의 샬럿 FC, MLB 팀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의 AAA팀인 샬럿 나이츠의 연고지이다. 노스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 듀크 대학교의 라이벌로 대표되는 농구 강세 지역이다보니, 수많은 농구 스타들을 배출해냈다. 마이클 조던과 스테판 커리의 실질적 고향이며, 조던은 호네츠의 구단주로 재임 중이기도 하다.[2][3]
역사
카토바 인디언은 메클렌버그 카운티(샬럿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역사적 부족으로, 1567년경 스페인 기록에 처음 기록되었다. 1759년까지 카타우바 부족의 절반이 천연두로 인해 사망했는데, 이는 카타우바 부족이 새로운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유럽 식민지 주민들 사이의 풍토병이다. 카타우바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 10,000명이었지만 1826년까지 그들의 총인구는 110명으로 떨어졌다.
샬롯은 처음에 남부 피에몬테 지역의 문화를 지배했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장로교 사람들 또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얼스터 스코트 정착자들의 이주의 물결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들은 창립 인구를 구성했다. 독일 이민자들도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그 지역에 정착했지만, 훨씬 적은 숫자였지만 여전히 이 지역의 초기 기반에 큰 기여를 했다.
메클렌부르크군은 처음에는 1729년 뉴하노버군이 된 뉴하노버 지구의 바스군(1696년 ~ 1729년)의 일부였다. 뉴하노버의 서부는 1734년에 블래든군으로 분할되었고 서부는 1750년에 안손군으로 분할되었다. 메클렌부르크군은 1762년 안손군에서 형성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후인 1792년에 메클렌부르크에서 카바루스 카운티가 형성되면서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 1842년, 유니언 카운티는 메클렌부르크의 남동부와 안손군의 서부로 형성되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솔즈베리 구역으로 알려진 노스캐롤라이나의 원래 6개 사법 및 군사 구역 중 하나였다.지금의 샬롯 지역은 1755년경 토마스 스프랫(Thomas Spratt)과 그의 가족이 지금의 엘리자베스 근처에 정착했을 때 유럽의 식민지 주민들에 의해 처음으로 정착했다.
샬럿은 몇 년 전에 카운티처럼 "여왕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마을이 합병되기 7년 전인 1761년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여왕이 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두 번째 별명은 영국군 사령관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적대적인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샬롯을 "말벌의 반란 둥지"라고 썼으며, "말벌의 둥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포크가 정착한 지 수십 년 만에 지역은 1768년에 합병된 샬롯 마을이 되었다. 샬롯(Charlotte)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 이름은 1800년경까지 많은 지도에서 "Charlotesburgh"로 나타났다. 콘월리스 장군의 침공 경로를 묘사한 영국 기원 지도에도 찰로타운으로 나타났다. 피에몬테의 교차로는 업타운 샬롯의 심장이 되었다. 1770년, 측량사는 미래의 개발을 위해 격자무늬로 거리를 표시했다. 동서 무역로는 트레이드 스트리트가 되었고,그레이트 왜건 로드(Great Wagon Road)는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의 왕실 총독이었던 윌리엄 트라이온(William Tryon )을 기리기 위해 트라이온 스트리트(Tryon Street)가 되었다. 윌리엄 몰트리(William Moultrie)는 1772년 캐롤라이나 사이의 경계를 조사하던 중 샬럿에 들렀는데, 그의 집 대여섯 채는 아주 평범한 통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다.
지역 지도자들은 1775년에 모여서 메클렌부르크 독립선언문으로 더 잘 알려진 메클렌부르크 결의문에 서명했다.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에 대한 진정한 선언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국 미국 혁명을 이끈 최초의 그러한 선언들 중 하나이다. 선언문 서명의 전통적인 날짜인 5월 20일은 샬럿에서 매년 독립광장에서 재연자들의 머스킷총과 대포 사격으로 맥덱(MecDec)으로 기념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주기와 인장에도 날짜가 새겨져 있다.
샬롯은 전통적으로 남부 장로교의 본거지로 여겨지지만, 19세기에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로마 가톨릭 등 수많은 교회가 생겨났고, 결국 샬롯은 '교회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1799년, 근처 카바루스 카운티에서 12살의 콘래드 리드는 그의 가족이 문설주로 사용했던 17파운드짜리 바위를 발견했다. 3년 후 한 보석상이 그것이 거의 순금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 가족에게 3달러 50센트의 하찮은 돈을 지불했다. 국에서 최초로 기록된 금 발견으로 인해 미국 최초의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많은 금맥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그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이것은 1837년 샬롯 조폐국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1848년 시에라 네바다가 발견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금의 주요 생산지였지만, 샬럿 지역에서 채굴된 양은 후속 채굴로 인해 작아졌지만 여전히 지역 하천과 개울에서 가끔 금을 채취했다. 리드 금광은 1912년까지 운영되었다. 샬럿 조폐국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부군이 장악한 1861년까지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폐국은 다시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 건물은 다른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조폐국 미술관이 들어섰다.
샬롯이 목화 가공의 중심지이자 철도의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의 첫 번째 붐은 남북전쟁 이후에 일어났다. 1880년대에 샬롯은 애틀랜타에서 워싱턴 D.C.까지 남부 철도 본선에 걸쳐 앉았다. 주위 수 마일에서 온 농부들은 업타운에 있는 철도 플랫폼으로 목화를 가져왓다. 1890년 인구조사에서 샬롯의 도시 인구는 11,557명으로 증가했다.
1910년 샬럿은 윌밍턴을 제치고 34,014명의 주민이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미국 정부가 오늘날 윌킨슨 대로 북쪽에 캠프 그린을 설립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구는 다시 증가했다. 이 캠프는 40,000명의 군인들을 지원했고, 전쟁이 끝난 후 많은 군대와 공급자들이 머물며 도시화를 시작했고, 결국 피에몬테 크레센트를 따라 오래된 도시들을 추월했다. 1920년 인구조사에서 샬럿은 48,395명의 인구를 가진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윈스턴세일럼이 되었고 샬럿보다 2000명이 더 많았다. 샬럿은 1930년 인구조사에서 윈스턴 세일럼을 추월했고 그 이후로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가장 큰 도시로 남았다.
도시의 현대 은행 산업은 주로 금융가인 휴 맥콜(Hugh McColl) 의 지도 하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맥콜은 노스캐롤라이나 국립 은행(North Carolina National Bank, NCNB)을 공격적인 인수를 통해 아메리카 은행(Bank America)과 합병하여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가 되었다. 자산 통제 측면에서 샬럿은 뉴욕시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 본부가 되었다.
1989년 9월 22일, 이 도시는 허리케인 휴고에 의해 강타당했다. 시속 111km의 지속적인 바람과 시속 140km의 돌풍으로 휴고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혔고, 80,000그루의 나무를 파괴했으며, 대부분의 인구에게 전력 공급을 중단시켰다. 주민들은 몇 주 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고, 학교들은 일주일 혹은 그 이상 문을 닫았고 청소는 몇 달이 걸렸다. 그 도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갇혔다. 샬롯은 캐롤라이나 해안 지역에서 내륙으로 320km 떨어져 있다 .
2002년 12월, 샬롯과 노스캐롤라이나 중심부의 많은 지역이 1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력을 잃게 만든 얼음 폭풍에 의해 강타당했다. 비정상적으로 추운 12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몇 주 동안 전력이 없었다. 도시의 많은 브래드포드 배 나무들이 얼음의 무게로 갈라졌다. 2015년 8월과 2016년 9월, 그 도시는 조나단 페렐(Jonathan Ferrell)과 키스 스콧(Keith Scott)의 경찰 총격과 관련된 며칠간의 시위를 겪었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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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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