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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1945)=== | ||
+ |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 조선은 근대식 공장 건설을 꾀했다. 그러나 경험, 자본, 기술 등의 부재로 인하여 중공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한반도에 중공업이 들어 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1918년 미쓰비시가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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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총독부에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반도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 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남 지역에 일본 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 걸 시작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 콤비나트가 들어선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반도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의 중공업 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의 자본으로 일본의 기술에 의해서 일본의 필요를 위해서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주요 중화학공업 기업의 경영과 기술진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과실 또한 조선 민중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 ||
+ | ===해방에서 전쟁까지(1945~1953)=== | ||
+ | 한반도의 지하자원은 북부에 편중되어 있다. 1942년을 기준으로 산업의 쌀인 철광석과 주 동력원인 유연탄은 98% 이상이 북한에 존재하였고 이외에 한반도 주요 광물인 구리(89.3%), 아연(78.4%), 텅스텐(72.7%), 무연탄(71.6%), 금(69.6%), 동(66.2%)이 모두 북에 쏠려있었다. 따라서 이와 밀접한 중공업 역시 일제강점기 북부를 위주로 발달하였고 전력 역시 그러하였다. 그 결과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중공업 공장과 이를 지탱하는 지하자원, 발전소를 소군정과 북한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공화국은 중공업이 완전 경제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산업부흥 5개년계획(1949)을 통해 금속공업, 기계공업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 ||
+ | ===전후복구기(1953~1962)=== | ||
+ | 자유당 정권은 중공업을 기간산업으로 보고 미국의 원조와 국채를 집중시켜 육성을 하려 하였다. 한국의 자동차 공업은 1955년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신진공업사가 세워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25인승 H-SJ 차량 2천 대를 생산하고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자 1960년에는 부산진 공장이 준공되어 8월부터 자동차 생산에 들어갔다. 이에 1962년 [[경성정공]]이 3륜자동차, K-360, T-600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해 10월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 ||
+ | ===박정희 정부 1기(1962~1971)=== | ||
+ | 5.16으로 집권한 군부 세력도 자립경제를 위한 핵심으로 중공업을 강조하였다. 정부는 1962년 4월 자동차공업 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국산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을 입안하며 그해 8월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준공하였다. 또한 그해 초 울산공업지구를 설정하여 수입대체산업화를 위시한 중공업화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석유화학 공장과 함께 연간 30만 톤 이상의 종합제철소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종합제철소는 삼화제철을 비롯한 실업계의 외면, 생산성과 추진력 부족 등의 이유로 추진에 난항을 겪었고 공화당의 양순직 의원, 민주당의 김대중 의원 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제철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소견을 내밀었으나 결국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하면서 무산된다. | ||
+ | ===박정희 정부 2기와 전두환 정부(1972~1987)=== | ||
+ | 대한민국 정부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진흥정책을 구상한 것은 1971년 말부터였다. 정부는 1972년 공업화가 아닌 중공업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980년 100억 불 수출 돌파, 1981년 국민소득 천불 달성이라는 과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중공업화로써 산업을 고도화시켜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계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69), 자동차공업육성계획(1969), 철강공업육성법(1970),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1970)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해오던 것이었고 이에 힘입어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 정책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실한 기반 위에서 외채와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면서 시작한 중화학공업은 때마침 닥친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곧바로 부실화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이에 유신정권은 8·3긴급 경제조치와 정책금융 등 각종 특혜를 대기업에 부여하면서 중화학공업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런 흐름은 새로이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에도 이어져서 산업합리화 조치가 단행되었고 정책금융 지원이 계속되었다. | ||
+ | ===민주화시대(1988~)=== | ||
+ | 고도성장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민주화 시기에도 중공업은 꾸준히 발전하였다. 201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전자산업, 조선업, 철강, 자동차, 방위산업 분야 등에서 세계적인 생산 규모를 달성하게 되었다. 2020년대에도 중공업은 한국의 명실상부한 핵심 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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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3일 (월) 14:51 기준 최신판
중공업(heavy industry, 重工業)은 경공업과 달리 부피에 비하여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을 만드는 공업으로 기계, 철강, 조선, 자동차, 기관차, 비행기 등이 중공업 분야에 해당한다. 한자문화권에서 중공업이라는 단어는 Heavy(무거운) Industry(공업)의 번역어이다.[1][2]
목차
개요[편집]
중공업이란 기계를 통해 둔중한 물체를 제조하는 산업을 말한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자 근대 공업의 역사적인 기점을 형성한 경공업의 시발점을 방적 공작기계의 발명에서 찾는다면 산업자본의 단계로부터 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거대한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중공업 특히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철강업의 기술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동요 내지 정체와 독점의 모국(母國)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및 독일의 약진은 자유경쟁에 대한 독점, 집중의 완전한 승리를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수출 상품이 중공업 부문의 제품인 고가의 생산재이거나 기타 고가의 기계일 때에는 그 대금이 크지만 이들 생산에는 막대한 시설 자본과 고도의 생산기술이 요구된다. 중공업은 그 시설이 극히 고도로 기계화되어 있어 다수의 전문 기술자를 필요로 한다.
중공업은 그 경영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 내지 기술적인 면을 등한시할 수 없는 점이다. 원래 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F. W. Taylor)도 중공업인 철강업에서 경영의 합리화를 목적으로 새로운 경영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과학적 관리법이 탄생하게 된 동기도 결국 대량생산기술의 발전과 독점자본의 형성 과정에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경영학의 모체는 중공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생산활동은 수요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품질 내지 품종, 수량 내지 시간, 원가 내지 가격 등 이들 3요소를 만족시켜 주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관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경영상 이러한 3요소가 각각 독립해서 만족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이다. 즉 수요자는 품종도 많고 품질도 우수하고 수량도 풍부하며 사용하고자 하는 시기에 지연됨이 없어야 하고 가격은 저렴해야만 비로소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생산계획을 수립하는 경우 품종을 다양하게 하면 생산 수량은 감소되고 생산시간은 장기화되며 결국 원가는 높아지게 된다. 만일 이러한 생산활동의 관리가 각 품종 및 품질관리, 원가관리, 시간관리 등 3요소로 분화되어 있다고 하면 이들 각 요소를 만족시키기 위한 관리는 각각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기업의 안정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경영의 행동 의욕은 항상 안정(安定)과 성장(成長)에 두게 된다. 성장이란 실은 위험에 대한 도전에 불과하다. 따라서 안정 행동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안정도를 높이게 되면 기업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되고 성장도를 높이면 위험도가 높아지 된다. 그러므로 기업은 이러한 특성과 경제적 환경을 밑바탕으로 하여 최적 상태를 선택하고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최적 상태가 곧 기업 경영의 합리화일 것이다. 중공업의 경우 기업의 성격상 일찍이 그 합리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요 산업[편집]
- 금속공업은 금속 소재(반제품이나 원자재)를 만드는 1차 금속 제조업과 이를 완제품으로 가공하는 금속 제품 제조업이 있다. 1차 금속 제조업은 제선, 제강, 압연의 공정을 갖는 철강공업과 광석(ore), 고철(scrap)에서 필요한 금속을 회수하는 비철금속공업으로 구분하고 있다. 현대에는 채산성을 위해 한곳에 모여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 기계공업에는 금속공업의 연장선상에서 기계공업의 기초를 담당하고 있는 산업기계공업과 이를 가지고 소비재 등을 설계, 조립하는 전자 기계공업(전자제품, 전자산업), 수송기계공업(자동차, 선박, 항공기), 건설기계공업(중장비, 기관차), 방위산업(미사일, 로켓, 전차) 등이 있다.
- 화학공업에는 유기화학공업과 무기화학공업이 있다. 여타 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설비를 요한다. 오늘날에는 원유가 유기화학공업 종래의 것들을 상당수 대체하고 있다.
위와 같은 것을 총동원하여 대형 공장, 댐, 초 고 층빌딩 등 초대형 건축물을 시공하는 것과 강도 높은 광업 또한 중공업에 포함된다고 한다.
중공업의 독점자본주의적 성격[편집]
- 생산의 집적과 자본의 집중이 자본구성의 고도화를 가져왔고 자본제 생산의 독점 단계에서 그 극치에 달했다.
- 중공업은 근본적으로 자본구성이 고도화한 산업이다. 여기에 중공업 자체가 가지는 본래적인 독점성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중공업은 타산업에 비해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산업과 은행과의 긴밀한 결합이 필연적으로 뒤따라 결국 금융 과액 지배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 원료 자원의 획득이나 후진국에 대한 자본수출 등의 충동이 가장 강렬한 것이 중공업으로 자본가 단체들에 의한 국제시장의 분할도 먼저 중공업 분야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중공업 역사[편집]
근대(~1945)[편집]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 조선은 근대식 공장 건설을 꾀했다. 그러나 경험, 자본, 기술 등의 부재로 인하여 중공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한반도에 중공업이 들어 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1918년 미쓰비시가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반도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 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남 지역에 일본 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 걸 시작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 콤비나트가 들어선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반도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의 중공업 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의 자본으로 일본의 기술에 의해서 일본의 필요를 위해서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주요 중화학공업 기업의 경영과 기술진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과실 또한 조선 민중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해방에서 전쟁까지(1945~1953)[편집]
한반도의 지하자원은 북부에 편중되어 있다. 1942년을 기준으로 산업의 쌀인 철광석과 주 동력원인 유연탄은 98% 이상이 북한에 존재하였고 이외에 한반도 주요 광물인 구리(89.3%), 아연(78.4%), 텅스텐(72.7%), 무연탄(71.6%), 금(69.6%), 동(66.2%)이 모두 북에 쏠려있었다. 따라서 이와 밀접한 중공업 역시 일제강점기 북부를 위주로 발달하였고 전력 역시 그러하였다. 그 결과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중공업 공장과 이를 지탱하는 지하자원, 발전소를 소군정과 북한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공화국은 중공업이 완전 경제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산업부흥 5개년계획(1949)을 통해 금속공업, 기계공업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전후복구기(1953~1962)[편집]
자유당 정권은 중공업을 기간산업으로 보고 미국의 원조와 국채를 집중시켜 육성을 하려 하였다. 한국의 자동차 공업은 1955년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신진공업사가 세워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25인승 H-SJ 차량 2천 대를 생산하고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자 1960년에는 부산진 공장이 준공되어 8월부터 자동차 생산에 들어갔다. 이에 1962년 경성정공이 3륜자동차, K-360, T-600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해 10월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박정희 정부 1기(1962~1971)[편집]
5.16으로 집권한 군부 세력도 자립경제를 위한 핵심으로 중공업을 강조하였다. 정부는 1962년 4월 자동차공업 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국산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을 입안하며 그해 8월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준공하였다. 또한 그해 초 울산공업지구를 설정하여 수입대체산업화를 위시한 중공업화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석유화학 공장과 함께 연간 30만 톤 이상의 종합제철소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종합제철소는 삼화제철을 비롯한 실업계의 외면, 생산성과 추진력 부족 등의 이유로 추진에 난항을 겪었고 공화당의 양순직 의원, 민주당의 김대중 의원 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제철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소견을 내밀었으나 결국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하면서 무산된다.
박정희 정부 2기와 전두환 정부(1972~1987)[편집]
대한민국 정부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진흥정책을 구상한 것은 1971년 말부터였다. 정부는 1972년 공업화가 아닌 중공업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980년 100억 불 수출 돌파, 1981년 국민소득 천불 달성이라는 과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중공업화로써 산업을 고도화시켜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계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69), 자동차공업육성계획(1969), 철강공업육성법(1970),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1970)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해오던 것이었고 이에 힘입어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 정책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실한 기반 위에서 외채와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면서 시작한 중화학공업은 때마침 닥친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곧바로 부실화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이에 유신정권은 8·3긴급 경제조치와 정책금융 등 각종 특혜를 대기업에 부여하면서 중화학공업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런 흐름은 새로이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에도 이어져서 산업합리화 조치가 단행되었고 정책금융 지원이 계속되었다.
민주화시대(1988~)[편집]
고도성장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민주화 시기에도 중공업은 꾸준히 발전하였다. 201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전자산업, 조선업, 철강, 자동차, 방위산업 분야 등에서 세계적인 생산 규모를 달성하게 되었다. 2020년대에도 중공업은 한국의 명실상부한 핵심 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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