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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동아프리카 위치 지도}} 썸네일|300픽셀|'''잔지바르''' 국기 '''잔지바르'''(영어: Zanzibar, 스와힐리어: Zanzibar,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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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수도: [[잔지바르시티]]
 
* 수도: [[잔지바르시티]]
* 면적: 137,600k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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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 137,600km²
 
* 인구: 3,508,180명(2017)
 
* 인구: 3,508,180명(2017)
 
* 공용어: 스와힐리어, 아라비아어, 영어
 
* 공용어: 스와힐리어, 아라비아어,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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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 잔석기 도구의 발견으로 약 2만년 전부터 잔지바르에 인류가 거주한것으로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그리스-로마 문서인 [[에리트레아 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에서는 [[운구자섬] 으로 추정하는 [[메누티아스]] ( 고대 그리스어 : Μενουθιάς ) 섬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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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석기 도구의 발견으로 약 2만년 전부터 잔지바르에 인류가 거주한것으로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그리스-로마 문서인 [[에리트레아 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에서는 [[웅구자섬] 으로 추정하는 [[메누티아스]] ( 고대 그리스어 : Μενουθιάς ) 섬을 언급했다.
  
 
9세기부터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상인들은 내륙과 [[인도양]] 양쪽에서 온 장거리 무역상들의 중개업자로 활동하였다. [[페르시아]], [[인도]], [[아랍]] 무역상들은 금, 상아, 호박과 같은 [[동아프리카]] 상품을 얻기 위해 잔지바르를 자주 방문했고 그 후 아시아로 수출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오대호와 잠베지안 지역에서 온 캐러밴 무역상들이 수입품, 특히 [[인도]] 원단을 거래하기 위해 해안으로 왔다.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는 남부 마을인 운구자 우쿠(Unguja Ukuu)와 키짐카지(Kizimkazi)와 북부 마을인 툼바투(Tumbatu)가 무역 중심지였다. 잔지바르는 스와힐리 사람들 무역상들의 중개자, 촉진자 역할을 하면서 부를 증가시켰다. [[중앙 아프리카]]와 [[인도양]] 문화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부분적으로 스와힐리 문화의 진화에 기여하였으며 아랍 문자 문학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반투족 언어이긴 하지만, 오늘날 스와힐리어는 일부 차용된 요소, 특히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외국 무역상들은 잔지바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과 결혼했다. 특히 몬순 바람이 만연한 탓에 6개월 동안 해안에서 월동한 아시아 남성들은 동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했다. 동아프리카의 모계 전통이 중요했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무역상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계 민족 정체성을 물려받았다.
 
9세기부터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상인들은 내륙과 [[인도양]] 양쪽에서 온 장거리 무역상들의 중개업자로 활동하였다. [[페르시아]], [[인도]], [[아랍]] 무역상들은 금, 상아, 호박과 같은 [[동아프리카]] 상품을 얻기 위해 잔지바르를 자주 방문했고 그 후 아시아로 수출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오대호와 잠베지안 지역에서 온 캐러밴 무역상들이 수입품, 특히 [[인도]] 원단을 거래하기 위해 해안으로 왔다.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는 남부 마을인 운구자 우쿠(Unguja Ukuu)와 키짐카지(Kizimkazi)와 북부 마을인 툼바투(Tumbatu)가 무역 중심지였다. 잔지바르는 스와힐리 사람들 무역상들의 중개자, 촉진자 역할을 하면서 부를 증가시켰다. [[중앙 아프리카]]와 [[인도양]] 문화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부분적으로 스와힐리 문화의 진화에 기여하였으며 아랍 문자 문학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반투족 언어이긴 하지만, 오늘날 스와힐리어는 일부 차용된 요소, 특히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외국 무역상들은 잔지바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과 결혼했다. 특히 몬순 바람이 만연한 탓에 6개월 동안 해안에서 월동한 아시아 남성들은 동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했다. 동아프리카의 모계 전통이 중요했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무역상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계 민족 정체성을 물려받았다.
  
 
===포르투갈의 식민지화===
 
===포르투갈의 식민지화===
1498년 Vasco da Gama가 잔지바르에 도착하였으며 1503년 또는 1504년, 루이 루렌소 라바스코 마르케스 선장이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평화의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요구하였고 잔지바르는 조공을 바침으로 포루트괄의 일부로 넘어 갔다. 는데 당시 루이 루렌소 라바스코 마르케스 선장이 도착하여 [24]: page: 99 평화의 대가로 술탄으로부터 조공을 요구받고 받음으로써 포르투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잔지바르는 거의 2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소유로 남아있었다.처음에는 포르투갈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일부가 되었고 총독에 의해 관리되었다.1571년경에 잔지바르는 포르투갈 제국의 서쪽 구역의 일부가 되었고 모잠비크에서 [25]: page: 15 통치되었다.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잔지바르를 면밀히 관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591년 웅구자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선박인 에드워드 보나벤처는 포르투갈의 요새나 수비대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이 점령한 범위는 모잠비크에 선적하기 위해 농산물을 구입하고 수집하는 무역 창고였다."다른 점에서는, 섬의 사무는 둥가의 [18]: page: 81 음위니 무쿠의 전신인 지역 '왕'에 의해 관리되었습니다."포르투갈이 몇 년 전 몸바사의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1635년경에 펨바 섬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이러한 손쉬운 접근은 끝이 났다.포르투갈은 오랫동안 펨바를 포르투갈 [18]: page: 85 통치에 대한 몸바사의 반란의 골칫거리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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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Vasco da Gama가 잔지바르에 도착하였으며 1503년 또는 1504년, 루이 루렌소 라바스코 마르케스 선장이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평화의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요구하였고 잔지바르는 조공을 바침으로 포루트괄의 일부로 넘어 갔다. 잔지바르는 거의 2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일부가 되었고 총독에 의해 관리되었다. 1571년경에 잔지바르는 포르투갈 제국의 서부 분할의 일부가 되었고 [[모잠비크]]에서 관리하였다. 1591년 웅구자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선박인 에드워드 보나벤처는 포르투갈의 요새나 수비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635년경에 포르투갈은 몸바사의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펨바 섬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운구자의 술탄의 정확한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그러나 그들의 수도 운구자우쿠는 광대한 도시였다고 여겨진다.지역 주민들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주로 부패하기 쉬운 [18]: page: 89 물질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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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인은 1498년에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슬람 아랍어를 사용하는 엘리트가 있는 해안에 여러 독립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포르투갈은 그들을 "흑인"이라고 부르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를 명확히 구분했다. 포르투갈인들과 이들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적대적이었지만 16세기 동안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권력을 확립하고 조공을 바치던 술탄의 도움으로 통치했다. 포르투갈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어서 기존의 지역 지도자와 권력 구조의 손에 행정이 맡겨졌다. 이런 관리 구조는 1631년 몸바사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 포르투갈은 유럽 총독을 임명했다. 무역 억제와 지역 권력의 약화로 인해 몸바사와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엘리트들은 유럽인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줄 오만 귀족들을 초대했다.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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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이후 2001년 다당제를 도입하였고, 2003년 행정부를 구성, 2005년 의회를 구성하였다. 공인 정당은 3개로 한정되며, 매 10년마다 정당 3개를 선택하는 선거를 치룬다. 이는 정당 수를 제한함으로써 씨족별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막고 각 씨족이 정치를 위해 협력하게 유도한 것이다. 총 득표율에서 상위 3위에 드는 정당이 공인되며, 각 정당은 총 득표율과 별개로 여섯 선거구 최소 네 선거구에서 20% 이상의 득표를 해야 한다. 이 또한 정당이 특정 씨족을 대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의원 후보는 정당에 속해야 하며, 대통령 선거 시엔 각 정당에서 후보를 1명씩 보내 3명이 경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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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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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에 잔지바르는 [[오만 술탄국]] 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784년 오만 통치에 대한 짧은 반란이 있었다. 잔지바르 귀족들은 19세기 전반에 오만 상인 왕자들을 포르투갈인보다 선호하여 잔지바르에 정착하도록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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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경까지 [[잔지바르]]의 술탄들은 [[몸바사]]와 [[다르에스살람]]을 포함한 잔즈 로 알려진 스와힐리 해안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 1886년부터 영국과 독일은 자신들의 제국을 위해 잔지바르 술탄국의 일부를 획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886년 10월, 영국-독일 국경 위원회는 아프리카 오대호 지역 해안 대부분을 따라 폭 10해리(19km)의 띠로 잔즈를 설립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거의 모든 잔지바르 영토가 유럽 제국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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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들은 [[잔지바르 군도]]의 무역과 현금 작물의 경제를 아랍의 지배 귀족들과 함께 발전시켰다. 상아는 주요 무역 상품이었다. 향신료와 정향나무로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재배 농장이 개발되고 군도의 상업은 점차 인도 아대륙의 무역상들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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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으로서 14년 동안 통치하는 동안 Majid bin Said는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 19세기 중반, 잔지바르시의 말린디는 매년 50,000명의 노예를 통과시키므로 [[중동]]과의 노예 무역을 위한 스와힐리 해안의 주요 항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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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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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무스카트의 영국 영사는 술탄 사이드를 압박하여 노예 거래를 중단시켰다. 술탄은 영국과 맺은 일련의 노예제도 반대 조약 첫 번째인 모레스비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아프리카의 케이프 델가도에서 인도 해안의 디우 헤드로의 모레스비 선 남쪽과 동쪽의 노예 이동을 금지했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의회와 원로원(구르티, Guurti)으로 구분된다. 둘 다 82명의 의석을 가지고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의원은 총선을 통해 선출되며, 원로는 씨족의 비례대표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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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0년부터 1913년까지 당지 비지어(vizier)들을 통하여 통치했으며 그들은 식민 사무소에서 임명한 고문의 감독을 받았다. 1913년부터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1896년 8월 27일 아침, 영국 해군 의 함선이 베이트 알 후쿰 궁전을 공격했고 38분 후에 휴전이 선언되었고 오늘날까지 포격은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원로원, 곧 구르티는 원로들이 특별히 모이는 회의란 뜻으로, 현대 소말릴란드의 구르티는 1988년 바레의 학살 이후 이사크 족이 소집한 원로 회의에서 유래했다. 이후 1993년 평화 협상으로 상설화됐으며, 이사크 족뿐만 아니라 모든 씨족의 원로가 원로원에 참여하게 됐다. 원로원은 분쟁을 조정하거나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심사하는 일을 맡는다. 또한 원로원은 소말릴란드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씨족사회였고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영국은 구 체제를 인정하는 간접적 통치를 했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의 정통성이 부족했다. 원로원을 씨족의 대표로 채워 원로원은 소말릴란드의 씨족들을 대표하는 기관이 됨으로서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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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0일, 영국 잔지바르법에 의해 영국은 보호령을 폐지하고 영연방 내 독립국으로서 잔지바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보호국이 폐지되자 잔지바르는 술탄 치하의 연방 내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2003년 최초로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으며, 이 선거에서 [[큘미헤당의 아흐메드 모하메스 시라아뇨]]가 4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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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월 12일 술탄 잠시드 빈 압둘라는 잔지바르 혁명 중 퇴위하고 술탄국은 아프로-시라지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혁명으로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난민들, 특히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섬을 탈출했다.
  
2017년 대통령 선거는 세계 최초로 홍채인식 확인절차를 도입했다. 3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며 대선 이슈는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독립을 인정받을 것인가?"라고 한다. 대선 결과는 집권당인 평화통합개발당의 [[무세 비히 압디]]가 55.1%의 득표율을 얻어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위가 일어 2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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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공화국은 [[탕가니카]] 본토와 합병했다.탕가니카 연합 공화국과 잔지바르 연합 공화국은 곧 두 개의 이름을 혼합하여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으로 개명되었고, 잔지바르 연방은 그 안에서 자치 지역으로 남았다.
  
2021년 5월 31일, 2005년 의회 구성 이후 처음으로 의원 선거를 치뤘다. 가뭄 같은 현생 문제를 비롯해 선거 절차에 대한 논쟁으로 계속 지연됐었는데, 지방 선거나 대선은 어떻게든 치루는 와중에도 의원 선거는 16년 만에야 시행됐다. 65.3%의 투표율을 보여준 의원 선거는 두 야당의 연정으로 인한 집권 여당의 패배로 결정됐고, 관련 부처 내 권력 이양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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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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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는[[탕가니카]]와 별개로 자치권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법적으로 탄자니아 부통령을 잔지바르에서 뽑도록 규정되어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인구수에 비해서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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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혁명당이 일당 독재하는 탕가니카 본토와는 다르게 잔지바르에서는 시민연합전선의 힘도 강한편이며, 그래서 선거에서 여러번 접전이 벌어져서 충돌이 벌어진적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잔지바르 내에서도 [[웅구자 섬]]과 [[펨바 섬]]이 따로 놀기 때문이며, 잔지바르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아랍인을 축출하자 따로 독립하려고 하기도 했고, 이후로도 잔지바르 정부에서 펨바 섬에 별로 신경을 안써준다는 인식 때문에 불만이 많다. 한때 갈등이 심했을 때는 펨바 섬에서 수백 명의 난민이 발생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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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사미아 술루후 하산]]이 전임 존 마구풀리 대통령이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 경제 ==
 
== 경제 ==
비공식 환율은 달러 당 6,000에서 6,500 실링 수준. 여담으로 1,000 실링 동전의 뒷면은 소말릴란드의 국장 대신 소말리아의 국장이 그려져 있다. 현재는 화폐 제조 기술이 없어 영국에서 수입 해오는 중이며, 인플레이션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영국과의 관계 개선 및 기술 탐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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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주로 [[펨바섬]]은 한 때 1970년대 동안 세계 일류의 정향 생산지였지만 연례 정향 판매가 1970년대 이래로 80%가량 폭락한 상태이다. 잔지바르는 현재 세계 정향 공급에서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3위이지만 인도네시아는 세계 정향의 공급의 75%, 잔지바르는 7%차지하므로 격차가 크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여러 나라에 양, 염소, 낙타 등의 가축을 수출하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소말리아 측에서 이 문제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항의했으나 가축 수입을 잠시동안 중단했다가 재개했을 뿐이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은 소말릴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도 없고 가축을 싼 값에 사는 것뿐이니 소말리아가 그 값에 팔 수 있다면 사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말리아도 연방 자치 행정구역인 [[푼틀란드]]통해 가축을 싸게 팔고 있다.
 
  
또한 [[레바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과일을 수입하면서 [[아랍 동맹]]의 여러 나라와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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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는 향신료, 해초, 품질이 좋은 라피아를 수출한다. 또한 큰 어장을 갖고 있으며 환목선 생산을 한다. 관광은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현재 미승인국이라는 현실과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소말릴란드 실링의 가치가 매우 떨어지기에 국민의 25%가 전자화폐를 쓸 정도로 전자화폐 거래가 활발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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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과 6월 동안 잔지바르는 정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섬주민들은 5월 21일에서 6월 19일까지 전력이 없거나 디젤 발전기같은 전기 생산의 대체 방안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거의 한달 동안 지내야만 했다. 이 정전은 주로 국제적인 관광 사업에 기반을 둔 섬의 빈약한 경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에티오피아]]가 소말릴란드 베르베라항에 출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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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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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는 [[인도양]]의 섬들 중 하나이며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와 인접한 스와힐리 해안에 위치해 있다.
  
2021년 5월, DP World라는 [[두바이]] 소재 기업이 소말릴란드와 베르베라 항구에 한화 5,000억 원(4억 4,000만 달러) 규모의 항구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소말릴란드에 대한 투자 금액으로는 역대 최대이며, 지역 무역 중심지로 개발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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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구자섬은 해협에 의해 탄자니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가장 좁은 곳은 36.5km이다.이 섬의 길이는 85km, 폭은 39km이며 면적은 1,464km²이다. 웅구자는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120m이다. 웅구자는 산호초가 주렁주렁 달린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특징이다.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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펨바 섬은 탄자니아 본토와 56km 너비의 해협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섬의 길이는 약 67km, 폭은 23km이며 면적은 985km²이다. 펨바는 또한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95m이다.
1991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나 아직 어떠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완전한 [[미승인국]]이다. 하지만 국가적 요소는 모두 갖추었고, 자국의 화폐까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독립국이다. 오히려 혼란한 정세인 [[소말리아]]보다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분리주의에 부정적인 국제 여론에 의해 승인이 주저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말리아의 자치 지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해적납치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소말릴란드는 소말릴란드의 구성 부족들이 정부와 함께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나 소말리아 반군 세력에 의한 테러로 인한 위험이 있다. [아프리카]]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 다음으로 군과 경찰에 여성의 비율이 높다. 2010년 6월 26일 [[푼틀란드]]에서 넘어온 민병대가 투표소를 습격하여 일부 투표소가 일찍 문을 닫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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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는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하며 북반구 겨울에 해당하는 여름의 높은 기온은 북동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카스카지로 알려져 있음)과 관련된 강한 바닷바람에 의해, 특히 북쪽과 동쪽 해안에서 낮아진다.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섬들은 일년 내내 따뜻하다. 강우량은 남서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쿠시라고 함)과 관련된 3월, 4월, 5월의 주요 최대치와 11월과 12월의 두 번째 최대치로 나뉜다.그  사이의 달은 비가 적게 오며, 7월에 가장 적게 비가 내린다.
  
== 소말릴란드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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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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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행정 지도|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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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릴란드 주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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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주변 지도===
 
{{다단2
 
{{다단2
|{{소말리아 행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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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행정 지도}}
 
|{{아덴만 국가 지도}}
 
|{{아덴만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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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A7%90%EB%A6%B4%EB%9E%80%EB%93%9C 소말릴란드]〉, 《위키백과》
+
* 〈[https://ko.wikipedia.org/wiki/%EC%9E%94%EC%A7%80%EB%B0%94%EB%A5%B4 잔지바르]〉, 《위키백과》
* 〈[https://namu.wiki/w/%EC%86%8C%EB%A7%90%EB%A6%B4%EB%9E%80%EB%93%9C 소말릴란드]〉, 《나무위키》
+
* 〈[https://en.wikipedia.org/wiki/Zanzibar Zanzibar]〉, 《Wikipedia》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소말리아]]
+
* [[탄자니아]]
* [[하르게이사]]
+
* [[탕가니카]]
 
* [[아프리카]]
 
* [[아프리카]]
  
 
{{국가|검토 필요}}
 
{{국가|검토 필요}}
[[분류:아프리카]]
+
[[분류:기타]]

2023년 6월 21일 (수) 17:39 판

파일:잔지바르 국기.jpg
잔지바르 국기

잔지바르(영어: Zanzibar, 스와힐리어: Zanzibar, 아랍어: زنجبار)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자치령으로, 웅구자섬(잔지바르섬)과 펨바섬을 중심으로 한 잔지바르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잔지바르에 있는 스톤 타운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육두구, 계피, 후추 등의 향신료 산지로 유명하다. 잔지바르는 현재도 드물게 향신료섬(Spice Islands)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잔지바르 정부는 1985년부터 약 1만 9000명을 동원하여 지역을 홍보했고, 2016년에는 약 37만 6000명을 동원하여 홍보하기도 하였다. 잔지바르는 아베이드 아마니 카룸 국제공항을 통해 비행기로 이동할 수 있으며, 잔지바르 붉은콜로부스가 잔지바르에서만 서식하고, 잔지바르 표범이 잔지바르에서 서식했었지만 현재 멸종된 상태이다. 또한 잔지바르도 마찬가지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의 피해를 입고 있다.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리시아어인 zangbâr (زنگبار [zæŋbɒːɾ])로부터 유래하였는데, Zang (زنگ [zæŋ], "black") "검은"이라는 단어와 bâr (بار [bɒːɾ], "coast") "해안"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검은 해안"를 뜻하며 의역을 하면 "흑인의 땅"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개요

  • 수도: 잔지바르시티
  • 면적: 137,600km²
  • 인구: 3,508,180명(2017)
  • 공용어: 스와힐리어, 아라비아어, 영어
  • 정치체제: 미승인 국가, 공화제, 대통령제
  • 대통령: 후세인 알리 음위니(Hussein Ali Mwinyi)

역사

잔석기 도구의 발견으로 약 2만년 전부터 잔지바르에 인류가 거주한것으로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그리스-로마 문서인 에리트레아 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에서는 [[웅구자섬] 으로 추정하는 메누티아스 ( 고대 그리스어 : Μενουθιάς ) 섬을 언급했다.

9세기부터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상인들은 내륙과 인도양 양쪽에서 온 장거리 무역상들의 중개업자로 활동하였다. 페르시아, 인도, 아랍 무역상들은 금, 상아, 호박과 같은 동아프리카 상품을 얻기 위해 잔지바르를 자주 방문했고 그 후 아시아로 수출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오대호와 잠베지안 지역에서 온 캐러밴 무역상들이 수입품, 특히 인도 원단을 거래하기 위해 해안으로 왔다.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는 남부 마을인 운구자 우쿠(Unguja Ukuu)와 키짐카지(Kizimkazi)와 북부 마을인 툼바투(Tumbatu)가 무역 중심지였다. 잔지바르는 스와힐리 사람들 무역상들의 중개자, 촉진자 역할을 하면서 부를 증가시켰다. 중앙 아프리카인도양 문화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부분적으로 스와힐리 문화의 진화에 기여하였으며 아랍 문자 문학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반투족 언어이긴 하지만, 오늘날 스와힐리어는 일부 차용된 요소, 특히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아시아의 많은 외국 무역상들은 잔지바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과 결혼했다. 특히 몬순 바람이 만연한 탓에 6개월 동안 해안에서 월동한 아시아 남성들은 동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했다. 동아프리카의 모계 전통이 중요했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무역상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계 민족 정체성을 물려받았다.

포르투갈의 식민지화

1498년 Vasco da Gama가 잔지바르에 도착하였으며 1503년 또는 1504년, 루이 루렌소 라바스코 마르케스 선장이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평화의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요구하였고 잔지바르는 조공을 바침으로 포루트괄의 일부로 넘어 갔다. 잔지바르는 거의 2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일부가 되었고 총독에 의해 관리되었다. 1571년경에 잔지바르는 포르투갈 제국의 서부 분할의 일부가 되었고 모잠비크에서 관리하였다. 1591년 웅구자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선박인 에드워드 보나벤처는 포르투갈의 요새나 수비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635년경에 포르투갈은 몸바사의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펨바 섬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포르투갈인은 1498년에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슬람 아랍어를 사용하는 엘리트가 있는 해안에 여러 독립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포르투갈은 그들을 "흑인"이라고 부르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를 명확히 구분했다. 포르투갈인들과 이들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적대적이었지만 16세기 동안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권력을 확립하고 조공을 바치던 술탄의 도움으로 통치했다. 포르투갈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어서 기존의 지역 지도자와 권력 구조의 손에 행정이 맡겨졌다. 이런 관리 구조는 1631년 몸바사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 포르투갈은 유럽 총독을 임명했다. 무역 억제와 지역 권력의 약화로 인해 몸바사와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엘리트들은 유럽인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줄 오만 귀족들을 초대했다.

잔지바르 술탄국

1698년에 잔지바르는 오만 술탄국 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784년 오만 통치에 대한 짧은 반란이 있었다. 잔지바르 귀족들은 19세기 전반에 오만 상인 왕자들을 포르투갈인보다 선호하여 잔지바르에 정착하도록 초대했다.

1890년경까지 잔지바르의 술탄들은 몸바사다르에스살람을 포함한 잔즈 로 알려진 스와힐리 해안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 1886년부터 영국과 독일은 자신들의 제국을 위해 잔지바르 술탄국의 일부를 획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886년 10월, 영국-독일 국경 위원회는 아프리카 오대호 지역 해안 대부분을 따라 폭 10해리(19km)의 띠로 잔즈를 설립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거의 모든 잔지바르 영토가 유럽 제국에 넘어갔다.

술탄들은 잔지바르 군도의 무역과 현금 작물의 경제를 아랍의 지배 귀족들과 함께 발전시켰다. 상아는 주요 무역 상품이었다. 향신료와 정향나무로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재배 농장이 개발되고 군도의 상업은 점차 인도 아대륙의 무역상들의 손에 넘어갔다.

술탄으로서 14년 동안 통치하는 동안 Majid bin Said는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 19세기 중반, 잔지바르시의 말린디는 매년 50,000명의 노예를 통과시키므로 중동과의 노예 무역을 위한 스와힐리 해안의 주요 항구로 되었다.

영국 보호령

1822년 무스카트의 영국 영사는 술탄 사이드를 압박하여 노예 거래를 중단시켰다. 술탄은 영국과 맺은 일련의 노예제도 반대 조약 중 첫 번째인 모레스비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아프리카의 케이프 델가도에서 인도 해안의 디우 헤드로의 모레스비 선 남쪽과 동쪽의 노예 이동을 금지했다.

1890년에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0년부터 1913년까지 당지 비지어(vizier)들을 통하여 통치했으며 그들은 식민 사무소에서 임명한 고문의 감독을 받았다. 1913년부터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1896년 8월 27일 아침, 영국 해군 의 함선이 베이트 알 후쿰 궁전을 공격했고 38분 후에 휴전이 선언되었고 오늘날까지 포격은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1963년 12월 10일, 영국 잔지바르법에 의해 영국은 보호령을 폐지하고 영연방 내 독립국으로서 잔지바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보호국이 폐지되자 잔지바르는 술탄 치하의 연방 내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1964년 1월 12일 술탄 잠시드 빈 압둘라는 잔지바르 혁명 중 퇴위하고 술탄국은 아프로-시라지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혁명으로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난민들, 특히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섬을 탈출했다.

1964년 4월, 공화국은 탕가니카 본토와 합병했다.탕가니카 연합 공화국과 잔지바르 연합 공화국은 곧 두 개의 이름을 혼합하여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으로 개명되었고, 잔지바르 연방은 그 안에서 자치 지역으로 남았다.

정치

잔지바르는탕가니카와 별개로 자치권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법적으로 탄자니아 부통령을 잔지바르에서 뽑도록 규정되어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인구수에 비해서 큰 편이다.

탄자니아 혁명당이 일당 독재하는 탕가니카 본토와는 다르게 잔지바르에서는 시민연합전선의 힘도 강한편이며, 그래서 선거에서 여러번 접전이 벌어져서 충돌이 벌어진적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잔지바르 내에서도 웅구자 섬펨바 섬이 따로 놀기 때문이며, 잔지바르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아랍인을 축출하자 따로 독립하려고 하기도 했고, 이후로도 잔지바르 정부에서 펨바 섬에 별로 신경을 안써준다는 인식 때문에 불만이 많다. 한때 갈등이 심했을 때는 펨바 섬에서 수백 명의 난민이 발생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부통령 사미아 술루후 하산이 전임 존 마구풀리 대통령이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경제

잔지바르, 주로 펨바섬은 한 때 1970년대 동안 세계 일류의 정향 생산지였지만 연례 정향 판매가 1970년대 이래로 80%가량 폭락한 상태이다. 잔지바르는 현재 세계 정향 공급에서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3위이지만 인도네시아는 세계 정향의 공급의 75%, 잔지바르는 7%를 차지하므로 격차가 크다.

잔지바르는 향신료, 해초, 품질이 좋은 라피아를 수출한다. 또한 큰 어장을 갖고 있으며 환목선 생산을 한다. 관광은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2008년 5월과 6월 동안 잔지바르는 정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섬주민들은 5월 21일에서 6월 19일까지 전력이 없거나 디젤 발전기같은 전기 생산의 대체 방안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거의 한달 동안 지내야만 했다. 이 정전은 주로 국제적인 관광 사업에 기반을 둔 섬의 빈약한 경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지리

잔지바르는 인도양의 섬들 중 하나이며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와 인접한 스와힐리 해안에 위치해 있다.

웅구자섬은 해협에 의해 탄자니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가장 좁은 곳은 36.5km이다.이 섬의 길이는 약 85km, 폭은 39km이며 면적은 1,464km²이다. 웅구자는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120m이다. 웅구자는 산호초가 주렁주렁 달린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특징이다.

펨바 섬은 탄자니아 본토와 56km 너비의 해협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섬의 길이는 약 67km, 폭은 23km이며 면적은 985km²이다. 펨바는 또한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95m이다.

잔지바르는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하며 북반구 겨울에 해당하는 여름의 높은 기온은 북동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카스카지로 알려져 있음)과 관련된 강한 바닷바람에 의해, 특히 북쪽과 동쪽 해안에서 낮아진다.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섬들은 일년 내내 따뜻하다. 강우량은 남서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쿠시라고 함)과 관련된 3월, 4월, 5월의 주요 최대치와 11월과 12월의 두 번째 최대치로 나뉜다.그 사이의 달은 비가 적게 오며, 7월에 가장 적게 비가 내린다.

잔지바르 지도

틀:잔지바르 행정 지도

잔지바르 주변 지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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