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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李純之, 1406년~1465년)는 조선의 문신·천문학자이다.
개요[편집]
- 이순지는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天文學者)이며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움직임을 계산하여 달력을 제작하였다. 1406년(태종 6) 한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 시호 정평(靖平)이다. 부친은 공조참의, 호조참의, 병조판서를 지낸 이맹상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였다.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외교문서를 다루는 일에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부임지는 승문원으로 외교업무를 다루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순지가 천문학 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세종이 한양의 위도를 물었는데 38강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후 간의대에 배치되어 천문관측기기 제작과 관측활동을 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성절사 고득종을 수행하여 중국을 다녀왔으며 왕명으로 산법(算法)을 연구한 후 《대통력법통궤》을 교정하여 《칠정산내외편》을 완성했다. 역대 중국의 역법을 연구하였고 천문학을 이론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간의규표(簡儀圭表)·태평현주(太平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다. 1457년(세조 3) 예조참판에 올랐고, 1459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 등에 밝았다.[1]
-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자(字)는 성보(誠甫)이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산학·천문·음양·풍수 등에 능하였다. 1425년(세종 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년) 동궁행수로 있다가 1427년(세종 9년) 친시문과에 을과 급제하였고, 한양의 북극고도(즉 위도)가 무엇이냐는 세종대왕의 질문에 관료 중에서 유일하게 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종의 신임을 받아 천문역산(天文曆算) 전문가로 활약했다. 1433년부터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이순지를 중심으로 역법(曆法)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1442년에 이르러 조선 독자의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그간 중국의 역법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으로 천체 운행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승지(承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2]
- 이순지는 조선 전기 승정원좌부승지,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천문학자이다.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봉상시판관·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승정원좌부승지 등을 거쳐 1465년(세조 11)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정평(靜平)이다.[3]
- 이순지는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이자 과학자이다.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수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정인지, 이천, 장영실 등과 함께 세종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과학자 중 1명으로 평가된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지만 알고 보면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1406년(태종 6) 경기도 양성현(현 안성시)에서 아버지 이맹상(李孟常)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자(柳滋)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시에 입격하고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2등 1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 문무관의 품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1품)에 이르렀다. 이전까지 조선은 명나라의 역법(曆法)을 받아들여 사용하였으나 오차가 심하고 사용이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1433년 세종의 독자적인 역법을 발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천 등과 함께 제작에 들어가서 1442년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편찬해 냈다. 칠정산내편은 중국 역법, 칠정산외편은 아랍 역법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장영실이 개발한 혼천의, 간의, 자격루의 제작에도 참여하였으며 수학에도 능해 토지 측량 작업에도 참여하였다.[4]
이순지의 업적[편집]
- 이순지는 역법과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세종의 과학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였다. 세종 대 모든 천문기구 제작에 관여하였고, 역법(달력)서인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했다. 출범한 지 몇십 년밖에 안 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법을 빌려다가 쓰고 있었는데, 고려부터는 그것을 수도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순지이다.
- 역법과 천문기구를 만드는 세종의 과학 프로젝트는 이천, 이순지, 장영실의 노력으로 불과 6년 만에 종결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이천은 천문기구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였고, 이순지는 천문기구의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하였고, 장영실은 천문기구를 제작하고 개발하였다. 세종시대에 제작된 천문기구는 『조선왕조실록』에 거명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순지가 모두 관여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순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모든 천문기구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혼천의였음을 봐도 그렇다.
- 이순지는 세종의 과학 프로젝트가 끝나자 서운관에서 근무했고, 여기에서 유명한 『칠정산 내외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란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 세종은 1431년 우선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외편』을 편찬케 했다. 이 두 책은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동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선 중국의 천문학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아랍 천문학은 더욱 퇴조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의상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간의 · 일성정시의 · 혼의 및 혼상이요, 구루(해시계와 물시계)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 · 현주일구 · 정남일구 · 앙부일구 · 대소 규표 및 흠경각루 · 보루각루와 행루들이다. 이 천문기구와 고금의 천문도를 지금까지 나온 각종 역법책을 연구하여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하였다.
이순지 선생 묘[편집]
- 이순지 선생 묘(李純之 先生 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 이순지(1406∼1465)의 묘이다. 1984년 9월 12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양성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묘는 봉분 높이 2.3m, 둘레 15m로 부인 영월신씨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의 묘비와 상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왼쪽이 이순지의 묘비이고 오른쪽이 부인의 것으로 모두 부식이 심하고 단촐한 모습이다. 2개의 비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높이 117㎝, 폭 44㎝, 두께 24㎝이다. 비의 앞면에는 각각 ‘판중추정평이순지지묘’, ‘정부인영월신씨지묘’라고 씌어 있다. 묘비 앞에는 각각의 상석이 있고 그 앞쪽으로 계체석이 있다. 신도비는 큰 길가에 있는데 근래에 새로 세운 것으로 이수, 비신, 귀부를 갖춘 전형적인 형태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320㎝, 폭 76㎝, 두께 45㎝이다.
- 이순지는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역법(歷法)을 연구하여 김담(金淡), 정인지(鄭麟趾) 등과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썼다. 또 장영실, 이천 등과 함께 자격루와 옥루의 의상(儀象)을 교정하였고 간의규표, 앙부일구, 자격루 등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또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450년 검지중추원사, 1451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예조와 공조의 참판을 거쳐 1465년(세조 11) 판중추원사 자리에 올랐다. 치밀한 성품으로 천문, 음양, 산학, 풍수 등에 능통하였으며 《제가역상집(諸家歷象集)》 《천문류초》 《선택요략》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시호는 정평이다.
제가역상집[편집]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은 조선 세종 때의 수학자 이순지의 편저. 활자본. 4권 4책. 세종의 명을 받고 여러 전적(典籍)을 검출하여 천문(天文) 1권, 역법(曆法) 1권, 의상(儀象) 1권, 구루(晷漏) 1권을 모아 1445년(세종 27)에 완성한 것으로 관상감본(觀象監本) ·교서관본(校書館本) 등 여러 관본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이순지〉, 《위키백과》
- 〈이순지〉, 《나무위키》
- 〈이순지(李純之,1406~1465)〉, 《두산백과》
- 〈이순지 (李純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일당,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 《네이버블로그》, 2024-09-2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