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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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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위치
루블린주 위치

루블린주(폴란드어: Województwo lubelskie)는 폴란드 남동부에 위치한 주이다.[1]

개요

루블린주의 면적은 25,155㎢이며 인구는 991,213명(2021년)이다. 포드카르파츠키에주(남쪽),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남서쪽), 마조프셰주(서쪽과 북쪽), 포들라스키에주(북쪽)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다. 주도(州都)는 루블린(Lublin)이다. 1999년 폴란드 지방정부 개혁으로 4개의 도시와 인근 2개의 주 일부를 합쳐 구성되었다.

주요 도시는 인구 34만 명인 루블린이며, 이외에 남동부의 자모시차(Zamość)와 헤움(Chełm) 등이 있는데 루블린을 제외하면 대부분 6만 명 전후의 소도시이다.

루블린에서 서쪽으로 53km 떨어진 작은 마을 푸와비(Puławy)에는 17세기에 지어진 르토리스키 궁전(Czartoryski Palace)이 있다. 이곳은 20세기 초 러시아에 맞서 폴란드 독립을 이끈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가 바르샤바 수복을 위해 마지막 작전회의를 한 역사적 장소이다.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국민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는 루블린주의 작은 마을 볼라 오크르제스카(Wola Okrzejska) 출신으로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서부에 독일과 접하는 작은 도시 코스트진 나트 오드롱(Kostrzyn nad Odrą)은 폴란드의 '우드스탁(wood·stock)'이라고도 불리며, 비상업적 락페스티벌로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매년 약 50여만 명이 찾는 '폴앤록 페스티벌(Pol’and’Rock Festival)'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2]

역사

9세기부터 사람이 거주하였고 14세기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 연합왕국 시절 당시 폴란드 왕국 수도 크라쿠프(Kraków)와 리투아니아 대공국 수도 빌니우스(Vilnius)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교역로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폴란드가 쇠퇴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지배에 놓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14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루블린 시에는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20세기 초까지 약 4만 2천여 명이 거주하여 도시인구의 3분의 1을 점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시 나치스에 의한 체계적인 학살과 기아로 소멸하였다. 1963년 루블린시에 유대인을 기리는 홀로코스트 기념관(Holocaust Memorial in Lublin)이 건립되었다.

1569년 폴란드의 황금기를 가져온 리투아니아와의 연합왕국 설립을 위한 협정이 체결된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폴란드의 최동부에 위치하여 2020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주이다.

자연환경

폴란드에서도 대표적인 미개발 지역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호구역인 폴레시 국립공원(Polesie National Park)을 포함해 2개의 국립공원과 17개의 달하는 자연공원이 있어, 농업과 연계된 생태관광이 활발하다.

산업

루블린주는 전통적인 농업 지역으로 현재도 곡물, 과일과 담배 등의 농작물 재배와 식품이 주산업이다. 목재가공과 풍부한 석탄 매장량으로 광업 그리고 폴란드 최동부에 위치하고 우크라이나와 [철도]]로 연계되어 동유럽과의 무역도 활발하다.

교육

루블린기술대학교

루블린기술대학교는 폴란드 루블린주 루블린시에 있는 공립 공과대학이다. 루블린의 기술학교가 규모가 커지면서 1977년 루블린기술대학교로 재개교했다. 기계공학부와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 토목공학 및 건축학, 환경공학, 기초기술, 경영학 등 6개 학부 22개 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교 명의로 1,000개가 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면적 15만m2의 단일 캠퍼스에 강의동과 도서관 등을 포함해 24개 건물이 들어서 있다. 루블린기술대학교는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001=1200위권, 신흥유럽 ・ 중앙아시아지역(EECA) 대학 중 251-300위권에 포함됐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735위, 유럽 대학 중 584위, 폴란드 대학 가운데 35위를 기록했다.[3]

루블린

루블린은 폴란드 동남부의 도시로 루블린주의 주도다. 중세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나라를 합친 루블린 연합조약이 승인된 곳으로 유명하다. 18세기 폴란드 국토 분할 때 오스트리아에 편입돼 오래 지배받았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총독부령이었으나 전후 폴란드에 다시 귀속되었다.

루블린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서기 6~7세기다. 10~11세기 무렵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12세기에 동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해 요새를 강화했으며, 루블린이라는 도시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세에 몽골군, 동슬라브족, 리투아니아인 등이 번갈아 도시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317년 폴란드 왕으로부터 도시 자격을 획득했다. 1341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지미에시(Kazimierz, 재위 1333~1370년) 3세 대왕이 루블린에 돌로 성을 쌓고 도시 주변에 석벽을 구축했다. 1392년에는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워 왕이 루블린에 교역 특권을 부여하였다.

당시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관계였는데, 루블린은 두 나라의 교역의 거점 역할을 하며 급속히 발전하였다. 16세기부터는 폴란드의 귀족회의(세임)가 자주 루블린에서 개최되었다. 폴란드 야기엘로니안 왕조(1386~1596년)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재위 1548~1572)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1569년 6월 26일 루블린에서 귀족회의를 열고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사실상 합치는 ‘루블린 연합조약’을 통과시켰다. 새로 발족한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은 군주제 연합국가로서 외교정책은 공동으로 펼치되 군대 · 행정조직은 독자적으로 운용했다. 국왕은 양국의 귀족대표가 모여 만장일치제로 선출했다. 루블린은 연합왕국 치하에서 한층 번영하였으며, 1578년에는 왕립 재판소도 설치되었다.

15~16세기에 걸쳐 번창하던 루블린은 17세기 북방전쟁 때 스웨덴군의 공격을 받아 피폐해졌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은 18세기 후반 주변 3개국에게 3차례에 걸쳐 국토를 분할당하다 결국 나라를 잃었다. 1772년 러시아(예카테리나 여제)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 대왕),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 영토의 30%를 나눠 가지는 분할조약에 서명했다. 1793년에는 러시아가 영토의 동쪽을, 프로이센은 서쪽 비엘코폴스카 지역을 빼앗아가는 2차 분할이 이루어졌고, 1795년에는 나머지 영토마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러시아가 빼앗아감으로써 2세기 전만 해도 유럽의 초강대국이었던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루블린은 1795년 이루어진 3차 분할 때 오스트리아 영토에 귀속되었다.

1807년 프로이센 군대를 굴복시킨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프랑스 황제는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옛 폴란드 영토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다. 나폴레옹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루블린은 1809년 바르샤바 대공국 영토가 되었다. 대공국은 겨우 7년간 존속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열린 빈 회의(1814~1815년)의 결과 루블린을 포함한 바르샤바 대공국 영토 대부분은 러시아가 사실상 지배하고 러시아 황제가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 치하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배세력이 바뀌는 와중에도 루블린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1852년 1만 2,900명이던 인구는 1910년에 5만 7,700명으로 증가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루블린은 이듬해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망국 후 123년 만인 1918년 독립을 이루었다. 루블린은 독립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루블린은 다시 전쟁에 휩쓸렸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1941년 루블린 근교에 강제수용소(마이다네크 수용소)를 설치하고 독가스 처형실을 운용했다. 1939년 전쟁 이전 루블린 인구의 40%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은 게토(유대인 집단거주지)를 거쳐 집단수용소에 보내져 대량 학살되었다. 나치 독일은 자국에 가까운 폴란드 땅은 ‘편입된 동부지역’이라는 명칭으로 아예 합병하고, 루블린을 포함한 나머지 점령지역은 총독부령으로 만들어 군정을 시행했다. 총독부령은 처음에는 4개 구역(바르샤바 · 크라쿠프 · 라돔 · 루블린)이었다가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갈리치아를 추가해 총 5개 구역이 되었다.

루블린은 다른 폴란드 도시보다 비교적 빠른 1944년 소련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후반기 들어 런던에서 활동 중이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대표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폴란드 내에 친소파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1944년 루블린에서 전후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염두에 둔 소련이 후원하는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소련은 ‘루블린 위원회’로 불린 이 조직을 1945년 1월 5일 폴란드의 공식 임시정부로 승인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루블린 위원회가 주축이 된 공산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1947년 폴란드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44년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했다.

1980년 7월 루블린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오토바이 제조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에서 시위대는 노동조합의 자유와 당 간부 특권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 파업은 그단스크 등 다른 도시들의 민주화 요구 파업 · 시위에 영향을 끼쳤다.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폴란드의 집권 인민공화국 정부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 간에 원탁회의가 개최됐다. 회의 결과 ‘국민화해 협정’이 맺어졌다.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제 실시, 자유선거제와 정치단체 합법화 등이 이루어졌다. 폴란드는 1989년 9월 7일 법적으로 민주화되어 폴란드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루블린은 1999년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 때 루벨스키에(Lubelskie)주의 주도가 되었다.

비교적 잘 보존된 구시가지 덕분에 루블린은 관광객들로부터 ‘작은 크라쿠프’라고 불린다. 그러나 폴란드의 동쪽에 치우쳐 있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1989년 민주화로 시장경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중서부 도시들에 비해 발전과 변화가 더딘 편이었다. 루블린의 대형 자동차 제조사 파브리카 사모호두프 체자로비흐(FSC)는 1990년대 한국의 대우그룹이 인수하였으나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대우그룹이 무너지면서 파산 위기에 몰렸다가 어렵게 회생하였다.[4]

지도

동영상

각주

  1. 루블린주〉, 《위키백과》
  2. 두산백과: 루블린주 〉, 《네이버 지식백과》
  3. 세계의 대학 : 루블린기술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폴란드 루블린〉,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유럽 같이 보기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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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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