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정중부(鄭仲夫)는 고려 시대의 무신(1106~1179)이다.
개요
- 정중부는 고려시대의 무신이다.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왕의 보현원 거둥 때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고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서북면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을 지냈다.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 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1164년(의종 18)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170년 왕의 보현원(普縣院) 거동 때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뢰(韓賴)에게 구타당하자 격분,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의종을 폐하고 왕제 익양공(翼陽公) 호(晧:明宗)를 즉위시키는 한편, 의종과 태자를 유배시켰다.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와 함께 전왕의 사제(私第)를 분점(分占),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문하평장사·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을 지냈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의 집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 문하시중이 되고 117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뒤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慶大升)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1]
- 정중부는 고려 중기의 무신 겸 정치인으로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이의방을 죽인 장군이자 고려의 권력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고려 명종 임금 때 1170년부터 1179년까지 고려 명종 임금 대신 실권을 잡았다. 본관은 해주. 용모가 우람하고 얼굴빛이 백옥 같았으며, 키가 7척이고 수염이 아름답고 위풍이 늠름했다고 전한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처음 주(州)의 군적(軍籍)에 올랐다가 상경하여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1144년 견룡대정으로 재직 중 어느 날 그가 오병수박희를 하던 중 왕의 측근이자 내시(內侍)인 김돈중(金敦中 : 재상 김부식의 아들)이 촛불로 오병수박희를 하던 정중부의 수염을 불사르니 정중부가 대로하여 김돈중을 묶어 놓고 구타하였다. 김부식이 이를 듣고 정중부를 고문하려 했으나 왕이 모면케 해주었다. 이로부터 정중부는 김돈중을 비롯한 모든 문관에 대한 원한이 싹트기 시작했다. 의종 초에 교위(校尉)가 되고 정3품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문벌 중심의 관료사회에서 문을 무보다 중요시하였고, 이에 따른 차별적인 처우로 인해 무신들의 불만이 고조에 이르러 문·무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극도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의종은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지 못했다. 무신으로 활동하던 중 김돈중의 전횡과 한뢰의 전횡에 분개하여 이의방, 이고 등과 1170년 8월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무신정권의 집권자가 되었다.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 의해 이의방을 제거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1179년 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했다.[2]
- 정중부는 고려의 무신(武臣)이다.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연 인물로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며 그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사람이었다. 비범한 외모를 지닌 거구의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는 용모가 우람했으며, 눈동자는 네모졌고 이마가 넓었다. 또한 얼굴빛은 백옥 같고 수염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키가 7척(약 172cm)가 넘는 거구로서 위풍이 늠름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그의 외모를 기록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중부가 군문에 몸을 담그면서 출세하게 된 계기도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의 덕이 컸다. 처음에 정중부가 살던 고을에서 정중부를 군적에 올려놓고는 그의 팔을 매어 수도인 개경으로 보냈는데 재상인 최홍재가 군사들을 가리다가 그의 풍채를 보고 비범하여 여겨 팔을 맨 것을 풀어주고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시켰다고 전한다. 1178년 정중부는 사직을 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을 이어받은 정균과 송유인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엔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정중부와 문신들과의 중계를 담당하던 송유인이 문신들의 대표격인 문극겸, 한문준과 틈이 벌어지면서 문신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 치명타였다. 1179년 9월에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정균의 행태에 분노한 26세의 청년 장군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기습했고, 아들과 사위와 함께 사이좋게 목숨을 잃으면서 정중부의 가문은 한순간에 몰락하게 된다.[3]
- 정중부는 해주(海州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사람이다. 생긴 모습이 헌걸차고 네모진 눈동자에 이마가 넓었다. 피부가 맑고 수염이 아름다운데다 신장이 7척이 넘어 바라보면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하였다. 처음에 주(州)에서 그를 군적(軍籍)2)에 올려 봉비(封臂)3)해 개경으로 보냈는데, 재상 최홍재(崔弘宰)4)가 군사를 선발하던 중 그를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묶은 것을 풀어주며 위로와 격려를 한 후 공학군(控鶴軍)5)에 충당시켰다. 인종(仁宗)대에는 견룡대정(牽龍隊正)6)자리에 올랐다. 섣달 그믐날 나례(儺禮)7)를 열고 잡기(雜技)를 연회할 때면 왕이 친히 임석해 관람했다. 내시(內侍)와 다방(茶房)8)과 견룡(牽龍) 등이 서로 뛰면서 즐기고 있는데 당시 신진기예였던 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렸다. 1174년에도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거병했다가 실패한다. 정중부는 반란을 잠재우고 그 와중에 이의방도 살해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권력자로서 살아가다가, 1175년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치사를 면하였다. 이후 정권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펴 같은 무신들의 불만을 샀다. 벼슬에 물러나자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효수되어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그가 역적으로 몰려 단죄됨으로써 그의 가계나 족보도 실전되었다.
정중부의 난
- 정중부의 난은 무신정변(武臣政變)이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 의종(毅宗) 24년 경인년(1170년) 10월 11일(음력 8월 30일)에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채원, 이고, 이의민 등의 휘하 장수들이 보현원(普賢院)에서 일으킨 쿠데타이다.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 정변이었기 때문에 무신의 난(武臣의 亂)이라고 부르고 정변이 일어난 해가 경인년이었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의 亂)이라고도 부르며 정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중부의 이름을 따서 정중부의 난(鄭仲夫의 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1170년 이후 계속된 무신정권은 100년 후인 1270년, 마지막 무신집권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하기까지 100년간 지속되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지 8개월 후, 유경 세력이 김준 세력에 밀려났다. 원나라에서 요청하는 개경 환도를 김준이 강력히 반대하자, 원나라는 김준을 원나라로 오게 하려 했다. 그러자 김준은 원종을 폐하려 계획했으나, 원종이 이를 눈치채 그의 휘하 장수였던 임연에게 하여금 김준을 살해하게 했다. 권력을 임연이 물려받자, 임연은 엉뚱하게도 개경 환도를 반대하였고 임연은 그 방도가 통하지 않자, 원종을 끝내 폐위시키고 안경공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원에 가 있던 태자가 이를 알려 원은 임연을 협박했고, 그로 인해 원종이 복위되었다. 원종이 원에 호송되기 전 임연은 미리 말하면 안 된다고 협박을 하였다. 이에 임연의 맏아들 임유간이 감시겸으로 따라 나섰으나, 이장용이 그를 말해 버리는 바람에 임유간이 감옥에 갇힌 후 임연이 급작스럽게 죽고 둘째 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이었다. 원종은 이를 계기로 환도하려 했으나 임유무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송송례와 홍문계는 원종의 지시로 하여금 임유무를 살해했고, 결국 무신정권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정중부의 반란 원인
- 고려 시대 정중부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 '무신의 난'이다. 고려 초기는 외침과 반란이 잦았고 이를 진압하는데 무인이 많은 공을 세운 까닭에 무반이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한동안 나라가 평안해지자 문반이 다시 득세하고 무반이 열등해졌다. 고려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무인이 건국해 정치권력을 누렸으나 세월이 가면서 문인이 과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잡고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문반은 토지개간·토지탈점, 대외무역 등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갔다.
- 양극화 현상에 무반의 불만이 고조되고, 서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하지만 임금(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유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가재정을 낭비하고, 백성 돌보기를 소홀히 했다. 이러할 때 무인인 대장군 정중부를 분노케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종이 보현원이라는 개성 인근 사찰에 가는 도중 시신(侍臣)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무인으로 하여금 오병수박의 놀이를 하게 했는데, 이때 문신 한뢰가 나이 많은 대장군 이소응이 패한 것을 비난하며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저녁때 왕의 가마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이의방과 함께 한뢰를 비롯한 문관 및 대소신료·환관을 몰살했다. 무인들은 다시 개경으로 군졸을 보내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많은 문신이 화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거제도로 내쫓고 대신 왕제를 왕으로 세웠으니 바로 명종이다. 이후 무인정권시대가 100년간 계속되고 내분에 의한 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중부의 세력
- 정중부(鄭仲夫)는 1106년(예종 원년)에 출생하여 1179년(명종 9)에 사망한 고려의 무신이다. 그는 무신으로 출세하여 상장군에 올랐다가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동하여 이후 100년가량 이어지는 무신집권기의 서막을 열었으며, 1174년(명종 4)부터는 정권의 일인자로서 고려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이의방을 제거한 직후인 1174년(명종 4) 12월, 정중부는 재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그와 함께 정변 당시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양숙(梁肅), 경진, 기탁성, 이광정(李光挺) 등이 재상직에 올랐고, 또한 정중부의 사위이자 최측근이었던 송유인(宋有仁)도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다. 1175년(명종 5)에 이르러 정중부는 고려 관료사회에서 정년에 해당하는 70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낭중 장충의(張忠義)의 제안에 따라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아 은퇴하지 않고 그대로 중방(重房)에서 국사를 좌우하였다.
- 정중부 정권은 개경 안팎에서 많은 위기와 도전에 봉착해있었다. 서북면에서 일어났던 조위총의 난은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지다가 1176년(명종 6) 6월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일단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1176년 정월부터 공주(公州)의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개경에서는 2월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등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 진압군은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난이 채 진정되기도 전인 9월에는 예산(禮山) 일대에서 손청(孫淸)이, 그리고 익산(益州)에서는 미륵산적(彌勒山賊)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아울러 남적(南賊)이라 부르며 위기감을 느끼면서 대장군 정세유(鄭世裕)를 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북상을 거듭하며 예산, 직산(稷山)을 거쳐 여주(驪州) 일대까지 진격하는 등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 반란은 1년 반이나 지속되다가 진압되고 말았지만, 중앙의 무신들에게 위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개경에서도 내분과 하극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선 이의방의 잔당들이 그의 원수를 갚겠다며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먼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내외의 위기에 더하여 정중부와 그 일가의 탐욕스러움이 당시 무신과 관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시중의 지위에 오르자 땅을 크게 늘렸으며, 그의 아들 정균은 옛 태후의 별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거처하지 않자 자신의 사저로 삼아 거창하게 집을 짓는 공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송유인은 의종이 건설한 이궁 가운데 하나인 수덕궁(壽德宮)을 달라고 요구해 자신의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않았다고 한다.
- 1178년(명종 8) 11월, 정중부는 시중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의 나이가 정년을 지나 이미 73세였다.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인 송유인이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송유인은 곧이어 문신 가운데 두터운 인망을 얻고 있던 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는 등 정권을 농단하는 처사를 계속하였다. 이는 결국 잃었던 인심을 정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1179년(명종 9) 9월, 정중부 정권이 일거에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균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스스로 공주에게 장가를 들려 하였다. 이 계획은 다른 무신들과 고위관료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대의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은 거사를 일으켜 우선 정균을 처치하고, 정중부의 측근인 이경백(李景伯), 문공려(文公呂) 등을 살해한 뒤 송유인과 그의 아들 송군수(宋群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중부를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이로써 약 5년에 걸친 정중부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정중부〉, 《위키백과》
- 〈정중부〉, 《나무위키》
- 〈정중부(鄭仲夫,1106~1179)〉, 《두산백과》
- 노마듀, 〈정중부의 난| 조선 사회를 뒤흔든 혼란의 시작 | 정중부, 무신정권, 사회적 동요, 조선 초기〉, 《네이버블로그》, 2024-10-17
- 전문교사, 〈무신정권의 개막과 정치적 변혁 고려의 정중부〉, 《네이버블로그》, 2024-09-12
- 자운, 〈김돈중,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다〉, 《네이버블로그》, 2022-09-0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