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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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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허준(許浚)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 의학서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개요

  •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이다.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를 지냈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 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지정유산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1]
  • 허준은 허준(1539년 ~ 1615년 10월 9일)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을 작성하였으며, 동의보감 외에도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종결 후, 각종 중국의서와 기존 의서의 복원, 편찬 및 정리에 힘썼다. 그밖에도 한글로 된 의서인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 산부인과 관련 의서인 《언해태산집요》, 기본 가정의서인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 등도 집필하였다. 한때 1543년생으로 알려졌으나 문장가 최립(崔笠)의 문집 《간이집(簡易集)》에 수록된 증송동경 대의 허양평군 환조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에서 최립이 그가 의주로 귀양가게 되던 1608년경의 일을 기록하면서, 허준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1539년생이라는 것을 언급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허준이 주치의로서 모셨던 선조는 그를 가리켜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은 "허준이 저미고란 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두창을 고쳤으며, 근래에 양예수, 허준, 박제가, 손사명, 안덕수 등이 의원으로 이름이 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2]
  • 허준의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로 적모로 윤씨가 있고 서모로 일직 손씨가 있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는 허준의 어머니로 김욱짐의 딸로 당대에서도 설명되고 있다. 선조 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내의원에 천거되려면 기본적인 의학 수준 이상을 갖추어야 하고 집안의 배경도 추천의 근거가 되므로 본인 실력과 뒷받침해주는 가문의 배경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추천장을 성 대감에게 받고 유의태가 추천장을 불태우는데 실제 허준은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3]
  • 허준은 조선시대 『동의보감』 · 『언해태산집요』 · 『언해구급방』 등을 저술한 의관. 어의 · 의학자.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 · 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 · 역사 · 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4]

허준의 생애

  •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양천 허씨 세보》에는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허준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琨)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許沃)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許澄)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의 사위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 허준은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

  • 동의보감(東醫寶鑑)은 1610년(광해군 2) 허준이 저술한 의학서적으로, 1613년(광해군 5) 내의원(內醫院)에서 허준의 《동의보감》을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로 찍어내었다.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개주갑인자본, 25권 25책이다. 1596년(선조 29) 왕명에 의해 내의원(內醫院)에 편찬국을 두고 허준·양예수(楊禮壽)·이명원(李命源)·정작(鄭碏)·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 등이 한(漢)나라 때에 체계화를 이룬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의학의 총집성과 더불어 민족의학을 정립시키는 대역사(大役事)에 착수하였다. 착수 1년 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일시 중단되는 곡절이 있었지만, 허준은 이를 자신의 일생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집념으로 저술에 임하였다.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증적 학구의 자세와 명민한 관찰력 그리고 고전에 대한 해박한 학식을 토대로 풍부한 임상경험을 살려 기본학리가 임상에 직결되기까지 일관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의술의 구체화를 이룩하였다. 그 결과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 8월 6일 마침내 25권이라는 방대한 의서가 완성되었고, 《동의보감》이라 이름하여 1613년 11월에 개주갑인자로 인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과에 관계되는 내경편(內經篇) 4권, 외과에 관한 외형편(外形篇) 4권, 유행성병·급성병·부인과·소아과 등을 합한 잡병편 11권, 약제학·약물학에 관한 탕액편(湯液篇) 3권, 침구편(鍼灸篇) 1권, 목차편 2권, 계 25권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17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하여 지금까지 의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국내에 남아있는 동의보감 초간본(목활자본)은 전본이 드물어 희소성이 있으며 한국의학사와 임난 이후 도서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에서 《동의보감》이 담은 시대정신과 독창성, 세계사적 중요성 등의 가치를 인정하여 1613년 허준이 간행에 직접 관여한 초판 완질 2본(오대산사고본, 적성산사고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이는 한국의 7번째 세계기록유산이었으며, 의학서적으로는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었다. 2015년 6월 22일 동의보감 세 본은 각각 국보로 승격·지정되었다.

허준에 대한 평가

  • 허준은 한국의 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 『동의보감』은 출간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다.

의성 허준동상

  • 의성 허준동상(醫聖許浚銅像)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에 있는 허준의 동상이다. 조선 시대의 의학자 구암 허준(1539~1615)을 기리기 위해 대한한의사협회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성금으로 조성한 동상이다. 허준이 <동의보감>의 저술을 완성하고 또 최후를 마쳤다는 허가바위(서울시기념물 제11호) 옆의 구암공원 호수 북쪽 언덕에 있다. 동상제막식은 공원이 개원한 1993년 10월 31일에 열렸다. 서울특별시 강서구는 매년 10월 허준축제를 진행하며 동상 앞에서 전통적인 유교제례 절차에 따라 허준추모제례를 진행한다. 구암공원 바로 옆에 허준박물관과 대한한의사협회 건물이 있다.

허준 묘

  • 허준 묘(許浚 墓)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허준 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명의(名醫) 허준의 묘역으로, 임진강 건너 비무장 지대에 있다. 재미(在美)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李亮載) 등이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에 기록된 '하포리 광암동 손좌쌍분(下浦里廣巖洞巽坐雙墳)’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 아래 1991년 9월 30일 발견하였다. 허준은 1610년(광해군 2) 16년 만에 25권의 방대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으며, 1615년에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구암공원

  • 구암공원(龜巖公園)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1471번지에 있는 허준(許浚) 기념공원이다. 허준공원이라고도 한다. 《동의보감》을 지은 구암(龜巖) 허준의 출생지인 가양동에 부지를 마련한 공원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의 허준 동상과 허가바위(서울기념물 11), 광주바위, 호수, 정자, 놀이시설 등이 있다. 허가바위는 어른 남자 2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로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난리 때마다 사람들의 피신처로 쓰였다. 이 일대 최초의 지명인 제차파의(齊次巴衣:구멍바위, 동굴바위라는 뜻)의 유래지이기도 하며,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양천허씨의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허준박물관

  • 허준박물관(許浚博物館)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2동에 있는 한의학 전문박물관이다. 서울특별시 강서구가 한국의 전통의학인 한의학을 체계화한 구암(龜岩) 허준의 숭고한 인간애와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한국 최초의 한의학 전문박물관이다. 1999년 10월 착공해 2004년 11월 완공한 뒤, 2005년 3월 23일 문을 열었다. 대지면적은 1,725평, 건축면적은 543평, 연 면적은 1,190평이다. 사업비는 총 141억 원이 들었다. 시설은 건축물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동영상

각주

  1. 허준(許浚,1539~1615)〉, 《두산백과》
  2. 허준〉, 《위키백과》
  3. 허준〉, 《나무위키》
  4. 허준 (許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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