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비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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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비던스(영어: Providence)는 미국 동북부에 있는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보스턴, 우스터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2000년에는 잡지 '머니'가 선정한 '미국 동북부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친환경 도시들 중 하나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1]
개요[편집]
프로비던스는 대서양 연안, 내러갠섯만의 만두 프로비던스강의 하구 우안에 있어 미국 북동부의 주요한 항구도시이다. 프로비던스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로드아일랜드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프로비던스는 크랜스턴, 포투켓 등과 접하며 프로비던스 대도시권을 이루고 있으며 인구는 약 160만 명이다. 1636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추방된 로저 윌리엄스가 이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신의 자비로운 섭리’(프로비던스)에 감사하여 명명하였다. 미국의 역사는 이곳 프로비던스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됐던 1773년 보스턴 차 사건보다 1년 앞서 항영투쟁이 벌어진 곳이 바로 프로비던스다. 인권보장 때문에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제일 먼저 폐지한 곳도 바로 프로비던스와 로드아일랜드 주이다. 이 덕분에 프로비던스에는 미국의 진보적이고 자유스러운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그러다보니 예술인의 낙원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지금도 예술하는 사람들이 프로비던스에 많이 모여 살고 있다. 18세기에 외국무역이 신장됨에 따라 발전하였으며 독립혁명 이후에는 공업도 급속히 발달하였다. 1832년 시(市)로 승격되고 1900년 주도가 되었다. 밀, 곡물류, 식육, 비료 등을 적출하고 목화, 목재, 석탄, 석유, 염색용재, 화학약품 등을 수입한다. 시내에서는 정유, 석유제품 제조, 보석·은세공, 섬유제품 및 섬유공업용 기계의 제조, 철물·전선·기계·광학기계·고무·화학약품 제조업이 성하다. 미국 최고 미술학교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대학교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프로비던스강 주변 4에이커에 달하는 푸른 녹지대 워터플레이스 공원(Waterplace Park)은 서울의 재개발된 청계천과 비교되기도 한다. 또한 프로비던스 동부, 칼리지 힐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1764년에 창설된 미국 최초의 종합대학의 하나로 1801년 이전의 문헌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브라운대학교, 1877년에 창설된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이 지역문화에 특색을 더하고 있다.[2]
역사[편집]
프로비던스는 1636년 6월 청교도 신학자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에 의해 정착되었고, 최초의 13개 식민지 중 하나로 성장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목사로서 윌리엄스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옹호하고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비난했다. 이러한 의견과 기타 "다양하고 새롭고 위험한 의견"으로 인해 그는 선동과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윌리엄스와 다른 사람들은 로드 아일랜드 럼포드에 정착지를 세웠다. 그들은 나중에 시콩크강을 따라 폭스 포인트 주변으로 이동하여 프로비던스강을 따라 모샤석강과 우나스콰투켓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정착지 이름은 "신의 자비로운 섭리"(프로비던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엇다.
프로비던스는 세일럼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왕실 헌장이 없었다. 정착민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1638년에 프로비던스 강 동쪽에 각각 대략 6에이커의 토지를 할당했다. 이 집터들은 타운 스트리트(Towne Street, 현재의 사우스 메인 스트리트-South Main Street)에서 호프 스트리트(Hope Street)까지 확장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 및 어업 정착지로 성장했지만, 토지는 경작하기 어려웠고 국경은 코네티컷 및 매사추세츠와 분쟁을 벌였다.
1652년, 프로비던스는 10년 이상의 계약 노예제도를 금지했다. 이 법령은 미국 최초의 노예제 반대법을 구성했지만 금지가 시행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로드아일랜드 총회는 1703년 식민지 전역에 아프리카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를 합법화했고, 프로비던스 상인들의 노예무역 참여는 도시를 주요 항구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755년까지 노예는 프로비던스 인구의 8%를 차지했는데, 이는 식민지 로드 아일랜드의 평균 10%보다 낮았지만 북부 식민지의 평균 5%보다 높았다.
1676년 3월,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Providence Plantations)은 필립 왕의 전쟁(King Philip's War) 동안 나라간세트(Narragansetts)에 의해 완전히 불탔다. 로드아일랜드 의회는 전쟁을 유발한 다른 식민지들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1770년 브라운 대학은 인근 워렌에서 프로비던스로 이전했다. 당시 이 대학은 로드아일랜드 대학(Rhode Island College)으로 알려졌으며 칼리지 힐(College Hill)에 있는 단일 건물을 점유하고 있었다. 뉴포트가 아닌 프로비던스로 이전하기로 한 대학의 선택은 식민지에 대한 뉴포트의 상업적, 정치적 지배에서 더 큰 변화를 상징했다.
1772년, 프로비던스의 한 그룹이 개스피 사건(Gaspee Affair)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프로비던스 남쪽의 영국 세관 스쿠너를 불태웠다. 이는 영국의 미국 통치에 대한 최초의 무장 저항 행위로, 더 유명한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보다 1년 이상 앞섰다. 로드아일랜드는 1776년 5월 4일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 13개 식민지 중 처음이었다. 또한 1790년 5월 29일 미국 헌법을 비준한 13개 주 중 마지막이었으며 권리장전이 헌법의 일부가 되도록 만들었다.
전쟁 이후 프로비던스의 인구는 7,614명으로 미국에서 9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경제는 해상 사업에서 제조업, 특히 기계, 도구, 은제품, 보석 및 직물로 전환되었다. 도시의 산업은 아일랜드, 독일,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카보베르데,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끌어모았다. 이러한 경제적, 인구학적 변화는 사회적 갈등을 일으켯다. 하드 스크래블(Hard Scrabble)과 스노우 타운(Snow Town)은 1824년과 1831년에 인종 폭동이 일어난 장소이다.
프로비던스 주민들은 인구가 17,000명을 넘어서자 1831년 도시 헌장을 비준했다. 시 정부의 소재지는 1832년부터 1878년까지 도시의 지리적, 사회적 중심지였던 마켓 하우스(Market House)에 위치해 있었다. 시의 사무실들은 곧 이 건물보다 더 커졌고 시의회는 1845년에 영구적인 시청사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1878년 새로운 프로비던스 시청으로 이전했다.
미국 남북 전쟁 동안 지역 정치는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부 면화 및 노예무역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양가감정에도 불구하고 자원 봉사자의 수는 정기적으로 할당량을 초과했으며 도시의 제조업은 연방에 매우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쟁 후 프로비던스는 번창했고, 이민자들의 물결로 인해 인구는 1865년 54,595명에서 1900년 175,597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대 초반까지 프로비던스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이민 노동자들은 미국에서 가장 큰 산업 제조업 중심지 중 하나에 힘을 실어줬다. 프로비던스는 증기 기관에서 정밀 도구, 은제품, 나사, 직물에 이르기까지 주요 산업 제품 제조업체였다. 주얼리와 코스튬 주얼리의 제조업이 지역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에 보석 무역 잡지들은 프로비던스를 "세계의 보석 수도"라고 불렀다. 1922년 뉴잉글랜드 직물 파업 의 영향을 받아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 증가 시도로 인해 도시의 공장이 폐쇄되었다.
제조업이 폐쇄되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공황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도시 노동력의 3분의 1 이상이 실업 상태에 빠졌다. 1937-1938년의 경기 침체 직후 1938년 뉴잉글랜드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시내를 침수했다. 허리케인은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섬유 산업에 파괴적이었으며, 많은 공장들이 폭풍 이후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프로비던스의 인구는 1940년 253,504명의 최고치에서 1970년 179,213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백인 중산층이 교외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백인 중산층 주민들은 디트로이트를 제외한 다른 어떤 미국 도시보다도 더 빨리 프로비던스를 떠났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프로비던스는 조직범죄의 악명이 높았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6억 6백만 달러의 지역 및 국가 지역사회 개발 기금이 도시 전역에 투자되었다. 1990년대에 도시는 활성화를 추진하여 다수의 주요 개발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이 중에는 철도 선로 정비, 하천 이전, 워터플레이스 파크 조성, 리버워크 개발, 다운타운 아이스링크 건설, 프로비던스 플레이스 몰(Providence Place Mall) 개발 등이 포함됐다. 1980년 이전에 감소하던 프로비던스의 인구가 다시 한번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프로비던스는 지식 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경제 개발 계획을 개발했다. 이러한 노력에는 이전 산업 주얼리 구역을 새로운 "지식 구역"으로 재브랜드화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새로운 투자에도 불구하고 도시 인구의 약 21.5%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 부동산 가치의 상승은 주 전체의 주택 구입 능력 위기를 반영하는 한계 소득 수준의 사람들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프로비던스는 미국 도시 중 주택 중간 가격이 가장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3]
브라운대학교[편집]
브라운대학교(Brown University)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미국 동부 8개 명문 사립대학인 아이비리그에 속한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764년 영국 식민지의회의 인가를 받아 워렌에서 침례교 계통 남자대학인 ‘로드아일랜드대학’으로 개교하였다. 1770년 프로비던스로 이전하고, 1804년 거액을 기증한 니컬러스 브라운(Nicholas Brown)의 이름을 따서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프랜시스 웨일랜드(Francis Wayland)가 학장으로 있던 1825~1855년에 선택제도와 자연과학 과목을 도입하였고, 1891년에는 여자대학(1928년 펨브로크대학으로 개칭)을 개설하였다. 1971년에는 펨브로크대학과 합쳐 남녀공학이 되었다. 학부 중심의 대학이며, 미국 동부 8개 명문 사립대학인 아이비리그에 속한다. 크게 브라운유니버시티 칼리지(The College of Brown University:1764년 설립), 대학원(1887년 설립), 앨버트의과대학으로 구성되며 모두 100여 개의 교육과정을 제공한다. 칼리지에서는 2학년 과정을 끝마칠 즈음 각기 전공분야를 결정하는데, 학제 간 전공이 많고 학사과정과 석사과정을 함께 진행할 수도 있다. 앨버트의과대학은 1811년 의과과정을 시작하였으나 1827년 정식 설립되었다.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72km 떨어진 프로비던스 시가지의 넓은 면적에 자리 잡은 캠퍼스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여러 곳에 위치한 캠퍼스들에도 특별한 명칭이 붙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주 캠퍼스는 본래 브라운대학교가 태동한 프로비던스 시가지의 칼리지힐(College Hill)로 보고 있는데, 본관 건물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치료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부설시설로는 존 D.록펠러도서관, 과학도서관을 비롯한 8개 도서관, 벨미술관, 인류학박물관, 왓슨국제학연구소 등이 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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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프로비던스〉, 《위키백과》
- ↑ 〈프로비던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프로비던스, 로드아일랜드 주〉, 《요다위키》
- ↑ 〈브라운대학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프로비던스〉, 《위키백과》
- 〈프로비던스, 로드아일랜드 주〉, 《요다위키》
- 〈프로비던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브라운대학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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