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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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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2월 16일 (목) 15:43 판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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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獨逸, Deutschland) 위치
베를린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프랑크푸르트
쾰른 대성당

독일(獨逸, Deutschland)은 유럽 중부에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베를린(Berlin)이다. 여러 개의 독립국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거쳐 독일제국으로 성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나뉘었다가 1990년 통일되었다.

개요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약칭 독일(Deutschland)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프랑스와 함께 현 유럽연합 체제를 주도하는 국가이다. 과거 독일과 여러번 경쟁하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도 현재는 독일만큼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다.

1949년 종전과 함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으로 이루어진 전승 4개국의 분할통치를 받다가, 서독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이후 서독은 1950년대부터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냉전이 정점에 이른 1961년에는 동독 측에서 일방적으로 베를린 시를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여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0년 이후 서독의 동방정책으로 대치가 완화되고 경제적 교류가 진행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따른 동독의 공산정권 붕괴로 1990년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통일 후 독일은 유럽연합의 핵심 회원국으로 경제강국에서 정치·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인구 8,200만 명, GDP 4조 달러로 유럽연합 최대 국가가 된다.

독일어가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만큼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아님에도 EU 3대 공용어 중 하나인데, 이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처럼 유럽 내 독일과 인접한 국가들이 독일어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경제적으로는 GDP(명목) 4위, GDP(PPP) 5위, 특별인출권 유로화, 1인당 GDP 18위, 국제통화기금 투표권 4위, 금 보유고 2위, 무역량 총합 3위, AIIB 지분율 4위이다. 국방 분야에서는 국방비 세계 8위, 군사무기 수출은 세계 5위다.

국가 상징

국호

독일의 영어명인 Germany로마의 정치인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라인강 동부의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부른데서 유래한다. 또한 독일어 국명인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사람들의 땅(diutisciu land)'에서 유래한다. 프랑스어로는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Niemcy), 중국어로는 '더궈'(德国)라고 한다.

현재의 독일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여러 게르만계 부족이 거주하였고, 서기 100년경 문헌에 게르마니아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 게르만족은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민족이 되었고, 16세기에 북독일은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여러 제후국과 도시국가로 분열되었다가, 1871년 북부의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독일제국(German Empire)을 형성하여 중부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국기

독일의 국기
연방직무기(Bundesdienstflagge)
동독 국기
독일 국장

독일의 국기는 분데스플라게(Bundesflagge, 연방기)로 검정, 빨강, 금색의 가로선으로 된 삼색기이다.

검정은 억압과 탄압에 대한 분노와 어둠을, 빨강은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을, 금색은 진리와 지혜를 뜻한다. 1813년 해방 전쟁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한 의용군의 군복색에서 이 3색이 왔다고 보기도 한다. 프로이센 왕국의 장군, 루트비히 아돌프 빌헬름 폰뤼초(Ludwig Adolf Wilhelm von Lützow) 육군 소장(Generalmajor) 의 휘하로 모인 독일 전역의 의용병들은 저마다 다른 군복이나 사복을 들고왔기 때문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 옷을 검정으로 물들였고 놋쇠 단추를 금색으로 달았고 소매를 빨강으로 썼다. 당시에 이 3색은 예속의 어둠에서 피의 살육을 지나 자유의 금빛으로 향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 흑적금 국기는 1848년의 3월 혁명으로 인해 탄생한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의해 처음으로 통일된 독일 국기로 지정되었으나 이로 인해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탓에 혁명 실패 이후 폐지되었다. 그리고는 검정, 하양, 빨강으로 구성된 삼색기로 바뀌어서 이것이 북독일 연방을 이어 독일 제국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1918년 제정이 폐지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었을 때도 1919년까지 잠깐 독일 제국의 검정, 하양, 빨강의 삼색기가 사용되었다. 1919년 검정, 빨강, 금색의 국기가 국기로 재지정되었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대독일국 체제가 세워지면서 폐지되고 다시 독일 제국의 국기가 잠시 쓰였다가 1935년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빨간 국기로 바뀌었다. 1945년에 나치 독일이 패전하며 하켄크로이츠는 국기의 지위를 잃었고, 1949년 흑적금 국기가 다시 서독과 동독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현재 하켄크로이츠기는 다른 나치의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달거나 쓰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독일 제국의 흑백적 국기는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독일 제국의 군국주의에 부정적인 독일인들은 독일 제국의 국기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독수리가 붙어 있는 연방국가 직무기(Dienstflagge der Bundesbehörden) 혹은 연방직무기(Bundesdienstflagge)라는 정부기도 있는데, 연방 정부의 부서에서만 사용되고 민간이나 주 정부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이 독수리 문양은 국장과 다르다. 가끔 현재의 독일과 서독을 구분하기 위해 연방직무기를 서독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깃발의 용도는 서독이나 통일독일이나 완전히 같기 때문이다. 또 이 깃발이 서독 국기고 통일되면서 독수리 문양이 빠진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가로로 다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세로로 달기도 한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후 1959년 동독은 이 국기의 중앙에 각각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상징하는 호밀, 망치, 컴퍼스가 그려진 국장을 추가하여 서독과 구분되게 하였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될 당시 이를 환영하던 동독 국민들은 동독 국기에서 국장이 있는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내거나 검은 테이프 등으로 문장에 X자를 쳐서 서독 국기처럼 만들고 서독 국민들과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 냉전이 격화되던 초기에 서독 정부는 하켄크로이츠와 동독 국기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며 동독 국기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1969년 금지에서 해제한 후로 통일 이후에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동독 국기의 사용을 허락하고 있다. 지금도 베를린 등 동부 지역에서는 종종 동독 국기를 볼 수 있다.

독일에서 국기의 금색을 금색(Gold)이 아니라 노랑(Gelb)이라고 하는 건 국기 모독으로 간주한다. 1959년 6월 독일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의 판결에 따르면 독일의 국기를 노랑으로 부르는 것은 나치 시기 민주주의 비방 중 하나며 나치 옹호와 동급으로 여긴다. 과거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검정, 빨강, 금색의 국기의 금색을 노랑, 겨자색, 똥색 등으로 부르며 비하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기 모독으로 인한 금지와는 별개로 '국기 색은 흑, 적, 금이다.'라는 규정 자체는 아예 기본법에 못박아 놨다.

1990년부터는 '금색'을 강조하기 위해 어두운 색상이 사용된 독일 국기도 자주 보였으나 1996년에 연방 표준이 정립된 후에는 쓰이지 않는다.

독일에서도 북유럽처럼 치우친 십자가 국기를 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던 요제프 비르머(Josef Wirmer)가 암살에 성공했을 경우 하켄크로이츠를 없애버리고 대신 쓰려고 만든 것도 있었다.

독일 현지에서는 정부기관 등 공식적인 위치에 걸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야외에서 국기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대신 지역별 주기가 걸려있는 게 많이 보인다. 물론 길거리에서 현 독일 국기를 들고 다녀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연히 하켄크로이츠가 있는 국기는 불법이다.

국가

독일의 국가(國歌) 제목은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이며, 흔히 약칭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라고 부른다.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현악 사중주 황제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곡이다. 이 곡에는 황제를 찬양하는 가사가 붙여져 Gott erhalte, Gott beschütze(하느님 보우하소서, 하느님 보호하소서)라는 제목으로 1797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및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찬가이자 국가로 사용되었다. 이후 1841년에 시인 팔러슬레벤이 같은 곡에 기존 황제를 찬양하는 가사 대신 독일을 찬양하는 애국적인 가사를 붙여서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라 했고, 독일의 애국가요로 널리 애창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자,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정부는 황실을 찬양하는 가사의 이 곡 대신 다른 곡으로 국가를 바꾸었다. 독일 제국에서도 제정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는데,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오스트리아가 기존 국가를 다른 곡으로 바꾸자 오스트리아 정부의 양해를 구하고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를 공식 국가로 채택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는 기존 국가에 대한 향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새 국가가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1929년 기존 하이든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국가로 재지정했다. 그리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곡에 가사만 다른 국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1938년 독일에게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독일의 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독립한 오스트리아는 1946년 새로운 곡으로 국가를 교체하였고, 동독 역시 1949년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였으나, 서독에서는 이 곡을 계속 국가로 사용했고, 1990년 통일 독일의 국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일 국가로서 '독일의 노래(Deutschlandlied)'의 가사는 1841년에 원래 3절로 작사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1952년부터는 원 가사의 3절만 부르고 있다.

독일이 축구강국이라 축빠들은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에서 이 곡을 자주 듣는다. 라 마르세예즈나 God Save the King, 마멜리 찬가처럼 친숙한 곡인 셈. 또한 포뮬러 1 팬들에게도 친숙한 노래인데, 2000년대 초중반엔 미하엘 슈마허가, 2010년대 초중반엔 제바스티안 페텔이 우승하는 경우가 많아 자주 국가가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2014년부터는 강력한 레이스카를 보유한 메르세데스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역시나 독일 국가가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일부 팬들은 반 농담으로 아예 독일 국가를 포뮬러 1 공식 주제가나 공식 엔딩곡이라고 부를 정도.

높지 않은 키(E♭)로 느리게 진행되는 장엄한 곡조 덕에 인기있는 국가 중 하나로도 꼽힌다.

비공식 국가 취급받는 노래로는 스콜피온즈의 Wind of Change가 있다. 독일 재통일을 상징하는 곡이다.

지리

독일의 면적은 35만 7,022㎢로 한반도의 1.6배, 남한의 3.5배이다. 국이 가운데 육지 면적은 349,223㎢, 내수면 면적은 7,798㎢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7번째로, 세계에서는 63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국토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형

독일의 고도 분포
슈바벤알프스산맥

독일의 지형은 4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4개의 지역은 북부의 북독일 평야(North German Plain), 남쪽으로 고도 200~1,000m의 구릉성 산지인 독일 중앙고지, 다시 그 남쪽에 펼쳐지는 구릉·대지 및 평탄지로 구성된 남독일, 그리고 독일의 알프스(German Alps) 산지로 나누어지며, 각 지역은 기후와 강수량뿐 아니라 토양과 식생도 상이하다.

북독일 평야

북독일 평야는 전역이 빙하 퇴적물로 뒤덮인 곳으로, 서부에서는 모래 크기 입자의 퇴적 토양이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저지대에는 소택지와 수생식물이 퇴적하여 형성된 이탄지가 넓게 분포한다. 북독일 평야는 산성토양으로 철분을 함유하여 식물의 생육에 적합지 않아 축산업을 주로 한다. 연안부에는 간척지가 조성되었는데 땅이 비옥하여 목초지로 이용하고, 그 배후에는 메마른 농토와 '하이데(Heide)'로 불리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독일 중앙고지

라인고지(Middle Rhine Highlands)로 불리는 중앙고지는 비옥한 퇴적지형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빙하가 형성한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하천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건설된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중앙고지는 동서로 연속되는 1,500m 이하의 산지지형으로, 라인협곡(Rhine Gorge) 및 베저강·엘베강의 곡지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베저강은 오랫동안 남북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왔다. 이곳에는 라인강과 그 지류 모젤강(Mosel River)이 흐르며 빙엔에서 본에 이르는 구간에 협곡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뢴산맥(Rhön)과 튀링겐주에 있는 튀링거숲(Thüringer Wald) 사이에는 고지대와 저지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남독일

남독일은 서쪽의 보주산맥에서 동쪽의 보헤미안숲(Bohemian Forest)까지 펼쳐진 지역으로 북쪽의 중앙고지, 남쪽의 독일 알프스 사이에 위치한다. 마인강·네카어강 유역은 독일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 중 하나로, 기후가 온난 건조하여 포도와 밀의 산출이 많다.

네카어강 유역에는 슈투트가르트·하이델베르크, 마인강 유역에는 뉘른베르크·밤베르크·뷔르츠부르크·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도시가 발달하였다. 스위스 바젤에서 마인츠에 이르는 단층에 의해 토양이 함몰된 형태인 라인지구대는 오래전부터 교통망으로 이용하였다.

라인강 동쪽으로는 숲이 울창하여 '검은 숲'이라고도 불리는 슈바르츠발트 숲과 산악지형이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보주산맥과 하르트산맥(Harz Mountains)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룬다. 라인지구대에는 단층 운동에서 수반되는 화산활동으로, 화산 산지나 온천이 많이 있다. 보름스에서 마인츠를 거쳐 빙엔에 이르는 구간은 독일에서 가장 비옥한 퇴적지형으로 포도재배 등의 농업이 활발하다.

알프스 산지

남부의 알프스 산지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를 포함하여 슈바벤(Swabian)과 프랑코니아(Franconia) 지역으로 직선으로 곧게 뻗은 언덕과 산맥으로 구성된다. 독일이 점한 알프스 산맥은 국경지역에 위치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 비해 면적이 작지만, 해발 2,962m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추크슈피체산이 있으며 많은 빙하호가 분포하여 경관이 뛰어나다. 또한 남부 산지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도나우강의 발현지로, 바바리안 숲(Bavarian Forest)을 사이에 두고 체코와 국경을 접한다.

기후

독일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남부 지방이 북부 지방보다 겨울이 더 춥다. 그 이유는 북부 독일은 해안가와 인접해 있기에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띠지만 남부 독일은 알프스 산맥과 가까워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위도 상으로는 더 남쪽에 있어서 따뜻할 것 같은 남부 독일 지역이 위도 상 더 북쪽인 북부 독일 지역보다 오히려 겨울이 더 춥고 연교차도 크다.

실제로 북부 독일의 함부르크는 북위 53° 33′ 55″에 위치해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영상 1°C로 위도 상으로 한참 남쪽인 대한민국 대구광역시(북위 35° 52′ 17″)의 1월 평균기온(0.6°C)과 비슷한 수준이다. 수도 베를린 또한 북위 52° 31′ 07″로 상당히 위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베를린의 1월 평균기온은 영상 0.6°C로 역시 위도 상 한참 남쪽인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의 1월 평균기온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남부 독일의 대표 도시인 뮌헨의 경우는 위도 상으로 북위 48° 08′으로 더 남쪽에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2.2°C로 오히려 함부르크나 베를린보다 더 춥다. 뉘른베르크 역시 위도는 북위 49° 27′으로 함부르크나 베를린보다 더 남쪽에 있지만 1월 평균기온은 -0.1°C로 더 춥다.

서안 해양성 기후 치고는 추운 편이며 서유럽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겨울이 혹독한 국가로 알려져있다. 습도도 높고 일조량이 적어 우울한 느낌이 들고 춥게 느껴지는데다, 서울 등에 비해 평균적으로 따뜻하지만 위도가 높아 한번 한파가 몰아닥치면 -15도 아래로도 내려갈 정도다. 2017-2018년에 북극 한파가 닥쳤을 때도 일부 지역은 -30도 아래 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물론 이건 극히 드문 경우지만.

다만 여름은 남부나 북부 모두 서늘한 편이며 연중 강수량이 고르다는 것도 똑같다. 그리고 독일이 암만 춥다고 해도 대한민국이나 북한보다는 겨울이 더 따뜻한 편이다. 열섬현상이 비교적 덜해서 가끔 서울 등 대도시보다 낮은 극값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장 추운 곳 중 하나인 뮌헨 역시 독일에서나 제일 추운 곳이지 한국의 서울특별시 기온과 비슷한 수준이고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로 한국의 중남부 지역 겨울철 기온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습도가 높은 편이기에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뼈가 시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식생

독일은 원래 원시림이 무성한 곳이었으나, 15~16세기부터 농경지 조성을 위해 산림과 습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는 국토의 약 50% 정도가 경작지이며, 30%는 산림 그리고 14%는 거주지와 산업시설이 들어서 있다. 평야와 구릉지의 숲에는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등의 낙엽송이 전체 수목의 약 40% 정도를 차지한다. 고지대와 북부지역을 포함해 전체산림 면적의 60%는 소나무와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다. 침엽수림 면적이 넓은 이유는 계획적인 조림사업에 따른 것이다.

저지대와 습지에는 다양한 종의 양치류와 이끼류가 풍부하고, 청색 수레국화는 독일의 국화(國花)이다. 숲에는 노루, 여우, 오소리, 토끼, 멧돼지, 야생양의 일종인 무플론 등 유럽중부에서 흔히 서식하는 동물이 분포한다. 가파른 산지에는 독수리도 불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는 유라시아 비버도 서식한다. 정부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 전국에 17곳의 생태계 보존구역과 105개의 자연공원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역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베를린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과 한산한 현재의 베르나우어가의 모습이 이채롭다. AP 연합뉴스.

역사적으로 지금의 지역에 독일(獨逸) 또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는 하나의 단일 국가가 등장한 것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지금의 독일 지역과 프로이센, 알자스, 로렌 지역을 합쳐 성립된 때이다. 이전에 지금의 독일 지역은 여러 개의 영방국가로 나뉘어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에, 알자스와 로렌은 프랑스에 넘어갔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독일의 역사의 시작점은 논란의 대상이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세워진 동프랑크 때로 보는 관점, 911년 콘라두스 1세가 독일 왕국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36년 오토 1세가 독일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62년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한 때로 보는 관점 등등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베르됭 조약 이전에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즉위한 시점을 독일의 기점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동프랑크 왕국 이후 "독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춘 나라가 세워진 것은 911년 동프랑크의 네 게르만 부족인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이 모여 독일 왕국을 세웠을 때이다. 925년에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로타링기아 지역이 독일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하인리히 1세가 오토 왕조를 창건한 뒤, 그 아들 오토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독일 왕국 뿐만 아니라 지금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 지방까지를 통치했다. 오토 왕조에 이어 잘리어 왕조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통치 아래서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는 엘베 강 너머로 전파되었으며, 엘베 강 동쪽 지역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곧 벨프 가문과의 대립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성장,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 등을 계기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을 비롯한 2000개에 가까운 영방 국가로 쪼개졌다. 남부의 오스트리아는 명목 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국을 겸하면서 북동부에서 성장하던 프로이센과 대립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의 정책으로 해체되고, 독일 서부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을 받아들인 라인 연방이 세워져 프랑스의 간섭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독일 지역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39개의 국가들이 모인 "독일 연방"이 세워졌다가, 1871년 빌헬름 1세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독일 제국"이 세워졌다.

독일 제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기존의 열강들과 대립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엔촐레른 왕가가 추방당한 뒤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난의 책임을 유대인과 집시에게 전가한 아돌프 히틀러나치는 1933년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했으며,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을 선포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무단으로 점령했으며, 1939년 중앙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 이탈리아 등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며, 수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은 멸망했으며, 독일 지역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비에트 연방이 분할하여 영국·프랑스·미국령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소비에트 연방령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분단된 독일의 두 나라는 나치 독일의 잔재를 청산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갔으나, 동독은 재정 관리에 실패하여 곧 경제가 악화되었다. 결국 동독은 합의를 통해 1990년 10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로 가입하는 형식으로 흡수되었고, 독일은 재통일되었다.

현재 독일은 유엔의 회원국이자 G20의 일원이며, 서독 시대의 체제를 계승하여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 지위를 가지고 있다. 또 1936년과 1972년(서독)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1974년(서독)과 2006년에 FIFA 월드컵을 개최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낙후된 구 동독 지역의 개발, 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 간의 지역 감정 해결, 외국인 노동자 이주 문제가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선사 시대

1907년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독일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Sippe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혁명의 여파는 독일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라이프찌히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 중심의 원시 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 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 사회

게르만족 사회

아르미니우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그린 벽화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다. 게르만족은 처음 부족연맹체로써 등장했다. 바이에른족, 알레마니족, 프랑켄족, 튀링겐족, 프리젠족, 작센족 등 같은 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관습·종교·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게르만 부족은 기원전 500년경 까지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다가 기원전 100년경 현재의 독일지역으로 남하하였다. 당시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부, 독일 동부의 오데르강과 비스와강, 현재의 덴마크 영토인 유틀란트(Jutland) 반도, 엘베강과 라인강 연안에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았다. 라인강은 당시 게르만 부족과 로마제국간 경계선의 역할을 했는데, 기원전 70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의 일부 부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로마제국은 북부로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게르만족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서기 9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시절 로마군은 독일 북서부 지역에 있는 토이토부르크 숲(Teutoburg Forest)에서 게르만의 족장 아르미니우스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빈번하게 침범하자 로마는 라인강을 따라 약 300km에 달하는 방벽을 설치하였다. 375년 훈족의 침입과 로마제국의 쇠퇴를 틈타 게르만족은 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하였다. 게르만계의 앵글로색슨은 영국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도 진출하였으나 곧 현지에 동화되었다.

프랑크 왕국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486년 게르만의 족장 클로비스는 부족을 규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250년간 유지된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최초의 문명화된 왕국으로, 8세기경에는 베네딕토회 선교사 성보니파시오(Saint Boniface)를 통해 기독교가 보급되었다. 768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2대 왕 샤를마뉴가 카롤링거왕조를 세우고, 바바리아(Bavaria), 롬바르디(Lombardy), 삭소니(Saxony) 지역을 복속시켰다. 이어서 샤를마뉴는 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 북부와 이탈리아의 약 절반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대부분 통합하자 800년 로마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제국의 왕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는 엄격한 법률과 체계적인 정치시스템 보다는 황제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840년 샤를마뉴의 아들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778~840.6.20, 재위 813~840)가 사망하자 843년 베르됭조약에 의해 왕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서프랑크왕국은 이후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고, 동프랑크왕국과 문화·언어적으로 다른 국가로 발전하였다.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동프랑크왕국이 들어서 서쪽으로 라인강, 동쪽으로는 엘베강, 남북으로는 알프스에서 북해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당시 동프랑크는 프랑코니아(Franconia), 삭소니(Saxony), 바바리아(Bavaria), 슈바벤(Swabia), 로렌느(Lorraine) 등 여러 공작령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공작령은 중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로 유지되어 동프랑크는 명목상의 왕국에 불과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3등분되었으며, 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지금의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사회

오토 대제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
함부르크와 뤼베크 간의 한자동맹 창설.

신성 로마 제국 시대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는 마자르(헝가리)에 대한 곡물 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다.

936년에 오토1세가 부족의 동의를 얻어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오토1세는 즉위 후 왕권강화를 위해 교회를 왕권의 후견인 혹은 지주로 삼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편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에 따라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주장하였다. 오토1세는 951년과 961년 두 번에 걸쳐 이탈리아왕국을 침공해 병합하여, 962년 교황 요한 12세(Papa Giovanni XII)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되었다. 오토 1세는 955년 레히펠트전투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거주하는 슬라브족도 복속시켰다. 996년에는 그레고리오 5세가 독일인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등극하면서 게르만 민족이 중심이 된 신성로마제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1046년 바이에른공국왕국의 대공이며 슈바벤의 공작인 하인리히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교회세력을 통제하여 4명의 교황을 교체하였고, 성직매매와 수도사의 결혼을 금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하인리히 4세는 개혁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대립하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며 교회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인리히 4세 이후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지속되면서 황제의 권한은 약화되고 제국 전역은 실질적으로 각 지역의 영주들이 지배하였다.

1152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확고히 지배하고, 동방식민운동을 전개하여 엘베강과 잘레강 너머 슬라브족의 본거지를 점령하여 독일민족의 거주지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였다. 당시 십자군전쟁을 치르기 위해 결성된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 등, 여러 독일기사단은 동쪽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 동북부의 실레시아(Silesia) 및 발트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1347~1351년에는 유럽인구의 30~60%가 사망한 페스트가 돌아 신성로마제국은 경제·문화·종교적으로 위축되었고, 혼란을 틈타 반유대인 정서가 널리 퍼져 유대인들이 폴란드와 발트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교황과 교회의 권위도 크게 위축시켰다.

1438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세습하여 1806년까지 제국을 지배하였다.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등 일부 지역의 통치에만 전념해 신성로마제국의 분권화는 더욱 심해졌다. 지방분권화가 심화되면서 상업도시들이 번창하였고 일부는 자유제국도시(Free imperial cities)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누렸다. 북부 독일의 도시에서는 상인조직인 길드가 주축이 되어 북해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망인 한자동맹이 탄생하였다. 상업의 발달로 도시에서는 상공업 계층이 확대되어 점차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발전하였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절대주의 시대

17세기부터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절대 왕정·상비군 제도·관료제·중상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독일의 절대주의는 봉건 국가의 최고이자 최후의 형태로서 발달하였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소규모 상품 생산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제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분산된 제조업이 등장하였다.

18세기초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등 숱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의 결과는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확장이었다. 이때에 오스트리아는 중앙관료체제가 성립되었고,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문화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를 중심으로 호엔졸레른 왕가가 브란덴부르크-마크를 중심으로 서서히 발달한다. 이 나라가 바로 훗날 군국주의의 대명사로 19세기 독일사를 주도해나간 프로이센 왕국이다.

16세기초 독일의 전환기

15·16세기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는 이른바 매뉴팩처(manufacture)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이다. 이때의 주요한 산업형태는 "선대제(putting-out-system;Verlag)" 체제이다. 선대제는 원거리무역으로 갑부가 된 상인이 직접 생산에 관여하는 체제로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제공하며, 생산도구는 노동자가 소유한 채, 노동자가 상인에게 약속한 물품을 넘기는 방식이다. 16세기 초 무렵, 생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주석, 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제련소·제철소·섬유 생산이 늘어났다. 생산수단과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이다.

농업에서도 자연 경제 중심 체제가 뚜렷하게 화폐경제로 이행되기 시작했고(화폐지대의 출현), 부유한 농민층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토지에 목을 매달고 살던 기사와 하급귀족들이 몰락·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사와 하급 귀족 중 일부는 근대적 관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독일에서 성직자 수는 계속 증가했는데, 이는 독일이 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배경을 이루게 된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권력이 확장된 시기였다. 그들의 권력확장은 주로 전쟁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결혼과 외교에 의존한 확장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독일·스페인 등이 합스부르크로 편입되었다.

초기 부르주아 혁명의 단초는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독일을 비롯한 북부유럽은 국민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으로 대표되는 북방 르네상스이다.

정치적 변동1250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종말을 고했고, 룩셈부르크 왕가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제후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와 국내 문제에 매달려 제대로 왕 역할을 하지 못했고, 수 십년동안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가 연출되기도 했다.

황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연방제후들의 준동이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럴수록 황제권은 약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정치생활의 중심이 제후들의 연방국가로 이동한 것이다. 농민 반란 실패 후 융커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 권력은 더욱 약해졌다.

대공위 시대 이래 독일에서는 연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권력이 2원화된 형태로 6세기 가까이 유지되었다. 농민 반란은 부르주아나 농민에게 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일내에서 세력을 잃었다.

종교개혁과 절대왕정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은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 내의 개혁 운동이다. 로마와 아비뇽의 대립은 14세기경부터 교회의 추락을 볼러왔다. 그리하여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公議會)가 열렸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에 불만을 가진 마르틴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이 본격적인 종교 개혁을 주장하였다. 위클리프와 후스의 개혁도 종교 개혁에 포함된다.

르네상스가 예술과 문화 측면에 국한 되었으나, 종교 개혁은 대중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종교 개혁은 근대 시민 국가의 형성 과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인
95개조 반박문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해 푸거가에 엄청난 돈을 빌렸다. 스페인의 카를 5세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입후보를 위해 역시 푸거가로부터 돈을 빌렸으나, 돈은 곧 떨어졌고 모자랐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면벌부 판매였다. 특히 면벌부는 독일에 집중적으로 팔렸는데, 성직자가 많았다는 것 외에도 이를 제어할 중앙권력이 없었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중앙 집권이 확립되어 가던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팔지 못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독일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는 인간은 내면적인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세초기의 순수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1518년에 루터는 소환되었고, 1519년에는 에크라는 신학자와 토론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로마와 결별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순수한 기독교'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로마와 결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레오 10세는 1521년에 루터를 파문하게 된다. 그러나, 작센공 프리드리히가 마틴 루터를 숨겨준다. 루터는 이때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역사상 최초의 모국어성서로서 독일어의 문법 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중이 성서와 문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 형성에 이바지하게 된다. 근대적 자본주의 이행에 나타나는 사상의 단초는 이때부터 형성된다. 루터의 사상은 신앙에 의한 의인화(sola fide),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 집약되며, "성서는 모든 대중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반대중이 성직자라는 중개자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근대적 개인주의 사상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독일에는 3가지 집단이 등장하는데, 크게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가 그것이다. 1522년에는 루터에 자극받은 이들 기사단이 슈말칼덴 동맹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토마스 뮌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혁명적 집단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1524년에 농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결과

루터의 개혁은 북중부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농민 전쟁 발 발시점을 계기로 농민과 루터와의 관계는 벌어졌으며, 루터는 정치화한다. 영방교회제 확립을 위해 루터를 지배층들이 끌어들였고, 루터는 이들 세력과 결합하였다. 1529년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와 결별했던 루터는 츠빙글리파와도 결별한다. 루터는 슈말칼덴 전쟁 직전인 1546년에 죽었다.

그러나 엘베강 동부 지역은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계급 사회가 계속 유지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에도 독일의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반동권력에 의해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후의 유럽 모습. 붉은 라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고, 그 안에 보이는 작은 독일 국가들이 있다.

30년 전쟁은 독일 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 된 것이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스부르크 왕조 및 가톨릭 연합세력, 그리고 초기 부르주아와 다른 귀족들간의 연합세력이 대립을 펼쳤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국에 불과한 처지였고,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의 시작은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은 보헤미아와 Platz간의 대립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개입을 거쳐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으로 프랑스군이 개입이라는 순서로 전개되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전체는 피폐화되었고, 독일 인구의 1/3이 죽었다. 결국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초에 왕국이 될 수 있었다.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 제국 의회에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이 두 강국이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국은 호엔촐레른 왕가가 지배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87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였다.

30년 전쟁이 끝난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중 비교적 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프로이센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때 크게 성장하는데 프리드리히 2세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왕가와의 7년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석탄과 철이 풍부한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굳히게 된다.

또한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펴서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어서 농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문을 폐지하는 등 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농노제는 여전히 프로이센의 사회적 저기반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는 여전히 프로이센의 사회적 지배계층 세력이 '융커'라 불리는 토지 귀족들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 또한 나라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대제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은 암우하였으며, 군대는 나약해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였으며, 예나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 전쟁에서 패한 뒤,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의 반을 잃고, 잃은 영토들은 나폴레옹이 라인연방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만들었으며,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대륙 봉쇄령에 따른 대영제국과의 무역금지와 프랑스군 주둔 등의 경제적 압박을 당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샤른호스트나 클라우제비츠,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에 의한 근대화를 위해 실시한 개혁에 의해 농노 해방과 행정 기구의 쇄신을 실시했다.

프랑스에 의한 지배는 독일인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자각심을 불어넣어,이때부터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프로이센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열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나 민족주의를 고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아직 그러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대 개혁을 단행한 프로이센은 대프동맹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구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영토의 일부를 사실상 러시아에게 양보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베스트팔렌지역을 획득하였고, 동년에는 독일 연방에도 가맹하여 맹주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력을 양등분하였다.

이무렵, 러시아 제국 및 오스트리아와 신성동맹을 체결한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을 억압하면서 개혁은 정체되었고 절대주의가 난입하게 되어, 지주 지배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독일의 경제적 통합

1848년 3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 봉기.

39개의 군소국가로 분리되어있던 상황에 1818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이 결성됨으로써 독일 연방 내의 국가들이 서로 무역할 때 부과되었던 번거로운 관세들이 폐지되었기에 독일경제는 이전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해 관세동맹은 독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 셈이다.

통일의 기운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영향을 받았는데,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 회의가 열리고, 이곳에서 자유주의적 평화통일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실패하였다.

독일 통일 전쟁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제국 선포식.

자유주의적 통일을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실패한 이후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자유주의 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철혈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맞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크게 이겨 북독일 연방을 성립시켰다.

이어서 나아가서는 1871년 7월 14일에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참패해 괴멸되었다.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를 세우고 계속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항복하고 만다. 프로이센군은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알자스지방과 로렌지방을 되찾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 수립을 성립시켰다.

독일제국

독일 제국의 영토.
1905년 당시 빌헬름 2세의 모습
비스마르크
성립과 비스마르크 체제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그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의 복수를 염려하여,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구 열강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 프랑스를 고립화시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이 비스마르크 체제로 프랑스를 견제하는데 있어서 성과가 있었다.

해외 식민지로서는 남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동아프리카(탄자니아·르완다·부룬디), 카메룬, 토고, 남양 군도, 뉴기니 북동부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나사 마크 제도), 사모아, 중국의 산둥 반도 등을 획득했다.

빌헬름 2세의 해외 팽창주의 정책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으나 제위 6개월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한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즉위함으로써, 1888년은 '3황제의 해'라고 불린다. 그해에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 비스마르크는 은퇴한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3B정책(베를린(Berlin)과 비잔티움(Byzantium), 바그다드(Baghdad))을 추진하여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로 인해, 카이로(Cairo)와 케이프타운(Cape Town),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려는 3C정책을 내세웠던 대영제국과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 제국, 그리고 프랑스와의 모로코 사건 등과의 대립으로 무리한 팽창 정책으로써, 결국 비스마르크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고 이러한 여러 가지로 열강세력들과 충돌하게 되어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져 발발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 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자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이었던 독일에 대항해 총동원령을 내렸으며, 독일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시간내에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과 장기전으로 되어갔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주변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참전하였고, 독일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가했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여기서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하자 미국은 1917년에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미국은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어 서부유럽 전선에 참전하게 되며 전쟁양상은 독일제국이 불리하게 되어간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선에 이탈하였으며, 1918년에 같은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탈퇴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통해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반전 운동이 생겼고, 독일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11월 혁명으로 퍼져 나가자,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추방당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독일제국이 가지던 식민지 영구히 상실, 막대한 배상금 지불, 군비축소,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에 반환 등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약으로 인해 뒷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의 씨앗이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1937년 독일의 영토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카톨릭,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나치독일

나치 독일 국기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의 영토
뉘른베르크 재판에 선 나치 전범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 팔츠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에 9월 작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분단과 통일

1945년의 분할 점령된 독일.
1981년 될른제에서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를 만난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데르-나이세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하였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서독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서독은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동독은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동독은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절대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진출한 바도 있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베를린의 수도 인정과 유럽 연합 통합

통일 당시 베를린의 모습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시장경제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독일은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를 역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세개혁을 단행하였다. 연방정부는 2003년부터 <아젠다 2010(Agenda 2010)>으로 이름 붙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사회보건정책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기후변화 정책을 대폭 확대하였다. 1999년 유럽연합 11개 국가에 유로화(Euro)가 공식적으로 도입되면서 독일은 유로존(Eurozone)의 최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1990년대 들어 유럽연합이 안보방위정책을 강화하면서 독일은 자연스럽게 군사적 활동에 대한 제약이 줄어들었다. 1999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자 독일은 이에 호응하여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후로도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으로,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프랑스와 함께 안보와 군사부분을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1998년 독일사회민주당(SPD: Social Democratic Party) 소속으로 총리에 오른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2003년부터 노동시장 유연화를 담은 하르츠 개혁(Hartz reform)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현대화를 담은 <아젠다 2010(Agenda 2010)>을 추진하였다. 2005년 기독민주당(CDU: Christian Democratic Union) 대표로 총리가 된 앙겔라 메르켈도 전임 정부에 이어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진행하였다. 메르켈 총리는 2009년 동독지역 재건비용에 따른 재정지출을 완화하기 위해 재정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내로 규정한 부채제동(Dept Brake)을 결정하였다. 부채제동은 의회의 승인을 얻고, 헌법의 성격을 갖는 기본법(Basic Law)에도 명시되었다. 이외에도 메르켈 정부는 이민정책 개편과 산업 4.0(Industry 4.0)으로 불리는 산업정책을 통해 정보통신과 기후변화대응 등 여러 성장 동력을 마련하였다. 메르켈 총리는 전임 정부에서 계획한 탈원전 정책을 이어받아 점진적으로 원전을 폐기하고, 새로운 에너지원 확보를 이해 2011년부터 러시아~발트해를 잇는 노드스트림(Nord Stream) 파이프라인을 연이어 건설하였다.

2000년대 들어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리더십을 배경으로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유럽연합의 중심 회원국이 되었다. 2007년 주요 8개국 정상회담인 G8을 유치하였고, 같은 해 유럽연합의 정상회담 의장국으로 새로운 조약 수정안을 제안하여 2009년 리스본 조약을 성사시켰다. 2008년 유로존 금융위기시 독일은 경제회복을 위해 약 600억 달러의 재정을 투입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유로존 위기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은 2000년대 들어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외교 등 다방면에서 유럽의 선도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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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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