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건축)
성(城, castle)은 예전에,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담을 말한다.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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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성은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돌 등으로 구축한 방어시설의 총칭을 말한다. 즉, 성(城)은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담을 말한다.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이다. 시대와 지역, 용도에 따라 축성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 성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극히 원시적인 방어시설이 설치된 것은 수만 년 전 인간이 동굴이나 야영하는 간단한 주거(住居)에 돌을 쌓거나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적과 야수의 습격을 방어한 때부터라고 여겨진다. 현재 고고학적 발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성곽도시(城郭都市)는 이스라엘의 예리코로 그 성벽은 BC 80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밖에 지중해의 동해안이나 소(小)아시아에서도 거의 같은 연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어서 BC 4000년경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 일대에 수메르인(人)이나 아카드인의 성곽도시가 번영하여 그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성곽도시는 또한 고대의 이집트·인도·중국에도 출현했다.
이들 고대 문명권에서는 그 후 여러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수많은 왕조가 흥망하였지만 성곽도시나 성새(城塞)의 구상은 계속 전승되어 근세에까지 이르렀다. 성은 원시인이 적이나 야수를 막는 원시적 방어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후 농경·목축 등 경제활동을 하면서 일정한 토지에 정주(定住)하게 되자 주거를 지키는 주거방어의 형태를 낳아 주거의 집합체인 취락(聚落) 방위로 발달하였고, 또 이것은 점차 성곽도시로 확대되어 갔다.
또 경제의 발달과 함께 인간사회의 계급화가 진행되어 권력자가 출현하자 권력자의 주거를 특별히 방어하는 사적(私的)인 주거방비가 거관(居館)·거성(居城)·왕궁(王宮)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편 주거를 위한 방비가 아니고 순전히 전투상의 필요에 의한 방어물도 구축하게 되었으니 이것들은 처음에는 목책(木柵)이나 녹채(鹿寨:가시울타리) 같은 간단한 것이었으나 뒤에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영국에 축조된 하드리아누스의 장성(長城)과 같은 방책(防柵)으로 발달하였다.
성은 원래 인간의 평화에 대한 소망 또는 자기방어 본능 등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는 집단적 싸움인 전쟁에서 방어적 구축물이 되었고, 동시에 도시국가나 왕후·영주 등의 세력신장의 기지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은 전란 속에서 발달한 축성기술에 의하여 유럽에서 중세로부터 근세에 걸쳐 현저한 발달을 이룩하였다. 또한 성은 위력 있는 대포(大砲)의 출현과 정세의 변화 등에 따라 군사적 구축물인 요새(要塞)와 일상생활의 건조물인 성관(城館)·거성 등으로 분리되어 발달·쇠퇴하여 왔다.[1][2]
특징[편집]
성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으로 흙이나 돌 등을 높이 쌓아 만든 군사적 건축물이다. 성은 주로 귀족이나 왕족 및 군사 명령에 의해 중세 시대에 지어진 일종의 요새 구조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성을 영주나 귀족의 개인 요새 거주지로 간주한다. 이는 주된 목적이 단지 즐거움을 위한 것이고 주로 요새는 아니지만 요새화될 수 있는 맨션, 궁전 및 빌라와는 다르다. 이 용어의 사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해졌으며 때로는 언덕 요새와 성처럼 지어진 19세기 및 20세기 주택과 같은 구조물에도 적용되었다. 중세 시대에 진정한 성이 건축되었을 때, 외벽, 화살구멍, 회랑과 같은 일부는 흔했지만, 다양한 특징을 지닌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유럽식 성은 9세기와 10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카롤링거 제국이 몰락한 후 영토가 개별 영주와 왕자에게 나누어졌다. 이 귀족들은 주변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성을 건설했으며 성은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구조였다. 그들은 적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습격을 시작할 수 있는 기지를 제공했다. 성 연구에서는 군사적 기원이 종종 강조되지만, 구조물은 행정 중심지이자 권력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도시 성은 지역 주민과 중요한 여행 경로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시골 성은 종종 공장, 비옥한 토지 또는 수원과 같은 지역 사회 생활에 필수적인 기능 근처에 위치했다.
많은 북유럽 성은 원래 흙과 목재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방어 시설을 돌로 교체했다. 초기 성은 탑이나 화살통 같은 기능이 부족하고 중앙 성채에 의존하는 등 자연 방어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성 방어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측면 사격에 중점을 두고 타워가 확산되었다. 많은 새로운 성은 다각형이거나 동심원 방어에 의존했다. 즉, 성의 화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동시에 기능할 수 있는 여러 방어 단계가 있었다. 이러한 방어의 변화는 동심원 요새화와 같은 십자군의 성 기술과 로마 요새와 같은 초기 방어의 영감이 혼합된 데 기인한다. 성 건축의 모든 요소가 본질적으로 군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해자와 같은 장치는 원래 방어 목적에서 권력의 상징으로 진화했다. 일부 웅장한 성에는 풍경에 인상을 주고 지배하기 위해 길고 구불구불한 접근 방식이 있었다.
화약은 14세기에 유럽에 소개되었지만 포병이 돌담을 뚫을 만큼 강력해진 15세기까지는 성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성은 16세기까지 계속 건설되었지만, 개선된 대포 사격을 처리하는 새로운 기술로 인해 성은 불편하고 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곳이 되었다. 그 결과, 실제 성은 쇠퇴하고 행정 역할을 하지 않는 포병 요새와 방어할 수 없는 시골 저택으로 대체되었다. 18세기부터 고딕 건축의 낭만주의 부흥의 일환으로 모의 성(mock castle) 건설로 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지만 군사적 목적은 없었다.[3]
기능[편집]
성의 역할은 주로 높고 튼튼한 성벽을 통해 적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최소화시킴으로써 적들의 공격 루트를 한정시키는 억제 효과가 있었고, 또 방어하는 측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전투 중 안정적인 엄폐물을 확보하게 해 줄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다. 성 중에서 궁전의 용도를 겸하는 성이 있는데 이를 궁성(宮城)이라 한다. 궁성에는 무장병력과 각종 군사장비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공성전[편집]
공성전은 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는 전술적인 작전으로, 성벽을 넘어오는 공격부대와 성벽을 방어하는 수비부대 간의 전투로 이루진다. 공성전은 성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성전은 공격군의 성벽 침투를 막고 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성, 즉 같은 전장에서 서로 반대되는 전략적 목적을 가진 것이 공성전과 수성전인데, 공격 측 입장에서는 공성전이고 수비 측 입장에서는 수성전인 것이다. 공격군은 수비군의 성벽을 둘러싸고 수비군의 식량과 물품 공급을 차단하여 수비군이 기아와 목마름에 시달리게 만드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성문, 성벽, 요새 등을 파괴하거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공성전은 성을 지키기 위해 수비군들이 사용하는 방어 대책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일반적으로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수가 훨씬 많아야 공성전이 가능하다.
냉병기 시절 성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어서, 제대로 축조한 성에 식량이 충분하다면 성 내부에 전염병이라도 돌거나 공격 측이 정말 압도적인 양과 질의 병력으로 밀어버리지 않는 이상 공격해 온 적군이 먹을 게 없어져서 물러갈 때까지 방어해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을 전투에서 섬멸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격 측과 방어 측의 병력 비율을 3:1이라고 할 때, 성이 있는 경우 이 비율이 5:1에서 10:1까지도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방어 측이 성 내부에 일정 규모의 기동성 좋은 부대를 갖추고 있는 경우, 공격자 측이 공격할 성을 완전히 둘러싸고 포위하지 않으면 난전 중 어느 구석에서 기어 나온 적군에게 뒤통수를 맞기가 십상이고, 포위했던 공격자가 물자가 다 떨어져 물러갈 때 모랄만땅 배만땅 채운 방어 측 기병에게 뒤통수 맞으며 갉아먹히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방어 측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방어 측 입장에서 특히 고난인 것은 식량 + 식수 조달 문제였는데, 아무리 많은 자원을 쟁여놓는다고 해도 일단 공성전이 시작되거든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다 성으로 몰리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해서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속도보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식수의 경우 해자 역할을 하는 강 정도가 없는 한, 해자 주변에 있는 건 오염된 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방어 측의 내분[2] 첩자 문제, 방어 측의 비효율적인 병력 분산 등의 위험이 있었다.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병기를 제작하는 수법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은 병기 제작을 위해 상당한 노력과 자원이 들어가게 되며, 공성 과정에서 병력이 손실되게 마련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이런 식으로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을 가장 하책으로 보았을 정도. [3] 애초에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게 가능했던 건 공략에 만 단위의 보병과 우수한 공병을 투입 가능했던 로마군이나 중동 제국, 중국군 정도였다. 대포가 나온 후에도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우수한 설계로 지어진 초대형 성곽은 한 줌의 병력만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략하는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정도다. 공성전 시 대형 공성포를 운반할 수 있는 참호를 수성 측 사거리 바깥부터 길게 뻗어 들어가며 만들고 거점에 공성포가 설치되는 시점에서 수성 측이 명예로운 항복을 할 수 있었다. 참호 못 파게 하는 유격부대와 이 유격부대를 처리하려는 유격부대 간의 전투가 주요한 공성전이 될 정도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예는 삼총사의 라 로셸 공방전 장면에서 나온다.
우회할 수 없는 이유[편집]
이렇게 보면 공격군이 그냥 성을 지나친 뒤 수도를 공격해 적의 수뇌부를 빨리 사로잡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성을 지나친다는 건 그 성을 지키는 병력들을 후방에 온전히 남겨둔다는 것인데, 이러면 성 안의 적이 빠져나와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이게 작은 성 한 두개면 모를까, 수천 수만 병사가 지키는 성이라면 그냥 지나치기엔 후방에 생길 위협이 너무 컸다. 여기에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도 이 적들 때문에 위태로질 게 뻔했는데, 전쟁에서 보급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더군다나 성들은 대개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건 지형상 불가능하거나, 크나큰 시간과 인명, 보급이 손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후자라 쳐도 통과해봐야 손실이 심하니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성을 점령하는 건 전쟁에서 사실상 필수적이었다. 물론, 삼국시대 당시에 요새를 공략하기보다, 험난한 절벽을 넘어 촉한을 점령한 등애처럼, 반대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국토가 작아 이동 거리가 짧고, 적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면 꼭 모든 성을 점령하지 않기도 했다. 이는 상황에 따라 수 년에서 수십 년간 지리하게 이어지는 전쟁의 완전히 반대인 단기결전 사례이다. 대표적인 예로 청나라가 인조를 순식간에 사로잡아 굴복시킨 병자호란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자칫 적에게 뒤를 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임은 틀림없어서,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에 요나라 황제인 성종은 곽주성 하나만 함락시키고 재빨리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현종이 재빨리 나주로 몽진하는데 성공하면서 허탕만 치다가 양규에게 후방이 개발살이 나면서 패한 바 있다.[2]
역사[편집]
방어 시설[편집]
기원
성이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석기 혁명 이후 가족 단위의 원시 집단이 대형화 되면서 하나의 부락을 이루었을 때, 부락의 외곽에 설치했던 시설이 성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초의 요새는 사람이 넘어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담을 높게 쌓은 형태였겠지만, 넘어오려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도록 담 위에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되어 발굴이 끝나 보고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성곽도시(城郭都市)는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로 BC 80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밖에도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모두 성의 구조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스라엘의 예리코 성이 축조된 시기 이전에 성이라는 방어 시설의 개념이 존재했고,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으로 전파된 것으로 파악된다.
고대
춘추전국시대 및 삼국시대 시기 중국의 경우, 성을 쌓는데 벽돌을 이용하지 않았다. 당대의 성벽을 쌓는 공법은 일단 맨 땅에 흙반죽을 쌓고 그 위에 건초와 흙을 섞은 건초 반죽을 쌓은 뒤 다시 흙반죽을 쌓는 방식을 반복했다. 중간중간에 건초 반죽을 넣는 이유는 건초가 흙을 붙잡아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 번 쌓을 때마다 최대한 다져서(넓은 판자를 이용해 다졌기 때문에 판축공법이라고 한다) 성벽의 내구도를 높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이 시작된 부분의 유적. 전술한 방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만리장성에서 벽돌로 만들어진 부분은 명나라 이후시기에 지은 것이고 삼국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부분은 이 공법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중국 이외의 동북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 등의 한국 왕조들이 이런 식으로 성을 쌓았다.
또한 중국의 토성 벽은 모래와 자갈을 섞어 올린 토벽에 벽돌을 쌓아 포격에 대비하기도 했다. 탄도체가 벽돌을 때려도 충격이 흡수되고 설사 벽돌이 무너져도 토벽이 계속 성벽의 역할을 하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열받는 구조. 거기에 공성시작과 함께 성위의 병력을 보호할 임시 요새가 건설되어버리기도 한다. 백제나 마한 등의 한반도 남부 지역의 왕조의 경우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흙을 높다랗게 쌓아서 언덕을 쌓은 다음에 그 위에 목책을 두르는 방식으로 성벽을 조성했다. 이런 방식은 냉병기를 이용한 전쟁 방식 밖에 없던 고대에는 상당히 유용한 축성기술이었다. 다만 모두가 흙과 목책만 쓴 것은 아니었고, 신라 삼년산성 같은 예외도 있었다.
중세 초기
유럽의 경우 5세기~11세기까지는 야만족의 침입이 일상적이고 인구도 부족하고 중앙에서 갖춘 방비 체제도 빈약해서 각 지역에서 각기 알아서 침략을 막아야 했던 특성 상 상당히 급조된 형태의 성이 발달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기의 성은 성터 주위에 해자를 파고 그 파낸 흙을 쌓아올려 원추형의 언덕을 구축한 후 그 정상에 목조로 탑상의 건물인 킵(아성)을 세우거나 아니면 대지에 접속시켜 목책이나 해자를 둘러치는 식의 간단한 것이었다. 이 형식을 모트 앤드 베일리(Motte and Bailey) 형식이라고 하는데, 모트는 해자와 언덕을 포함한 영역이고 베일리는 위 그림에서 보이는 언덕 아래 방벽 안쪽의 공간이다. 언덕 위의 킵 아래에 대장간이나 기타 부속시설들을 유치함으로써 전투 지속력을 키운 것이다. 노르만족의 축성방식으로 노르망디와 앙주에서부터 시작해서 브리튼 섬과 프랑스 전 지역, 신성로마제국 등지로 퍼져나갔다. 윈저 성도 원래 이 양식의 성이었으며, 성 중앙의 원기둥형 구조물이 이 형식이었던 시절의 잔재다.
이 형식은 11세기 무렵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1세기에는 킵을 석조로 만든 예도 나타났고, 동시에 견고한 성벽을 둘러쌓는 형식도 발달하였다. 서유럽에서 보이는 초기의 킵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며, 거기에는 우물, 그레이트 홀과 영주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거주하는 방, 창고 기타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예배당도 있었다. 벽은 매우 두껍고 모서리에는 커다란 우탑이 붙어, 높이는 2층 내지 4층으로 되어 있다. 입구는 통상 2층에 설치되어 걸쳤다 떼었다 하는 사다리로 출입한다. 이런 사각형 킵은 여러 방을 배치하기에는 편리하나 반면 공성추의 공격에는 약했다. 한쪽 벽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다른 벽에서 측면 반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킵의 평면을 원형이나 다각형으로 하게 된 것은 제3차 십자군 원정 이후의 일이다. 서유럽에 동방이 영향을 준 것들 중 하나이다.
중세 성기 및 후기
수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축성술을 알게 된 서유럽의 기사들의 체험은 12세기 말엽부터 본국의 축성술에 반영되었다. 12세기까지는 기존의 모트 앤 베일리에서 구조적으로 큰 발전은 없었다. 해자(Moat) 바로 안쪽의 장벽(Curtain wall)과 킵이 돌로 축조된 수준. 하지만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들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워지고, 인구가 늘고 법이 발전해 행정 역량이 증대되어 더 크고 정교한 건축이 가능해졌다. 대신 영주들 간의 내전이 상시화되어 공성 위주의 전투가 잦아지자, 단순히 구조물이 아닌 구조면에서도 12~14세기를 걸치며 급격한 발전을 한다. 성벽은 요소요소가 탑으로 강화되고, 그들 정상부에는 오목하면서 불록한 흉벽 또는 성가퀴가 설치되었다.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회랑식 주랑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마시쿨리라고 불리는 투석구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성벽에 싸인 성곽 속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건물은 킵이며 그것은 공방전에서 최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원형과 다각형 킵의 예로는 프랑스의 세자르·에탐프·프로방, 영국의 코니스보로 등이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에는 11∼12세기를 통하여 비잔틴의 전통이 계속되어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는 십자군에 의하여 그러한 동방의 축성술을 살려 안티오키아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견고한 성이 여러 개 구축되었다. 12세기의 사오누, 마르가트, 그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의 성채가 그 예다. 북프랑스의 가야르 성은 장대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이러한 형의 성채건축은 13세기를 통하여 더욱더 개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17년에 파괴된 쿠시성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대지에 세운 걸작이며 그 킵은 지름 31.5 m의 원통형으로 벽의 두께가 기부에서 약 7.5 m나 되었다. 독일에는 바위산 위에 세운 팔켄베르크성이 있으며, 영국의 예로는 런던 탑·윈저성·에든버러성 등을 들 수 있다.
13~14세기를 걸치며 베일리와 킵으로 나눠져 있던 구조가 해체되고, 해자 바로 안쪽에 기존의 킵의 역할을 한 탑들이 세워지고, 베일리는 오히려 그 킵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로 변한다. 베일리에 오두막을 세워 분담했던 주방, 마구간 등의 건물들도 킵 안의 건물로 재구성된다. 이런 13~14세기 축성술의 대표 건물로는 보디암 성 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세성으로 유명한 귀델롱 성도 13세기의 양식을 따른다. 실질적으로 '중세 성' 하면 제일 전형적으로 연상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핵무기의 등장으로 강대국 사이의 전면전이 어려워진 현대에는 전투의 양상이 정치, 외교에 긴밀하게 엮여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 졌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유형의 요새가 등장했다. 우선 더욱 강력해진 공군과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에 견고하게 갱도와 격납고, 지하기지 등이 등장했다. 특히 북한처럼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보유한 상대를 적으로 상정한 경우엔 이와 같은 시설을 무수히 지어 전국토 요새화를 이루어 놓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자 마자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강대국들도 나름대로 전국토의 요새화는 아니더라도 핵전쟁시 군과 관의 수뇌부들을 보호하거나 반격용 핵무기를 숨겨놓는 시설을 준비해 놓는다. 이들의 지하기지는 북한 따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자랑한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건물이 대중화 되면서 시가전의 난이도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했다. 선진국들은 따로 요새를 준비하지 않아도 전국에 막강한 요새가 즐비한 셈이 되었다.
항공, 포병, 생화학, 벙커버스터, 핵무기 등의 파훼법이 많아져서 전통적인 성곽형 요새들의 위상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상 병력의 기동력을 확실하게 차단할 수있는 물리적인 방어, 방해 건축물인 만큼 이전 시대의 성곽형 요새들도 현대전에 맞춰서 변화해가며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군대, 특히 기갑전력의 기동력이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빨라졌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전차방호벽은 분쟁지역에서 요긴하기 쓰인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바레브 라인이며 대한민국 국군도 기계화 전력이 북한보다 열세였던 1970년대말에 서울 북방에 구식 성채처럼 성벽과 성문을 갖춘 '수도권 방벽'이라는 성벽을 쌓기도 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선 현대판 토성이 등장했다. 본래 홍수 대책을 위해 사용하던 거대한 흙주머니를 기지 주위에 둘러쌓은 것인데, 테러리스트의 화기 정도는 충분히 방어하는 데다, 시공도 간단하고 가성비도 뛰어나다.[2]
분류[편집]
성이 지어지는 위치와 형태, 규모, 용도에 따라 크게는 산성, 평지성, 평산성으로 나뉘고,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진성, 장성, 보성, 행성, 폐성, 수영성, 병영성, 관문성, 포성, 고성으로 구분한다.
위치[편집]
산성
산성은 말 그대로 산에 지은 성을 말하며,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 수준에 가까운 작은 산성도 보인다.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감시와 방어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어 복잡한 방호시설을 하지 않아도 엄청난 방어성능을 보였으나, 산이 침공루트 그 자체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지라 시대가 갈수록 이런 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참고로 충청북도에는 여러 유명한 산성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을 《중부내륙 산성군》이란 명칭으로 묶여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 중이다.
평지성
평지성은 평야 지역에 건설되는 성을 말한다. 평야지역의 특성상 지형적으로 방어하기가 산성보다 불리해 높은 성벽과 복잡한 방어시설들을 만들어 성의 방어력을 극대화시키고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산성이나 산성과의 공존이 일반적이었으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건축 기술력의 향상으로 수성기술이 점차 발전하게 되면서 산성보다 일반화된다.
그러나 방어력 증강을 위한 투자에 비해서는 방어력이 크게 늘지 않으며, 적의 대형 공성병기가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이 완전히 평야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평야 중에서도 고지대를 취하거나, 적어도 성벽 내부에 약간이라도 고지대를 포함시켜서 내성을 만들어놓는 일이 흔하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성벽이 뚫리더라도 일부 지역은 살아남아서 농성전을 계속할 수 있다.
한국의 평지성들은 대체로 읍성이며, 방어적인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시에 피란하여 농성할 별도의 산성을 갖춘 경우도 많았다. 한반도의 특성상 어딜 가든지 산은 꼭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사시 피란이 전제된 읍성들은 대체로 성벽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방어에 썩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평산성
평산성은 산지와 평지를 아울러 성벽으로 이어지는 성을 말한다.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과거 고려/조선 시대의 개성/서울의 성곽이나 고구려 평양성, 백제 사비성, 동래읍성, 수원화성이 이런 평산성에 속한다.
다만 이러려면 지형의 조건이 평지 옆에 험준한 산이 붙어있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딱 맞아야 하므로 평산성은 짓고 싶을때 마음대로 지을 수 없어 그 수가 적다. 그리고 제대로 짓지 않으면 평지성도 아니고 산성도 아닌 것이 양자의 약점을 고루 가진 망작이 되기 딱 좋다. 더구나 성 안에 살고 있는 인구수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평산성이었던 읍성들이나 한양과 개성에서 성벽이 있는 송악산, 용수산, 북한산, 남산 등의 산기슭을 본다면 민가가 하나도 없어 성벽 둘레에 비해 사람이 거주할 구역이 평지성보다 제한적이다. 당연히 성벽을 따라 배치해야할 병사들의 수도 외부의 지원군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자체적으로 방어하기 힘든, 불리한 구조다.
지하
마지노선처럼 국경선 전체가 요새화된 방벽+지하 네트워크로 된 물건이나 지면 밖에 나온 시설물은 거의 없는 데 반해 지하에 100km가 넘는 지하통로로 거미줄같이 연결돼 있는 구조인 지하요새도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베트민과 베트콩들이 건설한 구찌 터널이 이런 개념으로 지어졌는데, 비록 사람이 들어가기엔 대단히 비좁긴 하나, 내부에 작전회의실, 식량창고, 병사들용 침실에 사기 진작을 위한 간이 극장도 있는 등, 웬만한 것을 다 갖추고 있다.
현대의 일부 군사기지도 종종 이런 식으로 건설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상기한 마지노 선이나, 스위스의 방공호 등인데, 입구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구찌 터널과는 달리, 못해도 수천 명에서 많게는 천만 명도 넘는 인구를 수용해야하므로 내부가 훨씬 넓고 쾌적하게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방공호를 다른 용도로 많이 써먹는데 주로 서민들의 피서, 피한지로도 애용된다. 이런 요새는 주로 건축공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건설되지만, 데린쿠유같이 고대에 지어진 지하 도시도 좀 있다. 이 경우는 화산암같이 파내기에 용이한 지형에 주로 건설되었으므로 건설 난이도는 다소 낮지만,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당대의 첨단 기술이 대거 동원되었다.
재료[편집]
성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
- 목책성(木柵城) : 목책, 책성, 성책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 형태의 성이다.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쉽고 빠르게 세울 수 있지만 내구성은 낮으며, 특히 재질의 특성상 불에 약하다. 상위호환형으로 목책도니성(木柵途泥城)이 있는데, 이것은 한옥의 벽을 만드는 것처럼 나무로 골조를 만든 뒤, 흙을 덧씌워 토벽을 만드는 것으로 일반 목책보다는 품이 더 들지만 다른 성에 비해 훨씬 싼 값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으면서도 일반 목책보다 튼튼하다. 목책도니성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보루 건설에 많이 사용했으며, 이외에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전라도 해안지대에 많이 건설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역시 많이 사용했고, 이에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여말선초기의 목책도니성과 왜군의 임시진지를 기초로 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목책도니성을 제시한 바 있다. 전축성, 석성이 일반화된 뒤에도 싸고 빠르게 짓는 게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많이 사용되었다.
- 목성(木城) :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등 빨리 자라거나 가시가 있는 나무들을 최대한 일렬로 빽빽하게 심어 서로 엉켜 자라게 해 천연 방어벽으로 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북방의 요, 금의 압력 때문에 자유로운 성곽 건설이 힘들었던 남송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 토성(土城) : 흙을 쌓아 만든 성. 토루(土壘)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 황하 유역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지형 자체가 널리고 널린 게 고운 진흙인 데다 흙에 칼슘성분이 풍부해 토성임에도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목책과 같이 설치하여 방어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대에는 흙을 정교하고 일정한 두께로 깐 뒤 다지기를 반복해 만드는 판축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이 방법은 튼튼하지만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 적당히 쌓아올려 만드는 성토법, 완만한 형태의 지형을 급경사로 깎아서 토성의 효과를 내는 삭토법, 돌로 일부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토성을 쌓거나 아예 처음부터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 석성(石城) : 석축성(石築城)이라고도 한다. 이름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성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한 한국에서 특히 발달한 성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쌓은 편축성(片築城)과 성의 내외벽면만 돌로 쌓고 사이에 흙을 채워넣은 협축성도 석성에 들어간다.
- 전축성(塼築城) : 전돌(벽돌)을 사용해 쌓은 성. 벽돌을 만들기 좋은 고운 흙이 풍부한 중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 벽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엄밀히 말해 순수한 전축성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돌과 흙을 벽돌과 같이 사용한 혼축성(混築城)이 대부분이다. 물론 벽돌성은 규격이 일정하여 보기도 좋고 섬세한 구조물의 건설이 가능하며, 접착력이 강해 포를 맞아도 피탄된 부분만 부서지는 장점이 있어 여러 차례 도입이 시도되었다. 국내에서도 드물지만 순수한 전축성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토질적인 이유로 좋은 벽돌 만들기가 어려웠으며 기후적으로도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과 잘 붙지 못해 내구성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좋은 석재가 풍부하고 가공기술이 잘 발달해 있어 한국에서는 전축성이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2]
사회적 중심[편집]
성에는 영주가 있었기 때문에 성은 영지를 다스리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는 더 강력한 세입자의 지원이 없으면 영주가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성공적인 영주들은 사회적 규모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법정을 열었지만, 부재한 영주들은 그들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더 큰 영주권은 규모가 클 수 있으며 영주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므로 대리인이 임명되었다. 이것은 특히 때때로 다른 나라에 토지를 소유한 왕족에게 적용되었다.
영주가 행정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인들을 두어 음식을 제공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게 했다. 집안은 시종에 의해 운영되었고 재무는 재산의 서면 기록을 관리했다. 왕실은 본질적으로 남작 가문과 동일한 형태를 취했지만 규모가 훨씬 크고 직위가 더 유명했다. 가정 하인의 중요한 역할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성 주방은 성이 점령되었을 때 바쁜 장소였을 것이며 많은 식사를 제공해야 했다. 성주가 없는 곳은 주로 성주가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성은 주민이 거의 없고 성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는 조용한 곳이었을 것이다.
사회 중심지로서 성은 전시를 위한 중요한 장소였다. 건축업자들은 모티프를 사용하여 상징주의를 활용하여 중세 엘리트들 사이에서 열망했던 기사도 정신을 불러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낭만주의 부흥의 후기 구조는 같은 목적으로 흉벽과 같은 성 건축 요소를 활용했다. 성은 건축적 자부심의 대상으로 대성당과 비교되었으며 일부 성은 정원을 장식적인 특징으로 통합했다. 군주가 부여한 총안 장식의 권리는(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주가 자신의 재산을 방어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성과 관련된 총안 및 기타 장신구가 엘리트의 사용을 통해 권위를 얻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총안을 만들 수 있는 허가증은 허가를 부여할 책임이 있는 군주와의 관계나 호의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궁중 사랑은 귀족들 사이의 사랑을 에로틱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연인 사이의 절제가 강조됐다. 때로는 기사들이 부인의 증표를 착용하고 싸우는 토너먼트와 같은 기사도 행사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지만, 비공개적이고 비밀리에 진행될 수도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은 중세 시대에 전해지는 궁중 사랑 이야기의 한 예이다. 비록 남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지만, 서로 결혼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이상이었다. 영주가 간음하는 것은 드문 일이거나 비천한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헨리 1세는 20명이 넘는 사생아를 두었다. 그러나 여성이 난잡한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 엘리트들 사이의 결혼의 목적은 토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소녀들은 10대에 결혼했지만, 소년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중세 성의 집안에서는 여성이 주변적인 역할을 했으며 성주가 직접 지배했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다. 이는 성이 군사 기관이라는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성들은 대부분 분쟁이나 포위 공격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정 생활은 소홀히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그 부인은 남편의 재산 중 약 3분의 1 정도를 평생 아내의 소유로 받았고, 남편은 아내가 죽으면 상속받게 되었다. 영주가 자신의 땅을 관리하는 것처럼 그들을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내의 의무였다. 일반적으로 병역에서 제외됨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편을 대신하거나 미망인인 경우 성을 관리할 수 있다. 중세 가정에서의 영향력으로 인해 여성은 때로는 직접적인 후원을 통해 건축과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찰스 콜슨(Charles Coulson)은 장기 거주로 인해 성에 "세련된 귀족적 취향"을 적용하는 데 있어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