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그리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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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그리스주(그리스어: Κεντρική Ελλάδα)는 그리스 중앙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
중앙그리스주의 면적은 15,549.31㎢이며 인구는 547,390명(2011년)이다. 주도는 라미아이다. 최대 도시는 주도인 라미아가 아닌 에비아 섬에 위치한 할키스다. 이 지역은 주로 그리스 중부 지역을 아우르는데 아티키주와 펠로폰네소스주 북쪽과 서그리스주 동쪽, 테살리아주와 이피로스주 남부에 이른다.
중앙그리스주에 속해있는 에비아 섬은 그리스에서 크레타 다음으로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섬은 180km가량 뻗어있는 길이를 자랑하는데, 그리스 본토와는 에우리푸스 해협으로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다.
중앙그리스주는 그리스에서 가장 산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기후는 해안지역은 온화하나 내륙은 건조하다.
주요도시
라미아
라미아는 그리스의 중부그리스주 프티오티다현에 속한 도시이다. 라미아에서 아테네 방향으로 가는 길목인 테르모필레에서 치러진 그리스-페르시아 전투가 유명하다. 이곳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서 싸웠다. 언덕에 축조된 라미아성이 관광명소다. 이 성의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최고 13m에 이른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이곳에는 BC 2000년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도시명 라미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 라미아의 이름을 따왔다는 전설이 있고,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말라이안 부족에서 지명이 왔다는 설명도 있다. 신화 속 여인 라미아는 제우스와의 사이에 자식을 여럿 낳았다가 헤라의 분노를 샀고, 헤라는 라미아의 자녀를 살해했다. 라미아는 동굴로 숨어들어간 뒤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게 되었다. 라미아는 포세이돈의 딸이라는 신화도 있다.
이곳은 남쪽의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지역과 북쪽의 테살리아 지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라미아에서 아테네 방향으로 가는 길목은 테르모필레라고 불렸다. 테르모필레는 산의 경사지가 바다와 만나는 경계에 좁고 길게 형성된 지역이다. 당시 폭이 좁은 곳은 100미터가 안 된 것으로 추정된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가 침략군을 저지하고 격퇴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때 아테네의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지상부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물리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에 따라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BC 480년 그리스 연합군 7000명을 이끌고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지상부대와 맞서 싸웠다.
그리스 연합군에게 며칠에 걸쳐 번번이 저지되던 페르시아군은 우회로를 통해 그리스 연합군을 기습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인원은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을 포함해 1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레오니다스와 부하들은 전원 전사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정신은 묘비명 "지나는 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조국의 명을 지킨 우리가 여기 잠들었노라"로 전해졌다. 페르시아 지상부대는 그리스 방어선을 뚫었고, 페르시아 함대도 아르테미시온에서 그리스 함대를 격파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티카를 점령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폭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다. 살라미스 해전을 마지막으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하지 않았다.
라미아는 스페르케이오스강이 말라이안만과 만나는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퇴적 작용으로 삼각주가 넓어지고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밀려났고, 이에 따라 과거 그리스-페르시아 격전지도 점차 퇴적되어 현재의 테르모필레보다 20미터 아래에 묻혔다. 해안선은 테르모필레 전투가 치러진 이후 약 9km 확장되었다.
라미아는 BC 5세기에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아테네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이 조직한 그리스 연합군은 BC 338년 마케도니아에 패배했다.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스의 맹주로 올라섰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23년 사망한 후 아테네와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아테네의 레오스테네스 장군이 사망하면서 끝났고, 마케도니아군 약 2만 명이 라미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라미아는 이후 BC 3세기에 번창했다.
라미아는 BC 190년에 로마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후 제4차 십자군 원정(1204) 때까지 이 지역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7세기에 슬라브족이 이곳을 점령했고, 10세기 말에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가 테르모필레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등의 기록만 전해졌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15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넘어갈 때까지 이 지역은 템플 기사단, 라틴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카탈루냐 동지회 등이 지배했다. 카탈루냐 동지회는 용병부대로, 재건된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고용했다. 이 용병부대는 동로마의 명령을 거부했고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라미아는 독립된 그리스 왕국에 1832년 편입되었다. 테살리아가 1881년에 그리스의 영토가 되기까지 라미아는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에 가까운 도시였다.
스페르키오스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라미아성이 있다. 라미아성은 BC 5세기부터 축조되었고 계속해서 활용-보수되어 현재 보존 상태가 좋다. 성의 둘레는 약 600미터이고, 높이는 최고 13미터에 이른다. 성벽의 두께는 평균 1.4미터다. 성문은 둘인데, 남동쪽의 철문을 통해 라미아 거주구역으로 연결된다. 언덕의 평원에는 라미아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라미아성 바로 아래 1760~1762년에 지어진 파나기아 아르코디키 교회가 있다.[3]
칼키스
칼키스는 그리스 중부그리스주의 에비아현에 속한다. 에비아는 그리스에서 크리티 다음으로 넓은 섬이다. 칼키스는 에비아섬에서 그리스 본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테네를 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에비아섬은 면적이 크리티섬에 이어 그리스에서 둘째로 넓다. 에비아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은 에우리포스(euripus)이다. 에우리포스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폭이 40미터에 불과하다. 이 해협은 조류가 거세고 여섯 시간마다 반대 방향으로 바뀐다. 영어 일반명사 '유라이퍼스(euripus)'는 물살이 거센 해협을 가리킨다.
칼키스와 관련해 전해진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데, 경쟁 도시인 에레트리아와 함께 언급되었다. 일리아드에 따르면 트로이와의 전쟁에 나서는 함대가 이 도시 인근 해협의 남쪽 해안에서 출범했다. BC 8~7세기에 칼키스의 식민주의자들은 테살로니키의 남쪽 칼키디키(할키디키)반도와 마그나 그레시아 등에 낙소스, 레기온, 구마에 등 중요한 도시 약 30곳을 개척했다. 마그나 그레시아는 '대(大) 그리스'를 뜻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칼키스는 광물과 도기를 이들 지역을 포함한 지중해 일대에 수출했다. 교역 물품을 해상 운송할 때 코린토스와 사모스의 선박이 활용되었다.
칼키스는 이들 지역과 동맹을 맺고 에레트리아 동맹과 렐란티네 전쟁(BC 710~650)을 벌여 승리한다. 이는 기록된 고대 그리스 시대 전쟁 중 가장 오래 전에 치러진 것이다. 칼키스는 전리품으로 에비아섬의 가장 비옥한 농지를 획득하고 이 섬의 맹주가 되었다. 칼키스는 BC 6세기 말에 아테네와 전쟁에서 패배했고, 아테네는 칼키스의 지배층을 추방한 뒤 클레르키아 제도를 통해 이곳을 지배했다. 클레르키아는 정복한 식민지의 토지를 시민에게 분배하고 시민에게 둔전병의 역할을 맡기는 제도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칼키스를 중부 그리스 지역을 지배하는데 필요한 성채 도시 중의 하나로 활용했다. 헬레니즘 시대는 고전기 그리스 이후 로마 제국이 등장하기까지의 기간으로,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력이 이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BC 323년부터 로마 제국이 등장한 BC 31년까지로 구분된다. BC 31년은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장악한 해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듬해 이집트 프톨레미 왕국을 정복했고, 원로원으로부터 '존엄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할 때까지 41년간 사실상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했다.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 칼키스는 상업적인 번영을 유지했다.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시대를 거쳐 칼키스는 12세기에 베네치아의 공격을 받은 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1209년에 베네치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칼키스는 이탈리아 지명인 네그로폰테로 불렸고 유럽에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 네그로폰테는 에비아섬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칼키스를 여러 차례 공략한 끝에 1470년에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칼키스는 1904년에 아테네 및 피레아스 항구와 철도로 연결되면서 수출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칼키스에 있는 성녀파라스케비 교회는 13세기에 지어졌다. 성녀 파라스케비는 에비아섬의 수호성인이자 시력의 수호성인이다. 이 교회의 천장과 남쪽 분회당에 있는 석재 조각은 이탈리안 고딕 양식을 대표한다. 남쪽 분회당에는 베네치아의 리파나모 가문의 무덤이 있다. 칼키스는 그리스 본토와 두 개의 교량으로 연결되었다. 하나는 1993년에 개통된 현수교 에우리포스교(칼키스교)이고 다른 하나는 미닫이 문처럼 열리는 슬라이딩교이다. 이 슬라이딩교는 에우리포스 해협의 가장 좁은 곳에 건설되었다. 에비아섬의 이 지점은 고대 이래 교량으로 본토와 연결되었다.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다리는 BC 411년에 지어졌다.[4]
에비아 섬
에게해에 있는 그리스령 섬으로 에보이아해(Euboic Sea)를 사이에 두고 그리스 본토와 구분되는 섬은 길이 150km, 넓이 6~40km의 좁고 긴 모양으로 에게해에 있는 섬들 중에서 두 번째로 크며 동쪽으로는 테살리(Thessaly) 지방과 경계를 이룬다.
섬의 북쪽에는 파가세틱만(Pagasetic Gulf)이 있고 서쪽에는 말리아코스만(Maliakos Gulf)과 노던에보이안만(Northern Euboean Gulf)이 있으며 에보이아해와 페탈리온만(Petalion Gulf)등이 섬을 둘러싸고 있다. 대부분이 산지 지형으로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1,745m의 디르피스(Dirphys)산이고 그외에 해발 1,341m의 피사리아(Pyxaria)산과 해발 1,394m의 오키(Ochi)산 등이 있다. 또한 해안을 따라 아름다운 해변이 있으며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중심 도시는 섬의 서쪽 에우리푸스(Euripus) 해협 끝에 위치하는 약 5만의 도시 칼키스(Chalcis)다. 호머의 기록에 의하면 트로이 전쟁 당시에 고대 그리스연합군으로 배를 보낸 도시국가 중의 하나였던 고대도시 에레트리아(Eretria)가 있으며 에레트리아에서 중요한 관광 명소는 고대 아폴로신을 기리는 축제 다프네포리아(Daphnephoria)가 열렸던 신전의 발굴 장소다. 그 외에 15세기에 건축된 요새와 고대 사원, 극장, 주택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리스 본토와 연결되는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하나는 칼키스와 테베(Thebes)를 연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칼키스와 아테네를 연결하는 것이다. 마그네사이트와 갈탄 , 철, 니켈, 석면 등의 광물과 대리석이 생산된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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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중앙그리스주〉, 《위키백과》
- ↑ 〈중앙그리스〉, 《나무위키》
- ↑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라미아〉,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칼키스〉, 《네이버 지식백과》
- ↑ 〈두산백과 : 에비아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중앙그리스주〉, 《위키백과》
- 〈중앙그리스〉,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라미아〉,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칼키스〉,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에비아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남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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