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스코샤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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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스코샤반도(영어: Nova Scotia peninsula)는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반도이다. 노바스코샤반도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에 속하며 북서쪽으로 본토와 유일하게 육지로 연결되는 뉴브런즈윅주와 경계를 접한다.[1]
개요
노바스코샤반도는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메인만, 북서쪽으로는 펀디만과 그 하부 유역, 북쪽으로는 노섬벌랜드해협과 접하고 있다. 1713년 이전에 반도는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Acadia)의 중심지였는데, 이 지역은 펀디만의 남부와 북동쪽 해안을 따라 정착 노력을 집중하였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이 통제하게 되었으나, 경계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오늘날 노바스코샤 지방의 본토 부분인 반도는 영국이 통치할 당시 아카디아 반도라고 일컬어졌는데, 이 영토는 노바스코샤 식민지 밑에 속했다. 반도는 코베퀴드 단층과 체다부크토 단층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뚜렷한 지질 지역(코바키드와 체다비토 단층)으로 나눌 수 있다. 반도 북부의 코베키드산맥은 반도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고원으로 구성되며 평균 고도는 250~300m이다. 빙하기 동안 두껍게 퇴적물이 덮였기 때문에, 풍부한 산림과 농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반도 북부 전역에 저지 평야, 구릉지 고지대, 해안 가장자리 지역은 수많은 정착지를 지원하며, 이들 중 많은 곳이 광물 채굴, 특히 석탄 채굴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케이프브레튼섬의 시드니와 인버네스 탄광 지역을 포함하면, 이 지역은 노바 스코샤의 산업 및 사회적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도 남부는 화강암 암석, 울창한 숲, 수많은 호수로 이루어진 빙하 지형이 지배적이다. 반도의 남서부와 중심부에 있는 많은 강 계곡과 저지대 내륙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부는 대서양의 독특한 미기후를 제공하여 과일과 채소 재배에 적합하다.[2]
노바스코샤주
노바스코샤주(영어: Nova Scotia, 라틴어: Nova Scotia, 프랑스어: Nouvelle-Écosse)는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주(州)이며, 주도(州都)는 핼리팩스이다. 대서양에 접한 반도이며 북서쪽으로 본토와 유일하게 육지로 연결되는 뉴브런즈윅주와 경계를 접한다. 주 이름의 의미처럼, 스코틀랜드 문화가 강한 주이며, 스코틀랜드계 주민이 29.3%를 차지한다. 섬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를 제외하면 캐나다 본토 내에서 가장 작은 주이다. 노바스코샤 주정부는 1848년에 설립되었고, 1867년에 캐나다에 편입되었다. 노바스코샤주의 과거와 현재는 어업, 조선, 대서양횡단 해운업과 같은 해양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무와 바람과 물'의 시대에는 조선업으로 유명했었다. 현대에는 수출무역, 특히 새로운 컨테이너 부두를 갖춘 핼리팩스항에서의 수출무역이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 핼리팩스-다트머스 지역 내의 조선소, 해군공작창(工作廠), 건설업체, 조립공장 또한 주요고용원이 되고 있다. 미국 항구들과의 경쟁으로 인한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핼리팩스는 세계 경제에서 서인도 제도가 우위에 있던 '돛배 시절'에 누리던 중요성을 되찾고 있는 것 같다. 어업은 계속 주요한 산업 활동이다. 북아메리카 최대의 생선가공 공장 가운데 하나가 루넨버그에 있다. 공장 가동에 의한 하천오염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고 있으나 펄프 산업은 여전히 지역 경제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노바스코샤 주의 가장 중요한 광물인 석탄은 케이프브레턴 섬의 석탄광맥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어 연방정부의 상당한 고민거리였고 이제 노바스코샤 주 GDP 중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0.8%에 불과하다. 쇠퇴해가는 석탄 산업을 대신할 대체 산업을 찾아내야 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국영기업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비금속광으로는 소금,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중정석(重晶石), 석고 등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
최소한 10,000년 전 노바스코샤에 인류가 살았다. 고고학자들이 구석기 시대 인디언으로 부르는 가장 초기 주민들은 주로 순록의 떼 옆에 살던 사냥꾼들이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노바스코샤에 도달하였을 때 미크마크족이 그 지역에 살았다. 오늘날 미크마크족은 자신들이 노바스코샤 주에서 가장 초기의 주민들의 자손이라고 여긴다. 초기 거주민들은 여름에 해안을 따라 낚시를 하였으며, 겨울에는 산림의 내륙 지방에서 사냥을 하였다.
1497년 잉글랜드에서 복무하던 이탈리아의 항해자 존 캐벗이 케이프브레튼섬 혹은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였다. 캐벗은 자신이 아시아에 상륙한 것으로 믿었다. 1520년과 1524년 사이에 몇몇의 다른 탐험가들이 서부로 아시아로 향하는 해로를 찾는 시도를 하는 동안 노바스코샤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항해자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와 2명의 포르투갈의 항해자 주장 알바레스 파군데스와 에스테반 고메스를 포함한다. 베라자노는 프랑스의 봉사에서 탐험을 하고 고메스는 스페인의 봉사에 항해를 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은 파군데스가 케이프 브레튼 섬에 식민지를 창립하였다고 생각한다. 1500년대 후반의 여름 동안에 프랑스와 바스크족 고기잡이 선원들은 자신들이 앞바다에서 잡은 마른 대구를 위하여 노바스코샤의 항구들을 이용하였다. 이 선원들은 매 가을 마다 프랑스로 돌아갔다.
1598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대서양 캐나다의 다양한 지역에서 모피 교역의 독점을 프랑스의 귀족 마르키 드 라 로셰 - 메스구에에게 승인하였다. 라 로셰는 자신이 일 드 부르봉이라고 이름을 지은 세이븡 섬으로 대략 50명의 남자들의 원정을 동행하였다. 그해 후반에 라 로셰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다른 남자들은 섬에 머물렀다. 많은 이들은 사망하였다. 하지만, 약간의 생존자들은 1603년에 귀국하는 데 자신들의 길을 만들었다.
1603년 앙리 4세는 프랑스의 귀족 피에르 뒤 가 드 몽스에게 노바스코샤를 포함한 지역에 대지와 교역 권리들을 승인하였다. 드 몽스와 사뮈엘 드 샹플랭을 포함한 다른 탐험가들은 1604년 현재의 노바스코샤 주, 뉴브런즈윅주와 메인주에 속하는 해안을 따라 함께 항해를 하였다. 샹플랭은 해안의 첫 정확한 해도를 만들었다. 노바스코샤 지방과 그 주위의 대지는 아카디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 몽스는 뉴브런즈윅주를 메인 주로부터 갈라지게 하는 생크루아 강의 입구에서 기지를 설립하였다. 1605년 어려운 겨울 이후에 기지는 오늘날 애나폴리스 로열 근처의 포트로열로 옮겼다. 새 정착지는 미크마크족과 모피 교역을 위한 거류지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지로서 취급되었다.
1613년 버지니아에서 온 잉글랜드의 원정대가 포트로열의 프랑스 정착지를 불태웠다. 선장 새뮤얼 아골이 공격을 지도하였다. 다음 150년 동안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이 아카디아의 통치를 위하여 서로 싸웠다.
1621년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를, 제임스 6세로서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국왕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대지의 승인을 만들었다. 그 승인은 오늘날의 노바스코샤 주(케이프 브레튼 섬을 포함), 뉴브런즈윅 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그리고 메인 주와 퀘벡주의 일부들을 포함하였다. 헌장은 새로운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는 노바스코샤로 지방을 부른 국왕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1629년 알렉산더 경의 아들 윌리엄 2세 경은 포트로열에 전 프랑스인 정착지의 지대 근처에 찰스포트를 지었다. 식민지는 1632년 평화 조역이 아카디아의 통치를 프랑스에 반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 회사에 의하여 보내진 식민주의자들은 포트로열의 통치를 차지하였으나 노바스코샤의 남해안에 라헤이브에 초기적으로 정착하였다. 1636년 경에 이 정착자들의 많은 이들은 농업을 위하여 더욱 가능성을 가진 포트로열 지역으로 다시 배치시켰다. 포트로열로 불린 그들의 주요 정착지는 원래의 포트로열 정착지로붜 대략 10 마일(16 킬로미터)이나 떨어져있다. 제방들을 지으면서 그들은 농사를 위하여 바다로부터 늪지대를 재주장하였다.
프랑스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아래에서 노바스코샤 본토를 포기하였다. 그 조약은 거기에 남아있던 아카디아인들의 영국 주제를 만들었다. 조역은 프랑스가 일루알(현재의 케이프 브레튼 섬)과 일생장(현재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을 간직하는 데 허락하였다. 양국은 오늘날 뉴브런즈윅 주의 대부분에 권리를 주장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지방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단언하는 데 일루알에 있는 루이부르에 요새화한 타운을 지었다. 영국에 의하여 통치된 뉴잉글랜드에서 온 군인들이 영국의 왕립 해군의 원조와 함께 1745년 요새를 포획하였다. 프랑스는 1748년 유럽의 전쟁을 가라앉힌 애라샤펠 조약 아래에 다시 얻었다. 그러나 루이부르는 7년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1758년에 영국에게 떨어졌다.
1758년 영국 정부는 대표적 회의를 선출하는 데 노바스코샤 주에서 식민주의자들을 허락하였다. 첫 회의는 핼리팩스에서 열렸으며, 주민들에게 그들의 정부에서 어떤 발원권을 주었으나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총독과 의회는 지속적으로 주를 통치하였다. 1763년 파리 조약은 공식적으로 케이프 브레튼 섬(전의 일루알)과 세인트존스 섬(전의 일생장)을 영국에게 주었고, 그들은 노바스코샤 주의 일부가 되었다. 세인트존스 섬은 1769년 갈라진 식민지가 되어 1799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케이프 브레튼 섬은 1784년부터 1820년 또 다시 노바스코샤 주의 일부가 될 때까지 갈라진 식민지로서 존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핼리팩스에는 북아메리카와 유럽 사이를 오가는 연합국 호송선을 위한 본부가 위치하게 되었는데, 1917년 폭발물을 실은 프랑스 배가 마침 핼리팩스 항구에 정박한 노르웨이 배와 충돌하여 폭발하였다. 이 폭발로 인해 대략 2,0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도시의 거의 모든 부분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이어 노바스코샤 주는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을 함께 경험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떠났다. 잠시 번성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어려운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에 캐나다의 전부의 전후 번영이 노바스코샤 주에 새어나기 시작하였고 주의 경제가 자라났다. 학교, 병원과 근대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캐나다 횡단도로의 노바스코샤 주 부분이 지어졌다. 1955년 주의 본토와 케이프 브레튼 섬을 잇는 캔소 인도가 완공되어 주의 경제 번창과 관광업의 확장에 공헌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주민들이 주의 도시 지역들로 이주하면서 노바스코샤 주의 시골 인구가 쇠퇴하였다.[3]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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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Nova Scotia peninsula", Wikipedia
- 〈노바스코샤 반도〉, 《요다위키》
- 〈노바스코샤주〉, 《위키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