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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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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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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운하(京杭运河, Jing–Hang Canal)는 중국베이징항저우를 잇는 운하다. 베이징-항저우 대운하, 경항대운하(Jing–Hang Grand Canal, 중국어: 京杭大运河, 한자: 京杭大運河, jīng háng dà yùn hé) 또는 대운하(The Grand Canal, 중국어: 大运河, 한자: 大運河, dà yùn hé)라고도 부른다. 단기간 내에 건설된 운하가 아닌 수 백년에 걸쳐 만들어낸 역사적 과업이다. 운하는 전 구간 복원 계획을 세운 지 100년 만인 2022년 4월에 전체 길이 1,789km가 개통되었다.[1]

개요[편집]

경항운하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양쯔강과 화이허강 유역에서 수도인 베이징까지 식량과 생활 필수품을 수월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건설하였다. 대운하 시작은 기원전 5세기 또는 7세기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나라 양제가 7세기에 시작했다고 하며, 원나라 쿠빌라이칸 시기 개수했고, 명나라 영락제 시기 완성했다고 한다. 운하 노정은 대체로 진푸선과 병행하고 있다. 수나라 대운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그 도정은 다르다. 오늘날의 대운하 이른바 경항대운하라고 불리는 것은 명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양제의 대운하가 낙양을 중심으로 두 개의 대각선을 교차시킨 형태였다면, 명대의 대운하는 정말 북경에서 항주까지 직선으로 뚫은 것이다. 이 운하는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및 전당강(戰䕋江)의 주요 5대 수계를 연결하였으며, 전체 운하 길이는 약 1,794㎞에 달한다. 그리고 수양제의 대운하와는 달리 각 수계의 지류와 호수를 적절하게 연결해서 공사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량의 조절이 용이하게 했다. 경항운하는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그 기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현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육상 수송능력이 뛰어난 철도자동차, 비행기 등의 다른 운송수단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명, 청대에 비해선 그 비중이 떨어진다. 그러나 수도 베이징에서 역시 해안 대도시인 항저우뿐만 아니라 중간에 빠지면 사실상의 경제수도인 상하이로까지 갈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대규모 화물 운송은 여전히 성황리에 이용되고 있다. 대운하 복원은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인 1922년부터 있었으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문제로 중단되었다가 2022년 1750km에 달하는 전 구간이 복원되었다. 운하 연안에는 13개의 항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유수량을 조절하는 수문(水門) 등이 설치되었다. 베이징의 쭤안먼(左安門) 밖에는 4,000t급 기선의 접안이 가능한 부두가 건설되어,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2]

경항운하는 실제로는 원대에 만든 것으로서 원나라는 북경에 수도를 정했기 때문에 북경까지 식량을 운반해야 했다. 하지만 원대에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에 운하가 자주 막혔다. 그래서 운하 자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바다로 식량을 옮기는 해운을 병행해야만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명대에서였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기로 한 다음 대운하를 보수, 증설하였는데 이 때 비로소 오늘날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명대부터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대운하는 대동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명대에 매년 강남에서 북경으로 실어나르는 식량의 규모가 원대의 운송량의 40배에 가까웠다. 훗날 들어선 청나라에서도 경항대운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문제가 생겼다. 700년간 태산 이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태산 이북으로 흐르게 된 것. 이 여파로 경항대운하의 물자수송 능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3]

역사[편집]

수나라 시기[편집]

위진 남북조시대 약 400여 년간의 중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말미암아 경제문화적으로 남북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 하기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문제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문제로 인해 계획에 그쳤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로 돈이 없어서라는 뜻이 아니다. 수문제는 수나라를 부유하게 경영한 황제이며, 현실적으로 출혈이 너무 큰 대공사이기에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가 대운하를 완성시킨다. 604년 (인수 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 (대업 원년)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파기 시작하였다.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허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화이허(淮河)와 합류한다. 통제거로 인해 황허와 화이허(淮河)를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화이허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닿을 수 있었다. 2년 뒤, 강남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 모두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 정도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으로 모두 400km 정도이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였다.

당나라~원나라 시기[편집]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황하/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왜냐하면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2,700km라는 긴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낙양까지 밖에 가지 않았던지라,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현종 시기인 734년의 낙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가 된 배효경이 삼문협 동쪽엔 집진창, 서쪽엔 삼문창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길로만 육상 운송으로 떼우게 하였다. 이로 인해 육운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 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대운하는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중요한 수로가 되었다. 대운하는 원나라 때 다시 대공사를 하여 황허 유역 동안진과 위하 유역의 임청을 잇는 회통 운하라는 새로운 운하가 건설되었다.

명나라 시기 이후[편집]

1411년 명나라 때에는 명나라 공부 대신 송례가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대운하를 6개 주요 부분으로 나누었다.

  • 북경 주변 통현을 잇는 짧은 수로.
  • 백하와 천진을 잇고 다시 위하 유역 임청까지 운하를 파서 이어지는 강.
  • 산동성에 있는 구간.
  • 서주에서 황허의 남쪽 진로를 따라 칭장강까지 뻗은 구간.
  • 칭장강에서 옛 산양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장강 유역 금강까지 이어진 구간.
  • 강남 운하 라 불리는 장강 남쪽 구간 운하로 장강 남동쪽에서 소주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항주까지 이어지는 320km의 운하.

이렇게 6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운하는 19세기에는 몇 차례 홍수로 제방이 무너져 큰 문제가 일어났고 1934년 국민당 정부가 칭장강과 장강 구간의 운하를 수리했다. 1958년에는 공산당 정부가 600t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다시 수리했고 근대식 갑문과 64km의 새로운 운하를 연결하고 이렇게 여러 번 준설하고 보강하여 지금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건설 효과[편집]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괴롭혔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분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대운하〉, 《위키백과》
  2. 대운하〉, 《나무위키》
  3. 대운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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