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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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우즈베크어: Buxoro/Бухоро, 러시아어: Бухара́, 타타르어: Boxara, 페르시아어: بُخارا /Bukhârâ/, 튀르키예어: Buhara, 타지크어: Бухоро, 카자흐어: Бұхара)는 자라프샤강 하류에 위치해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로 부하라주의 주도이다. 2020년 1월 기준 인구 280,187명으로 우즈베키스탄 내에서 인구가 일곱 번째로 많은 도시이다. 1993년에는 구시가지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도시명은 페르시아어, 차가타이어에서는 بُخارا (Bukhārā)로 표기된다. 여러 나라어에 의한 표기에서는 'Bukhara' 혹은 'Bokhara'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반까지 부하라 칸국의 수도였고 서투르키스탄에 있어서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근대 페르시아어 문학의 발달에 이 도시가 남긴 영향은 크다. 이러한 역사 배경으로부터 현재는 주민의 대다수가 민족적으로는 우즈베크인으로 되어 있지만, 주민들 중에는 타지크어가 널리 사용되어 타지크인의 특성이 있는 사람도 많이 존재하는 복잡한 민족 구성의 도시이다.
개요[편집]
- 행정 구역: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주의 주도
- 면적: 143km²
- 인구: 280,187명 (2020년)
- 공용어: 우즈베크어, 타지크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buxoro.uz/
역사[편집]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도시다.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조 시절의 금화가 출토되었으며 사마르칸드, 발흐와 함께 불교가 매우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도시 이름 부하라는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사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비하라 혹은 바하라(Vihara, Vahar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인도 쿠샨 왕조와 중국 사이의 중개 무역으로, 사산 왕조와 튀르크족 사이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의 영향도 많이 받은 국제도시였다. 무역만 했던 것은 아니고 기원원년 전후로 인도의 관개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양질의 과일을 많이 생산했다.
이슬람화 이후에는 중세 초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사만 왕조 시절에 부하라의 번영은 절정에 달하였다 전해진다. 부하라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인 사힛 알 부하리가 바로 부하라 출신 학자 무함마드 알-부하리(부하라 사람 무함마드)에 의해서 수집되고 편집되었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무함마드 알 부하리는 아랍어에 매우 능통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 문화 풍습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슬람에서 결혼을 권장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앙아시아의 마니교나 불교 승려들과 유사하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며, 성직자이자 학자로서 자신이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때 몽골군의 의해 도시 인구가 전멸했던 적도 있지만 탁월한 지리적 입지 덕분에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부하라 칸국의 실질적인 수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히바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아르크(성)과 구시가지는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하라는 원래 성곽 도시였지만 현재 도시 성채은 일부만 남아 있다.
인구 약 26만 명 규모의 도시이지만 구시가지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 전부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다. 과거 에미르가 살던 아르크나 부하라의 랜드마크인 칼론 미나렛, 구시가지의 중심 랴비하우즈를 둘러싼 수많은 모스크와 수백 년 된 가옥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주민 중에는 타지크인이 많이 산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역사적으로 타지크/페르시아인이 주도한 도시였고 현재에도 타지크인이 다수이기 때문에 여전히 타지크어가 일상생활에 널리 쓰인다. 부하라 주민의 약 90%가 타지크어를 모어로 쓰며, 도시 곳곳에서 타지크어를 많이 들어볼 수 있다. 애초에 소련 시대에는 전부 한 나라였으므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도 국경선으로 민족이 딱 나뉘지 않는다. 도시 자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역사 만화 신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 부하라 일대의 반유목, 목축 공동체들이다.
부하라는 부하라 토후국의 마지막 수도였다. 1920년 부하라 작전 동안 볼셰비키 장군 미하일 프룬체(Mikhail Frunze)가 지휘하는 러시아 적국이 부하라시를 공격했다. 1920년 8월 31일, 에미르 알림 칸은 두샨베로 도망쳤다 (나중에 그는 두샨베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탈출했다). 1920년 9월 2일, 4일간의 전투 끝에 에미르의 성채가 파괴되었고 칼얀 첨탑 (Kalyan Minaret) 꼭대기에 붉은 깃발이 게양되었다. 1920년 9월 14일, A. 무키디노프(A. Mukhitdinov)가 이끄는 전 부하라 혁명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은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존재했으며, 이때 도시는 우즈베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에 통합되었다. 20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타지키스탄 내전으로 인해 다리어와 타지크어를 사용하는 난민들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로 유입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부하라 유대인 인구 상당수가 거주하였으나 1970년대 소련이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하고 소련 붕괴 를 전후하여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이스라엘이나 미국 등으로 이민하면서 오늘날에는 극소수만 남아있다.
지리[편집]
우즈베키스탄 중남부의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으로 약 230km 떨어졌으며 제라프샨강의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중앙아시아의 시원하고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1월 평균 최대 오후 기온은 6.6°C(43.9°F)이며, 7월에는 평균 최고 기온 약 37.2°C(99.0°F)까지 올라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135mm 이다.
명소[편집]
- 부하라 아르크 성채: 5세기 경에 건설되었으며 부하라 지역의 통치자들의 왕실궁전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관광명소로 현지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다.
- 볼로 하우즈 모스크: 레기스탄 지역의 아크 성채 반대편에 1712년에 건축된 볼로 하우즈 모스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 칼란 모스크 (Masjid-i Kalân): 1514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마르칸트의 비비카님 모스크 와 크기가 같으며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칼란 모스크와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님 모스크는 같은 건물이지만 건축 예술적인 면에서는 다르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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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중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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