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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영어: San Antonio, 스페인어: San Antonio)는 미국 텍사스주의 남부, 멕시코가까이에 있는 도시이다. 스페인어로 '성 안토니오'라는 뜻이다. 인구는 약 143만 명으로 텍사스주에서는 휴스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으며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다.[1]
개요
샌안토니오는 텍사스주 남부, 멕시코만으로 빠지는 샌안토니오강 연안에 자리한 공업도시이다. 샌안토니오 도시권 인구는 219만 명으로 텍사스주에서 댈러스-포트워스, 휴스턴 다음으로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25위 안에 든다. 미국 10대 도시 중 한 곳이고 에너지, 의료,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도시이며 중요한 회의도 자주 열린다. 1718년 스페인군의 성채가 건설되었으며, 1731년 스페인인이 처음으로 이주했다. 1821년 멕시코혁명에 의해서 멕시코령이 되었으나, 1845년 텍사스주의 독립운동에 의해서 미국령이 되었다. 1890년대에는 철도가 부설되어 가축의 집산지로서 발전했다. 육우, 양모, 목화, 채소, 과일의 대집산지를 이룬다. 또 부근의 유전에서 산출되는 석유의 정제를 비롯하여 식육가공, 금속, 주류, 섬유 등 각종 제조업이 성하다. 미국 최대의 육공군 기지로 알려져 있고 각과부대, 학교가 있다. 육로와 공로에 의한 멕시코와의 무역액도 많다. 시내에는 천연의 온천이 있으며, 생활용수도 온천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시 중심부는 에스파냐 및 멕시코가 100여 년 동안 텍사스를 통치했던 곳으로 텍사스 독립전쟁의 의용대 180여 명이 전원 전사한 알라모 요새와 충독관저, 교회 등 18세기 전반의 건물들이 30층 이상의 고층건물과 함께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현재도 지리적 관계로 멕시코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따뜻한 기후와 에스파냐, 멕시코풍의 건축물, 알라모전투의 유적 등이 많아 관광산업도 발달하였다. 샌 안토니오 컨벤션 방문객 관리국에 따르면 도시는 일년에 약 3천 2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고 한다.[2]
역사
유럽인들이 도착하기전 파야인들은 샌안토니오 근처에 살았다. 1691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축일인 6월 13일 스페인 탐험가와 선교사 들이 강과 파야족 정착지에 도착하여 이름을 "샌 안토니오"라고 지었다.
스페인인들의 정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안토니오 데 올리바레스(Antonio de Olivares) 신부는 1709년 이곳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선교와 민간인 정착지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총독은 1716년 후반에 그들의 식민지인 라 루지안에서 동쪽으로 프랑스의 확장을 막고 파야족과의 불법적인 무역을 막기를 원했기 때문에 임무와 대프레시디오를 합치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는 코아우일라이 테하스의 주지사인 마르틴 데 알라콘에게 선교 단지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알라콘과 올리바레스 사이의 차이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었고, 공사는 1718년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요새 주변에 모여든 가족들과 선교사들은 스페인 텍사스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이 될 운명의 빌라 데 베자르(Villa de Béjar)의 시작이었다. 주지사는 산 안토니오 데 발레로 선교회의 소유권을 프레이 안토니오 데 올리바레스에게 양도했다.
1719년 2월 14일, 산 미겔 데 아구아요 후작은 스페인 왕에게 카나리아 제도, 갈리시아 또는 하바나에서 400가구를 수송하여 텍사스주에 거주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계획은 승인되었고, 카나리아섬 주민들에게 200가구를 제공하라는 통지가 주어졌다. 1730년 6월까지 25가구가 쿠바에 도착했고 10가구의 가족이 베라크루스로 보내졌고 스페인으로부터 재 정착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후안 레알 고라즈(Juan Leal Goraz)의 지휘 아래, 일행은 육로로 베라크루스에서 프레시디오 산 안토니오 데 벡사르(Presidio San Antonio de Béxar)까지 행진하여 1731년 3월 9일에 도착했다. 도중에 있었던 결혼으로 인해 일행에는 이제 15가구, 총 56명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1718년에 설립된 군사 공동체에 가입했다. 이민자들은 텍사스 최초의 정규 조직된 시민 정부인 산 페르난도 데 벡사르(San Fernando de Béxar) 빌라의 핵심을 형성했다.
샌안토니오는 텍사스에서 가장 큰 스페인 정착지가 되었으며 나중에 멕시코 테하스 지방인 스페인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샌안토니오에서 카미노 레알이 작은 변경도시 너카그더치즈(Nacogdoches)까지 건설되었다. 멕시코는 미국에서 온 유럽계 미국인 정착자들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들은 대부분 동쪽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 1835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가 1824년 멕시코 헌법을 일방적으로 폐지하자 멕시코의 여러 주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멕시코의 노예제 폐지와 텍사스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 더해 텍사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일련의 전투에서 텍사스군은 미국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샌안토니오 동쪽의 정착지에서 멕시코 군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835년 12월 벡사르 전투에서 벤 밀람(Ben Milam)의 지휘 아래 텍사스군은 산타아나의 처남인 마틴 퍼펙토 데 코스(Martin Perfecto de Cos)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로부터 샌안토니오를 점령했다. 윌리엄 배럿 트래비스(William Barrett Travis)와 제임스 보위(James Bowie)의 합동 사령관이 기존 임무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알라모 전투(Battle of the Alamo)는 1836년 2월 23일부터 3월 6일까지 일어났다. 수적으로 열세인 텍사스 군대는 결국 패배했고 알라모 수비군은 모두 죽었다.
텍사스 독립을 위해 싸운 테하노 애국자들의 단체를 조직한 후안 세긴(Juan Seguín)은 콘셉시온 전투, 벡사르 공성전, 샌재신토 전투에 참여하고 샌안토니오 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1842년 종파 신참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의 생명 위협으로 인해 공직에서 쫓겨났다.
1845년, 미국은 마침내 텍사스를 합병하고 연방에 주로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생했다. 비록 미국이 궁극적으로 이겼지만, 그 전쟁은 샌안토니오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도시의 인구는 800명으로 거의 3분의 2가량 감소했다.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에 힘입어, 미국 남북전쟁이 시작되던 1860년까지 샌안토니오는 15,000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남북전쟁 이후 샌안토니오는 축산업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이 기간 동안 이곳은 미국의 다른 도시와는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개척 도시로 남아있었다.
독일 이민자들은 뉴 브라운펠스(New Braunfels), 카스트로빌(Castroville), 보에르네(Boerne), 컴포트(Comfort),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 불베르데(Bulverde)와 같은 작은 주변 마을을 세웠는데 모두 샌안토니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독일이 샌안토니오에 끼친 영향은 컸고, 1900년대 초에는 샌안토니오의 적어도 1/3이 민족적으로 독일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샌안토니오의 많은 독일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5세대나 6세대까지 텍사스 독일어를 구사했다. 텍사스 독일어는 독일어가 독일에서 분리되면서 진화한 독일어의 방언이다. 텍사스 독일어는 텍사스어를 사용하는 독일어 방언으로 가장 잘 묘사된다.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개발자들은 샌안토니오까지 최초의 철도를 건설하여 주요 시장 및 항구도시와 연결했다. 텍사스는 주요 도시들이 수로가 아닌 철도로 개발된 최초의 주였다. 텍사스에서 철도는 샌안토니오, 달라스, 포트워스와 같은 주요 내륙 도시의 개발 패턴이 기존 동부 주에서 해안 항구도시의 역사적인 개발과 비교할 때 확연히 다른 것을 지원했다.
20세기 초, 시내의 거리는 노면전차와 현대 교통을 수용하기 위해 넓어졌다. 그 당시 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오래된 역사적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샌안토니오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도시의 인구는 인구 증가와 토지 합병을 통해 1970년 인구 조사의 650,000명에서 2005년 약 120만 명으로 35년 만에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샌안토니오 미션스 국립역사공원(San Antonio Missions National Historical Park)과 알라모(The Alamo)는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문 직업이 증가함에 따라 샌안토니오는 많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목적지가 되었다.[3]
교통
미국 중부와 멕시코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미국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10번 인터스테이트와 미국 중앙부를 관통하여 멕시코까지 연결되는 35번 인터스테이트가 교차한다. 여객 철도 교통은 미국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거의 망했지만 그래도 암트랙 노선이 교차한다. 시카고까지 연결되는 Texas Eagle의 시발점이고, 로스앤젤레스~뉴올리언스를 연결하는 Sunset Limited도 있다. 항공 교통의 경우 크고 아름다운 샌안토니오 국제공항이 있지만, 텍사스주에 더 큰 공항들이 있다보니 샌안토니오 국제공항의 노선망은 주로 국내선 위주로 되어 있고 국제선은 멕시코와 연결되는 것들 뿐이다. 미합중국 공군에 입대할 때 이 공항에 집결하게 되며, 여기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랙랜드 공군기지(Lackland Air Force Base)까지 공군버스로 수송한다. 미육군 의무 사령부와 의무학교가 있는 포트 샘 휴스턴(Fort Sam Houston)이 여기에 위치해 있다. 시내 대중교통의 발달이 느린 편이다. 도시철도가 없는 미국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샌안토니오보다 작은 엘패소마저 2018년에 노면전차 노선을 개통하면서 텍사스 5대 대도시 중 유일하게 도시철도가 없는 도시라는 오명까지 함께 얻게 되었다.[4]
멕시코와의 관계
주민의 70%가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미국 흑인은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굳이 흑인 노예를 들여오기 보다는 멕시코 잔존 주민들을 싸게 육체노동자로 고용하는 편이 더 나은 곳이었기에 멕시코인들은 지배국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바뀐 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잔존 주민들 후손말고 본토 멕시코인들이 이민으로 밀고 들어와 멕시코계 미국인 비중은 더 높아질 예정이다. 멕시코외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온두라스계도 많다. 아시아인 역시 미국 어디나 있는 중국인만 좀 있다. 그나마 약간의 한국인 교민들이나 유학생들이 있지만 전체 주민에 비하면 극소수다. 1980년대 초반 헨리 시스네로스(Henry Cisneros)가 민주당 소속으로 텍사스 최초의 멕시코계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을만큼 주 정계도 멕시코계에 우호적이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샌안토니오 캠퍼스 또한 이곳에 있으며 미국인에 대한 스페인어 교육 및 UNAM 재학생들의 영어 연수를 담당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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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샌안토니오〉, 《위키백과》
- 〈샌안토니오〉, 《나무위키》
- 〈샌안토니오〉, 《요다위키》
- 〈샌안토니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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