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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에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주요 민족으로는 하우사인과 요루바족, 이그보족이 있으며, 하우사인이 전체 인구의 30%, 요루바족이 15.5%, 이그보족이 15.2% 정도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에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주요 민족으로는 하우사인과 요루바족, 이그보족이 있으며, 하우사인이 전체 인구의 30%, 요루바족이 15.5%, 이그보족이 15.2% 정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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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8일 (토) 22:05 기준 최신판

나이지리아 국기

나이지리아(Federal Republic of Nigeria)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이다. 북쪽으로는 니제르, 북동쪽으로는 차드, 동쪽으로는 카메룬, 서쪽으로는 베냉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서양의 기니만을 면하고 있다. 인구는 약 2억여 명으로서,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초기 역사[편집]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후 200년까지 녹 문화가 번성했는데, 실물 크기의 테라코타 유물들을 남겼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품으로 추정한다. 또한 기원전 550년 즈음이나 그 이전에 철을 제련했다. 에누구주의 은수카와 레자, 오피에서 철을 제련한 유적들이 나왔다. 10세기 즈음에 이그보족이 은리 왕국을 세웠으며 1911년에 대영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로스트 왁스 주조법으로 만든 청동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이 은리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도시인 이그보우쿠에서 발굴됐다. 요루바족이 세운 이페와 오요 제국은 각각 12세기와 14세기에 세력을 키웠다.

하우사인의 역사 기록물인 카노 연대기는 하우사인들의 도시국가인 카노와 하우사인들의 주요 도시들의 역사를 10세기부터 다룬다. 7세기부터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오늘날의 나이지리아 지역은 흑인의 땅이라는 뜻의 '빌라드 앗수단' 또는 '수단'이라고 불렀다. 주민들이 북아프리카의 아랍, 무슬림 문화를 일부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하라 종단 무역을 하면서 넓은 의미의 이슬람 세계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중세의 아랍, 무슬림 사학자들과 지리학자들은 카넴-보르누 제국을 이 지역에서 이슬람 문명의 거점으로 언급했다.

식민 지배 이전[편집]

16세기에 포르투갈 제국의 탐험가들이 노예 해안의 라고스와 칼라바르에서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남부 나이지리아의 주민들과 직접 교역을 했다. 유럽인과의 해안 교역은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작이기도 했다. 칼라바르는 대서양 노예 무역 시기에 가장 큰 노예 무역 항구 가운데 한 곳이 됐다. 그 밖의 주요 노예 무역 항구로는 라고스의 바다그리와 비아프라만의 보니섬이 있었다. 이 시기에 주요 항구와 내륙지를 잇는 노예 무역로가 여러 개 만들어졌다. 노예 무역에 참여했던 왕국 가운데 남쪽의 베닌 제국과 남서쪽의 오요 제국, 남동쪽의 아로 연맹이 활발하게 참여했다. 베닌 제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오요 제국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영토가 가장 넓었다.

북쪽에서는 하우사인들의 도시 국가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카넴-보르누 제국이 쇠퇴하는 동안 풀라인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풀라인들의 지도자 우스만 단 포디오가 하우사 왕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중앙 집권화된 소코토 칼리파국을 세웠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공용어는 아랍어였으며 우스만 단 포디오와 그의 자손들은 전사들을 모든 방향으로 보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남쪽으로는 오요 제국의 일부를 점령하고 대서양에 도달하고자 이바단을 향해 나아갔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술탄들은 점령지에 종주국을 세우고 이슬람 문명을 전파하고자 에미르들을 보냈고, 에미르들은 무역과 노예 제도로 부와 권력을 얻었다. 189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예 인구는 소코토 칼리파국의 영토에 집중적으로 있었으며 그 수는 약 200만 명이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1903년에 유럽 열강에 무너지기 전까지 식민지 시대 이전의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가장 큰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령 나이지리아[편집]

1807년에 영국이 대서양 노예 무역을 금지한 뒤로 밀수꾼들은 해안에서 현지 노예 상인들과 불법으로 노예를 매매했다. 영국 왕립해군의 서아프리카 함대는 바다에서 밀수꾼들을 막으려 했다. 구조된 노예들은 원래 영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을 재정착시키기 위해 서아프리카에 세웠던 프리타운으로 보내졌다. 영국은 1851년에 라고스를 포격하며 현지의 권력 투쟁에 개입했고, 노예 무역에 우호적이던 코소코왕을 폐위하고 영국에 우호적이던 아키토예를 왕으로 세운 뒤 1852년 1월 1일에 라고스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조약을 맺었다. 영국은 1861년 8월에 라고스를 왕령식민지로 합병했고, 그 뒤로 내륙 지방으로 진출했다. 1864년에 요루바족 출신 새뮤얼 아자이 크라우더가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성공회의 주교가 됐다.

영국은 1885년에 베를린 회담에서 서아프리카에서의 세력권을 다른 유럽 열강들로부터 인정받았고, 이듬해에 영국에서 왕립 나이저 회사가 칙허를 받았다. 왕립 나이저 회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나이저강 주변의 많은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1900년에 왕립 나이저 회사령이 영국 정부의 직할지가 됐고, 영국 정부는 대영 제국의 한 부분으로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을 세웠다.

1902년에 영국은 소코토 칼리파국을 향해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성은 영국군 장교 프레더릭 루가드에게 해당 계획을 수행할 임무를 부여했다. 루가드는 소코토 칼리파국과 그 남쪽의 에미르들 사이에서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영국군이 수도 소코토에 다다르자 술탄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는 영국군을 상대로 빠르게 항전 태세를 갖추었지만 패배했고,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와 그의 많은 추종자는 소코토를 떠나 피신했다. 북동쪽에서는 카넴-보르누 제국이 쇠퇴하는 사이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보르노 에미르국이 세력을 키웠다.

1903년 3월 13일에 소코토의 대시장 광장에서 소코토 칼리파국의 대재상이 공식적으로 영국에게 통치권을 넘겼고, 영국은 새 술탄으로 무하마두 아타히루 2세를 세웠다. 영국은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을 세우고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의 군대와 싸워 이긴 뒤 그를 살해했다. 1906년에 이르러서 영국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을 모두 진압했다.

1914년 1월 1일에 영국은 남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을 나이지리아 식민지 보호령으로 정식 통합했다. 다만 행정상으로는 남나이지리아와 북나이지리아, 라고스 식민지를 나누어 통치했다. 해안가가 있는 남나이지리아의 주민들은 영국 및 다른 유럽 세력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더 많이 교류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보호령에 서양식 교육 기관들을 세웠다. 영국은 간접 통치를 하면서 이슬람 전통을 인정했고, 선교사들이 무슬림이 많은 북부에서 선교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남부의 학생 가운데 일부는 고등교육을 받고자 영국으로 가기도 했다. 1960년에 나이지리아가 독립했을 때 지역별로 현대식 교육의 접근성이 차이가 있었다. 남부와 북부의 차이는 나이지리아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북나이지리아는 1936년까지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았으나 다른 곳은 식민지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이지리아에서 민족주의와 독립 요구가 일어났고, 영국은 나이지리아에 자치 제도를 도입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자 아프리카 전역에서 탈식민지화가 일어났고, 나이지리아는 1960년에 독립했다.

독립과 제1공화국[편집]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나이지리아 연방이 됐으며, 총독은 은남디 아지키웨, 명목상 국가원수와 나이지리아의 여왕은 영국의 군주 엘리자베스 2세였다. 나이지리아 연방의 초대 정부는 아마두 벨로가 이끄는 북부 무슬림 중심의 북부인민회의, 아지키웨가 이끄는 이그보족 및 기독교인 중심의 나이지리아 카메룬 국민평의회가 연립해 구성했다. 야당은 오바페미 아월로워가 이끄는 요루바족 중심의 행동단체로 비교적 진보적이었다. 독립 당시 3개 주류 민족이었던 북부의 하우사풀라인, 동부의 이그보족, 서부의 요루바족 사이에서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컸다. 1961년에 남카메룬이 카메룬으로 편입되자 나이지리아의 북부가 남부보다 더 커지면서 정치상 균형이 깨졌다. 1963년에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이 세워졌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아지키웨가 취임했다.

군정과 내전[편집]

1966년이 되자 정치적 불안과 부정부패로 두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첫 번째 쿠데타는 1966년 1월에 이그보족 군인들과 소령 이매뉴얼 이페아주나, 중령 추쿠마 카두나 은제오구가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아마두 벨로와 나이지리아의 총리 아부바카르 타파와 발레와를 살해했고 북부와 서부 지역의 명망가들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으나 정부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이지리아 상원의장 은와포르 오리주는 권력을 이그보족 소장 존슨 아그이이론시에게 이양했다. 그해 7월에 북부 출신 장교들의 주도로 반쿠데타가 일어나 야쿠부 고원이 정권을 장악했고, 북부의 이그보족들이 박해받고 동부로 피란을 떠나며 북부와 남부 사이의 갈등이 높아졌다.

1967년 5월에 동부주 주지사 중령 추쿠에메카 오두메구 오주쿠가 비아프라를 세우고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비아프라가 독립을 선언하고 1967년 7월 6일에 나이지리아군이 비아프라를 공격하면서 비아프라 전쟁이 일어났다. 비아프라 전쟁은 30개월 동안 이어졌고, 비아프라의 교역과 보급을 봉쇄한 끝에 1970년 1월에 끝났다. 30개월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동부주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백만 명에서 3백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와 이집트, 소련, 영국, 이스라엘 등이 막후에서 전쟁에 깊게 관여했는데, 영국과 소련은 나이지리아 정부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고, 가말 압델 나세르는 나이지리아에 전투기 조종사들을 파병했으며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비아프라를 지원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향한 지지를 밝히고 수천 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전쟁이 끝난 뒤 나이지리아는 1970년대에 석유 붐의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군부는 석유로 얻은 이익을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거나 사회 기반 시설에 투자하는 데 거의 쓰지 않았다. 석유로 얻은 이익이 많아져 각 주에 주는 보조금이 많아지자 중앙 정부는 권력 투쟁의 장이 됐다. 석유 생산량과 이익이 많아지자 나이지리아 정부는 석유 수입에 크게 의존했다. 1975년 7월에 소장 셰후 무사 야르아두아와 조지프 난벤 가르바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야쿠부 고원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쿠데타 세력은 고원의 독재 정치를 준장 세 명이 참여하는 삼두 정치로 바꾸려 했으며, 최고군사회의가 준장 세 명의 결정에 반대할 수 있었다. 대장 무르탈라 모하메드가 국가원수, 대장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참모총장, 중장 테오필루스 단주마가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며 물가 상승을 막고자 엄격한 조치를 취하고, 부패조사국을 설치했으며, 군정 장관들을 새 장교로 교체하고, '데드우드 작전'을 펼쳐 공무원 1만 1천 명을 해임했다.

1976년 2월에 대령 부카 수카 딤카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르탈라 모하메드를 암살했지만 군 내부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쿠데타는 실패해 딤카와 쿠데타 주동자들은 5월 15일에 공개 처형됐다. 쿠데타 미수가 있고 나서 오바산조가 국가원수가 됐고, 오바산조는 무르탈라 모하메드의 정책을 계속 펼쳤다. 오바산조는 북부 출신 인사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셰후 무사 야르아두아를 참모총장에 임명했고, 오바산조와 야르아두아, 단주마의 삼두 정치를 구성해 군정을 펼쳤으며 권력 이양 계획을 준비했다.

민정과 제2공화국[편집]

1977년에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의회 선거가 열렸으며 이듬해 9월 21일에 새 헌법이 공포됐고 정치행위 금지가 풀렸다. 1979년에 5개의 당이 경쟁한 선거를 거쳐서 나이지리아 국민당의 셰후 샤가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9년 10월 1일에 샤가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오바산조는 샤가리에게 나이지리아 역사에서 최초로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했다.

샤가리 정부는 나이지리아 사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부패했다는 인식을 받았다. 1983년 8월에 있었던 선거에서 국민당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폭력과 다양한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선거 부정으로 법정 공방을 벌였다. 또한 유가가 떨어지고 국가 재정이 악화하면서 샤가리 정부는 인기를 잃었다.

군정과 제3공화국[편집]

1983년 12월 31일에 나이지리아군의 주요 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이 무너졌으며 소장 모하마두 부하리가 국가원수에 올랐다. 부하리는 개혁을 약속했지만 큰 진전은 없었고, 1985년에 대장 이브라힘 바방기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통치위원회를 세워 정권을 장악했다. 1986년에 바방기다는 나이지리아 정치국을 설치하고 제3공화국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사를 시행했다. 1989년에 바방기다는 제3공화국으로 전환하기 위한 계획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1990년에 쿠데타 미수를 겪고 민주화를 1992년으로 미루었다.

바방기다는 창당을 합법화했으며 1992년 총선을 앞두고 사회민주당과 국민공화협의회의 양당 체제를 구축했다. 양당 체제는 정치국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고, 바방기다는 모든 국민들에게 두 당 가운데 한 곳에 가입하라고 했다.

1993년 6월 12일에 대통령 선거가 열렸고, 개표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사회민주당의 모슈드 아비올라가 국민공화협의회의 바시르 토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방기다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고,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8월에 바방기다는 어니스트 쇼네칸을 국가원수 대행으로 임명하고 나서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바방기다 정부는 가장 부패한 정부, 나이지리아에 부패 문화를 만든 데 책임이 있는 정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말에 대장 사니 아바차가 쿠데타를 일으켜 쇼네칸이 이끄는 임시 정부를 전복했고, 군사를 동원해 시민 불복종을 진압했다. 군사 정부는 오고니족 노인 살인 사건을 조작해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를 교수형에 처했다. 1999년에는 아바차와 연계된 수억 달러의 계좌가 발견됐다. 아바차는 유럽의 은행으로 돈을 빼돌렸고 장교와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매수하며 쿠데타 음모를 막았다. 아바차는 1998년에 대통령 관저에서 죽은 채 발견됐고, 그의 후임자인 대장 압둘살라미 아부바카르는 1999년 5월 5일에 새 헌법을 채택하고 다당제 선거를 보장했다.

민주화와 제4공화국[편집]

1999년 5월 29일에 아부바카르는 199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의 승자이자 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비록 1999년과 2003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시기에 나이지리아 정부는 부패를 해소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개선에 힘썼다. 2007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우마루 야르아두아가 승리를 거두었고, 국제 사회는 선거에 흠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대통령 오바산조는 선거에서 과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선거 결과가 여론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오바산조는 또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국민들이 후임자의 승리를 좋아하지 않으면 4년 뒤에 또 투표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르아두아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도중 2010년 5월 5일에 죽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굿럭 조너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조너선은 2011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국제 사회는 폭력 사태나 선거 사기가 비교적 적어 잘 진행됐다고 평가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총선거를 앞두고 세 주요 야당인 나이지리아 행동의회와 진보변혁회의, 범나이지리아인민당, 그리고 일부 정파가 모여 범진보의회당을 창당했다. 2015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전 국가원수 모하마두 부하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선거는 공정했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조너선은 패배를 인정하고 소요의 위험을 줄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편, 보코 하람은 선거 기간에도 투표소에 가는 유권자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투표소를 파괴하는 등의 테러를 했고, 이로 인해 41명이 죽었다. 부하리는 201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지리[편집]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32번째로 큰 나라이다. 가장 높은 곳은 차팔 와디로서 해발 2,419 m에 달한다. 남부지방은 해안을 끼고 있어 해변이 나타나며 열대우림도 나타난다. 중부와 남서부 지역에는 사바나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북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뻗쳐있다. 나이저 강이 가장 주요한 강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강 삼각지인 나이저 삼가지가 나타난다.

베누에 강과 나이저 강이 가장 주요한 지세를 이루는 곳인데 계곡 지형도 강 곳곳에 나타난다. 평원이 북쪽 계곡 지대에 나타나기도 한다. 남서쪽의 나이저 강에는 병풍을 이루는 듯한 고지대가 나타나며 카메룬과 국경을 접하는 곳으로 통한다.

인구[편집]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2019년 말 추정치로는 2억 6백만 명이다. 2017년 기준으로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약 17%를 차지한다. 유엔은 2100년이 되면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5억 5백만 명에서 10억 명 사이가 되리라 추정했다.

나이지리아에는 250개가 넘는 민족이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주요 민족으로는 하우사인과 요루바족, 이그보족이 있으며, 하우사인이 전체 인구의 30%, 요루바족이 15.5%, 이그보족이 15.2% 정도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 지도[편집]

나이지리아 도시 지도[편집]

나이지리아 주변 지도[편집]

나이지리아 강 지도[편집]

나이지리아 만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모하마두 부하리〉,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서아프리카 국가
서아프리카 도시
서아프리카 지리
서아프리카 문화
서아프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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