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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피카(영어: Topeka)는 미국 캔자스주 북동부에 있는 캔자스주의 주도이며 쇼니군의 군청소재지로서 캔자스시티 서쪽 캔자스강 연안에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이고 토피카 대도시 인구는 약 24만 명이다. 이름은 캔자-오사지(Kansa-Osage) 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감자 캐기 좋은 곳'을 의미한다.[1]
개요[편집]
토피카는 미국 중부 캔자스주 북동부, 캔자스강을 따라 건설되었다. 토피카는 칸사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1842년 첫 정착자들 중의 하나인 루이스 패펀이 캔자스강에 배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배는 캘리포니아주와 오리건주 등의 서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통의 수단이었다. 1854년 샌타페이통로와 오리건통로가 갈라지는 지점 가까이에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로렌스를 떠나온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개척자들은 펜실베이니아주의 비지니스맨 사이러스 할리데이가 있었다. 할리데이는 후에 애친슨, 토피카와 샌타페이 철도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1878년에 이 철도의 본사를 토피카에 설립하였다. 1857년에 도시로 합병되었고, 1861년에 캔자스주의 주도가 되었다. 토피카는 남북전쟁 전에는 노예제를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논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토피카는 주로 밀 경작과 가축을 사육하는 비옥한 농업지대의 상업과 제조업의 중심지이다. 주요 생산품은 가공식품, 인쇄물, 의류, 타이어, 금속제품 등이며 관광업, 보험업 등도 도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신병학의 교육센터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메닝거재단 병원으로 인하여 미국의 정신병 치료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닝거재단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관한 방대한 학술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명소로는 캔자스 역사박물관, 군사 항공에 관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컴뱃 항공박물관, 미국의 회화와 조각품을 소장하고 있는 멀베인 아트센터(Mulvane Art Center), 토피카 동물공원(Topeka Zoological Park), 워싱턴 D.C.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본따 건립한 주의회 의사당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워시번대학교 토피카 캠퍼스(1865)가 있다.[2]
역사[편집]
수 천년 동안 북미의 대평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거주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왕국은 북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했다. 1762년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 후반, 프랑스는 폰테인블로 조약에서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비밀리에 양도했다. 1800년 스페인은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 반환했다. 1803년,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오늘날의 캔자스주 대부분을 포함하는 영토를 매입했다.
1840년대에 마차 열차는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오리건 트레일로 알려진 길을 따라 서쪽으로 3,000km 나아갔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서쪽 약 97km 지점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 파판 형제와 결혼한 이복 캔자스 인디언 자매 3명이 현재의 토피카에서 캔자스강을 건널 수 있도록 페리 서비스를 개설했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여행자들은 강을 건너는 길을 확실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지역에 다른 것은 거의 없었다.
1850년대 초,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가는 교통은 포트 레번워스에서 토피카를 거쳐 새로 설립된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 이르는 새로운 군사 도로의 무역으로 보충되었다. 1854년, 첫 번째 오두막이 완공된 후, 아홉 명의 남자들이 토피카 마을 협회를 설립했다. 1860년대 후반까지 토피카는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토피카는 캔자스준주에서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제 찬성론자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는 동안 자유주의 운동의 보루였다. 1856년 남부군이 토피카에 바리케이드를 친 후, 토피카의 지도자들은 침략으로부터 자유 국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병대가 조직되었고 퀸시 스트리트에 석조 요새가 건설되었다. 요새는 적어도 한 개의 대포의 존재로 강화된 저지대 토공 부담금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민병대는 마을 주변의 포위 공격이 해제된 1856년 9월까지 요새에 주둔했다.
캔자스는 10년 동안 노예제도 폐지와 노예제도 옹호로 인해 블리딩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별명이 붙은 후 1861년에 연방의 34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토피카는 찰스 로빈슨이 초대 주지사로 선출된 가운데, 주도로 선정되었다. 1862년, 사이러스 K.홀리데이(Cyrus K. Holliday)는 주 의사당 건설을 위해 구획의 토지를 주에 기부했다. 캔자스주 의사당의 건설은 1866년에 시작되었다. 캔자스 석회석을 사용하여 의사당을 건설하는 데 약 37년이 걸렸습니다. 먼저 동쪽 건물, 그 다음 서쪽 건물, 마지막으로 중앙 건물을 건설했다. 1864년 가을, 당시 미주리에 있던 남부군이 도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경우 토피카를 보호하기 위해 나중에 포트 심플(Fort Simple)로 명명된 요새가 6번가와 캔자스 애비뉴 교차로에 건설되었다. 요새는 1865년 4월에 폐기되었다가 1867년 4월에 철거되었다.
주 공무원은 1869년 헌법홀(Constitution Hall)에서 이전하여 새로운 주 의사당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헌법홀은 1863년부터 1869년까지 캔자스 주의회로 사용되었던 것 외에도 1855년에 노예제 반대 정착민들이 모여 4개의 주 헌법 중 첫 번째 헌법을 작성하여 "자유 주 의사당"이 된 장소이다. 국립 공원관리청은 토피카의 헌법홀을 노예 탈출 통로이자 자유 무역 도로인 지하철도의 자유를 향한 레인 트레일(Lane Trail to Freedom on the Underground Railroad) 운영의 본부로 인정한다.
1860년의 가뭄과 남북전쟁의 뒤이은 기간이 토피카와 주의 성장을 둔화되었지만 토피카는 캔자스가 1865년 전쟁이 끝날 때부터 1870년까지 누린 부흥기와 성장기에 보조를 맞추었다. 1870년대에 많은 예전 노예들이 정착했다. 중앙회 중교회의 목사인 찰스 셸던(Charles Sheldon)은 1893년 미시시피 서쪽에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치원을 조직했다.
링컨 칼리지(현재 워시번 대학교) 는 캔자스주와 캔자스 회중 목사 및 교회 총회가 발행한 헌장에 의해 1865년 토피카에 설립되었다. 11869년에 철도가 토피카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1878년에 애치슨, 토피카, 산타페 철도 시스템의 일반 사무실과 기계 공장이 설립되었다.
1880년대 후반, 토피카는 재난으로 끝난 호황기를 겪었다. 마을 부지에 대한 엄청난 투기가 발생했다. 1889년 거품이 꺼졌고, 많은 투자자들이 망했다. 하지만, 토피카는 그 기간 동안 인구가 두 배가 되었고, 1890년대의 불경기를 견딜 수 있었다.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이 도약하면서 수많은 선구적인 기업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토피카도 빠지지 않았다. 스미스 자동차 회사(Smith Automobile Company)는 1902년에 설립되어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시시피강 서쪽에 있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치원의 본거지인 토피카는 브라운 대 교육 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소송의 원고인 올리버 브라운(Oliver Brown)의 고향이다. 이 사건은 "분리적이지만 동등한" 기준을 없애고 미국 공립학교에서 인종 통합을 요구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건이었다. 1960년 인구조사국은 토피카의 인구를 백인의 91.8%, 흑인의 7.7%로 보고했다.
소송이 제기될 당시 토피카에는 초등학교만 분리되어 있었고, 토피카 고등학교는 1871년 개교 이래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게다가, 토피카 고등학교는 토피카 시의 유일한 공립 고등학교였다. 1918년에 만들어진 워시번 시골 고등학교와 1920년에 만들어진 시먼 고등학교와 같은 다른 시골 고등학교들이 존재했다. 하일랜드 파크 고등학교는 1961년 토피카 웨스트 고등학교의 개교와 함께 1959년에 토피카 학교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나중에 캐피톨 가톨릭 고등학교로 개명하고 1939년에 설립자인 프란시스 헤이든(Francis Hayden) 신부의 이름을 따서 다시 헤이든 고등학교로 개명한 가정 고등학교도 1911년부터 도시에 있었다.
1990년대 초 캔자스 의회 대표단과 협력한 브라운 재단의 노력을 통해 역사적인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결정에 등장한 분리된 학교인 먼로 초등학교는 현재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국립사적지이다. 브라운 재단은 유적지의 해설 전시물 내용을 주로 책임지고 있다. 국립역사유적지구는 2004년 5월 17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문을 열었다.
토피카는 브라운 이후에도 인종 차별의 부담에 시달려왔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교외 교육구가 도심 지역과의 인종 통합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토피카의 인종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Task Force)라고 자칭하는 시민 단체가 조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66년 6월 8일, 토피카는 후지타 규모의 F5 등급 토네이도에 의해 강타당했다. 토네이도는 시내와 워시번대학을 강타하며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총 수리비는 1억 달러로 책정되었으며,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싼 토네이도 중 하나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현재까지도 토피카 토네이도는 기록상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토네이도 중 하나였다.
토피카는 1966년 토네이도로부터 회복되었고 꾸준한 경제 성장을 지속해왔다. 역사적인 건물을 여러 채 잃은 워시번대학은 많은 학교 시설을 재건하기 위해 지역 사회와 동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1974년, 포브스 공군 기지가 문을 닫았고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토피카를 떠났고, 향후 9년간 도시의 성장 패턴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동안 토피카 시민들은 새로운 공항과 컨벤션 센터를 짓고 시정부의 형태를 바꾸기 위해 투표했다. 웨스트 리지 몰(West Ridge Mall)은 1964년 개장한 화이트 레이크 몰(White Lakes Mall)을 대체하여 1988년에 문을 열었다.
1989년, 토피카는 하트랜드 파크 토피카의 개장으로 모터스포츠 메카가 되었고 토피카 공연 예술 센터는 1991년에 문을 열었다. 1990년대 초, 도시는 토피카에 위치한 리저 파인 푸드와 산타페와 힐스 펫 뉴트리션의 확장으로 사업 성장을 경험했다.
2000년에 시민들은 토피카와 쇼니 카운티(Shawnee County)의 경제 발전을 위해 다시 25센트의 판매세를 연장하기로 투표했다. 2004년 8월, 쇼티 카운티 시민들은 2000년 25센트 판매세를 폐지하고 경제개발, 도로 및 교량을 위해 지정된 12년 20센트 판매세로 대체하기로 투표했다. 판매세는 매년 사업개발과 고용 창출 장려금으로 지정된 5백만 달러와 도로와 교량에 9백만 달러를 지원한다. 토피카를 거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캔자스강을 따라 지역을 계속 재개발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다. 시내 중심부를 지나는 캔자스 강 회랑(Kansas River Corridor)에서 토피카 시내는 아파트 및 콘도미니엄 로프트 개발, 외관 및 거리 경관 개선을 경험했다.[3]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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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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