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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는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도시이다. 오클라호마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약 68만 명이며 오클라호마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1]
목차
개요
오클라호마시티는 오클라호마주 중부, 오클라호마 카운티(Oklahoma County)의 군청소재지이며 아칸소강의 지류인 오클라호마강(노스캐나디언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오클라호마주 최대의 도시로 도시권 인구는 140만 명이며, 주의 경제, 문화, 행정의 중심지이다. 면적은 1,606.7km²로 미국의 주 수도 중에서 알래스카 주노 다음으로 면적 면에서 두 번째로 크다. 1887년 철도 통과지점으로 건설되었고, 이후 부근의 농지를 분양하면서 본래 인디언의 거주지였던 이곳에 백인들이 몰려들었다. 백인들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곧 시로 승격되었고, 1910년 주도가 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1928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성장이 가속화되어 석유제품, 항공기 부품, 유전용 기계류, 전자제품, 컴퓨터, 타이어, 자동차 등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했다. 대규모 병참, 통신 기지인 팅커 공군기지와 항공안전과 공항관리를 위한 연방항공관리국의 항공센터가 있다. 교육 시설로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1904), 오클라호마시티 사우스웨스턴대학(1946), 오클라호마 크리스천대학(1950),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공업연구소(1961)가 있으며 의료시설은 오클라호마대학교 보건과학 센터(1900)와 사립인 오클라호마 의학연구소가 있다. 도시에는 서부개척시대의 카우보이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 서부 사적 센터, 국립 소프트볼 명예의 전당, 역사적인 유물을 모아놓은 주립역사박물관, 스카이 쇼를 즐길 수 있는 커크패트릭 플래네테리움(Kirkpatrick Planetarium), 직접 체험하며 둘러볼 수 있는 옴니플랙스 아트 박물관(Omniplex Art and Museum)을 비롯하여 국제사진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등이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는 복합공간인 커크패트릭센터 등이 있다. 다운타운 북쪽으로 있는 돔 모양을 한 의사당 건물 부지 안에는 현재도 가동 중인 유정(이 있다. 매년 6월에는 아메리카인디언 예술의 기념 축제인 레드 어스 페스티벌이, 9월에는 오클라호마주 박람회가, 12월에는 로데오 대회가 열린다. 21㎞ 북동쪽에는 옛 서부 마을을 그대로 재현한 개척도시가 있다. 광대한 부지에 500여 종의 동물 1,8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는 오클라호마시티 동물원이 있다. 1995년 4월 19일 미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테러사건이 발생해 168명이 사망하고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윌 로저스 월드 공항이 있으며, 오클라호마시티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으로 NBA 농구의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있다.[2]
지리 및 기후
오클라호마시티는 텍사스와 멕시코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 중 하나를 따라 위치해 있으며 댈러스-포트워스 메트로플렉스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 도시는 주의 중앙에 있는 프론티어 컨트리(Frontier Country) 지역에 위치한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이 도시의 총면적은 1,606.7km²이며 그 중 1,556.9km²는 육지이고 49.8km²는 물이다.
오클라호마시티는 온대 습윤 아열대 기후(Köppen: Cfa)와 대륙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도시는 매우 덥고 습한 여름과 시원한 겨울이 특징이다. 평균 기온은 16.3°C이고, 월별 일평균 기온은 1월 4.0°C에서 7월 28.3°C이다. 극한 범위는 1899년 2월 12일 −27°C와 1936년 8월 11일 및 2012년 8월 3일 45°C이다. 기온은 일년 중 10.4일에 38°C에 이르고, 거의 70일 동안 32°C를 유지한다. 그 도시는 매년 약 91.2cm의 강수량이 있으며 그 중 21.8cm가 눈이다.
역사
오클라호마시티는 1889년 4월 22일 "미할당 토지"로 알려진 지역이 정착을 위해 개방되었을 때 정착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약 만 명의 주민이 정착하였으며 189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다. 1907년 오클라호마가 연방에 편입될 때까지 오클라호마시티는 새로운 주의 인구 중심지이자 상업 중심지로 되었다. 1928년 도시 경계 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오클라호마시티는 석유 생산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오클라호마시티는 주요 축산장을 개발하다. 전후의 성장은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의 건설과 함께 이루어졌고 오클라호마시티는 I-35, I-40, I-44의 융합으로 주요한 교통 중심지가 되었다. 다른 많은 미국 도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인근 교외의 새 주택으로 이사하기 위해 새로 건설된 고속도로를 따라가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심 도시 인구가 감소했다. 1993년, 그 도시는 도시의 핵심을 시민 프로젝트로 재건하여 도심에 더 많은 활동과 삶을 정착시키기 위한 계획인 대도시권 프로젝트(MAPS)로 알려진 거대한 재개발 패키지를 통과시켰다.
1995년 4월 19일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무라(Murrah) 건물 앞에서 폭탄을 터뜨려 오클라호마시티 주민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인근 건물 100여 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16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장소는 오클라호마시티 국립기념관과 박물관으로 기념되었으며 2000년 문을 연 이후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3]
경제
오클라호마시티는 1928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에너지 중심으로 되었으며 현재는 정보기술, 서비스, 의료 서비스, 행정 분야로 다양해졌다. 도시는 Fortune 500대 기업의 두 곳인 체서피크 에너지(Chesapeake Energy) 및 데본 에너지(Devon Energy)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Oklahoma City University)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 있는 소규모 인문교양대학교이다. 연합감리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9개의 대학과 1개의 감리교 신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70개 이상의 학사학위 전공과정과 법학박사(JD)와 경영학석사(MBA), 간호학 박사학위 등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대학원 학위과정을 제공한다. 직장인을 위한 성인학습과정을 이수하여 이학사 또는 문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미국대학평가에서 전체 미국대학 가운데 234위를 기록했다. 2022년 타임스고등교육의 세계대학순위에서 미국 대학 가운데 264위로 평가됐다.
오클라호마시립대학교는 1900년대 초 지역 개발사업자 안톤 클라센(Anton Classen)에 의해 엡워스대학교(Epworth University)로 시작되었다. 클라센은 다른 개발 프로젝트들과 연계하여 감리교 대학교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1902년 학교건설이 시작됐고, 1904년 학생 100명으로 개교했다. 클라센은 초기 오클라호마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감리교 대학교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엡워스대학교는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여 1911년에 문을 닫았다. 같은 시기에 교회는 오클라호마 거스리(Guthrie)에 오클라호마감리교대학교(Oklahoma Methodist University)를 설립했다. 몇 년 후 학교 관리자들은 거스리의 학교를 폐쇄하고 오클라호마시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학교는 1919년 감리교 교단의 자금을 지원받아 오클라호마시티대학(Oklahoma City College)으로 개교했으며, 폐교된 포트워스대학교(Fort Worth University)의 일부 교직원도 참여했다. 이 대학이 발전해 1924년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0년대에 상당한 성장을 했으나 대공황기에 다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남학생들이 입대하면서 학생이 줄어들었다. 1942년 재학생의 75%가 여성이었다. 선수와 자금 부족으로 축구팀 등 여러 운동부도 활동을 중단했다. 종전 후 등록학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1940년대 나머지 기간은 급속히 발전했다. 1970년대 중반 대학교는 다시 재정적 곤란을 겪었다. 1980년까지 감리교회는 300만 달러 이상의 대학교 발전기금을 모금했다. 이 대학교 동문인 제럴드 워커(Jerald Walker)가 1979년 총장에 취임한 뒤 교회의 재정 지원에 따라 대학교는 성장을 계속했다. 1981년 재정난에서 벗어났다. 1980년대에 종교대학이 만들어졌고 간호학 과정이 추가되었다. 2010년 법학대학을 오클라호마 시내로 옮기고, 의료보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4]
미국오클라호마폭탄테러
미국오클라호마폭탄테러는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알프레드 머라 빌딩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사건이다. 9층짜리인 이 건물에는 마약단속국 등 미국 연방정부의 각 기관 사무실과 탁아소 등이 들어 있었다. 이 폭발로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폭발 지점에는 폭 10m, 깊이 2.45m의 큰 구덩이가 패었다. 공무원들이 출근한 시간에, 탁아소가 있는 건물을 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이 테러에 대한 선전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또 사고 당일은 바로 2년 전 사교 집단인 다윗파의 방화자살 사건 날짜와 같다는 점이 중요한 단서였다.
범인으로 붙잡힌 티모시 맥베이(당시 26세)는 사건 발생 90분 후 발생 지점에서 100km쯤 떨어진 거리에서 과속으로 달리던 중 속도 위반으로 순찰대의 검문을 받았다. 구금된 맥베이는 보석금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담당 판사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더 구금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검문 경찰관이 맥베이를 알아보고 검거했다. 맥베이는 사건 발생 2년 전 텍사스에서 집단자살한 사교 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168명이 죽고, 6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파 주범인 맥베이는 사건 발생 6년 2개월이 지난 2001년 6월 11일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연방교도소에서 사형되었다.
당시 폭발 장소는 오클라호마시티 국립기념관과 박물관으로 기념되었다. 오클라호마시티국립기념지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주도인 오클라호마시티 시내 이전 알프레드 머라 빌딩 자리에 있다. 1995년 4월 19일 일어난 미국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희생자, 생존자, 구조자 및 모든 관련자를 기리기 위해 1997년 10월 9일 지정되었다. 면적 2만 5300m²로 비슷한 성격의 기념지로는 미국에서 최대 규모이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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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오클라호마시티〉, 《위키백과》
- ↑ 〈오클라호마 시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오클라호마시티〉, 《요다위키》
- ↑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 ↑ 〈미국오클라호마폭탄테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오클라호마시티〉, 《위키백과》
- 〈오클라호마시티〉, 《요다위키》
- 〈오클라호마 시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 〈미국오클라호마폭탄테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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