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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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게주(그리스어: Περιφέρεια Βορείου Αιγαίου)는 그리스 동부 에게해 북부에 위치한 섬들로 구성된 주이다.[1][2]
개요
북에게주의 면적은 3,835.91㎢이며 인구는 199,231명(2011년)이다. 북에게주 산하에는 히오스섬, 레스보스섬, 사모스섬이 있다. 주도는 레스보스섬에 있는 미틸리니이다.
행정구역
히오스
에게해에 있는 섬이며 고전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키오스이다. 그리스의 섬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에게 해에 있으며, 튀르키예 영토와는 7km 떨어져 있다.
마스티하(μαστίχα)라고 불리는 고무가 특산품인데, 영어로 매스틱(mastic)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자일리톨 껌에도 들어가는 물건이다.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는 일종의 향신료로 쓰거나, 로쿰을 만들 때 집어넣기도 하며, 독특한 향과 청량한 맛을 가지고 있다. 튀르키예 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에도 들어가 살렙과 더불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을 내는 역할을 한다. 튀르키예어로 히오스 섬을 '고무섬'이라는 뜻의 '사크즈아다'라고 부르는데 이 향신료 때문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매스틱이 위 건강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이 섬의 타도스 마을에서 매년 부활절마다 하는 행사가 있다. 400미터 떨어진 언덕 두 곳에 위치한 각 성당이 반대진영을 향해 서로 폭죽을 쏘아 반대편 성당의 종을 울리도록 하는 게 목표다.[3]
레스보스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중심도시는 미틸리니(Μυτιλήνη, Mytilíni)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기원전 79년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에게해 테마에 편성되었다. 4차 십자군 이후 라틴 제국에 합병되었으나 1224년 이후 니케아 제국이 재탈환하였다. 이후 1354년 제노바인 프란체스코 가틸루시오에게 봉토로 수여되며, 1462년 오스만 제국이 정복할 때까지 가틸루시오 가문이 지배하였다. 1912년 그리스 왕국이 발칸 전쟁에서 되찾은 이후 지금까지 쭉 그리스령으로 내려온다.
현재는 섬 내에 그리스 최대의 난민 수용소인 캠프 모리야가 위치하였다. 캠프 모리야는 중동,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난민들이 주를 이루는데 난민들과 현지 주민들 사이 갈등 또한 빈번하다. 2020년에는 캠프 내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많은 난민들이 살 곳을 잃기도 했다.
이 섬 사람들(레스보스인)을 가리켜 영어로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 섬 출신의 여성 시인 사포가 동성애자였다는 설에서 유래한 것이다.[4]
사모스
그리스의 섬들 중 하나로 에게해 동부에 있다. 튀르키예의 쿠샤다스(Kuşadası)까지는 10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을 정도로 가까우며, 바로 건너편에 역시 튀르키예에 속하는 디딤(Didim, 고대명은 디디마)과 마주하고 있다. 인구는 2011년 기준 32,977명이며, 전체 면적은 477.4㎦이다. 동부 에게해의 섬 가운데서도 꽤 큰 편에 속한다. 섬 인구의 1/3인 12,517명이 수도인 바시(Βαθύ)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와인의 명산지로 유명하다.
피타고라스와 에피쿠로스의 고향이며, 이솝 또한 사모스인 주인의 노예로서 이 섬에 흔적을 두었다. 때문에 섬 남동부 끝에 위치한 도시(고대 사모스의 중심지)의 이름을 피타고라스에서 따서 피사고리오라고 지었다. 항구에 피타고라스의 동상이 있다.
이오니아 문화권이었으며,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도시였다. 현재도 유명하지만, 고대부터 사모스의 와인은 특산품으로 유명했으며, 또한 로마인들이 사모스 도기(Samian ware)라고 지칭한 붉은색의 도기도 특산품으로 각지에 수출되었다. 이오니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를 차지하고 있어 중개무역이 발달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고대 사모스는 마찬가지로 이오니아의 막강한 도시였던 밀레투스와 경쟁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삼단노선을 처음 사용한 지역으로도 알려져있다. 특유의 사자문양을 새긴 사모스의 드라크마 은화는 그리스 세계뿐만 아니라 멀리 이집트, 일리리아 일대에서도 발견될 만큼 널리 통용되었다.
그리스에서 선박으로 튀르키예로 넘어가려는 배낭여행객이라면 히오스, 사모스, 코스, 로도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튀르키예인은 이 섬을 방문하는데 비자는커녕 여권조차도 필요 없기 때문에 여름 휴가철에는 튀르키예인들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근데 튀르키예어는 커녕 영어도 피사고리오를 제외하고는 거의 안 통한다 물가도 상당히 저렴하고, 코카리 해변, 포시도니오, 섬 중앙에 위치한 사화산인 케르키스 산(정상높이 1434m)을 비롯해 자연경관도 아름다운 편이라 오랫동안 쉬어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섬 내에서는 바씨를 중심으로 버스가 다니는데, 바씨에서 피타고리오까지는 버스로 12분, 코카리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튀르키예에서 사모스섬으로 넘어올 경우 3월부터 11월까지 쿠샤다스에서 배가 매일 2회 다니며, 운임은 2016년 기준으로 편도 25유로, 왕복 40유로이다. 인구가 비교적 많은 섬이라 인근의 파트모스, 아가토니시, 레로스, 코스, 낙소스 섬으로도 정기선이 꽤 자주 다니기 때문에 섬을 따라다니는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특이한 기념품으로 피타고라스의 잔이 있다.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발명한 와인잔인데, 모두가 공평한 양의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특수고안된 잔이다. 중앙에 기둥처럼 올라간 구조물이 있고 잔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잔에 그려진 금 이상으로 와인을 채우면 잔속의 와인이 구멍을 통해 죄다 흘러내린다. 원래는 포도주를 따르는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된 잔이라고 하며, 그리스 전국에서 관광지라면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원 제작지인 사모스 섬이 유명하다.
그리스인들에게도 사모스는 이국적인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튀르키예 본토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문화, 풍습이 튀르키예와 유사하고, 튀르키예로 가는 길에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5]
미틸리니
미틸리니는 그리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북에게주의 주도이다. 그리스 술 우조를 증류해 다양한 브랜드로 판매하고, 정어리, 올리브유, 라도티리 치즈 등을 수출한다. 에게대학의 본부와 중앙도서관이 있다. 터키와 가까운 미틸리니에는 난민이 많이 들어오고있고, 난민캠프가 미틸리니 인근 곳곳에 있다. 레스보스의 고대 시인 사포가 미틸리니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는 2019년 6월 현재 약 7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미틸리니는 에게해 동쪽 레스보스섬에서도 터키와 가까워, 터키를 통한 난민이 많이 들어오는 장소이다. 미틸리니 인근에는 난민 캠프가 곳곳에 있다.
전쟁과 억압적인 체제, 경제난을 피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등 자기 나라를 떠난 난민들은 레스보스섬을 거쳐 그리스나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에 정착하고자 한다.
겨울에 온화하고 여름에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1월 일중 최저기온의 평균은 6.7도이고, 7월 일중 최고기온의 평균은 30.4도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671mm이고 여름에는 비가 한 달에 6mm 이하로 내린다.
미틸리니는 그리스 술 우조의 산지로 유명하다. 15개 우조 브랜드가 여기서 빚어진다. 우조는 주정에 아니스 등 향신료를 첨가해 숙성시킨 도수 40% 정도의 술이다. 미틸리니는 정어리, 올리브유, 라도티리 치즈 등을 수출한다. 미틸리니는 해운을 통해 다른 섬 및 그리스 본토의 주요 항구와 연결된다. 렘노스를 비롯한 인근 섬, 터키의 디킬리, 피레아스와 테살로니키 등이 주요 행선지이다.
미틸리니는 BC 7세기에 레스보스섬 동부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섬의 주도권을 놓고 북부의 미팀나와 경합했다. 당시의 주요 인물은 정치가 피타쿠스(BC 640~568), 정치가-시인 알카이오스와 시인 사포이다. 피타쿠스는 미틸리니의 피타쿠스라고도 불리며 그리스의 7대 현인으로 꼽힌다. 그는 BC 7세기 말에 알카이오스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참주 멜란크루스를 몰아냈다. 또 장군으로 참전해 아테네와의 전투에서 미틸리니를 승리로 이끌었다.
시민들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되어 BC 590년부터 10년 동안 미틸리니를 다스렸다. 알카이오스는 집권자 피타쿠스와 빚어진 갈등으로 이집트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귀국했다. 미틸리니에서 태어난 사포는 미인으로 이상화된 시인으로, 소녀들에게 음악과 시를 가르쳤다. 사포와 제자들의 관계에 대한 연상으로부터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레스보스섬 사람을 뜻하는 레즈비언은 여성 동성애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미틸리니는 BC 428년에 아테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군림하던 시기였다. 이때는 또 스파르타를 필두로 한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의 지배에 반발해 BC 431년에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기 3년 전이었다. 미틸리니는 아테네 원정군에게 패배했고, 당초에 결정된 성인 남성 전원 학살 결정은 번복 되었지만 반란에 가담한 시민 약 1000명이 처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으로 활동한 뒤 BC 337~335년 2년 동안 미틸리니에서 거주했다. 이 시기에 미틸리니 출신으로 아리스토렐레스의 친구이자 후계자인 테오프라스투스가 그와 함께 지냈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81년에 미틸리니를 정복했다. 미틸리니는 로마 지배 아래서 번영을 누렸다. 중세에는 동로마(비잔티움)제국에 속했고 한동안 투르크계 셀주크족에 의해 점령되었다. 1198년에는 베네치아공국이 획득한 권리를 바탕으로 미틸리니항에서 교역했다. 13세기에 레스보스는 동로마제국의 망명계승국 중 하나인 니케아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황제가 차지했다. 이후 제노바 귀족 도메니코 카타네오의 소유가 되었다.
1335년 동로마제국은 오스만제국의 도움을 받아 레스보스섬을 다시 정복했다. 1355년 요한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는 이 섬을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제노바의 모험가 프란체스코 가틸루시오에게 선사했다. 1462년 레스보스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1912년 제1차 발칸전쟁 때 레스보스섬은 그리스왕국의 영토가 되었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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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북에게주〉, 《위키백과》
- 〈북에게〉, 《나무위키》
- 〈히오스 섬〉, 《나무위키》
- 〈레스보스〉, 《나무위키》
- 〈사모스 섬〉,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그리스 미틸리니〉,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남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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