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블랴나
류블랴나(슬로베니아어: Ljubljana, 독일어: Laibach, 이탈리아어: Lubiana, 라틴어: Emona)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다. 11개 특별시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의 연결 부분과, 사바 강으로 흘러서 들어가는 류블랴냐 강의 하구에 있다.
해발 298m 지점에 위치해 있고, 동쪽에서 흐르는 류블랴니차강, 사바강, 캄니크 비스트리강(the Kamnik Bistrica Rivers)의 합류점에서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해왔으며, 남쪽 류블랴나 습지는 그루버 운하(The Gruber Cana) 건설 이후 홍수의 위험이 감소했다.
기계·섬유·화학·제약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슬로베니아의 문화, 사회, 경제, 정치 및 행정 중심도시이다.
개요
- 행정 단위: 슬로베니아 수도
- 면적: 163.8km²
- 인구: 295,504명 (2020년)
- 지역어: 슬로베니아어
- 시장: Zoran Janković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ljubljana.si/
역사
류블랴나 지명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슬라브어의 ‘사랑스러운(Ljublj-)’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5세기에서 6세기 로마인들은 에모나(Emona, 류블랴나의 과거 지명)를 포함한 세 곳에 주둔지를 세워 슬로베니아를 가로지르는 군사 도로를 건설하였다. 당시 에모나(Emona)는 약 6천 명의 주민을 수용했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9세기에는 마자르족(the Magyars)의 침략을 받다가, 10세기 프랑크족에 장악되었다. 에모나의 몰락과 이주 정착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2세기 초 사바강 남쪽 영토는 카린시아(the Carinthian)의 공작이 관리하면서,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3세기에는 장인들이 길드를 조직하였고, 튜턴 기사단(The Teutonic Knights),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s), 프란체스코 수녀원(the Conventual Franciscans)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1256년 카르니올라(Carniola)의 공작이 된 카린시아 공작(the Carinthian duke Ulrich III of Spanheim)이 수도를 캄니크(Kamnik)에서 류블랴나로 이전하였다. 1270년 보헤미아 왕국에 정복되었다가, 1278년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에 합병되면서 라이바흐(Laibach)로 개명되었으며, 1335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았다.
1436년, 슬로베니아 가문의 첼레(Celje)가 공작으로 등극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첼레 가문은 1456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20세기 초까지 슬로베니아의 중심인 류블랴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461년에는 도시 내에 로마 카톨릭 교구(Roman Rite Catholic Diocese of Ljubljana)가 설립되었다. 16세기 류블랴나 인구는 약 5,000명으로 그 중 70%가 슬로베니아어를, 30%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다. 같은 시기 최초의 중등학교, 공립 도서관, 인쇄소가 설립되면서, 국가 내 중요한 교육 센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함께 류블랴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슬로베니아의 비공식 수도로 되었다.
1941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와 주축국의 전투가 이 도시에 영향을 미쳤고, 이탈리아는 슬로베니아를 침공하여 류블랴나는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되어 류블랴나 주로 바뀌었고, 1942년부터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는 슬로베니아인에 대한 대량학살과 학살을 시작했다. 도시는 지하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고 1942년 2월 23일 이탈리아는 슬로베니아 저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30km 길이의 철조망으로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인을 대신해 도시를 점령했다. 이 도시는 1945년 5월 슬로베니아 게릴라들이 도시를 해방할 때까지 독일이 통치하였다.
1955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요시프_브로즈_티토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국민들이 보여준 영웅주의로 인해 류블랴나의 '영웅 도시' 칭호를 수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류블랴나는 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1991년,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하여 류블랴나를 수도로 삼았다.
지리
레이캬비크는 아이슬란드섬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해안은 반도, 만곡, 해협, 섬이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은 엘리다(Elliðaá) 강인데 배가 지날 수 없다. 도시 내 강에서 연어 낚시를 할 수 있다. 레이캬비크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샤(Esja)다.
기후는 냉대습윤기후(Dfc)에 가까운 아극 해양성 기후(Cfc)가 나타나며 고위도에 위치해 있어 툰드라기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계절에 따라 긴 낮과 밤을 볼 수 있다. 때문에 5~7월 사이에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나며 반대로 12~1월 사이에는 극야현상이 나타난다.
고위도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대서양 해류와 걸프해류의 영향으로 겨울 기온이 영하 15°C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어 비교적 온화한 겨울이 나타나며 여름은 평균적으로 10~15°C로 시원한 여름을 볼 수 있다. 다만, 도시의 위치가 바다와 근접한 탓에 바람이 잦고 겨울에는 강풍이 불기도 한다.
연 강수량은 840mm며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높은 강수량이 나타난다.
행정 구역
레이캬비크는 1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며 대부분 20세기에 형성되었다.
- Vesturbær
- Miðborg
- Hlíðar
- Laugardalur
- Háaleiti og Bústaðir
- Breiðholt
- Árbær
- Grafarvogur
- Kjalarnes
- Grafarholt og Úlfarsárdalur
경제
18세기 중반까지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1786년 덴마크 왕국은 독점 거래를 폐지했고 아이슬란드 전역에 무역헌장 6군데를 설치했다. 레이캬비크는 그 중 한 곳으로 이는 무역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749년 사법집행관으로 임명된 스쿨리 마스누손(Skúli Magnússon)은 주식회사 인레틴가르(Innréttingar)를 설립하면서 모직물 제품을 생산하려 했으나 덴마크 왕 프레드릭 5세(Frederik V)의 지원으로 16개의 추가 시설을 건설하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회사는 유황채굴, 어업, 농업, 조선업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했고 이 무렵 도시의 산업화가 일어났다.
이후 지속적으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1880년에는 레이캬비크는 모든 나라와 무역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고 아이슬란드 상인들의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농업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까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1960년대 후반까지 도시 내에서도 전통적인 농장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도시 외곽에 상업농업이 존재한다.
오늘날 레이캬비크의 주요 산업은 금융, IT이다. 은행 시스템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면 개편돼 2020년 현재 아이슬란드 증권거래소(ICEX)를 비롯해 3대 시중은행 NBI, Arion Bank, Islandsbanki, 소규모 은행 및 저축은행들이 레이캬비크에 있다.
관광산업도 아이슬란드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으로 아이슬란드 방문객들이 숙박시설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은 수도인 레이캬비크이다. 어업 또한 1920~30년대 발전하여 아이슬란드 경제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수산가공·냉동·간유제조·조선업과 관련된 회사들이 레이캬비크에 위치해있다.
문화
- ‘문화의 밤’(culture night, Menningarnótt): 8월 셋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행사로 레이캬비크에서도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다. 1996년에 처음 시작하여 도심 내 다양한 문화 행사, 콘서트, 항구에서 불꽃쇼 등이 열리고 매회 10만여 명이 참석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열을 이용한 온천 및 수영장을 저렴한 비용으로 1년 내내 즐길 수 있는데, 레이캬비크에서도 다양한 곳을 방문할 수 있다.
- 할그림스키르캬 교회(Hallgrimskirkja): 뫼보르그(Miðborg)에 있는 루터교 교회다. 교회명은 아이슬란드 성직자이자 시인인 할그리뮈르 페튀르스손(Hallgrímur Pétursson)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그뷔드욘 사무엘손(Guðjón Samúelsson)이 디자인했으며 1937년 설계, 1986년 완공되었다. 레이캬비크 최대 랜드마크로 높이는 약 74m이며 초대형 오르간이 있고 정기적으로 오르간을 연주한다.
- 레이프 에이릭손(Leifur Eiriksson)의 동상: 할그림스키르캬 교회 앞에 있으며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탐험가로 콜럼버스보다 앞선 시기 북아프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이다. 그의 동상은 1930년 아이슬란드 위회 개최 1000년을 기념하여 미국 정부가 축하의 의미로 기증한 것이다.
- 하르파 홀(Harpa Concert Hall): 해변에 위치한 하르파 홀(Harpa Concert Hall)은 2011년 개관했다. 현무암 절벽을 형상화 한 유리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날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며 공연뿐 아니라 간담회 등도 열린다.
교육
레이캬비크에는 아이슬란드 대학교, 레이캬비크 대학교, 아이슬란드 예술대학이 있다.
- 아이슬란드 대학교(University of Iceland)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고등교육기관으로 국립과학연구소가 위치해 있다. 1911년 설립된 이 학교는 종합대학으로 성장하여 14,0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사회과학, 인문, 법학, 의학, 자연과학, 공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 레이캬비크 대학교(Reykjavík University)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사립대학교로 3,5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1988년 컴퓨터 과학을 시작으로 10년 뒤 경영대학이 설립되었고 2000년 ‘레이캬비크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2년 법학대학, 2005년 아이슬란드 기술 대학교와 합병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대학에는 2020년 현재 법학대학, 경영대학, 컴퓨터과학대학, 공과대학이 있다.
- 아이슬란드 예술대학(Iceland Academy of the Arts)은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대학 수준의 예술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1998년 9월 21일 아이슬란드 연극학교(Iceland Drama School)와 레이캬비크 예술학교(Reykjavík Arts Schoo)를 통합하여 설립되었으며 1999년 가을부터 정규과정이 시작되었다. 2020년 현재 예술교육, 디자인 & 건축, 미술, 음악, 연극 & 무용 총 5개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
참고자료
북유럽 같이 보기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