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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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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위치
우치주 위치

우치주(폴란드어: Województwo łódzkie)는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주이다.[1]

개요[편집]

우치주의 면적은 18,219㎢이며 인구는 2,571,534명(2021년)이다. 마조프셰주(북쪽과 동쪽),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남동쪽), 실롱스크주(남쪽), 오폴레주(남서쪽), 비엘코폴스카주(서쪽), 쿠야비포모제주(북쪽)와 접한다. 주도는 우치(Łódź Voivodeship)이다. 3개 도시군과 21개 군, 177개 그미나(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교통[편집]

우치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공항[편집]

폴란드 중부 우츠키에(Łódzkie)주의 주도(州都) 우치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약 6km 거리에 위치한다. 정식 명칭은 19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Władysław Stanisław Reymont, 1867-1925)를 기념하여 명명하였다. 1925년 9월 13일 개항했으며, 1927년 첫 국내선 정기 노선이 취항하였다. 2005년 구 터미널인 2터미널을 개관하였다. 2007년 활주로를 확장하여 현재의 길이를 갖추었다. 2012년 6월 2터미널을 사용 중지하고 3터미널을 개관하였다. 공항 코드는 LCJ(IATA), EPLL(ICAO)이다.

여객 터미널은 2층 규모의 한 동이다. 활주로는 2,600m×45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한다. 스칸디나비아항공·라이언에어(Ryanair)·체코항공·아드리아항공(Adria Airways)의 총 4개의 항공사가 취항한다. 국제선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 노르웨이 오슬로(Oslo), 아일랜드 더블린(Dublin), 영국 런던(London)·캐슬도닝턴(Castle Donington)·에딘버러(Edinburgh), 독일 뮌헨(München), 체코 프라하(Praha)의 총 6개국 8개 도시로의 정기 직항 노선을 운항한다. 국내선은 수도 바르샤바(Warszawa)의 1개 도시로의 직항 노선이 있다. 공항과 우치 시내를 잇는 65번, 55번 버스 노선이 운행되며 도로 교통편으로는 14번 도로가 인접한다.[2]

교육[편집]

우치대학교[편집]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우치에 있는 국립 종합대학교이다. 폴란드 정부가 설립한 18개 국립대학교의 하나로 명문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12개 학부에 76개 분야의 학사학위 프로그램과 160개의 특별과정을 비롯해 60개 이상의 석박사과정이 개설돼 있다.

매년 약 1만 명의 학생이 졸업한다. 유럽연합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80여 개국에서 1,800 여 명의 교환학생이 재학한다. 상당수의 프로그램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가운데 경제학과 컴퓨터과학, 경영학 분야의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가 높다.

우치대학교는 프랑스의 장물랭 리옹3 대학교와 프랑수아라벨레대학교, 미국 텍사스오스틴대학교, 볼티모어대학교, 메릴랜드대학교의 로버트스미스경영대학원, 타우슨대학교, 핀란드의 센트리아 전문대학교, 독일의 뮌스터 대학교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이 대학교의 동문 가운데 폴란드 총리와 국립은행총재를 역임한 마렉 벨카와 폴란드법무부 장관을 지낸 크지슈토프 콰트코프스키, 판타지 작가 안드레이 사프코프스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치대학교는 1945년 이 지역에 있던 고등교육기관들이 통합되어 탄생했다. 우치대학교의 전신은 교사훈련대학(Teacher Training Institute, 1921~1928)과 사회경제학고등대학(the Higher School of Social and Economic Sciences, 1924~1928), 자유폴란드대학교 분교(division of the Free Polish University, 1928~1939) 등이다.

이 대학교는 1945년 바르샤바 봉기로 바르샤바가 완전히 파괴된 후 자유폴란드대학교의 테오도르 비에베거(Teodor Vieweger) 교수 등에 의해 설립됐다. 약학과 의학, 치의학 등 6개의 학부를 갖추고 문을 연 첫 해부터 7,000명 이상의 학생이 등록했다.

1952년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위한 폴란드어학교가 설립되어 계속 운영되고 있다. 1998년 토마수프마조비에치키에 우치대학교의 분교가 세워졌다. 2007년 법학행정학부에서 알렉시스 드 토크빌 정치법학 사상 센터가 세워졌다. 대학중앙도서관은 중부유럽에서는 가장 큰 대학도서관 중의 하나로 약 30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3]

우치[편집]

우치는 폴란드 중부 우치주의 산업도시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인구 800명 미만의 작은 도시였으나 19세기 들어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면서 급속히 대도시로 발전했다. 한때 ‘폴란드의 맨체스터’로 불렸다. 국제정세에 따라 프로이센, 러시아, 독일에 차례로 점령당한 역사가 있다. 1990년대부터 섬유산업 쇠퇴와 고령화, 인구 감소에 직면하여 도시 재생 등으로 활력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우치는 근대에 들어 급속히 발전한 도시이다. 우치가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은 1332년이며, 도시로 공인받은 것은 폴란드 왕국이 야기엘로니안왕조(1386~1596) 치하이던 1423년의 일이었다. 16세기에도 주민 수는 800명이 채 안 됐고 대부분 주변 곡물농장에서 일했다.

폴란드는 1793년 영토의 동쪽은 러시아가, 비엘코폴스카 등 서쪽 지역은 프로이센이 빼앗아가는 2차 분할을 당했다. 이때 우치는 프로이센 영토로 편입돼 남프로이센주에 속하게 되었다.

1807년, 프로이센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의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패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맺은 틸지트조약에 따라 폴란드 영토 중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는데 우치는 여기에 속해 있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열린 빈 회의에서 바르샤바 대공국 영토 대부분은 러시아 황제가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 치하로 넘어갔다. 1816년 러시아가 황제 포고령을 통해 우치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에 나섬에 따라 우치는 주변 외국인, 특히 수많은 독일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다.

우치는 급속히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1825년에 방직공장이 세워졌다. 1839년에는 당시 첨단기술로 꼽히던 증기기관을 이용한 공장이 세워졌다.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 · 기술자 · 사업가들이 우치로 몰려들었다.

우치는 러시아 제국의 섬유산업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1850년에는 러시아가 폴란드 왕국과의 교역에서 관세를 철폐하고 1865년에는 철도가 개설돼 도시는 더욱 번창했다.

1823년부터 1873년 사이에 우치의 인구는 10년마다 두 배로 증가했다. 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치는 인구 31만 5,000명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다섯 번쨰로 큰 도시였다. 이 시기의 공업도시 우치는 19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브와디스와프 스타니스와프 레이몬트(1867~1925)의 작품 ‘약속된 땅’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공장지대여서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었기에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892년 대규모 파업 때는 시내 대부분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1905년 러일전쟁 여파로 폴란드의 경제도 악화돼 노동자 10만 명가량이 직장을 잃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우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다.

러시아 경찰과 코사크 기병부대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점점 악화돼 1905년 6월 21일 대규모 봉기가 시작됐다. 봉기는 5일간 이어졌으나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진압됐다. 폴란드 노동자 수백 명이 사망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우치는 독일에 점령당했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망국(3차 분할) 후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우치의 인구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약 40%가 줄면서 우치는 급속한 성장을 멈추고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주된 생산품인 면직물이 서방에선 독일과의 관세전쟁 때문에, 동방에선 러시아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판로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치는 1939년 11월 우치를 독일 영토에 편입됐다. 도시 명칭도 1차 세계대전 때 우치를 점령한 독일 장군(카를 리츠만)의 이름을 따 ‘리츠만 슈타트’로 바뀌었다.

독일은 유대인들을 우치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집단수용소나 학살장소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치에는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2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전쟁을 거치며 거의 사망하고 1만 명가량만 살아남았다.

1945년 1월 18일 소련군이 우치에 진입하면서 나치 독일 지배는 끝났고 폴란드는 인민공화국 체제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수도 바르샤바가 철저히 파괴되었기에 1945~1948년 사이 우치에는 폴란드 정부기구와 관료 대부분이 몰려 있었다.

인민공화국은 전면적인 기업 국유화 정책을 시행했다. 우치의 자본가 · 공장주들은 모든 재산을 잃었다.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전후 재건이 시작되었다.

우치의 인구는 1988년 최고(85만4261명)를 기록한 이후 조금씩 줄고 있다. 2007년까지만 해도 바르샤바에 이어 폴란드 제2 도시였으나 곧바로 크라쿠프에 2대 도시 자리를 내주었다. 저출산 · 고령화의 영향에다 1989년 폴란드 민주화 이후 시장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다.

2004년 폴란드가 EU에 가입한 효과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옛 공장 터를 현대적 복합 쇼핑몰로 바꾸는 도시 재생 사업과 함께 문화예술 관련 인프라를 늘리는 등 활력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우치주〉, 《위키백과》
  2. 두산백과: 우치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3. 세계의 대학: 우치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폴란드 우치〉,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동유럽 지리
동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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