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김홍집(金弘集, 1842년~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인이다.
목차
개요
- 김홍집은 조선의 문신, 마지막 영의정. 을미사변 후 일본의 압력에 의한 을미개혁을 실시하다가, 의병들의 규탄을 받고 붕괴되었으며, 그는 살해되었다. 본관 경주(慶州) 김씨이며 개성유수를 지낸 김영작(金永爵)과 창녕 성씨의 아들(3남)로 1842년 7월에 출생하였다. 초명은 굉집(宏集)이었으나 홍집(弘集)으로 개명하였다. 천주교도이자 개화사상에 식견을 지닌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성립시켰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순종 때 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이 있다.[1]
- 김홍집은 자(字)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이다.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진압 후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1896년 관제 개정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 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함께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 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백성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었다.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 고종(高宗) 건륭황제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자(字)를 바꾸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그의 사위였다. 박규수, 오경석, 강위의 문인이다. 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 외에도 단발령 강행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집회를 야기하였고, 1896년(건양 1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홍집은 많은 대신이 피살될 때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친러파 군인들과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2]
- 김홍집은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이며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굉집(金宏集),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 · 이정학재(以政學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후손이다.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다음, 1868년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다. 몇 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고,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 · 훈련도감 · 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興陽)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1895년 5월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상태에서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 간의 갈등 심화 등으로 인해 총재직을 사임하자, 박정양(朴定陽) ·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 사건이 탄로나 일본으로 망명하자, 같은 해 7월 재차 입각하여 친미(親美) · 친러파(親露派)와 제휴로 이뤄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런데 김홍집 내각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철저하지 못해, 시종 반일 · 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임진면에 있었으나, 6 · 25사변 후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다.[3]
- 김홍집은 조선 개화기의 정치인이다. 초명은 굉집(宏集). 그의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가 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바 있는 온건개화파이며, 1894년에는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갑오개혁, 을미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단발령 등으로 분노한 민중에 의해 아관파천 직후 살해당했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구한말 최초의 총리였다. 관료와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참판이 되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통상을 전담하는 당상경리사가 되었다. 한때 위정척사파의 반대에 사표를 썼으나 얼마 안 가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이 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에 신헌의 부관으로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과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때도 함께 갔다. 그 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호조참판, 공조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883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4년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瓣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하여 대외 통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갑신정변 뒷수습을 위해 좌의정을 겸하고 1885년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종1품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있다가 1887년 다시 좌의정이 되지만 사임하고 수원 유수가 되어 백성의 반란으로 고생했다.[4]
김홍집의 생애
-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셋째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1845년에서 1848년까지 경상도 경주에서 잠시 3년간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김효대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의 후손이다. 실학자 환재 박규수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67년 정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재생 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1867년(고종 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훈련도감, 사간원을 거쳐 흥양현감(興陽縣監:현재 전남 고흥)이 되었다.
- 1880년 6월 25일 예조참의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할 때 청나라 공사관 참찬관인 황준헌(黃遵憲)을 만났고 그가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서 이를 소개하고, 조선은 청국과 친(親)하고 일본과 결(決)하며 미국과 연(緣)하여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개화파의 지지를 받아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유학자 중심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뒤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부사로서 활약하고 이어 제물포조약 체결에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후 일본 세력이 표면화되고 강력해지자, 그 힘으로 제1차 김홍집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세력을 잡자 강력한 친일파 인사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여 새로운 국가체계를 세우고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의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이후 프랑스·러시아·독일이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건 삼국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제4차 김홍집내각을 세웠다. 내각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단발령(斷髮令)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규탄을 받았으며, 1896년 친러파 내각의 탄생과 함께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그때 많은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홍집도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되었다.
김홍집에 대한 평가
-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 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받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서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1960년대 가서야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되었으나 한국전쟁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김홍집 선생 묘》는 1986년 6월 16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김홍집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과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점 등은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또한 구한말의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이끌며 개항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
김홍집 영세불망비
- 김홍집 영세불망비(金弘集永世不忘碑)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麻北洞)에 있는 조선 말기의 개화파 김홍집(金弘集)의 불망비(不忘碑)이다. 마북동(麻北洞) 330-1에 있다. 개화파 김홍집(金弘集)이 관찰사로 재임할 때 베풀었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1884년 6월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며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총 높이 176cm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도로 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을 갖추고 있으며, 비신(碑身)의 앞면에 '관찰사김공홍집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弘集永世不忘碑)'이라는 구문과 '병심지공 위정이인(秉心至公 爲政以仁)'이라는 구문이 새져겨 있다. 뒷면에는 '갑신육월 일 립(甲申六月 日 立)'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로 보아 이 비의 건립 연월 추정할 수 있다.
김총리유고
- 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는 조선 후기에 총리대신을 지낸 도원(道園) 김홍집(金弘集)의 시문유고(詩文遺稿)이다. 필사본. 8책.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정인보(鄭寅普)의 서문에 따르면, 그의 종자(從子) 춘희(春熙)와 종손(從孫) 교신(敎莘) 부자가 양대에 걸쳐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본고(本稿)가 시중 책방에 유락(流落)된 것을 이희종(李喜鍾)이 구입하여 당시 보성전문 도서관에 기증, 보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채 8책으로 분권된 필사본 그대로이다. 내용구성은 권1은 차주의(箚奏議), 권2는 서(序) ·기(記) ·제(題) ·발(跋) ·명(銘) ·찬(贊) ·설(說) ·제문(祭文) ·진향문(進香文) ·기우제문(祈雨祭文) ·고문(告文) ·전(箋), 권3은 묘표(墓表) ·묘지(墓誌) ·묘갈(墓碣), 권4는 소(疏) ·수신사별단(修信使別單), 권5는 가장(家狀) ·행장(行狀) ·시장(諡狀), 권6~8은 일기(日記) 등으로 되어 있다. 저자가 비운의 최후를 마친 탓으로 시문이 거의 산일(散逸)되었으나, 여기에 수록된 주(奏) ·소 ·일기 및 수신사별단 등은 당시의 내외사실(內外史實)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김홍집선생묘
- 김홍집선생묘(金弘集先生墓)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 김홍집의 묘이다. 1986년 6월 16일 고양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김홍집(1842~1896)은 자 경능(敬能), 호 도원(道園), 본관은 경주이다. 1867년(고종 5)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예조참판에 올랐으나 개화반대세력에 몰려 사직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다시 조약체결의 부사(副使), 경기도 관찰사로 재직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으며 동학혁명 이후 영의정에 올랐다. 세상을 떠난 뒤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는 대자골에 있는데, 원래 파주에 있던 묘를 1975년 6월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묘 왼쪽에는 정경부인 남양 홍씨의 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묘의 총 둘레는 15m이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그 좌우로는 망주석을 배치해놓았다. 봉분 오른쪽에는 옥개석을 갖춘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높이 240cm, 폭 95cm, 두께 45cm이고 비문은 후손 정록(正祿)이 썼다.
수신사일기
-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는 1880년(고종 17)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문제로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金弘集)의 기록. 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본서는 복명서(復命書) 및 입시하여 일본의 상황 등에 대해 고종과 대담한 입시연설(入侍筵說), 청나라의 외교관 황쭌셴(黃遵憲)이 조선의 외교정책의 방향에 대해 권고한 《조선책략 朝鮮策略》, 황쭌셴 ·하여장(何如璋)과 필담한 내용인 <대청흠사필담(大淸欽使筆談)>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 내용은 당시 조선 집권층의 대외인식과 개화정책의 방향 등에 관하여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공사문답록
- 공사문답록(公私問答錄)은 1880년(고종 17)에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 일본에 가서 외국인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 필사본. 1권 1책.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일본 정계의 거물인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사쿠라다 지카요시(櫻田親義)·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과의 5차에 걸친 회견내용과 일본 주재 청국(淸國) 외교관인 황준헌(黃遵憲)·하여장(何如璋)과의 문답 내용을 적은 것이다. 순한문으로 된 초서(草書)로서 판독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으나, 개항(開港) 초기의 대일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김홍집〉, 《위키백과》
- 〈김홍집〉, 《나무위키》
- 〈김홍집(金弘集,1842~1896)〉, 《두산백과》
- 〈김홍집 (金弘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달뫼, 〈10월 29일 / 김홍집, 좌의정 임명됨〉, 《네이버블로그》, 2024-10-29
- 이명자, 〈김갑신정변과 김옥균, 김홍집의 의견〉, 《네이버블로그》, 2024-10-01
- 싱아, 〈조선을 개혁하고 싶었던 그들 "김옥균과 김홍집"〉, 《네이버블로그》, 2024-05-23
- 서유당,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을 읽은 후 조선 조정에서의 반응〉, 《네이버블로그》, 2023-02-07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