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수원화성(水原華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지형에 맞추어 읍성과 산성의 구조가 모두 존재하도록 축조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 정조 시기에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에도 수원시의 자랑이자 랜드마크이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명칭[편집]
정식 명칭은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약칭으로 수원성(水原城), 또는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르며,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실제로 시와 군이 분리될 경우, 특히 그 군의 전통적인 중심지가 분리될 경우 지명으로 시 지역과 군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기존 지명에서 한 글자를 바꾸거나(청주시 - 청원군 등), 고지명(충주시 - 중원군 등) 혹은 유적 이름(경주시 - 월성군 등)을 쓰는 방식을 썼다. 다만 전통적인 중심지가 아닌 곳이 시로 분리되는 경우 시 쪽이 새 이름을 지었는데 대개 시가 될 지역의 읍면명을 땄다(사천군 - 삼천포시 등).
실제로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을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였으나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의 행정구역 화산군이 등장한다.
구조와 특징[편집]
군사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치성의 활용으로, 성벽 전체 구간에 치성을 갖추어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사각없이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성형 요새의 삼각형 포루(砲樓)다.
다만 세간에 퍼진 화포에 대비하여 성벽을 낮게 쌓고 뒤쪽에 언덕을 덧대었다는 이야기는 낭설에 가깝다. 이런 방식은 내탁외축이라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전통의 축성방식이다. 오히려 이렇게 안 지은 성을 찾는 게 어렵다. 당시 조선은 화포에 대비하여 특별히 새로운 설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성벽이 화력을 견디지 못해 성형요새가 등장하는 유럽이라면 모를까, 19세기 이전에 화포로 성벽을 완전히 때려 부수는 것은 대형 화포 사용 비중이 극도로 낮은 동아시아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성첩(성 위에 병사들의 엄폐물로 쌓은 담장)을 무너트리거나 외벽을 일부 파손해서 기어 올라갈 만한 틈을 만드는 게 한계였다. 평지에 쌓은 전축성의 경우엔 홍이포쯤 되는 화포로 집중 사격하면 벽 일부를 뚫을 수 있긴 했지만, 그런 성은 다중성벽이 기본이라 효율적인 짓은 아니었다.
성벽 높이도 삼년산성 같은 삼국시대의 거대 성벽이나 해외의 거성에 비교하여 낮은 것이지 조선시대의 읍성치곤 그렇게 낮지도 않다. 수원화성의 성벽이 낮은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 부족이다. 원안은 25척의 높이를 가진 성벽을 쌓는 거였는데 예산이 딸려서 20척 높이로 낮춰 쌓았다고. 사실 수원화성은 조선에서 중국식 성곽 시설을 도입하여 쌓은, 기존에 없던 성곽 건축의 시제품으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지 군사 요새로서는 여러모로 부실한 점이 많다. 치성이 잘 갖춰있긴 해도 다중성벽에 천연 해자를 갖춘 진주성, 평양성이나 지금 가도 토나오는 험지에 지은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성벽 뒷쪽에 파낸 흙으고 둔덕을 쌓아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간혹 팔달문=수원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나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양도성의 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수원화성을 짓는 중에 정조가 수원유수부 관아를 화성행궁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면서 1912년 수원유수부를 철폐하여 관아가 폐지되었다. 이후 수원부청이 세워졌으나 조선총독부의 결정으로 수원부청은 수원화성 바깥으로 나가게 됐다. 결국 현대 대한민국에 와서 수원화성 내부에는 오랫동안 수원시청 및 수원시 관련 행정관청이 단 하나도 없었다. 2014년 4월 팔달구 구청이 수원화성 내부 종로사거리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102년 만에 수원화성 내부에 수원시 지방관청이 처음으로 복귀했다.
역사[편집]
건축배경[편집]
-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 정조, 《정조실록》 15년(1791)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한 이유와 유사하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다. 거기다가 도로 공사를 장려하지 않는 조선의 교통망을 생각하면 말이다.
건축과 재건[편집]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6.25 전쟁 당시에 반파당한 장안문의 모습이다. 문 앞에 세워진 수원시 경계 표지판(This is Suwon)이 눈에 띈다. 왜 경계판이 여기 있었냐면,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직 장안구 중북부 지역(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등)이 수원시에 편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화성군 일왕면). 이 지역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전쟁의 참화를 워낙 심하게 겪은 나머지, 복원 전에는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았는데, 동문은 도망가고 북문은 부서졌네"라는 노래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고로 저 반파된 장안문의 모습은 1951년 1월 경의 모습이고, 1년 뒤인 1952년에는 반파된 문루는 무너지고 홍예의 형태까지 더 심하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의 4대 문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게 장안문이다.
다행히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복원물, 혹은 최근에 건축된 건물은 극히 적은데 수원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원래 설계 도면과 건축 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과거 건축 방법 그대로 재연해서 복원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즉 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공습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됐다.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사가 잘못 진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굵기를 굵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결국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다시 완공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성곽 근처에 많은 이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꾸준히 문화재 구역 안의 사유 주택들을 매입해서 허물고 문화재 구역으로 바꾸는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화성 인근지역은 건축 규제가 심한 편으로, 많은 주민들의 불만사항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공심돈으로 대표되는 팔달문 주변 일부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복원되지 못했다. 정확히는 팔달문 기준 서남암문쪽으로 95m, 남수문쪽으로 160m 정도가 건물이 들어선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따라서 팔달문 좌우에 있어야하는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도 복원되지 못했다. 참고로 적대는 장안문 좌우와 팔달문 좌우에만 있다. 현재는 팔달문시장의 일부가 철거되는 등 복원의 기초가 다져 지고 있다.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2006년 5월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 먹었다. 이 바람에 정조어필인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는데,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었고 90년대에 불태워 먹은 서장대도 6.25전쟁에 휘말려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한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하기도 했다. 문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서장대 사고 이후 방화 창호지를 썼기 때문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2013년에는 성벽에다 불을 지른 적도 있는데 용의자는 중학생이라고 한다. 용의자 주장에 따르면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고. 엄밀히 말해 성벽 자체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 성벽 주변 억새밭에다 불을 질렀다고 한다.
2011년 이후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 일주가 가능해졌다. 화성 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팔달문 인근이 이렇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이미 못골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 이걸 다 헐어내고 성곽을 연결시킨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
방어시설[편집]
4대 성문[편집]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남문, 서문, 북문, 동문 4개의 성문이 있다.
장안문[편집]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 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팔달문[편집]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창룡문[편집]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머리는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궁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동쪽에 있는 옹문으로써 동옹문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이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자랑 청룡열차이다.
화서문[편집]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수문[편집]
화홍문[편집]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남수문[편집]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舖)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등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장대(將臺)와 노대(弩臺)[편집]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편집]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성곽 내부와 궁궐 안까지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서장대이다. 석성으로 쌓은 성곽에서 한쪽 끝에 궁궐로 화성행궁과 창경궁이 성곽을 쌓는 시기에 구체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궁궐인 창경궁에 안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는 궁궐 내부로 있다.
동장대[편집]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공심돈(空心墩)[편집]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수원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편집]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동북공심돈[편집]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남공심돈[편집]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서북공심돈 =[편집]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암문[편집]
암문(暗門)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동암문[편집]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북암문[편집]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과 거의 함께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정조 19년) 2월 23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서암문[편집]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남암문[편집]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현재는 미복원 상태로 있다.
서남암문[편집]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舖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각루[편집]
각루(角樓)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편집]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각루[편집]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동남각루[편집]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서남각루(화양루)[편집]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봉돈[편집]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포루(砲樓)와 포루(舖樓)[편집]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벽돌로 짓고 포루(舖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포루(砲樓)[편집]
포루(砲樓)는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남포루[편집]
남포루(南砲樓)는 팔달산 중턱 서남암문 근처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준공되었다. 구조는 동북포루와 거의 동일하다. 여장에는 타구와 전안을 뚫었고, 타구의 안에는 전판문을 달았다. 마루, 지붕 등의 구조는 서포루와 비슷하다. 남포루에는 대포와 혈포가 각 2대, 총안 19개가 설치되어 있다.
동포루[편집]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垛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북동포루[편집]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과 북수문 사이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중층이며, 도리는 납도리이고 홑처마의 5량 구조이다. 포루 밖으로는 우진각지붕을 안으로는 박공지붕으로 하였다.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계단을 설치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도로 했다. 그 외는 북서포루와 비슷하다.
북서포루[편집]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서포루[편집]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포루(舖樓)[편집]
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북포루(北舖樓), 서포루(西舖樓) 등이 있다.
동북포루[편집]
동북포루(東北舖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동일포루[편집]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동이포루[편집]
동이포루(東二舖樓)는 봉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누각 밑에는 총안을 뚫어 놓았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3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납도리를 썼으며, 지붕틀은 5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하층의 총안 등은 동북포루와 동일하다.
북포루[편집]
북포루(北舖樓)는 서북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5년 (정조 19년) 2월 20일에 준공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중층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처마는 홑처마에 민오리집이며, 상층에는 주위에 전판문을 달았다.
서포루[편집]
서포루(西舖樓)는 서장대 남쪽 서암문과 서삼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18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내면은 나무사다리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치(稚)[편집]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적대(敵臺)[편집]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질과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북서적대(北西敵臺)[편집]
북서적대(北西敵臺)는 장안문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북동적대(北東敵臺)[편집]
북동적대(北東敵臺)는 현안과 총안을 두어 성문과 응가성을 방어하던 곳이다.
남서적대(南西敵臺)[편집]
남서적대(南西敵臺)는 팔달문 옆 팔달산쪽에 있었는데 도시화로 복원되지 않았다.
남동적대(南東敵臺)[편집]
남동적대(南東敵臺)는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기타 시설[편집]
화성행궁[편집]
화성행궁은 화성 내부에 위치해있는 궁궐이다. 2007년 6월 8일, 사적 제 478호로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여민각[편집]
여민각(與民閣)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성신사[편집]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효원의 종각[편집]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관광[편집]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 특히 한양도성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라든가, 종로 옆의 수원천이라든가. 한양도성으로 치면 종로와 청계천이 나란히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특히 화서문 - 장안문 - 화홍문 - 방화수류정 - 활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 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 열차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화성 관람 시 관람료는 성인 기준 1,000원이며 중간중간 매표소에서 직원이 표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수원시민은 주소가 기재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관람료가 면제된다. 또한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창룡문 밖 주차장에 수원화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열기구가 생겼다. 다만 좀 비싸다. 15분 정도 탑승하는데 성인 18,000원, 청소년 17,000원, 어린이 15,000원이며, 수원시민의 경우 연령 구분 없이 성인 요금의 30% 할인된 가격인 12,6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 수원화성 관람
- 하절기 (3월 ~ 10월) 동절기 (11월 ~ 2월) : 상시
- 휴무일 : 연중무휴
- 요금 : 무료
- 수원화성은 개방형이며 야간 관람 가능
- 화성행궁 관람
- 하절기 (3월 ~ 10월) 동절기 (11월 ~ 2월) : 09:00 ~ 18:00
- 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마감 : 관람시간 30분 전
- 야간개장 기간 : 2022. 5. 1.(일) ~ 10. 31.(일) 기간 중 매주 수 ~ 일요일
- ※ 월요일, 화요일은 화성행궁 야간개장 미운영
- ※ 단,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 정상운영
- 야간개장 시간 : 18:00 ~ 21:30 (입장마감 21:00)
- 요금 : 어른(1,500원) 청소년 및 군인(1,000원) 어린이(700원)
- 단체(20인 이상) 요금 : 어른(1,200원) 청소년 및 군인(800원) 어린이(500원)
- 무료 :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화성행궁 야간개장은 제외)
- 2단계 복원공사로 인해 일부 시설(낙남헌, 노래당, 화령전 등)의 관람제한
- 화성어차 요금
노선 구분 어른 청소년 및 군인 어린이 연무대 출발 (순환형 노선)
개인 4,000원 2,500원 1,500원 단체(20인 이상) 3,200원 2,000원 1,200원 화성행궁 출발 (관광형 노선)
개인 6,000원 4,000원 2,000원 단체(20인 이상) 4,800원 3,200원 1,600원
- 국궁체험
요금 : 개인 1회 10발 : 2,000원
- 효원의 종 타종
구분 타종요금 회수 타수 1 ~ 2명 1,000원 1회 3타 3 ~ 4명 2,000원 1회 3타
※ 1타 : 부모의 건강을 기원 / 2타 : 가족의 건강을 기원 / 3타 : 나 자신의 발전을 기원
-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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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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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 수원화성 안내 홈페이지 - https://www.suwon.go.kr/web/visitsuwon/pages/hs01/hs01-01/list.do
-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 https://www.swcf.or.kr/?p=59
- 유네스코와 유산 홈페이지 - https://heritage.unesco.or.kr/%ED%99%94%EC%84%B1/
- 〈수원화성〉, 《나무위키》
- 〈수원화성〉, 《위키백과》
- 이성규 기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쌓은 성곽〉, 《사이언스타임즈》, 2016-03-21
- 정찬필 기자, 〈조선 시대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 《레저신문》, 2021-04-02
- 구완회 여행작가, 〈정조의 꿈, 정약용의 학문, 수원화성〉, 《비즈한국》, 2021-03-23
- 권순섭 기자, 〈경기도 가볼만한 곳 ‘수원 화성’ “성벽을 따라 걷는 성곽길로도 유명한 대한민국 명소”〉, 《한국강사신문》, 2021-06-10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