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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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내티(영어: Cincinnati)는 미국 오하이오주 남서부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23만 명으로 클리블랜드, 콜럼버스에 이어 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 오하이오강을 사이에 두고 켄터키주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신시내티는 88위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0곳에 선정되었고 포브스는 신시내티를 2023년 젊은이에게 가장 좋은 도시 5위로 선정했다.[1]
개요[편집]
신시내티는 오하이오주 해밀턴군의 군청 소재지이며 인디애나주 접경에서 동쪽으로 24㎞ 떨어져 있다. 오하이오주, 켄터기주, 인디애나주 외곽에 걸쳐 있는 광범한 지역의 상업, 교통, 산업의 중심지이다. 1788년에 로잔티빌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으며 1790년 노스웨스트 준주의 초대 총독이었던 아서 세인트 클레어(Arthur St. Clair)에 의해 신시내티로 개칭되었다. 1811년 서부지역 최초의 증기선인 뉴올리언스호가 피츠버그에서 강 하류를 따라 신시내티에 운항하면서 하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819년 시(市)가 되었다. 1832년 데이턴까지 이어지는 마이애미-이리 운하가 완공되고 1843년 리틀마이애미 철도의 첫 구간이 부설되면서 수운과 육상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시는 돼지고기 정육업의 중심지로 유명하여 '돼지고기의 도시'라는 뜻의 '포코폴리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시내티는 공작기계, 비누, 오락용 카드, 오르간, 화학제품, 의류, 건축자재, 가구, 화장품, 인쇄물, 제트엔진, 신발, 포장육 등 다양한 제조업이 이루어지며 큰 기업들의 본사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세계 제1의 비누 생산지로 알려졌다. 또한 자동차 부품, 화학, 철강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신시내티는 중북부의 주들과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신시내티대학교(1819), 신시내티기술대학(1966), 제이비어대학교(1831), 오하이오마운트세인트조지프대학(1906), 에지클리프대학(1935) 등이 있다. 신시내티 미술 박물관과 19세기 중반에 노예 탈출을 도운 국립지하철도 자유센터 등의 박물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명소로는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는 마운트오번에 있는 미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의 생가, 해리엇 비처 스토 하우스 주립기념관, 조각가인 아우구스트 폰 크렐링이 건축한 타일러 데이비드슨 파운튼(1871) 등이 있다. 시 북쪽에는 테마 놀이공원인 킹스아일랜드가 있다. 스포츠 팀으로는 미국 최초로 창단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인 신시내티 레즈와 NFL 미식축구팀 신시내티 벵골즈 등이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인디애나주 및 켄터키주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그래서 이 지역을 세-상태(Tri-state)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오하이오강을 따라 켄터키주의 코빙턴과 접한다. 세 주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보니 세 주에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이며, 따라서 도시 자체 인구에 비해 유동인구가 많다. 시내 인구는 30만이 약간 안 되는 중소도시이지만, 켄터키주, 인디애나주까지 걸쳐 있는 생활권의 인구는 클리블랜드와 동일한 수준이다. 사실 인디애나 주 방면엔 도시가 없고 도시 외곽순환도로인 275번 고속도로가 인위적으로 늘어져다.
신시내티의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냉대 기후에 속하며, 습고젖은 대륙성 기후를 띈다. 다만 1월 평균 기온은 변동폭이 커서 대전광역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기후적으로는 그렇게 덥지 않은 여름과 춥지 않은 겨울로 미국 내에서도 살기좋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지난 2~3년동안 겨울 폭설을 기록했다. 2014년 신시내티대학교 봄학기에 폭설과 강추위로 10번 넘게 휴교령을 내리기도 했다.
역사[편집]
원래 신시내티 지역에는 마이애미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으며, 정착자들이 1788년에 도착하여 로잔터빌(Losantiville)이란 마을을 설립하였다. 1790년 노스웨스트 준주의 총독 아서 세인트클레어 장군이 정착지의 이름을 신시내티로 고쳤다.
1700년대 후기에 많은 정착자들이 마을에 와서 새로운 비지니스를 열거나 둘러싸여 있는 지역에 농장을 세웠다. 1802년에 도시로 형성되었고, 1810년에는 2,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800년대 초반에는 강 무역의 결과로 도시가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811년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기선 업무가 시작되어, 물건들을 빠르고 비용이 덜 들게 운송하도록 허락되었다. 신시내티는 곧 중요한 강의 항구가 되었고, 1819년에 도시 헌장을 받았다. 1827년 근로자들은 이리호 운하의 첫 부분을 완공하였다. 신시내티와 오하이오 북부를 잇는 이 운하는 지방적 무역을 크게 늘였다. 1830년에는 도시 인구가 25,000명 가까이 도달하였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수천 명의 독일인 이민들이 신시내티에 정착하였고, 도시의 문화와 경제적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40년대에는 아일랜드 이민들도 연달아 들어왔다. 그 시기에는 가축 도살업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1800년대 중기에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지하 철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남북전쟁 중에는 신시내티와 남부 간의 교역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상인들은 무기 공장을 열고, 무기를 만들어 정부에 팔면서 이득을 얻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신시내티에서 남서부로 향하는 교역이 뻗어갔고 도시의 수상 교통이 늘어났다. 미술관, 분수 광장, 뮤직홀이 세워졌고, 1860년대에는 20개 이상의 이웃들을 합병하였다. 1870년에는 도시의 인구가 약 216,000명으로 도달하였다.
1870년대에는 신시내티의 지위가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로서 쇠퇴하고 말았다. 철도가 더 많은 화물들을 시카고와 다른 도시로 싣고 가자, 도시의 강 무역의 지위가 떨어졌다. 1880년 신시내티는 도시 정부가 지은 신시내티 사우던 레일웨이(Cincinnati Southern Railway)가 채터누가(Chattanooga)에 도달하자 도시의 남부 시장을 회복하였다.
1800년대 후기에는 제조업이 도시의 중요한 산업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프록터 앤드 갬블과 다른 비누 회사들의 번창과 함께, 도시의 인구가 1900년 325,000명 이상으로 도달하였다.
1900년대 초기에는 많은 부유층 시민들이 분지에서 둘러있는 언덕 쪽으로 옮겨갔다. 강변 지대는 공장, 철도, 해운 시설들의 대지가 되었고, 강 근처의 주택들은 빈민가를 이루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도시를 무기 공업의 중심지로 변화시켰다. 다수의 변두리 사람들이 공장 직업을 구하러 도시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이 근로자들은 전쟁 후에도 도시에 남아있었고, 정부는 그들의 위한 집세가 싼 아파트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강변 지대의 부분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1900년대 후기에 신시내티는 인구가 외곽들로 빠져나가는 경험을 하였으나, 그 이웃들은 살만하게 남아있고 다운타운은 계속 번창하였다. 다운타운에는 새로운 관청, 백화점과 작은 가게, 호텔들이 건설되었다.
1996년 해밀턴 군의 투표인들이 2개의 스포츠 시설의 기금을 위한 새 판매 세금 제도를 찬성하였다. 2000년 새 미식축구 경기장의 건설이 완공되었고, 2003년에 강변 지대 근처에 새 야구장을 열었다. 그 동안 도시의 교육과 서비스업이 기금에 계속 애를 썼다.
2001년 신시내티의 가난한 흑인 이웃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더 나빠진 경찰과의 관계는 소란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러나, 폭동은 미래를 위한 도시의 강력한 도전으로서 빈부간 격차가 성장하는 데 강조하였다.[3]
교통[편집]
도시간 교통면에서는 고속도로망을 통해 콜럼버스, 인디애나폴리스, 그리고 시카고 등의 주변 도시를 가기가 용이한 편이고, 신시내티 유니언 터미널을 통해 철도 교통도 이용이 가능하며 강 건너 켄터키 지역에는 신시내티 노던 켄터키 국제공항도 위치해 있어 다른 도시로 가기가 아주 좋다. 신시내티-노던켄터키 공항은 한때 델타항공의 허브공항이었으나 델타가 노스웨스트 항공과 합병하면서 중서부 지역의 허브공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옛날에는 노면전차가 도시 곳곳을 이어주면서 대중교통이 편리했다. 강변의 중심가에서 산 위에 있는 주거지역들까지 모두 연결해주었으며, 등판능력이 떨어지는 당시의 노면전차를 위해 별도의 케이블카도 존재했다. 19세기 말에 건설되어 1951년까지 노면전차가 운행되던 이 시기는 말 그대로 신시내티 대중교통의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였으며, 당시 노면전차 탑승객의 숫자는 현재 신시내티 버스 이용객의 4배에 달한다. 당시 신시내티 시내 인구수가 현재보다 많았던 것과 자가용 보급률을 따져보더라도 대단한 차이이다. 하지만 자가용이 보급되고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신시내티 시 정부는 노면전차가 시설 보강비용을 무릅쓰고 계속 운행될 가치가 없다는 판단하에 노면전차를 1951년에 폐선시킨다. 하지만 버스 노선망의 효율은 노면전차의 그것을 절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신시내티 대중교통은 이후로도 꾸준히 불편해졌으며, 심지어 이것이 신시내티 인구 감소의 원인제공을 어느 정도 했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4]
신시내티대학교[편집]
신시내티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주립 종합대학교로 주립 대학교군인 오하이오대학교 시스템에 속한다. 약칭은 ‘UC’이다. 1819년 신시내티대학과 오하이오의학대학이 신시내티에 설립되었다. 1870년 오하이오주의회에 의하여 미국 최초의 시립대학인 신시내티대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06년 미국 최초로 협동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였고 1943년 신시내티대학 연구재단이 창설되었다. 1968년부터 시의 지원을 받는 준 주립대학으로서의 과도기를 거쳐 1977년 오하이오주의 주립대학교가 되었다. 주립대학교가 되기까지 신시내티대학교는 미국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시립대학이었다. 콜럼버스에 있는 오하이오주립대학교를 본교로 한 주립 대학교군 '오하이오대학교 시스템'에 속한다. 오하이오대학교 시스템은 13개 4년제 주립대학교, 24개 지역 캠퍼스, 23개 2년제 지역 단과대학·기술대학, 1개의 의과대학으로 구성된다.
주 캠퍼스는 신시내티 중심지에 위치하며 해밀턴 타운티의 블루 애시(Blue Ash)에 레이먼드 월터스 대학, 클러몬트 카운티의 소도시 바타비아(Batavia)에 클러몬트 대학이 있다. 한다. 부속기관·시설로는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16개 도서관, 학습자료센터·미술관·라디오 방송국, 학생의료센터, 레크리에이션센터, 공학연구센터, 아로노프 예술·디자인센터, 본츠 분자학센터, 린드너 체육관 등이 있다. 192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전 미국부통령 찰스 도스가 졸업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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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신시내티〉, 《위키백과》
- ↑ 〈신시내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신시내티〉, 《요다위키》
- ↑ 〈신시내티〉, 《나무위키》
- ↑ 〈신시내티대학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신시내티〉, 《위키백과》
- 〈신시내티〉, 《나무위키》
- 〈신시내티〉, 《요다위키》
- 〈신시내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신시내티대학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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