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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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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이황(李滉)는 조선의 유학자이다. 자는 경호(景浩). 시호는 문순(文純).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개요[편집]

  •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숭앙된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초명(初名)은 서홍(瑞鴻)이다. 자(字)는 경호(景浩)이며, 호(號)는 퇴계(退溪)인데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 '계(溪)'는 이황이 물러나 머물렀던 '토계(兎谿)'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해석된다. 청량산(淸凉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도옹(陶翁)·도수(陶叟)·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별호(別號)도 사용했다.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이황은 도덕적 수양을 학문의 최고 목표로 삼았으며, 특히 경(敬)을 강조했다. 주자는 도덕적 수양의 방법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강조했다. 거경(居敬)은 도덕적 본성을 온전히 지키고 북돋는 내적 수양(存心養性)이고, 궁리(窮理)는 인간과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어 욕구를 다스리는 외적 성찰[格物致知]을 뜻한다. 그러나 이황에게 경(敬)은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할 뿐 아니라, 궁리를 심화시키기 위한 핵심적 원리이다. 이황은 인심에서 비롯된 인욕(人慾)을 극복하고, 도심을 북돋아 기질의 한계에서 벗어나 천명으로 받은 본연지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보았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도덕적 본성을 보존하여 수양하고 살피는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태도가 필요한데, 그 바탕이 되는 것을 경(敬)으로 보았다. 이황에게 경(敬)은 인간이 도덕적 주체로서 확고히 서려는 태도이며, 앎과 함을 함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는 경(敬)이 없는 궁리(窮理)는 난삽한 사변에 빠지기 쉬우며, 참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1]
  •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아버지 이식이 의성김씨와 사별한 후, 춘천박씨(박치의 장녀)정경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한편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갔는데,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8일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 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안이 완성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 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2]
  • 이황은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 퇴도(退陶) · 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 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1533년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69년( 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1570년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1570년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3]

이황의 생애[편집]

  • 이황은 1501년 11월 25일(음력) 예안(禮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됨)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李堣)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하던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교리(校理)·교감(校勘) 등을 역임했으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의 문학(文學) 등의 직위에도 있었다. 1542년에는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1543년에는 성균관의 교수직인 사성(司成)이 되었다.
  •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으나, 곧바로 서용(敍用)되어 사복시(司僕寺) 정(正)·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47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8년에는 충청도 단양의 군수(郡守)가 되었는데,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옮겼다. 당시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병으로 물러났어도 왕을 가까이서 섬기던 이황에게 갑자기 외직(外職)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학전(學田) 등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와 면역의 특권도 부여하였는데,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 이황은 1549년에는 병을 이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 인근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1551년에는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황은 1550년 형인 이해가 참소(讒訴)를 당해 유배지로 가던 도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관직에 올랐다가도 곧바로 사퇴하기를 되풀이하였다. 1552년에는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시독관(侍讀官)으로 참여해 왕에게 불교를 멀리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와 병조(兵曹) 참의(參議),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명종(明宗)은 이황을 아껴 1555년에는 낙향해 있던 그에게 음식물 등을 전하며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도 하였고, 화공(畵工)을 보내 도산(陶山)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기도 했다. 1558년과 1559년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이황은 사직을 청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6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명종은 이황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기도 했다.
  • 이황은 명종의 잇따른 부름을 사양하고 고향인 예안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1556년에 예안향약(禮安鄕約)을 만들었고, 1561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1567년 명종이 죽고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는 명종의 행장(行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선조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이황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특별히 교서(敎書)를 보내 다시 부르자 상경하여 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대학(大學)>과 <예기(禮記)> 등을 강론하였다. 1568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하였고,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그 해 7월에 상경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실록청(實錄廳)의 도청당상(都廳堂上)을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때 선조에게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제출하였다.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을 여섯 조항으로 정리하여 상소한 것으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라고도 불리며, 이이(李珥)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 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는 저술로 꼽힌다. 1569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이황 필적(선조유묵첩)[편집]

  • 이황 필적 선조유묵첩(李滉 筆蹟 - 先祖遺墨帖)은 경상북도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시대의 서첩이다. 퇴계 이황이 쓴 다양한 글을 모은 것이다. 2010년 1월 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퇴계(退溪) 이황이 자손에게 보낸 서한을 비롯하여 이황의 시문 원고, 다른 이의 저작을 베낀 것, 당송(唐宋)의 시를 베낀 것 등을 모아서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황이 청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필로 쓴 여러 필적을 확인할 수 있다. 첩의 표지에는 '선조유묵(先祖遺墨)'이라 되어 있어 이황의 후손이 성첩(成貼: 문서에 관인을 찍는 것)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지 숫자가 '卄三'까지 되어 있어 원래 23첩 이상이었음이 분명하나 현재는 제2, 7, 10, 21, 22첩이 없고 18첩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각 면 왼쪽 상단에는 장수(張數)가 표시되어 있다. 제13첩 끝에는 1565년에 손자 안도(安道)에게 여러 잠명(箴銘)을 써주었다는 이황의 글이 실려 있다. 책의 곳곳에 '이안도장(李安道章)'이라는 도장이 있으며 제12첩과 제18첩 끝에는 이황의 9대손인 이지순(李志淳)의 발문이 남아 있다. 2010년 1월 4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서첩에는 이황의 다양한 필적이 남아 있으며 서예로서도 가치가 있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1~9첩인 「가서(家書)」와 제23첩의 「명종대왕행장 원고」는 내용 면이나 행서와 초서로 쓴 글씨의 서체 면에서 의미가 크다. 제13첩의 잠명(箴銘), 제14첩 주희(朱熹)의 「감흥시(感興詩)」, 제15첩의 「대보잠(大寶箴)」, 제20첩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등의 필적을 베껴 쓴 것이 서예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제18첩의 「활인심방(活人心方)」은 당시 도학자들이 어떤 체조를 했는지를 보여 주며 이황이 30대 중반에 쓴 필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제11첩에는 '진성후인(眞城後人)', '이황장인(李滉章印)', 제17첩에는 '온계(溫溪)', '진성후인(眞城後人)', '이황장인(李滉章印)' '경호(景浩)'라는 인장이 있다. 이황의 친필의 필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서 이황의 후손들이 본 서첩을 가전(家傳)한 역사를 보여준다.

도산서원[편집]

  •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옛 1000원 그림에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에 시작하여 1576년 완공하였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 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1] 1975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1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황(李滉,1501.11.25. 음력 ~1570.12.8. 음력 〉, 《두산백과》
  2. 이황〉, 《위키백과》
  3. 이황(李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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