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견훤(甄萱)은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세운 왕이다.
개요
- 견훤은 재위시간이 900년~935년이다. 본래의 성은 '이(李)'이지만, 나중에 성을 '견(甄)'으로 바꿨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이며,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는 본래 농민이었으나 뒤에 장군이 되었다. 생모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견훤의 어머니가 일을 하느라 어린 견훤을 강보에 싸서 숲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했다. 그리고 성장하여 종군을 하게 되었을 때 서남해(西南海) 지방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인 888년 세금을 독촉하는 중앙정부에 맞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견훤은 신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세력을 모아서 892년(진성여왕 6)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신라서면 도독(新羅西面都督)이자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으로 칭했다. 그리고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서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 남조의 국가들에도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901년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신라 정복에 나섰다. 그 뒤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그 뒤를 이은 왕건(王建)의 고려와 후삼국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1]
- 견훤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이다. 892년에서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반란을 일으키고, 892년에 통일신라의 무진주를 습격하였으며, 900년에 통일신라의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27년 서라벌로 쳐들어가 붙잡은 신라의 경애왕을 스스로 자진토록 하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세웠다. 935년 음력 3월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황위에서 축출되었다가 그 해 6월에 고려 측과 사위 박영규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탈출했고 대리청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지만, 936년 음력 9월에 견훤을 앞세운 왕건 측의 총공격으로 후백제는 패망하였다. 신검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앞장을 섰던 견훤은 신검이 왕건에 의해 일단 사면되는 조치를 받자 극도의 울분과 번민으로 등창이 일어나 크게 번졌고, 이에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음력 9월 8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2]
- 견훤은 남북국시대 때,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이다.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 용개(龍蓋) · 보개(寶蓋) ·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자랄수록 남달리 체모가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해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해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이르러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3]
- 견훤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창업군주이다. 견훤은 본래 남북국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 해안에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되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백제(百濟) 왕이 되었으나 공공연히 왕을 자칭하지는 못하고 자서(自署)할 때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 지휘·병마·제치(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持節都督) 전·무·공등주군사(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兼)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漢南郡) 개국공(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에 도읍하여 200여 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했다. 이때 견훤이 재건한 백제를 먼저 있었던 부여씨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부른다. 신라, 궁예, 왕건 등과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간 다투었으나 935년(태조 18) 음력 3월에 적장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집정을 하던 신검이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왕위에 올랐다. 권력을 잃은 견훤은 금산사에 갇혔으나 나주를 통해 탈출하여 과거의 숙적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고 10만이 넘는 고려군의 선봉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하였다. 936년(태조 19) 음력 9월 8일에 후백제는 대패하여 신검과 그 신하들이 항복하였고 견훤은 신검이 처형되지 않고 용서받자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음력 9월 8일(계해일) 황산(黃山)의 절에서 사망하였다.[4]
견훤의 최후
- 후백제를 멸망시킨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 만에 황산(논산)의 절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8일이라고 하는데, 대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되기에는 8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서는 왕건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고 하나 증거는 전혀 없다. 견훤이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견훤에 대한 평가
- 현존하는 견훤 관련 기록 거의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작성되었다. 신라계 대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견훤을 가리켜 원래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판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견훤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 견훤은 남북국시대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이다. 재위 기간은 892년~935년이며, 신라 서남해안의 변방비장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진성여왕 때 각 지역의 호족들이 지방을 점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는 사태에 이르자,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후삼국 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왕위계승 다툼이 일어나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가 도망쳐 왕건에게 의탁하다가 936년에 사망했다. 특정한 지역 기반이 없었고 혼란기를 해소할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단명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정치가로서 견훤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듬해에는 오월(吳越)과 통했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 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게 하였다. 또 922년과 929년 2차례에 걸쳐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했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해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한 것이다. 또한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를 건국한 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했기 때문에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전견훤 묘
- 전견훤 묘(傳甄萱 墓)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의 묘라고 전하는 묘이다.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이다. 주변에 아무 시설이 없고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때 후백제를 일으킨 산이 그립다고 하여 전주의 완산 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완산의 칠봉이 보이는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자가 붙었다. 또한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은진현조〉에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며, 1757년에 간행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현남 12리에 견훤묘, 현남 13리 금곡사우'라고 밝혔다.
상주 견훤사당
- 상주 견훤사당(尙州 甄萱祠堂)은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사당으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이 사당은 상주의 청계마을에서 동제(洞祭)를 지낸 장소로서 적어도 19세기 전반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사당은 매우 단출한 목재 건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견훤이라는 역사 인물을 모셨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하며 민속 신앙인 동제가 현재까지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북도 상주의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군인이 되었다가 진덕여왕에 반기를 들고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후백제 나라의 건립은 현재의 전주-완산 일대였으나 상주가 출생지였다는 점에서 이 일대에 견훤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상주 일대에 전승되는 견훤 관련 설화를 바탕으로 본 사당을 중심으로 동제 의례가 설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민속학적 의의가 있다. 아울러 후백제의 견훤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본 사당 자체의 건축학적 수준은 높지 않지만 사당으로서는 드물게 19세기라는 건립 시기가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간 별다른 중건(重建)없이 초기 건축 그대로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 건축학적 가치도 있다. 2013년 3월 18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백제
- 후삼국 시대,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892년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졌다가 900년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일대)로 도읍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후백제의 영역은 완산주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라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신라는 하대에 진골 귀족들의 치열한 왕위 계승전이 펼쳐지면서 점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한 뒤에는 흉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조세 독촉이 이어지자, 이에 대한 저항이 889년(진성여왕 3)에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일대)에서 일어난 원종(元宗) 애노(哀奴)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발생하였다. 918년에 다시 오월로부터 '중대부(中大夫)'를 더 책봉 받았으며, 927년 11월에는 오월에서 온 반상서(班尙書)를 고려에 보내어 외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견훤〉, 《위키백과》
- 〈견훤〉, 《나무위키》
- 〈견훤(甄萱,867~936)〉, 《두산백과》
- 〈견훤(甄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준희 기자, 〈"못생긴 춘향" 논란에 놀란 전주시 "견훤 영정 밑그림 비공개"〉, 《중앙일보》, 2023-07-01
- 이호영 기자, 〈(인물로 본 충남역사) 5.백제유민과 후백제를 세운 견훤〉, 《밥상뉴스》, 2019-10-17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