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슈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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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슈토베(카자흐어: Үштөбе, 영어: Ushtobe)는 카자흐스탄 남동부 제티수주(Jambyl oblysy)의 카라탈구의 도시이자 행정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2만 5천 명이다. 이 마을은 소련 본토의 고려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 고려인이 처음으로 떠난 곳이자 공동체 역할을 했다. 카자흐스탄 -한국 우정공원이 있어 고려인의 첫 공동체가 있던 곳을 표시한다. 또한 카라탈 고려인 역사센터가 있어 실제 주택과 이 지역에서의 고려인들의 삶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1][2]
목차
개요
우슈토베는 1937년 10월 소련 연해주(프리모르스키 변경주)에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정착한 도시이다. 불모지 벌판이었던 이곳에 약 10만 명의 고려인이 이주하면서 마을로 발전했으며 현재 약 24,0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했던 고려인들은 간첩행위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아무런 연고와 지역 정보 없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초기 정착시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남은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우슈토베에는 기차역이 있어 외부 지역과 연결되며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티와 연결된다. 그외 지방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지만 정기적인 대중교통이 취약하기 때문에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된다. 우슈토베 역 앞에는 이곳의 중심이 되는 중앙광장과 제태수 시장이 있다. 우슈토베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바스토베(Bastobe)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은 고려인들이 최초로 정착하였던 곳이다.[3]
고려인강제이주
1937년 소련의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약 172,000명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이주된 사건이다.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1937년 8월 21일)에 따라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카자흐 공화국 및 우즈베크 공화국 등지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유는 이 지역에서 일본의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외모가 매우 유사하여 간첩 색출이 어렵다는 의견이 소련 지도부내에 있었고, 또한 일본은 1918년에 소련 땅을 침공한 적이 있으며, 1931년에는 이미 만주 지역을 장악하였고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공하였기 때문에 소련 극동 지역의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강제이주로 인하여 고려인들의 생활기반은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소련 극동지역의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거주지를 재배치하려는 계획은 193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당국은 1927년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거주 고려인들을 내륙지방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고,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로 이주시킬 계획이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은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만주로 그리고 일부는 조선 땅으로 이주해 버렸다.
1931년에 만주 지역이 일본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면서 극동 정세는 소련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1934년의 레닌그라드 당제1서기이던 키로프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30년대의 대숙청이 전개되었다. 숙청대상에는 소련 정권수립에 기여했던 혁명원로들도 포함되었고, 공산당 간부들도 다수 해당되었다. 이러한 정치탄압의 노선 상에 고려인 공산당 간부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7년 강제이주가 실행되기 직전에 극동 지역의 고려인 간부들이 당국의 보안기관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그 수는 2,000~2,500명으로 짐작될 뿐 정확한 수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37년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역의 일부 고려인들 속에서는 강제이주에 대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소문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해 8월 21일에 모스크바에서 결정이 되고 9월부터 신속하게 실행되어야 하는 강제이주 집행이 실제로 이루어 질 때까지 고려인들은 평상시의 생활을 할 뿐이었다. 대략 실행 3~7일 전에 통고되고 이주열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혼란과 어려움이 고려인 사회에서 나타났다.
소련 중앙 당국의 결정에 따라 먼저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열차에 올랐다. 이어서 당국은 9월 28일자 ‘고려인들을 극동주에서 이주시키는 결정’(소련 인민위원회 결정 No. 1647-377cc)을 하달함으로써 극동주의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완벽하게 강제이주시키게 되었다.
소련 내무인민부 의장인 예조프의 1937년 10월 25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극동주의 고려인 총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주를 마쳤다고 하면서, 이주 고려인들은 카자흐 공화국으로 20,170가구 95,256명,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16,272가구 76,525명이 총 124편의 열차를 타고 배치되었다. 그리고 극동주의 캄차카 및 오호츠크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700명의 특별이주 고려인들이 11월 1일부터 열차로 이주될 것이라고 하였다. 11월에는 이주 및 이주민 배치의 상황이 거의 완료되는데, 1937년 12월 5일 문서자료에 의하면, 카자흐 공화국에 20,141가구 95,427명, 우즈베크 공화국에 16,079가구 73,990명,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명,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6,448가구 169,927명의 고려인들이 배치되었다. 카자흐 공화국에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여 가구는 이듬해 초에 러시아 공화국의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재이주되었다.
강제이주의 원인
1937년에 단행되었던 극동 지역 고려인의 강제이주에 관한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스탈린이 서명한 문서에도 적시되었듯이 극동 지역에서 있을 지도 모르는 일본 첩자의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있었다. 외모에서 고려인과 일본인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극동주의 전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논리이다.
두 번째는 극동주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고 특히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었던 포시에트 군의 경우는 고려인들이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전에 고려인들의 자치구 요구가 비등하였고 향후에도 영토적 자치요구가 있을 것으로 본 중앙 당국에서는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다. 1934년에 이미 극동주 지역에 유태인 자치주가 설립된 점이 참고될 만하다. 결국 1938년에 포시에트 군 공산당 지구당 제1서기였던 김 아파나시가 극동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획책한 혐의로 총살되었다.
세 번째는 소련에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자체 인구가 급감하게 된 카자흐 공화국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인구를 공급하고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수요가 있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인구유입책이 필요하였다. 사실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 공화국으로 초청된 농업전문가들이 이미 1928년에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농업기술을 가진 극동 거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적합한 민족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의 행로
강제이주 행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역을 출발하여 노보시비리스크까지 갔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소요 기간은 대략 30~40일 소요되었다. 열차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편의 열차는 객차 50량, 위생객차 1량,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체적으로 화물 열차가 이용되었다. 객차는 이층칸으로 되어 있었고 1개의 난로가 있었는데 하나의 객차에 5~6가구(30명 정도)가 배치되었다. 열차 이동 중 노약자의 사망도 나타났고 그 인원은 554명에 이르렀다. 강제이주 과정의 실상에 관해서는 원로 고려인들의 회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다. 한 마디로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상태, 식수 부족, 의료 지원의 부족 등 한 달여의 여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주지
카자흐 공화국의 우슈토베는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첫 이주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였다. 1928년에 신생 공업도시로 설립된 우쉬토베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이곳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쉬토베의 바쉬토베 지역에는 고려인들이 토굴을 이용한 움막을 짓고 생활했던 흔적이 있다. 강제이주의 행렬은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으로 연속해서 이어졌고 고려인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카자흐 공화국으로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가구에 이르는 사람들이 당국의 명령으로 러시아 공화국의 스탈린 주 아스트라한 군으로 재이주되었다. 어업 콜호즈의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주 고려인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였는데, 무엇보다도 현지 아스트라한 군 당국과의 갈등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스트라한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다시 당국의 명령으로 카자흐 공화국의 구리예프(현 아티라우)와 아크몰라로 이주되었다. 전쟁 시기에 고려인은 소련 당국이 신뢰할 수 없는 민족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우즈베크 공화국 담당자가 중앙 당국에 보고한 문서(1937년 12월 5일자)를 보면 총 16,307가구, 74,500명의 이주 고려인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그 속에는 1929년에 우즈베크 공화국의 자치공화국에서 구성공화국으로 승격한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명, 그리고 1936년에 러시아공화국의 자치공화국에서 구성공화국으로 승격한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이 포함되어 있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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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Ushtobe", Wikipedia
- ↑ 〈우슈토베〉, 《요다위키》
- ↑ 〈우슈토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고려인강제이주(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Ushtobe", Wikipedia
- 〈우슈토베〉, 《요다위키》
- 〈우슈토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고려인강제이주(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중앙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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