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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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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조선 초 시기에 살았던 무신이다

개요

  • 최무선은 고려 말기의 관료이다.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중국 상인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배워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으며 1380년 진포에서 왜선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조선 왕조에서는 화약을 개발해 왜국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최무선의 업적을 목화씨를 가져와 서민생활의 개선에 기여한 문익점(文益漸)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무선은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고, 문익점은 백성의 이(利)를 일으켜 백성의 삶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들로 숭상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1401년(태종 1)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에게 특별히 벼슬을 내렸으며, 세조는 1456년(세조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두 사람의 관향에 사당을 세워 업적을 기리게 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 등을 기록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아들인 최해산(崔海山)과 손자인 최공손(崔功孫), 증손인 최식(崔湜) 등도 그에게서 화기 제조법을 이어받아 모두 벼슬을 하며 조선 전기 군기(軍器) 개발을 주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87년(성종 18)에 최식이 증조부인 최무선의 책과 그림인 《화포법》과 〈용화포섬적도(用火砲殲賊圖)〉를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1]
  • 최무선은 고려의 무신 겸 정치가이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화약 무기를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에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 불화살 등 여러 종류에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적이 칩입 했을 때 사용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최무선은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영주(영주,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兵法)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가져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중국어에도 뛰어났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연 공양왕 4년(1392년) 7월, 이방원의 건의로 최무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檢校參贊) 문하부사(門下府事) 겸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가 되었다. 그때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태조 4년(1395년) 4월 19일에 사망. 태종 1년(1401년) 조정은 그가 세운 공을 참작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하였다.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의 졸기에는 최무선이 임종할 당시 책 한 권을 부인에게 주며 아들이 다 자라면 줄 것을 당부하였고, 아들 최해산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유언대로 최무선의 책을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화약의 제조법과 염초의 채취 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 등의 저술이었다. 태조 때부터 군기시소감(軍器侍少監)으로 등용되었던 최해산은 그 비법을 배워 조정의 직무에 활용하였다고 하나, 이 책은 전하지 않는다.[2]
  • 최무선은 고려 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들을 제조한 발명가이다. 본관은 영주(永州: 현재의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한국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에 허락받아 한국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 · 이장군(二將軍) · 삼장군(三將軍) · 육화석포(六火石砲: 완구의 일종) · 화포(火砲) · 신포(信砲) · 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 · 철령전(鐵翎箭) · 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 · 철탄자(鐵彈子) ·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 유화(流火) ·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 최해산(崔海山)과 손자 최공손(崔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3]
  • 최무선은 여말선초의 장군이자 화약/화포 개발자.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천시이다. 동시대 인물인 포은 정몽주와 같다. 영천 출신으로 위인전에 실릴만한 인물이 2명뿐인데다가 영천 시내에 최무선의 이름을 딴 도로인 최무선로가 있을 만큼 최무선을 모르는 영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최무선에 대해 '일찍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왜구를 제압하는 데는 화약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약 개발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에 송나라 등지에서 화약 무기와 화포가 개발되어 무기로 쓰이고 있었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체로 중국 상인이나 지나가는 외국인의 이야기였다는 점, 나라의 지원 없이 자체 연구를 통하여 개발하였다는 점,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보고 폭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 최무선의 일가는 정부에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상인 가문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제조법 및 양산법을 몰랐을 뿐, 이미 고려에서도 화약을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법이나 위험성은 이미 알려졌을 것이므로 무작정 밑바닥에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과도하게 위험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것저것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화약을 연구한 것은 확실하다. 그 후에는 자신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남에 살던 중국 상인(원나라 사람)이 최무선의 국가를 위한 목숨 건 개발 행위에 감복하여 가르쳐줬다고 하나 그 전에 대충 거의 다 완성했다고 한다. 화약을 양산하는데 성공한 최무선은 이를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고 이를 시험해 확인하고는 화약국(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로 삼아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다.[4]

최무선의 화약 도입

  •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이 설치된 이후 화약은 급속도로 발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그 이후 거의 20종의 화약무기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이름으로 미루어 분류해보면 총포류로는 대장군포(大將軍砲), 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㷁) 등이,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등이 있었고, 그밖에도 폭탄의 일종인 질려포(蒺藜砲), 로켓병기의 일종인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그 위력은 보는 사람들이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화통도감을 설치한 지 반년 만인 1378년(우왕 4) 4월에는 개경과 외방의 각 사찰에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을 정하였는데, 큰 사찰에 3명, 중간 사찰에 2명, 작은 사찰에 1명씩으로 하였다. 이 정도 수효의 전문부대를 편성하여 그들에게 지급할 정도로 화기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실전에 투입된 화약무기는 대단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1380년(우왕 6)에는 진포(鎭浦), 즉 지금의 전라도 옥구(沃溝)에 왜구의 배 5백 척이 들어와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때 화포로 정박한 적선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1383년(우왕 9)에는 진도(珍島)에서 화포를 가지고 적선 17척을 불태우는 승리를 얻기도 하였다. 해상전뿐만 아니라 지상전에서도 화포는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해상에서의 열세로 상륙한 이후 내륙지방으로 깊이 들어온 왜구를 섬멸하는 데에도 화포가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왜구는 험한 산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는데, 화포를 쏘아 적의 진지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 고려군이 화포를 사용하게 되면서 왜구와의 전투는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30년 이상 전국을 들쑤셔놓았던 왜구는 화포의 위력 앞에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해상에서 고려군은 화포를 이용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왜구의 배들이 마음 놓고 한반도 연안을 횡행하지 못하게 하였고, 상륙한 왜구와의 전투에서도 화포의 활약으로 고려군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무선의 생애

  •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1325년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았으며 병법(兵法)을 즐겼다고 한다. 14세기에 고려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생활이 피폐해지면서 규슈(九州)와 쓰시마(對馬島) 등의 주민들은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에 대한 약탈에 나섰는데, 14세기 후반에는 그 규모도 커졌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고, 해안 지역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하여 평야 지대의 농토가 황무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세 운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 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 최무선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火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 강남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원(李元)이라는 상인에게서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염초(焰硝) 제조법을 배워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그 뒤 최무선은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해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㷁都監) 설치를 이끌어냈으며,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다양한 화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전함(戰艦)에 관해서도 연구해 군사와 장비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누선(樓船)도 개발했다.
  • 화약과 화기 제작을 주도한 최무선은 1380년(우왕 6) 왜구가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략해오자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참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화기를 사용해 진포(鎭浦)에서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격파했다. 1383년(우왕 9)에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9년(창왕 2)에는 박위(朴葳)와 함께 쓰시마[對馬島] 정벌에도 참여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를 사용하면서 고려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화기를 해안 지역에 배치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의 벼슬은 문하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검교참찬(檢校參贊)으로 임명되었다. 최무선은 1395년(태조 4) 5월 8일(음력 4월 19일)에 죽었으며, 1401년(태종 1)에 의정부 우정승과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최무선에 대한 평가

  • 최무선이 처음으로 자체 개발에 성공한 뒤, 향상된 고려의 화력은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의 진압과 방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이오(鄭以吾)가 쓴 《화약고기》(火藥庫記)는 최무선의 업적을 두고, "나라를 위해 마음을 썼으므로 능히 이원의 기술을 얻었으니 그 사려가 깊고 멀다 하겠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겨루려 들지 못하는 데는 앞서 진포에서의 싸움과 뒷날의 남해에서의 승전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 최무선의 고향인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영천시는 영천 출신으로써 한국 최초로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포와 전함 등을 독자 개발해 실전에 사용한 최무선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최무선기념사업회와 영천문화원이 공동으로 최무선과학축제를 매년 주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삼거리에서 시작하여, 문외동을 거쳐 시청오거리까지 연결하는 도로인 최무선로는 최무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1995년 4월에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의 1200T급 209형 장보고급 잠수함(209급 잠수함) 최무선함의 이름은 최무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동영상

각주

  1. 최무선(崔茂宣,1325~1395)〉, 《두산백과》
  2. 최무선〉, 《위키백과》
  3. 최무선 (崔茂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최무선〉,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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