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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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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공민왕(恭愍王)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개요[편집]

  • 공민왕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이며 충혜왕의 동복 동생이다. 묘호는 없으며 고려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고,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恭愍)이다. 즉위 초반에 무신 정권을 혁파하고 배원정책을 추진하여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개혁을 추진하였다.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노력하였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에 개혁의지를 상실한 채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말년에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영명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에 능하였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홉 살에 불과한 아들 모니노(우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모니노의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노비라는 점 때문에 후에 정통성 논란이 벌어졌다.[1]
  •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통해 몽골풍,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했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영토를 회복했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 정치를 펼쳤다.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顓).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의 난·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2]
  •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군주.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명나라가 하사한 공민왕(恭愍王). 고려에서 올린 시호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 경효왕(敬孝王)이라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제25대 충렬왕의 고려 시호인 경효왕(景孝王)과 혼동할 수 있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고려식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말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 종신(終身)하며 정권을 장악한 군주였기에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3]
  • 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 국왕이다. 공민왕의 이름은 왕전(王顓), 옛 이름은 왕기(王祺)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로, 1330년(충숙왕 17) 5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숙왕(忠肅王)이고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이며, 충혜왕(忠惠王)의 친동생이다.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원나라 위왕(魏王) 보로테무르[孛羅帖木兒]의 딸이고,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失里]이다. 1349년(충정왕 1) 공민왕이 원나라에 숙위(宿衛)하고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공민왕의 왕비로는 이 밖에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 이씨, 종실 왕의(王義)의 딸 익비(益妃) 한씨(韓氏), 안극인(安克人)의 딸 정비(定妃) 안씨, 염제신(廉悌臣)의 딸 신비(愼妃) 염씨 등이 있다.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5월에 왕의 동생 강릉대군(江陵大君)이라는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때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등 30여 명이 호종(扈從)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책봉되었고, 충목왕 사후 윤택(尹澤)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했으나, 고용보(高龍普) 등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지원을 받은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그 뒤 공민왕은 그대로 원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다가 1351년(충정왕 3) 원나라 황실이 외척 세력의 전횡과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현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다. 이 밖에 「염제신상(廉悌臣像)」, 「고사위기도(高士圍棋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이양도(二羊圖)」 등도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4]

서울 창전동 공민왕 사당[편집]

  • 서울 창전동 공민왕 사당(King Gongmin's Shrine in Changjeon-dong, Seoul,서울 倉前洞 恭愍王 祠堂)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공민왕을 기리는 사당이다. 2006년 3월 2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초 서강 일대에 양곡 보관 창고를 지으려 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에 당을 짓고 매년 제사 지낼 것을 계시한 데 따라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쟁 직후 주민들이 새로 건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전면이 3칸인 데 비해 2칸인 것이 특징이다. 주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48호인 느티나무 5그루와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다. 민간 전통 건축술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21길 13에 있다.

공민왕릉[편집]

  • 공민왕릉(恭愍王陵)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북한의 국보 제39호로 지정되었다가 제123호로 변경되었다.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의 산중턱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과 나란히 있는 쌍무덤으로, 동쪽의 것이 정릉이고 서쪽의 것이 공민왕릉인 현릉이다. 공민왕은 1365년(고려 공민왕 14) 왕비가 죽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9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 공사를 벌였다. 개성시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고려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송악산 북쪽과 개성의 서쪽인 만수산의 남쪽 언덕 일대에는 20여 기나 있다. 공민왕릉은 이 무덤들의 서쪽 맨 끝에 있다. 무덤 구역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사층단으로 되어 있다. 공민왕의 무덤은 왕비의 무덤과 함께 그중 동서 40m, 남북 24m 정도 되는 상단 한가운데에 나란히 놓여 있다. 공민왕릉의 봉분은 지름 13m, 높이 6.5m이다. 화강암으로 12각의 호석을 돌리고 그 면석에 구름을 탄 12지신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겼다. 그 밖으로 돌난간을 둘렀다.
  • 공민왕릉은 석실봉토분이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단실묘)이다. 널방은 가로 2.97m, 세로 3m, 높이 2.3m이며 화강암 판돌로 쌓고 평천장으로 하였다. 널방의 남쪽 벽 중앙에 만들어진 널길은 길이 9.1m, 너비 2.04m, 높이 1.82m이다. 널방의 동·서·북 세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벽면에는 12지신상을, 천장에는 북두칠성·삼태성·해를 그렸다. 널방의 동벽에는 가로 38cm, 세로 43cm 정도 되는 문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이 있어 정릉과의 연결을 표시했다. 고려의 능제에서는 왕과 왕비의 무덤이 따로 만들어지다가 공민왕릉에 이르러 처음으로 같은 곳에 장사하게 되었다. 특히 문인석과 무인석을 구별하여 세운 점 등 후에 조선의 왕릉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말기의 능(陵) 형식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1905년 이후 여러 차례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없다.

공민왕의 존호[편집]

  • 기나긴 여몽전쟁이 끝나고 원 간섭기에 들어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자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됐다. 그 일환으로 고려는 5묘제 태묘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못하게 됐고,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충렬왕부터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의 고려 국왕들은 묘호가 없다. 이후 《고려사》 <예지> -태묘- 조에는 공민왕이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서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이었다. 잘 보면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를 회복했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했기 때문인데,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여력이 남아 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래서 종묘 제도는 천자의 것을 따르되 묘호를 새로 올리지는 않았고,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들에게 독자적인 시호를 올려 자주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 공민왕 본인 묘호가 없고 명나라가 우왕 11년에 내린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만 존재한다. 다만 우왕이 재위 2년에 올린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약칭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시호는 있으며, 명나라가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지는 이 이름으로 주로 불렸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다음 왕인 우왕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폐위당했고, 그다음 왕인 창왕은 <우창비왕설>에 휘말려 폐위 후 처형당했으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도 조선 건국으로 인해 폐위당하면서 묘호를 올릴 사정이 되지 않았다. 이후 들어선 조선 왕조 역시 자신들의 건국 정당성을 위해 고려 왕조의 묘호 없는 왕들에게 묘호를 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 묘호가 없는 고려 국왕들은 오늘날까지도 시호로만 불리고 있다. 그

천덕봉[편집]

  • 천덕봉(天德峰)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신둔면, 여주시 금사면, 광주시 곤지암읍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635m로, 이천시에서 제일 가장 높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왔다고 하여 공민왕봉이라고도 한다. 원적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항상 구름과 안개에 싸여 있다. 산속에 신라 선덕여왕 때 혜법선사가 세운 영원사가 있고, 계곡에는 산간 오지마을인 곤지암읍의 외선리·내선리가 있다. 신둔면 장동리 쪽은 군사훈련장 때문에 입산을 제한하고 있어 산행은 백사면 경사리에서 시작한다. 영원사를 지나 564m봉(원적봉)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은 완만하며 정상에서 원적봉까지는 육군 사격장지대가 있으므로 능선안부를 지나 만선리로 내려온다.

공민왕 시역사건[편집]

  • 공민왕시역사건(恭愍王弑逆事件)은 1374년(공민왕 23) 9월 21일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이 주동이 되어 공민왕을 살해한 사건. 자제위(子弟衛)의 홍륜(洪倫)이 익비(益妃)와 사통하여 임신시키자, 최만생이 이를 밀고하였고, 공민왕은 홍륜과 비밀을 아는 최만생 등도 함께 죽이려 하였다. 이를 안 최만생이 선수를 써서, 홍륜·권진(權瑨)·홍관(洪寬)·한안(韓安)·최선(崔瑄) 등과 공모하여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경복흥(慶復興) 등 고관들에게 발각되어, 최만생 일당은 참형(斬刑)되었다.

공민왕의 업적[편집]

  • 공민왕이 집권하던 시기 중국 세력의 변화가 있었다. 고려의 내정 간섭을 일삼던 원나라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공민왕 17년,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명나라가 원을 북방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홍건적의 두목이 되었다. 마침내 한족이 몽골족을 북방으로 밀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고려에게는 자주성을 회복할 만한 좋은 시기가 되었다. 공민왕은 어머니가 원나라 사람이고 그의 아내 역시도 원나라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철저하게 고려인이었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즉위하여 밖으로는 반원정책을 통해 자주권을 회복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여 왕권과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다.
  •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골풍의 의복과 변발을 폐지하였다. 1356년에는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여 고려 문종 때 만든 관제로 돌려놓았다. 또한 원나라의 내정간섭 기관이었던 정동행소의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라비로 고려에 온갖 횡포를 일삼던 기철 형제를 비롯하여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숙청하였다. 공민왕의 또 다른 업적은 원나라의 직속령이었던 영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였다. 이곳을 수복할 때 이성계의 아버지였던 이자춘이 협력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공민왕〉, 《위키백과》
  2. 공민왕(恭愍王,1330~1374)〉, 《두산백과》
  3. 공민왕〉, 《나무위키》
  4. 공민왕(恭愍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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