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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타'''(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Toyota Motor Company, 丰田汽车)는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본사를 둔 일본 굴지의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차량 메이커이자 기업인데, 일본 전체 주식시장 1위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며 동시에 전세계 자동차 회사들 중에서 시가총액 2위의 기업이다. 1937년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토요타 키이치로]]'''(丰田喜一郎)이며 현직 사장은 '''[[토요타 아키오]]'''(丰田章男)이다. 한국토요타 사장은 '''[[타케무라 노부유키]]'''(武村信之)이다. | + | '''토요타'''(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Toyota Motor Company, 丰田汽车)는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본사를 둔 일본 굴지의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차량 메이커이자 기업인데, 일본 전체 주식시장 1위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며 동시에 전세계 자동차 회사들 중에서 시가총액 23조 7,709억 엔으로 2위의 기업이다. 1937년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토요타 키이치로]]'''(丰田喜一郎)이며 현직 사장은 '''[[토요타 아키오]]'''(丰田章男)이다. 한국토요타 사장은 '''[[타케무라 노부유키]]'''(武村信之)이다. |
− | 토요타는 2019년에는 승용차 판매에서 세계 2위를 차지했으며 2020년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자동차 및 부품기업 2위를 차지했다. 2019년 도요타는 약 1,074만 대가 팔렸고, 승용차는 핵심 브랜드인 토요타와 럭셔리 브랜드인 렉서스(Lexus,凌志)가 주류를 이뤘다. 도요타의 최대 단일시장은 2019년 약 276만 대가 팔린 미국 시장이다. 2019년 도요타자동차는 중국에서 약 162만 대가 팔렸고, 절대 다수는 합작기업인 [[이치토요타]]와 [[광치도요타]]가 기여했으며, 이는 각각 중국 승용차 제조업체 11위와 13위를 차지했다. | + | 토요타는 2019년에는 승용차 판매에서 세계 2위를 차지했으며 2020년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자동차 및 부품기업 2위를 차지했다. 2019년 도요타는 약 1,074만 대가 팔렸고, 승용차는 핵심 브랜드인 토요타와 럭셔리 브랜드인 렉서스(Lexus,凌志)가 주류를 이뤘다. <ref>快科技, 〈[https://tech.sina.com.cn/roll/2020-02-02/doc-iimxxste8301352.shtml 丰田汽车2019全球销量超1074万辆:中国市场同比大增9%!]〉, 《新浪网》, 2020-02-02</ref>도요타의 최대 단일시장은 2019년 약 276만 대가 팔린 미국 시장이다. 2019년 도요타자동차는 중국에서 약 162만 대가 팔렸고, 절대 다수는 합작기업인 [[이치토요타]]와 [[광치도요타]]가 기여했으며, 이는 각각 중국 승용차 제조업체 11위와 13위를 차지했다.<ref>杨高宇 , 〈[https://www.pcauto.com.cn/news/1952/19521119.html 丰田2019年销量达162万辆 同比增长9%]〉, 《太平洋汽车网》, 2020-01-09</ref> 2020년 상반기 세계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로 토요타 '코롤라'가 60만 693대로 1위를 차지했다. <ref>박태준 기자, 〈[https://www.etnews.com/20200824000164 올해 상반기 세계서 가장 많이 팔린 차 토요타 '코롤라']〉, 《전자신문》, 2020-08-24</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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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타는 [[쿄토대학]]과 함께 '불화물이온(FI) 배터리' 개발에 나섰으며 곧 1000㎞를 달리는 전기차가 개발 될 전망이다. 토요타에 따르면 불화물이온 배터리는 기존 전기차에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 대비 7배7배 전기를 더 담을 수 있다. <ref>김형원 기자,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7/2020080702603.html 지금 일본에선 토요타, 1000㎞ 달리는 전기차 차세대 배터리 개발 나서(8월7일)]〉, 《IT조선》, 2020-08-07</ref>또한 토요타는 2021년 1월에 자율주행차, 전기차 등에 탑재될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출범할 계획이다. <ref>이상원 기자, 〈[https://www.auto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200 토요타,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업체 내년 1월 출범]〉, 《M오토데일리》, 2020-08-05</ref> | ||
== 개요 == | == 개요 == | ||
+ | 토요타는 일본의 기업 집단 및 그 산하의 차량 브랜드이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톱, 세계에서도 생산과 판매대수는 2012, 2013, 2014년 3년 연속 세계 1위인 자동차 메이커다. 2007년 1/4분기에는 제너럴 모터스의 총 판매대수를 앞질러, 사실상 톱의 자리를 매듭지었다. 경차를 생산하는 다이하츠공업, 트럭 및 상용차를 생산하는 [[히노자동차]]의 모기업이며, 스바루로 유명한 후지 중공업의 대주주이기도 하다(14년 12월 기준 보유지분 16%). 노조의 영향력이 강해, 노사화합과 정책수립 시 노조의 동의로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력 최초공장은 아이치현 토요타시 모토마치공장과 쓰쓰미공장이며 1970년 160만대, 1980년 330만대 규모 능력을 갖추었다. 대규모 수출을 위한 다하라(전원)임해공장이 1979년 준공되었다. 큐슈공장 등 일본내에 30여개 공장이 있다. 차부품 주력사로 도요타직기(Toyota industries), 덴소(일본 최대 차부품 다국적기업 12만명고용), 아이신 세이키(아이신 AW와 AI사), 칸토 자동차(센추리를 수공으로 생산하는 동후지 공장), 도요타 보쇼쿠, 이이치제강, 상사로 도요타쯔쇼 등이 있다. 또한 자동차 업계에서도 시가총액이 테슬라에 이어서 2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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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자동차 제조 업체로는 최초로 V형 12기통 가솔린 엔진을 자체 개발했으며, 이 엔진은 렉서스가 아닌 센추리에만 장착되어 나온다. 배기량은 5리터다. 하지만 센추리가 3세대로 풀 모델 체인지하면서 LS600hL의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으로 교체하여 V12 엔진은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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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명은 설립자의 성씨인 豊田을 딴 회사 이름이기는 한데, 이 사람의 이름은 토요타가 아니라 토요다이다. 그런데 왜 회사 이름이 '토요타'냐 하면 그쪽이 어감이 더 좋아서라나 일본에서는 토요다 사키치가 서양인들이 발음하는 걸 보고 서양인들에겐 'TOYODA'보다 'TOYOTA'가 더 발음하기 쉬워서 바꿨다는 게 정설이다. 1936년부터 상호를 토요타(トヨタ)로 변경하였다. 공식적으로 한자가 아니라 카타카나로 쓰는데 이름 획수가 합쳐서 8획이면 운이 좋아서 이렇게 했단 얘기도 있다. 그걸 증명한 건지 태평양 전쟁 당시 군용트럭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폭격을 당해본 적 없었고 정작 토요타 공장을 폭격하려 계획을 세우자 일본이 패망해버렸단 얘기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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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상장 === | ||
+ | 주식 총수는 33억 3,799만 7,492주이다. | ||
+ | * 토쿄증권거래소(TYO) | ||
+ | * 나고야증권거래소(NAG) | ||
+ | * 뉴욕증권거래소(NYSE) | ||
+ | * 런던증권거래소(LS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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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요인물 == | ||
+ | * '''[[토요타 키이치로]]'''(丰田喜一郎) : 토요토의 창업자이다. 1984년생인 그는 토요타자동차의 창업자로서 195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 자동차 산업의 정신적인 지주로 할동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토요타 자동직조기'의 창업자로서 그는 기업인이었던 아버지의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준비된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고, 미국 [[포드]]사의 자동차를 구입해서 구조를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동차 제작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당시 일본사회는 자동차 산업이라는 것은 아직 이른 시기였고 성공이나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은 '도전' 또는 '무모함'으로 인식될 수 있었으나, 그는 일본 자동차 업계의 선진적인 인물로서 지금의 토요타가 가지고 있는 기업적인 이념과 자동차 연구에 몰두한 인물로서 자동차가 지금이 아닌 미래의 교통수단으로서 확립되는 그 시기를 염두에 두고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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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역사 == | ||
+ | [[토요타 사키치]](1867년 ~ 1930년)가 창업한 '토요타 자동 방직기 제작소'에, 1933년 9월에 설립한 자동차 부서가 기원이다. 부서 설립의 중심이 된 것은 사키치의 아들인 [[토요타 키이치로]](1894년-1952년)이지만,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사키치의 사위인 토요타 리자부로였다. 방직기 제작에 있어서의 주조·기계 가공 기술등의 노하우를 살려, 연구 기간을 거쳐 1935년에 자동차 제조를 개시했다. 1937년에 독립한 신 회사 토요타 자동차 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태평양 전쟁 때 육군용 트럭을 생산하였으나, 당시의 물자 부족으로 인해 간소화된 것이었다. 아이치현의 공장이 미군에 의해 폭격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그 전에 원자 폭탄 투하로 종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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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전 후 5년이 지난 1950년에 경영 위기에 빠지면서 노사 관계는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인 생산 인원 감축 곧 정리해고에 반대하며,부실경영을 한 토요타 키이치로 사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토요타 자동차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토요타 키이치로가 사장에서 해임되고 제국 은행을 중심으로 은행단의 긴급 투자 조건으로 판매 강화를 위한 토요타 자동차 판매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당시 토요타 자동차의 노사 관계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후, 생산개발의 토요타 자동차 공업과 공동 보조를 취해 왔으나 1982년에 합병하여 현재의 토요타 자동차 주식회사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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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전 후 1949년 일본 전체가 닷지라인불황에 빠졌을 무렵 토요타자동차는 경영위기를 겪는다. 토요타자동차는 당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행, 거래업체 등에 채무상환유예, 대금지불유예를 요청했지만 딱 두 회사로부터 거절당한다. 스미토모은행은 토요타의 채무상환유예를 거절하면서 칼같이 채무를 회수해갔고, 카와사키제철은 대금지불유예를 거절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창업자 토요타 키이치로가 급사했고, 정말 말 그대로 토요타는 망할 뻔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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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토요타는 그때의 원한을 기억하며 모든 거래에서 스미토모은행과 카와사키제철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일단 스미토모은행에는 절대로 대출하거나 예금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스미토모은행이 1965년 자신의 거래업체인 프린스자동차가 경영위기를 겪자 토요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당시 토요타가 딱 잘라 거절했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철강을 살 때도 카와사키제철의 것은 절대로 사지 않았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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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경영 위기는 직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 투입된 미군용 트럭의 대량 주문으로 인해 모면되었다. 1958년 브라질공장과 남아공공장, 1962년 태국공장, 1988년에는 미국 켄터키 공장, 텍사스 공장 등 미국 내 5개공장 준공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의 글로벌 산업 항모로 변신 되었다. 그리고 토요타 자동차 노조는 일본이 보수화되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을 탄압한 55년 체제로 큰 타격을 받아, 결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는 민주노조가 아닌, 자본가에 협력하는 어용노조가 되고 말았다. 현재 일본의 대다수 노조들은 제2의 노무관리부서라는 말을 들을만큼 어용노조들이며,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차별, 고용불안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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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전 세계적인 석유 파동을 겪은 시점부터, 상대적으로 연비가 좋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이 부각되어 폭발적으로 판매량이 증가, 저렴한 가격에 믿을 만한 내구성의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미에서는 아직도 중고차 감가상각이 가장 적은 차량들 중 하나가 토요타 물건들이다. 이는 패전 이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에서 배척받았던 에드워즈 데밍의 품질관리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혁신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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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에는 새로운 본사 건물이 완공되었고 그 해 10월 제너럴 모터스(GM)가 보유했던 후지중공업의 주식(약20%) 중 8.7%을 매수, 필두 주주가 되어 제휴 체결을 발표했다. 2008년 북미에서 대규모 리콜사건의 발단이 된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어 2009년 결함에 대한 은폐사실이 발각되었다. 2007년에는 나고야 역 앞의 토요타 빌딩, 마이니치 빌딩의 재건축으로 지어진 미드랜드 스퀘어에 나고야 오피스가 완성되어 본사의 일부, 도쿄 본사의 영업 부문이 이전되었다. 잘 나가던 토요타가 2010년 또 자동차 역사상 최악의 위기인 토요타 리콜 사태를 맞는다. 그러나 2012년 1분기에는 다시 세계 1위를 탈환했다. 그리고 2016년 10월 12일, 스즈키의 스즈키 오사무 회장은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의 자동차 3강(토요타, 혼다, 닛산) 구도가 더욱 명확해지게 되었다. 그외 변속기로 유명한 아이신, 자동차 부품업체 덴소, 일본 5대 특수강업체 아이치스틸 등을 거느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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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민국과의 관계 === | ||
+ | 대한민국에는 1960년대 한국의 신진 자동차(현 한국GM의 전신)와 합작으로, 코로나 세단의 조립 생산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1970년에 반공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의 4원칙이 발표된 후 중국 대륙의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철수를 통보하고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당시 이 사건이 논란이 있었는데, 이미 신진 자동차와 합작 사업을 하기로 사업계획서까지 제출했던 일본 토요타가 외자 도입 수속만 남긴 상태에서 일방적인 철수를 선언한 것이다. 이와 함께, 토요타는 저우언라이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신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어떤 회사, 어떤 기관과도 단교하겠다고 선언한다. 일개 회사가 국가를 상대로 단교를 선언하는 것은 토요타가 처음이었다. | ||
+ | 세월이 지나고 대한민국의 수입선다변화 정책이 1990년대 말에 폐지되어 일본 생산 차량의 직접 공식 수입이 가능하게 되자, 토요타는 대한민국 법인인 한국토요타자동차를 설립한 후 렉서스 브랜드로 2001년에 다시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한다. 윈덤을 조금 고친 중형급인 렉서스 ES로 강남 아주머니 계층에 인기몰이를 하였지만, 동일 모델의 미국 시장 판매가보다 3배 이상 비싸게 파는, 한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차값 폭리가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국세청과 관세청 등 세무당국은 차값 폭리로 렉서스를 판매해 온 한국토요타가 그동안 차 가격을 부풀려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는 혐의를 잡고 세무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국 토요타는 한국 시장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이익을 일본 본사에 매년 현금 배당을 통해 송금해 오고 있으며, 한국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한국내 사회공헌이나 서비스 개선 등에 쓰지 않고 자국에 보내왔다는 점에서 글로벌 기업의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법인 설립 이후 7년간 한국시장에서 벌어들인 순익은 465억원인 반면, 이 7년간 기부금액은 순이익의 단 1.7%에 그쳤다.[5] 또 한국용 렉서스 모델에 탑재되는 내비게이션에는 독도가 누락되어 있는데, 내비게이션용 지도를 공급하는 PMI 측에 의하면, BMW와 르노삼성자동차에 납품하는 동일 지도 데이터에는 독도가 들어가 있지만, 토요타 렉서스에 납품하는 네이게이션용 지도에는 독도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PMI 측에 의하면 제공되는 데이터는 똑같지만 토요타측에서 가공하는 과정에서 그 표기가 빠졌다고 한다.[6] | ||
+ | 대한민국 시장에서 렉서스 브랜드로 성공을 맛본 토요타는, 2009년 10월 20일 토요타 브랜드의 대한민국 정식 진출을 선언하고 하이브리드 카 프리우스, 중형차 캠리, 캠리 하이브리드, SUV 차량인 RAV4 등 4개 차종을 대한민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가격대가 기존 국내서 인기를 끌던 수입 대중차 브랜드였던 혼다보다 저렴한 데다가 현대자동차의 중형급모델과도 경쟁가능한 수준이므로 대한민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되었다. 2011년 4월에는 준중형차인 코롤라가 출시되어 판매를 시작하였다. 또한 도라에몽이 자동차 광고에 등장하였다. (세계 최초의 수소전지차는 혼다에서 제작하였고, 수소차를 세계 최초로 '상용판매화' 한 것은 현대이다.) | ||
+ | 한국토요타자동차는 2008년 3월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
+ | {{각주}} | ||
+ | == 참고자료 == | ||
+ | * 快科技, 〈[https://tech.sina.com.cn/roll/2020-02-02/doc-iimxxste8301352.shtml 丰田汽车2019全球销量超1074万辆:中国市场同比大增9%!]〉, 《新浪网》, 2020-02-02 | ||
+ | * 杨高宇 , 〈[https://www.pcauto.com.cn/news/1952/19521119.html 丰田2019年销量达162万辆 同比增长9%]〉, 《太平洋汽车网》, 2020-01-09 | ||
+ | * 김형원 기자,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7/2020080702603.html 지금 일본에선 토요타, 1000㎞ 달리는 전기차 차세대 배터리 개발 나서(8월7일)]〉, 《IT조선》, 2020-08-07 | ||
+ | * 이상원 기자, 〈[https://www.auto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200 토요타,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업체 내년 1월 출범]〉, 《M오토데일리》, 2020-08-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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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8일 (금) 14:45 판
토요타(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Toyota Motor Company, 丰田汽车)는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본사를 둔 일본 굴지의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차량 메이커이자 기업인데, 일본 전체 주식시장 1위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며 동시에 전세계 자동차 회사들 중에서 시가총액 23조 7,709억 엔으로 2위의 기업이다. 1937년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토요타 키이치로(丰田喜一郎)이며 현직 사장은 토요타 아키오(丰田章男)이다. 한국토요타 사장은 타케무라 노부유키(武村信之)이다.
토요타는 2019년에는 승용차 판매에서 세계 2위를 차지했으며 2020년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자동차 및 부품기업 2위를 차지했다. 2019년 도요타는 약 1,074만 대가 팔렸고, 승용차는 핵심 브랜드인 토요타와 럭셔리 브랜드인 렉서스(Lexus,凌志)가 주류를 이뤘다. [1]도요타의 최대 단일시장은 2019년 약 276만 대가 팔린 미국 시장이다. 2019년 도요타자동차는 중국에서 약 162만 대가 팔렸고, 절대 다수는 합작기업인 이치토요타와 광치도요타가 기여했으며, 이는 각각 중국 승용차 제조업체 11위와 13위를 차지했다.[2] 2020년 상반기 세계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로 토요타 '코롤라'가 60만 693대로 1위를 차지했다. [3]
토요타는 쿄토대학과 함께 '불화물이온(FI) 배터리' 개발에 나섰으며 곧 1000㎞를 달리는 전기차가 개발 될 전망이다. 토요타에 따르면 불화물이온 배터리는 기존 전기차에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 대비 7배7배 전기를 더 담을 수 있다. [4]또한 토요타는 2021년 1월에 자율주행차, 전기차 등에 탑재될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출범할 계획이다. [5]
개요
토요타는 일본의 기업 집단 및 그 산하의 차량 브랜드이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톱, 세계에서도 생산과 판매대수는 2012, 2013, 2014년 3년 연속 세계 1위인 자동차 메이커다. 2007년 1/4분기에는 제너럴 모터스의 총 판매대수를 앞질러, 사실상 톱의 자리를 매듭지었다. 경차를 생산하는 다이하츠공업, 트럭 및 상용차를 생산하는 히노자동차의 모기업이며, 스바루로 유명한 후지 중공업의 대주주이기도 하다(14년 12월 기준 보유지분 16%). 노조의 영향력이 강해, 노사화합과 정책수립 시 노조의 동의로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력 최초공장은 아이치현 토요타시 모토마치공장과 쓰쓰미공장이며 1970년 160만대, 1980년 330만대 규모 능력을 갖추었다. 대규모 수출을 위한 다하라(전원)임해공장이 1979년 준공되었다. 큐슈공장 등 일본내에 30여개 공장이 있다. 차부품 주력사로 도요타직기(Toyota industries), 덴소(일본 최대 차부품 다국적기업 12만명고용), 아이신 세이키(아이신 AW와 AI사), 칸토 자동차(센추리를 수공으로 생산하는 동후지 공장), 도요타 보쇼쿠, 이이치제강, 상사로 도요타쯔쇼 등이 있다. 또한 자동차 업계에서도 시가총액이 테슬라에 이어서 2위이다.
일본의 자동차 제조 업체로는 최초로 V형 12기통 가솔린 엔진을 자체 개발했으며, 이 엔진은 렉서스가 아닌 센추리에만 장착되어 나온다. 배기량은 5리터다. 하지만 센추리가 3세대로 풀 모델 체인지하면서 LS600hL의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으로 교체하여 V12 엔진은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사명은 설립자의 성씨인 豊田을 딴 회사 이름이기는 한데, 이 사람의 이름은 토요타가 아니라 토요다이다. 그런데 왜 회사 이름이 '토요타'냐 하면 그쪽이 어감이 더 좋아서라나 일본에서는 토요다 사키치가 서양인들이 발음하는 걸 보고 서양인들에겐 'TOYODA'보다 'TOYOTA'가 더 발음하기 쉬워서 바꿨다는 게 정설이다. 1936년부터 상호를 토요타(トヨタ)로 변경하였다. 공식적으로 한자가 아니라 카타카나로 쓰는데 이름 획수가 합쳐서 8획이면 운이 좋아서 이렇게 했단 얘기도 있다. 그걸 증명한 건지 태평양 전쟁 당시 군용트럭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폭격을 당해본 적 없었고 정작 토요타 공장을 폭격하려 계획을 세우자 일본이 패망해버렸단 얘기도 있다.
상장
주식 총수는 33억 3,799만 7,492주이다.
- 토쿄증권거래소(TYO)
- 나고야증권거래소(NAG)
- 뉴욕증권거래소(NYSE)
- 런던증권거래소(LSE)
주요인물
- 토요타 키이치로(丰田喜一郎) : 토요토의 창업자이다. 1984년생인 그는 토요타자동차의 창업자로서 195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 자동차 산업의 정신적인 지주로 할동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토요타 자동직조기'의 창업자로서 그는 기업인이었던 아버지의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준비된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고, 미국 포드사의 자동차를 구입해서 구조를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동차 제작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당시 일본사회는 자동차 산업이라는 것은 아직 이른 시기였고 성공이나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은 '도전' 또는 '무모함'으로 인식될 수 있었으나, 그는 일본 자동차 업계의 선진적인 인물로서 지금의 토요타가 가지고 있는 기업적인 이념과 자동차 연구에 몰두한 인물로서 자동차가 지금이 아닌 미래의 교통수단으로서 확립되는 그 시기를 염두에 두고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토요타 사키치(1867년 ~ 1930년)가 창업한 '토요타 자동 방직기 제작소'에, 1933년 9월에 설립한 자동차 부서가 기원이다. 부서 설립의 중심이 된 것은 사키치의 아들인 토요타 키이치로(1894년-1952년)이지만,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사키치의 사위인 토요타 리자부로였다. 방직기 제작에 있어서의 주조·기계 가공 기술등의 노하우를 살려, 연구 기간을 거쳐 1935년에 자동차 제조를 개시했다. 1937년에 독립한 신 회사 토요타 자동차 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태평양 전쟁 때 육군용 트럭을 생산하였으나, 당시의 물자 부족으로 인해 간소화된 것이었다. 아이치현의 공장이 미군에 의해 폭격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그 전에 원자 폭탄 투하로 종전되었다.
종전 후 5년이 지난 1950년에 경영 위기에 빠지면서 노사 관계는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인 생산 인원 감축 곧 정리해고에 반대하며,부실경영을 한 토요타 키이치로 사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토요타 자동차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토요타 키이치로가 사장에서 해임되고 제국 은행을 중심으로 은행단의 긴급 투자 조건으로 판매 강화를 위한 토요타 자동차 판매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당시 토요타 자동차의 노사 관계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후, 생산개발의 토요타 자동차 공업과 공동 보조를 취해 왔으나 1982년에 합병하여 현재의 토요타 자동차 주식회사가 되었다.
패전 후 1949년 일본 전체가 닷지라인불황에 빠졌을 무렵 토요타자동차는 경영위기를 겪는다. 토요타자동차는 당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행, 거래업체 등에 채무상환유예, 대금지불유예를 요청했지만 딱 두 회사로부터 거절당한다. 스미토모은행은 토요타의 채무상환유예를 거절하면서 칼같이 채무를 회수해갔고, 카와사키제철은 대금지불유예를 거절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창업자 토요타 키이치로가 급사했고, 정말 말 그대로 토요타는 망할 뻔했다.
이후 토요타는 그때의 원한을 기억하며 모든 거래에서 스미토모은행과 카와사키제철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일단 스미토모은행에는 절대로 대출하거나 예금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스미토모은행이 1965년 자신의 거래업체인 프린스자동차가 경영위기를 겪자 토요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당시 토요타가 딱 잘라 거절했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철강을 살 때도 카와사키제철의 것은 절대로 사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 경영 위기는 직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 투입된 미군용 트럭의 대량 주문으로 인해 모면되었다. 1958년 브라질공장과 남아공공장, 1962년 태국공장, 1988년에는 미국 켄터키 공장, 텍사스 공장 등 미국 내 5개공장 준공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의 글로벌 산업 항모로 변신 되었다. 그리고 토요타 자동차 노조는 일본이 보수화되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을 탄압한 55년 체제로 큰 타격을 받아, 결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는 민주노조가 아닌, 자본가에 협력하는 어용노조가 되고 말았다. 현재 일본의 대다수 노조들은 제2의 노무관리부서라는 말을 들을만큼 어용노조들이며,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차별, 고용불안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1970년대 전 세계적인 석유 파동을 겪은 시점부터, 상대적으로 연비가 좋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이 부각되어 폭발적으로 판매량이 증가, 저렴한 가격에 믿을 만한 내구성의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미에서는 아직도 중고차 감가상각이 가장 적은 차량들 중 하나가 토요타 물건들이다. 이는 패전 이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에서 배척받았던 에드워즈 데밍의 품질관리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혁신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2005년에는 새로운 본사 건물이 완공되었고 그 해 10월 제너럴 모터스(GM)가 보유했던 후지중공업의 주식(약20%) 중 8.7%을 매수, 필두 주주가 되어 제휴 체결을 발표했다. 2008년 북미에서 대규모 리콜사건의 발단이 된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어 2009년 결함에 대한 은폐사실이 발각되었다. 2007년에는 나고야 역 앞의 토요타 빌딩, 마이니치 빌딩의 재건축으로 지어진 미드랜드 스퀘어에 나고야 오피스가 완성되어 본사의 일부, 도쿄 본사의 영업 부문이 이전되었다. 잘 나가던 토요타가 2010년 또 자동차 역사상 최악의 위기인 토요타 리콜 사태를 맞는다. 그러나 2012년 1분기에는 다시 세계 1위를 탈환했다. 그리고 2016년 10월 12일, 스즈키의 스즈키 오사무 회장은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의 자동차 3강(토요타, 혼다, 닛산) 구도가 더욱 명확해지게 되었다. 그외 변속기로 유명한 아이신, 자동차 부품업체 덴소, 일본 5대 특수강업체 아이치스틸 등을 거느리고 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에는 1960년대 한국의 신진 자동차(현 한국GM의 전신)와 합작으로, 코로나 세단의 조립 생산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1970년에 반공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의 4원칙이 발표된 후 중국 대륙의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철수를 통보하고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당시 이 사건이 논란이 있었는데, 이미 신진 자동차와 합작 사업을 하기로 사업계획서까지 제출했던 일본 토요타가 외자 도입 수속만 남긴 상태에서 일방적인 철수를 선언한 것이다. 이와 함께, 토요타는 저우언라이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신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어떤 회사, 어떤 기관과도 단교하겠다고 선언한다. 일개 회사가 국가를 상대로 단교를 선언하는 것은 토요타가 처음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대한민국의 수입선다변화 정책이 1990년대 말에 폐지되어 일본 생산 차량의 직접 공식 수입이 가능하게 되자, 토요타는 대한민국 법인인 한국토요타자동차를 설립한 후 렉서스 브랜드로 2001년에 다시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한다. 윈덤을 조금 고친 중형급인 렉서스 ES로 강남 아주머니 계층에 인기몰이를 하였지만, 동일 모델의 미국 시장 판매가보다 3배 이상 비싸게 파는, 한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차값 폭리가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국세청과 관세청 등 세무당국은 차값 폭리로 렉서스를 판매해 온 한국토요타가 그동안 차 가격을 부풀려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는 혐의를 잡고 세무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국 토요타는 한국 시장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이익을 일본 본사에 매년 현금 배당을 통해 송금해 오고 있으며, 한국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한국내 사회공헌이나 서비스 개선 등에 쓰지 않고 자국에 보내왔다는 점에서 글로벌 기업의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법인 설립 이후 7년간 한국시장에서 벌어들인 순익은 465억원인 반면, 이 7년간 기부금액은 순이익의 단 1.7%에 그쳤다.[5] 또 한국용 렉서스 모델에 탑재되는 내비게이션에는 독도가 누락되어 있는데, 내비게이션용 지도를 공급하는 PMI 측에 의하면, BMW와 르노삼성자동차에 납품하는 동일 지도 데이터에는 독도가 들어가 있지만, 토요타 렉서스에 납품하는 네이게이션용 지도에는 독도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PMI 측에 의하면 제공되는 데이터는 똑같지만 토요타측에서 가공하는 과정에서 그 표기가 빠졌다고 한다.[6]
대한민국 시장에서 렉서스 브랜드로 성공을 맛본 토요타는, 2009년 10월 20일 토요타 브랜드의 대한민국 정식 진출을 선언하고 하이브리드 카 프리우스, 중형차 캠리, 캠리 하이브리드, SUV 차량인 RAV4 등 4개 차종을 대한민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가격대가 기존 국내서 인기를 끌던 수입 대중차 브랜드였던 혼다보다 저렴한 데다가 현대자동차의 중형급모델과도 경쟁가능한 수준이므로 대한민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되었다. 2011년 4월에는 준중형차인 코롤라가 출시되어 판매를 시작하였다. 또한 도라에몽이 자동차 광고에 등장하였다. (세계 최초의 수소전지차는 혼다에서 제작하였고, 수소차를 세계 최초로 '상용판매화' 한 것은 현대이다.)
한국토요타자동차는 2008년 3월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각주
- ↑ 快科技, 〈丰田汽车2019全球销量超1074万辆:中国市场同比大增9%!〉, 《新浪网》, 2020-02-02
- ↑ 杨高宇 , 〈丰田2019年销量达162万辆 同比增长9%〉, 《太平洋汽车网》, 2020-01-09
- ↑ 박태준 기자, 〈올해 상반기 세계서 가장 많이 팔린 차 토요타 '코롤라'〉, 《전자신문》, 2020-08-24
- ↑ 김형원 기자, 〈지금 일본에선 토요타, 1000㎞ 달리는 전기차 차세대 배터리 개발 나서(8월7일)〉, 《IT조선》, 2020-08-07
- ↑ 이상원 기자, 〈토요타,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업체 내년 1월 출범〉, 《M오토데일리》, 2020-08-05
참고자료
- 快科技, 〈丰田汽车2019全球销量超1074万辆:中国市场同比大增9%!〉, 《新浪网》, 2020-02-02
- 杨高宇 , 〈丰田2019年销量达162万辆 同比增长9%〉, 《太平洋汽车网》, 2020-01-09
- 김형원 기자, 〈지금 일본에선 토요타, 1000㎞ 달리는 전기차 차세대 배터리 개발 나서(8월7일)〉, 《IT조선》, 2020-08-07
- 이상원 기자, 〈토요타, 첨단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업체 내년 1월 출범〉, 《M오토데일리》,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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