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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레이건 고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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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레이건 고햄]](William Ragan Gorham, Gohamu Katsundo, 1888년 1월 4일 ~ 1949년 10월 24일)은 일본으로 이주한 미국 태생의 일본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고햄은 일본의 신생 자동차 산업의 기술과 역량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아이카와 요시스케에 의해 결국 닛산 자동차 회사에 합병될 많은 회사들과 함께 일했다. 고햄은 제1차 세계대전 중 1918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처음에는 항공산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1년 만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동차산업으로 관심을 옮겼다. 일본 최대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하고 이끈 성공한 기업인 쿠보타 곤시로는 자동차 시장 진출에 열심이었다. 당시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는 이즈즈, 하시모토 마쓰지로가 설립한 가이신샤가 유일했다. 쿠보타는 고햄을 수석 디자이너로 고용했는데, 고햄은 차량을 디자인하고 고햄의 3륜 자동차 제조 공장을 세웠다. 다른 일본인 투자자들과 함께 쿠보타, 고럼은 고럼으로 삼륜차를 제조할 지쓰요 지도샤, 그리고 고럼이 디자인한 4륜자동차를 라일라로 찾아내곤 했다. 지쓰요 지도샤와 가이신샤는 나중에 닛산 자동차의 전신으로 합병되었다.  지쓰요 지도샤, 토바타 캐스트링스, 니혼상요 등 닛산자동차의 전임자들과 함께 1936년 출발하여, 후에 히타치로 합병될 자신의 회사인 고쿠산 세이키를 찾았다. 1941년 5월, 고햄 부부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일본 시민으로 귀화했다. 전시상황이 외국인에 대한 규제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이것을 선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고럼은 멀티컷 선반과 제트 엔진에 초점을 맞추어 히타치에서 엔지니어링 작업을 계속했다.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했다. 한편, 그는 산업 문제와 관련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본부와 연락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40년대 내내, 그는 또한 그들의 조달 및 공장 관리 관행과 관련하여 캐논 사의 컨설턴트로 자주 활동했다.
 
[[윌리엄 레이건 고햄]](William Ragan Gorham, Gohamu Katsundo, 1888년 1월 4일 ~ 1949년 10월 24일)은 일본으로 이주한 미국 태생의 일본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고햄은 일본의 신생 자동차 산업의 기술과 역량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아이카와 요시스케에 의해 결국 닛산 자동차 회사에 합병될 많은 회사들과 함께 일했다. 고햄은 제1차 세계대전 중 1918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처음에는 항공산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1년 만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동차산업으로 관심을 옮겼다. 일본 최대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하고 이끈 성공한 기업인 쿠보타 곤시로는 자동차 시장 진출에 열심이었다. 당시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는 이즈즈, 하시모토 마쓰지로가 설립한 가이신샤가 유일했다. 쿠보타는 고햄을 수석 디자이너로 고용했는데, 고햄은 차량을 디자인하고 고햄의 3륜 자동차 제조 공장을 세웠다. 다른 일본인 투자자들과 함께 쿠보타, 고럼은 고럼으로 삼륜차를 제조할 지쓰요 지도샤, 그리고 고럼이 디자인한 4륜자동차를 라일라로 찾아내곤 했다. 지쓰요 지도샤와 가이신샤는 나중에 닛산 자동차의 전신으로 합병되었다.  지쓰요 지도샤, 토바타 캐스트링스, 니혼상요 등 닛산자동차의 전임자들과 함께 1936년 출발하여, 후에 히타치로 합병될 자신의 회사인 고쿠산 세이키를 찾았다. 1941년 5월, 고햄 부부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일본 시민으로 귀화했다. 전시상황이 외국인에 대한 규제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이것을 선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고럼은 멀티컷 선반과 제트 엔진에 초점을 맞추어 히타치에서 엔지니어링 작업을 계속했다.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했다. 한편, 그는 산업 문제와 관련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본부와 연락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40년대 내내, 그는 또한 그들의 조달 및 공장 관리 관행과 관련하여 캐논 사의 컨설턴트로 자주 활동했다.
 
==자회사==
 
  
 
==관계사==
 
==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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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시비===
 
===미쓰시비===
 
[[미쓰시비]](Mitsubishi )는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99년 3월 27일에 경영난을 겪고 있던 일본 닛산 자동차의 지분을 프랑스 르노가 54억 달러에 인수하며 닛산의 1대 주주가 되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효시이다. 2016년에 닛산은 연비 조작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 34%를 22억 달러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르노-닛산의 얼라이언스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삼자 체제로 변경되었다.<ref name="33퍼센트">Maki Shiraki, Naomi Tajitsu, 〈[https://www.reuters.com/article/us-nissan-mitsubishimotors-investment-idUSKCN0Y227F Nissan buying $2.2 billion controlling stake in scandal-hit Mitsubishi Motors]〉, 《로이터》, 2016-05-12</ref>
 
[[미쓰시비]](Mitsubishi )는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99년 3월 27일에 경영난을 겪고 있던 일본 닛산 자동차의 지분을 프랑스 르노가 54억 달러에 인수하며 닛산의 1대 주주가 되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효시이다. 2016년에 닛산은 연비 조작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 34%를 22억 달러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르노-닛산의 얼라이언스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삼자 체제로 변경되었다.<ref name="33퍼센트">Maki Shiraki, Naomi Tajitsu, 〈[https://www.reuters.com/article/us-nissan-mitsubishimotors-investment-idUSKCN0Y227F Nissan buying $2.2 billion controlling stake in scandal-hit Mitsubishi Motors]〉, 《로이터》, 2016-05-1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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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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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타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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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타이탄]](Nissan Titan)은 닛산이 북미 시장을 위해 미국에서 제조한 풀사이즈 픽업트럭이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티탄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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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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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개발은 1999년 9월에 시작되었는데, 다이앤 앨런의 설계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지오바니 아로바의 TA60 외관은 2000년 말 선택되었으며, 2001년 7월 최종 생산이 동결되었다. 미래형 트럭의 디자인 언어는 앞서 2000년 11월까지 개발했던 2001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보여준 2001년 알파 T 개념으로 미리보였다. 생산은 2003년 9월 21일에 시작되었고 판매는 2003년 12월 1일에 시작되었다.[3][4] 타이탄은 닛산의 신형 풀사이즈 F-알파 플랫폼을 사용했다. 이 새로운 플랫폼은 닛산 무적함대, 인피니티 QX56 SUV와 공유되었으며, 세 가지 모두 미국 미시시피 주 캔턴에서 제조되었다. 1세대 타이탄은 2015년까지 대대적인 재설계 없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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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모델에는 32V, 5.6L 엔진인 VK56DE가 표준 장착되었는데, 이 엔진은 317hp (236 kW) (2004–2006 모델의 경우 305 hp 또는 227 kW)와 385 lb³ft (522 N⋅m)의 토크를 발생시킨다. 1세대 타이탄은 완전 박스형 사다리 프레임을 장착했으며, 5단 RE505A 자동변속기와 결합된 후륜 구동 또는 비행중 4륜 구동 시스템 중 하나로 이용이 가능했다. 자동 브레이크 제한 슬립(ABLS) 시스템은 모든 타이탄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1세대는 일반 택시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킹택시(확장택시)나 뒷좌석이 풀사이즈인 승무원택시로 이용할 수 있었다. 킹 캡은 6피트 7인치(2.01m)의 침대를, 승무원들은 5피트 7인치(1.70m)의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2008년, 더 긴 축간거리 모델은 킹 캡의 8피트 3인치(2.51m) 침대 또는 승무원의 카브의 7피트 3인치(2.21m) 침대로 제공되었다. 원래 사용할 수 있는 트림 수준은 S, SV, Pro-4x, SE, LE 등 4가지였다. SE와 LE 트림은 결국 럭셔리 SL 트림으로 대체되었다. S는 기본 모델, SV는 기능이 더 많은 중급 모델, PRO-4X는 오프로드 지향 버전, 최상위 SL에는 20인치 알로이 휠과 같은 기능이 표준 장비로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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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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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타이탄은 가볍게 가죽을 벗기고 다시 붙이는 닷지램이 될 예정이었으나, 그러한 계획은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함께 무산되었다. 닛산은 2015년 북미국제오토쇼에서 2세대 타이탄을 공개했다. 이 회사는 5%의 시장점유율 즉 미국에서 연간 10만 개의 매출을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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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판매량은 2만1880대에 달했다. 표준 엔진은 5.6L V8 가솔린 엔진이다. 엔진은 이전 모델에 비해 출력이 증가해 7단 자동에 연결된 390hp(290kW)와 394lblbft(534N⋅m)의 토크를 생산했다. 또한, 2세대 타이탄은 2019년 말까지 거의 555lbft(752 N (m)의 토크를 생산하는 310마력(230kW) 컴민스 5.0L 터보레이델 V8을 제공했다. 이 엔진은 ISV라고 불린다. 2세대 타이탄은 일반형과 XD의 두 가지 형태로 이용 가능하다. XD 버전은 닛산의 상용차 라인을 기반으로 한 중형 프레임에 구축되며 옵션으로 컴민스 디젤 엔진을 포함하고 있다. 그 플랫폼은 닛산 NV와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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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4일 (월) 12:06 판

닛산(NISSAN)
닛산(NISSAN)
르노(RENAULT)

닛산(Nissan)은 일본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토요타(Toyota), 혼다(Honda)와 함께 일본 3대 자동차 회사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군수 산업을 담당한 전범기업이기도 하다. 소유주는 프랑스의 르노(Renault) 사로 지분 43.4%를 보유하고 있고, 한국의 르노삼성자동차㈜에 승용차의 기본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닛산은 2014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매출액 기준으로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순위에서 6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6위 자동차회사에 이름을 올렸다.

개요

닛산은 1999년부터 일본의 닛산과 미쓰비시자동차가 프랑스의 르노와 제휴한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2016년 미쓰비시 가입)에 가입해 왔다. 2013년 현재 르노는 닛산 지분 43.4%를 보유하고 있고, 닛산은 르노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다. 닛산은 2016년 10월부터 미쓰비시자동차의 지분 34%를 보유하고 있다. 닛산은 2013년 도요타, 제너럴모터스, 폴크스바겐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포드 등에 이어 세계 6위의 자동차 업체였다.[9] 합치면 르노-닛산 연합은 세계 4위의 자동차 회사가 될 것이다. 닛산은 중국, 러시아, 멕시코에서 일본 브랜드로 손꼽힌다. 2014년 닛산은 북미에서 가장 큰 자동차 제조업체였다. 닛산은 세계 최대 전기차(EV) 제조사로 2018년 4월 기준 전전기차 글로벌 판매량이 32만대를 넘어섰다. 자동차 메이커의 완전 전기 라인업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량은 전전기차인 닛산 리프(Nassan REF)이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고속도로용 플러그 인 전기 자동차다. 2018년 1월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최고경영자(CEO)는 2021년부터 출시한 인피니티 차량은 모두 하이브리드 차량이나 전전기차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1]

역사

하시모토 마수지로(山本路)는 1911년 7월 1일 도쿄 도 아자부히로 지구에서 가이신샤 자동차 워크스(快進社自動車, 좋은 회사 자동차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1914년에, 그 회사는 DAT라고 불리는 그것의 첫 번째 자동차를 생산했다. 이 새 차의 모델명은 이 회사 투자자들의 성의 약자였다. 덴 겐지로 , 아오야마 로쿠로, 다케우치 메이타로 등이다. 1918년에 가이신샤 자동차 주식회사로 개칭되었고, 1925년에 다시 DAT 지도샤 주식회사로 개칭되었다. DAT 모터스는 DAT와 닷산 승용차 외에 트럭을 만들었다. 당시 승용차에 대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소비자 시장과 1923년 간토 대지진의 결과로 인한 재해 복구 노력 때문에 생산량의 대부분은 트럭이었다. 1918년부터 최초의 DAT 트럭이 군사 시장을 위해 생산되었다. 이와 함께 지쓰요 지도샤(지쓰요는 실용적 사용이나 효용을 의미한다)는 부품과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소재를 이용해 소형 트럭을 생산했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동안 상업적 작전은 보류되었고, 회사는 전쟁 노력에 기여했다. 1926년에 도쿄에 본사를 둔 DAT 모터스는 오사카에 본사를 둔 지쓰요 지도샤 주식회사와 합병했다. 지쓰요 지도샤 세이조(1919년 쿠보타 자회사로 설립)는 1932년까지 오사카에서 DAT 지도샤 세이조가 되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이 회사는 라일라라는 이름으로 경차와 트럭을 생산했다. 1931년, DAT는 "DAT의 아들"이라는 뜻의 첫 번째 "Datson"인 Datsun Type 11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소형 자동차를 출시했다. 이후 닛산 그룹 자이바츠가 DAT모터스를 장악한 1933년, "아들"은 일본어로도 "손"을 의미하기 때문에 "닷산"(ダトサン, Dattosan)이라는 명칭이 "태양"으로 바뀌었다. 1933년, 회사명을 지도샤 세이조로 일본화하여 요코하마로 이전하였다. 1928년 아이카와 요시스케(닉네임:기이스케/아유카와 구이스케)가 지주회사 니혼상요(日本 産業, 일본공업 또는 니혼공업)를 설립했다. 닛산이라는 명칭은 1930년대에 니혼상요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사용된 약어로 유래되었다. 이 회사는 토바타 캐스팅과 히타치가 포함된 닛산 '자이바츠'였다. 이때 닛산은 주조 공장과 자동차 부품 사업을 지배했으나 아이카와씨는 1933년까지 자동차 제조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이바츠는 결국 74개의 회사를 포함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회사가 되었다. 1931년 DAT 지도샤 세이조는 토바타 캐스팅에 소속되어 1933년 토바타 캐스팅에 합병되었다. 토바타 캐스팅은 닛산 회사였기 때문에, 이것이 닛산의 자동차 제조의 시작이었다. 1934년 아이카와씨는 토바타 캐스팅의 확장된 자동차 부품 부문을 분리해 새로운 자회사로 편입시켰고, 닛산자동차(日産自動車)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신기업의 주주들은 일본의 자동차 전망에 열광하지 않아, 아이카와씨는 1934년 6월에 토바타 캐스팅 주주(니혼 산업의 자본을 이용)를 모두 매수했다. 이때 닛산자동차는 사실상 니혼상요와 히타치가 소유하게 되었다. 1935년에 요코하마 공장의 건설이 완료되었다. 닷산는 아시아, 중남미로 운송되었다. 1935년, 통합 조립 시스템에 의해 제조된 최초의 자동차가 요코하마 공장에서 라인에서 굴러 떨어졌다. 닛산은 일본 제국군을 위해 트럭, 비행기, 엔진을 만들었다. 1937년 11월, 닛산의 본사는 만주국의 수도인 싱킹으로 이전되었다. 12월에 그 회사는 이름을 만주 중공업 개발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1940년, 최초의 녹다운 키트가 MHID의 회사 중 하나인 다우아 지도샤 코교(도와 자동차)로 조립을 위해 선적되었다. 1944년 본사를 도쿄의 니혼바시로 이전하고, 회사명을 닛산중공업으로 변경하여 1949년까지 유지하였다.https://en.wikipedia.org/wiki/Nissan

DAT는 쿠보타의 수석 디자이너인 미국 엔지니어 윌리엄 레이건 고햄(William Reagan Gorham)에게 상속되었다. 이는 아이카와 씨의 1908년 디트로이트 방문과 함께 닛산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첨단 자동차 제조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언제나 아이카와 씨의 의도였지만, 이 계획을 실행한 것은 고햄이었다. 대부분의 기계와 공정은 원래 미국에서 왔다. 닛산이 1937년 '닛산' 브랜드로 대형 차량을 조립하기 시작했을 때 디자인 계획과 플랜트 시설의 상당 부분은 그레이엄-페이지 컴퍼니에서 공급했다. 닛산도 승용차, 버스, 트럭 등이 만들어지는 그레이엄 면허를 갖고 있었다. 할버스탐은 데이비드 할버스탐의 1986년 저서 <추계>에서 "기술 면에서는 고햄이 닛산 자동차 회사의 창립자였다"면서 "그를 만나본 적이 없는 젊은 닛산 엔지니어들이 그를 신으로 여기고 회사에서의 그의 세월과 그의 많은 발명품들을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34년부터 닷산은 라이선스 하에 오스틴 7s(Austin 7s)를 짓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오스틴의 세븐의 해외 라이선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고, 데이썬의 국제적인 성공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닛산은 1952년 오스틴과 법률협약을 체결해 일부 조립된 수입 세트에서 2000개의 오스틴을 조립해 오스틴 상표로 일본에서 판매하기로 했다. 이 협정은 닛산이 3년 안에 모든 오스틴 부품을 국산화하도록 요구했는데, 닛산이 충족시킨 목표였다. 닛산은 호주를 7년간 생산해 판매했다. 이번 협약은 닛산이 자체 개발한 다트선 라인의 엔진 개발에 사용한 오스틴 특허 사용권도 닛산에 부여했다. 1953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호주가 조립되어 판매되었지만, 1955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닛산에 의해 건설되고 새로운 1489 cc 엔진이 탑재된 오스틴 A50이 일본에서 시판되었다. 닛산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2만855개의 오스틴을 생산했다. 닛산은 오스틴의 특허를 활용해 오스틴의 A-와 B-패밀리 디자인이 제공하는 것을 지나 그들만의 현대적인 엔진 디자인을 더욱 발전시켰다. 오스틴에서 파생된 엔진의 정점은 1966년 새로운 디자인 A 시리즈 엔진이었다. 1967년 닛산은 신형 4기통 오버헤드캠(OHC) 닛산 L 엔진을 선보였는데, 메르세데스-벤츠 OHC 디자인과 유사하지만 닛산이 설계한 완전히 새로운 엔진이었다. 이 엔진은 전 세계 세단 시장에서 닛산의 존경을 받은 새로운 데이썬 510에 동력을 공급했다. 그 후, 1969년에 닛산은 닛산 기계(닛산 코키 주식회사)에 의해 개발된 L 시리즈 엔진의 6기통 변형을 사용한 닷산 240Z 스포츠카를 선보였다. 240Z는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닛산을 자동차 시장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국전쟁 당시 닛산은 미 육군의 주요 차량 생산국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는 상당한 수준의 반공 감정이 존재했다. 닛산의 노동력을 조직한 노조는 강성하고 전투적이었다. 닛산은 자금난에 시달렸고, 임금협상이 오자 회사는 강경책을 취했다. 노동자들은 감금되었고, 수백 명이 해고되었다. 일본 정부와 미국 점령군은 몇몇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노조의 파업자금이 바닥나 패퇴했다. 새로운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시오지 이치로는 그 지도자들 중 한 명이다. 이치로는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 정부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었다. 그는 임금 삭감을 2,000명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과 맞바꾸자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치로의 생각은 생산성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노조 계약[34]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55년과 1973년 사이에 닛산은 노조에 의해 지원되고 종종 제안되는 기술적 진보에 기초하여 빠르게 확장되었다고 말했다. 이치로는 일본자동차노동조합총연맹 회장이 됐고 일본 노동운동의 우파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1966년 닛산은 프린스 자동차 회사와 합병하여 스카이라인과 글로리아를 포함한 더 많은 고급 자동차를 선택으로 끌어들였다. 프린스라는 이름은 결국 포기되었고, 잇달은 스카이라인과 글로리아스는 닛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프린스'는 일본 닛산 대리점 '닛산 프린스샵'에서 1999년까지 사용하다가 '닛산 레드 스테이지'가 이를 대체했다. 닛산 레드 스테이지 자체가 2007년 현재 교체됐다. 스카이라인은 인피니티의 G시리즈로 살아가고 있다.

주요 인물

아이카와 요시스케

아이카와 요시스케(또는 아유카와 가이스케, 1880년 11월 6일 ~ 1967년 2월 13일)는 일본의 기업가, 사업가,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의 가장 강력한 기업집단 중 하나인 닛산 자이바쓰(1931~1945)의 설립자 겸 초대 회장이다. 아이카와씨는 현재 야마구치 현 야마구치 시의 일부인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메이지 시대 겐로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카딸이었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 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시바의 선구자인 시바우라 세이사쿠쇼에서 일하게 되었다. 비록 그의 보수는 매우 낮았지만, 아이카와씨는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절약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융통성 있는 주철 기술을 공부했다. 일본 귀국 후,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전 조슈 정치인들의 후원으로 1909년 기타큐슈에 토바타 주조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현재 히타치 킨조쿠(히타치 금속회사)로 알려져 있다. 1928년, 아이카와씨는 형부 구하라 후사노스케로부터 인수해 구하라 광공업(현재의 닛산 광공업)의 사장이 되어, 줄여서 니혼상요, 즉 닛산이라는 지주 회사를 만들었다. 구하라는 미래의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비롯한 정치군사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정치계에 종사했고, 이후 이 관계를 아이카와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주식시장 붐이 일면서 아이카와씨는 닛산 자회사 132개사의 지분 다수를 매입해 닛산 그룹(日本 그룹, 닛산 콘체룬, '닛산 우려')을 새로 만들었다. 닛산자동차, 이수즈, NEC공사, 닛산광업지주회사, 닛산화학, 히타치, 니치유상사, 니치유상사, 니치아이리상사, 닛산해상보험, 닛산상생보험 등이 포함됐다. 이 그룹에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앞선 기업들도 포함됐다. 1937년 친척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으로 만주국으로 건너가 일본 관퉁군의 신디칼리스트 경제 비전과 만주국을 위한 중앙집권적 산업발전계획에 합의했다. 닛산의 본사를 만주국으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만주국 자이바쓰라는 만주산업개발회사의 핵심이 되었다. 아이카와씨는 사장 겸 회장으로 있던 자리에서 만주국에서의 모든 산업 노력을 지도하면서, 1930년대에 군 이념가 호시노 나오키의 경제 산업 비전에 따른 두 개의 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러나 아이카와씨는 보다 독점적인 접근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호시노의 원래 개념과는 달랐다. 그는 만주국의 경제 상태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허용하기에는 아직 너무 원시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카와씨는 만주국 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철강산업자들로부터 은행 대출을 받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불인정' 정책으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그의 경제관은 일본 제국주의 육군정책과 일맥상통했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카와씨는 삼자협정의 강력한 반대자였으며, 총전이 발발하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이 나치 독일을 이기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만주국에 유대인 난민 정착 프로젝트인 푸구 계획을 지지했다. 1942년, 관퉁군의 선동으로 아이카와씨는 만주 산업 개발 회사의 회장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항복 이후 에이카와씨는 미국 점령당국에 체포되어 A급 전범 용의자로 20개월간 스가모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그의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풀려났지만, 이 기간 동안 닛산 자이바츠는 해체되었다. 아이카와씨는 석방 후 일본의 전후 경제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상업은행을 매입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정리했다. 데이코쿠 석유회사와 일본석유 탐사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1953년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기시 노부스케 당시 총리의 도움으로 1960년대 중소기업중앙회가 된 압력단체인 추세이렌의 리더로서 경제통제법과 정책을 실천하는 데 목적을 달성했다. 아이카와씨는 1967년 급성 담낭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 외곽의 타마 묘지에 있다.[2]

윌리엄 레이건 고햄

윌리엄 레이건 고햄(William Ragan Gorham, Gohamu Katsundo, 1888년 1월 4일 ~ 1949년 10월 24일)은 일본으로 이주한 미국 태생의 일본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고햄은 일본의 신생 자동차 산업의 기술과 역량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아이카와 요시스케에 의해 결국 닛산 자동차 회사에 합병될 많은 회사들과 함께 일했다. 고햄은 제1차 세계대전 중 1918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처음에는 항공산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1년 만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동차산업으로 관심을 옮겼다. 일본 최대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하고 이끈 성공한 기업인 쿠보타 곤시로는 자동차 시장 진출에 열심이었다. 당시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는 이즈즈, 하시모토 마쓰지로가 설립한 가이신샤가 유일했다. 쿠보타는 고햄을 수석 디자이너로 고용했는데, 고햄은 차량을 디자인하고 고햄의 3륜 자동차 제조 공장을 세웠다. 다른 일본인 투자자들과 함께 쿠보타, 고럼은 고럼으로 삼륜차를 제조할 지쓰요 지도샤, 그리고 고럼이 디자인한 4륜자동차를 라일라로 찾아내곤 했다. 지쓰요 지도샤와 가이신샤는 나중에 닛산 자동차의 전신으로 합병되었다. 지쓰요 지도샤, 토바타 캐스트링스, 니혼상요 등 닛산자동차의 전임자들과 함께 1936년 출발하여, 후에 히타치로 합병될 자신의 회사인 고쿠산 세이키를 찾았다. 1941년 5월, 고햄 부부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일본 시민으로 귀화했다. 전시상황이 외국인에 대한 규제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이것을 선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고럼은 멀티컷 선반과 제트 엔진에 초점을 맞추어 히타치에서 엔지니어링 작업을 계속했다.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했다. 한편, 그는 산업 문제와 관련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본부와 연락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40년대 내내, 그는 또한 그들의 조달 및 공장 관리 관행과 관련하여 캐논 사의 컨설턴트로 자주 활동했다.

관계사

럭스젠

럭스젠 자동차 회사(Luxgen Motor Co., Ltd)는 중화민국의 자동차 회사이다. 먀오리 현 싼이향 시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위롱 자동차 회사가 100% 지분을 가지며 자회사로 2009년 1월 설립했다. 생산은 항저우 시에 있는 동펑 위롱 자동차 회사가 2010년 하반기부터 생산하고 있다. 럭스젠 제품들은 위롱 자동차 회사의 또 다른 자회사인 HAITEC에서 개발하고 있다. 럭스젠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는 내수용과 수출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회사의 슬로건은 "Think Ahead"이다. 럭스젠(Luxgen)과 닛산은 자회사인 닛산자동차필리핀사(Nissan Motor Philippines Inc. (NMPI))와 필리핀에서 차량 조립을 위해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https://ko.wikipedia.org/wiki/%EB%9F%AD%EC%8A%A4%EC%A0%A0

포드

포드(Ford)는 승용차, 트럭, SUV 등의 자동차를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미시간 주 디어본에 본사가 있다. 2010년 현재 전 세계 34개국에 생산 및 조립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만 5000개의 유통업체를 가진 세계적인 기업이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6364&cid=43671&categoryId=43671 1989년과 1992년 사이 호주에서는 닛산 핀타라 버전이 포드 코르세어, 포드 팔콘 버전이 닛산 유테로 판매되는 등 정부가 지원하는 버튼 플랜(Button Plan)으로 알려진 합리화 계획에 따라 닛산 호주는 포드 오스트레일리아와 모델을 공유했다. 닛산 순찰대의 변종은 1988-94년 모델 동안 포드 매버릭으로 팔렸다. 북미에서 닛산은 1993년부터 2002년까지 포드사와 제휴하여 오하이오주가 건설한 머큐리 빌라거와 닛산 퀘스트를 시판했다. 그 두 미니밴은 외관상 차이 외에는 사실상 동일했다. 2002년 닛산과 포드는 협정 중단을 발표했다. 유럽에서는 닛산과 포드 유럽이 손잡고 닛산 테라노 2호와 배지엔지니어링이 가능한 닛산자동차 이베리카 S에서 생산된 중형 SUV 포드 매버릭을 생산했다.스페인 바르셀로나의 A(NMISA) 공장. 매버릭/테라노 2세는 유럽과 오스트랄라시아 전역에서 판매된 인기 차량이었다. 닛산 모델이 닛산 미스트랄로 시판되는 등 일본에서도 포획 수입으로 판매됐다.

폭스바겐

폭스바겐(Volkswage)은 독일의 자동차 제조업체로 폭스바겐(Volkswagen), 아우디(Audi), 벤틀리(Bentley), 부가티(Bugatti), 람보르기니(Lamborghini), 스카니아(Scania), 포르쉐(Porsche)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자동차 회사다. 닛산이 폭스바겐과의 완전한 제휴를 목적으로 일본 시장용 산타나 생산을 계획하고 있었고,1981년부터 협상이 진행되었다.협상의 결과로 1984년 2월 일본 가나가와 공장에서 산타나의 라이센스 생산이 진행되었다.차량의 코드명은 M30이었으며,가격은 폭스바겐에서 판매되는 산타나보다 저렴한 편이었다고 한다.닛산에서 생산하는 산타나는 일본 시장의 우핸들 운전 방식 때문에 새로운 본닛과 외이퍼 연결 방식이 변경되었다.[11]닛산의 산타나는 폭스바겐에서 생산하는 차량보다 폭이 5mm 정도 좁았는데, 이는 폭 1700mm 이하인 차량만 달 수 있는 5넘버 규제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가솔린 엔진은 1.8L I4 엔진과 2.0L I4 엔진이 있었으며,1.6L I4 엔진은 디젤 터보 방식이 적용되었다.변속기는 5단 수동변속기와 3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다.1985년 5월에는 Xi5 아우토반(Autobahn) 트림이 추가되었는데 벨벳 스포츠 시트,전자식 선루프,14인치 알로이 휠이 적용되었다.1987년 1월에는 범퍼의 크기가 커지는 일종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쳤으며,1.6L 터보 디젤 차량은 단종되었다.1.8L 엔진의 출력은 91PS로 감소했으며,Li 트림과 Gi5 트림에 들어간 편의장비 수도 감소하였다.Xi5 버전의 경우에는 DOHC 방식의 2.0L 엔진이 적용되었다.1989년에 닛산은 산타나의 생산을 중단했으며,1990년 5월에 재고 차량을 모두 판매하면서 단종되었다.이후 닛산에서는 라이센스를 얻고,닛산의 딜러망을 통해 3세대 폭스바겐 파사트를 판매했지만,폭스바겐이 토요타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닛산을 통한 폭스바겐 차량의 판매도 중단되었다.https://namu.wiki/w/%ED%8F%AD%EC%8A%A4%EB%B0%94%EA%B2%90%20%EC%82%B0%ED%83%80%EB%82%98#s-2.1.2.1

알파 로메오

알파 로메오(Alfa-Romeo)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고성능 자동차를 주로 생산하는 자동차 회사이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닛산은 알파 로메오와 협력하여 아르나를 건설했다. 알파가 패밀리 해치백 시장 부문에서 경쟁하고, 닛산이 유럽 시장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였다. 피아트의 알파 로메오 인수 이후 차와 협력이 모두 중단됐다.

제너럴모터스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는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체이다. 유럽에서는 GM과 닛산이 경상용 차량인 닛산 프리마스타를 공동 운영했다. 하이루프 버전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NMISA 공장에서 제작되며, 로우루프 버전은 영국 베드포드셔의 보홀 모터스/오펠의 루턴 공장에서 제작된다. GM은 2013년 닛산 NV200 상용 밴을 2014년 말까지 선보일 2015MY 시보레 시티 익스프레스 모델로 재입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GM의 호주법인 홀덴은 1984년부터 1989년 사이에 닛산 펄서 버전을 홀덴 아스트라로 판매했다.

LDV

LDV(Leyland DAF Vans)는 버밍엄주 워시우드 히스에 본사를 둔 영국의 밴 제조사이다. LDV 그룹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배지공학적 경형 상용차인 닛산 세레나 버전을 LDV Cub로 판매했다. 닛산 동급 제품은 닛산 밴넷 카고(Vannett Cargo)로 시판됐다. https://en.wikipedia.org/wiki/LDV_Group

제휴

르노

르노(Renault)는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이다. 닛산은 1999년 극심한 자금난을 겪으면서 프랑스의 르노S.A.와 제휴를 맺었다. 1999년 3월 27일 체결된 르노-닛산 연합은 일본과 프랑스 자동차 제조업체가 참여한 최초의 동맹으로 각각 고유한 기업 문화와 브랜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2000년 봄, 일본의 수입차 판매 1위 업체인 야나세가 르노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취소하고, 닛산이 단독 사업자로 인수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수년 동안 닛산 지분 43.4%를 르노가 보유하고 있고, 닛산이 르노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진화했다. 이 동맹 자체는 네덜란드 법에 따라 2002년 3월 28일에 설립된 르노-닛산 B.V.로 통합되어 있다. 르노-닛산 B.V.는 르노와 닛산이 똑같이 소유하고 있다. 곤 CEO의 "닛산 부흥 계획"(NRP)에 따라, 이 회사는 많은 주요 경제학자들이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업 턴어라운드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것에서 반등하여 닛산을 수익 기록으로 만들고 닛산과 인피니티 모델 라인업의 극적인 활성화로 이끌었다. 곤 회장은 일본 경제가 침체된 가운데 회사가 회복세를 보인 것으로 일본에서 인정을 받아왔다. 곤과 닛산 턴어라운드가 일본 망가와 대중문화에 특색 있게 등장했다. 닛산 재활성화에 대한 그의 업적은 2004년 일본 정부가 그에게 블루리본과 함께 일본 메달을 수여한 것에 의해 주목받았다. 다임러 AG는 2010년 4월 7일 보유 지분 3.9%를 닛산과 르노로부터 모두 3.9%로 교환했다. 이 3중 동맹은 기술 및 개발 비용의 공유를 증가시켜 글로벌 협력과 상호 발전을 촉진한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2012년 12월 12일 러시아 최대 자동차 회사이자 국내 최대 판매 브랜드 라다의 소유주인 에이브토바즈의 장기 지배주주가 될 목적으로 러시아 테크놀로지스(Aliance Rostec Auto BVV)와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번 인수는 2014년 6월 완료됐으며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두 회사는 얼라이언스 로스테크의 지분 67.1%를 모두 인수해 아보바즈 지분 74.5%를 인수해 르노와 닛산이 러시아 제조사를 간접 지배하게 됐다. 곤 회장은 2013년 6월 27일 에이브투바즈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됐다.

미쓰시비

미쓰시비(Mitsubishi )는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99년 3월 27일에 경영난을 겪고 있던 일본 닛산 자동차의 지분을 프랑스 르노가 54억 달러에 인수하며 닛산의 1대 주주가 되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효시이다. 2016년에 닛산은 연비 조작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 34%를 22억 달러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르노-닛산의 얼라이언스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삼자 체제로 변경되었다.[3]


모델

닛산 타이탄

닛산 타이탄(Nissan Titan)은 닛산이 북미 시장을 위해 미국에서 제조한 풀사이즈 픽업트럭이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티탄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1세대
타이탄의 개발은 1999년 9월에 시작되었는데, 다이앤 앨런의 설계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지오바니 아로바의 TA60 외관은 2000년 말 선택되었으며, 2001년 7월 최종 생산이 동결되었다. 미래형 트럭의 디자인 언어는 앞서 2000년 11월까지 개발했던 2001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보여준 2001년 알파 T 개념으로 미리보였다. 생산은 2003년 9월 21일에 시작되었고 판매는 2003년 12월 1일에 시작되었다.[3][4] 타이탄은 닛산의 신형 풀사이즈 F-알파 플랫폼을 사용했다. 이 새로운 플랫폼은 닛산 무적함대, 인피니티 QX56 SUV와 공유되었으며, 세 가지 모두 미국 미시시피 주 캔턴에서 제조되었다. 1세대 타이탄은 2015년까지 대대적인 재설계 없이 계속됐다.

모든 모델에는 32V, 5.6L 엔진인 VK56DE가 표준 장착되었는데, 이 엔진은 317hp (236 kW) (2004–2006 모델의 경우 305 hp 또는 227 kW)와 385 lb³ft (522 N⋅m)의 토크를 발생시킨다. 1세대 타이탄은 완전 박스형 사다리 프레임을 장착했으며, 5단 RE505A 자동변속기와 결합된 후륜 구동 또는 비행중 4륜 구동 시스템 중 하나로 이용이 가능했다. 자동 브레이크 제한 슬립(ABLS) 시스템은 모든 타이탄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1세대는 일반 택시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킹택시(확장택시)나 뒷좌석이 풀사이즈인 승무원택시로 이용할 수 있었다. 킹 캡은 6피트 7인치(2.01m)의 침대를, 승무원들은 5피트 7인치(1.70m)의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2008년, 더 긴 축간거리 모델은 킹 캡의 8피트 3인치(2.51m) 침대 또는 승무원의 카브의 7피트 3인치(2.21m) 침대로 제공되었다. 원래 사용할 수 있는 트림 수준은 S, SV, Pro-4x, SE, LE 등 4가지였다. SE와 LE 트림은 결국 럭셔리 SL 트림으로 대체되었다. S는 기본 모델, SV는 기능이 더 많은 중급 모델, PRO-4X는 오프로드 지향 버전, 최상위 SL에는 20인치 알로이 휠과 같은 기능이 표준 장비로 제공되었다.

  • 2세대
2세대 타이탄은 가볍게 가죽을 벗기고 다시 붙이는 닷지램이 될 예정이었으나, 그러한 계획은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함께 무산되었다. 닛산은 2015년 북미국제오토쇼에서 2세대 타이탄을 공개했다. 이 회사는 5%의 시장점유율 즉 미국에서 연간 10만 개의 매출을 목표로 삼았다.

2016년 판매량은 2만1880대에 달했다. 표준 엔진은 5.6L V8 가솔린 엔진이다. 엔진은 이전 모델에 비해 출력이 증가해 7단 자동에 연결된 390hp(290kW)와 394lblbft(534N⋅m)의 토크를 생산했다. 또한, 2세대 타이탄은 2019년 말까지 거의 555lbft(752 N (m)의 토크를 생산하는 310마력(230kW) 컴민스 5.0L 터보레이델 V8을 제공했다. 이 엔진은 ISV라고 불린다. 2세대 타이탄은 일반형과 XD의 두 가지 형태로 이용 가능하다. XD 버전은 닛산의 상용차 라인을 기반으로 한 중형 프레임에 구축되며 옵션으로 컴민스 디젤 엔진을 포함하고 있다. 그 플랫폼은 닛산 NV와 공유된다.


각주

  1. 닛산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Nissan
  2. 아이카와 요시스케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Yoshisuke_Aikawa
  3. Maki Shiraki, Naomi Tajitsu, 〈Nissan buying $2.2 billion controlling stake in scandal-hit Mitsubishi Motors〉, 《로이터》, 2016-05-12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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