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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작지만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를 위한 사업자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국민차 티코(Tico)다. 티코는 일본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통해 개발된 경차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민차 계획을 바탕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진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 요구하는 가격대는 200만 원대였는데, 이는 당시 소형 승용차인 현대 엑셀 5도어의 400~500만원 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우국민차는 편의사양을 덜어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티코는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을 갖춘 차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290만원으로 출시 가격을 맞출 수 있었다. 티코의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 카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기가 서서히 높아졌고, 1995년에는 승용차 판매의 4%를 티코가 홀로 점유하기도 했다. | + |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작지만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를 위한 사업자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국민차 티코(Tico)다. 티코는 일본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통해 개발된 경차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민차 계획을 바탕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진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 요구하는 가격대는 200만 원대였는데, 이는 당시 소형 승용차인 현대 엑셀 5도어의 400~500만원 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우국민차는 편의사양을 덜어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티코는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을 갖춘 차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290만원으로 출시 가격을 맞출 수 있었다. 티코의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 카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기가 서서히 높아졌고, 1995년에는 승용차 판매의 4%를 티코가 홀로 점유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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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4일 (수) 12:06 판
대우자동차㈜(Daewoo)는 한국지엠㈜의 전신으로 과거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대한민국의 3대 자동차 회사로 꼽혔으며 특히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는 현대와 기아를 누르고 대우자동차가 한국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 자동차공업을 토대로 1963년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고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 업체인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1972년 06월 김우중 회장에 의하여 신진자동차와 미국 제너럴모터스사의 공동출자(185억 원)로 종합자동차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78년 대우그룹이 인수하고 경영권을 넘겨받아 1983년 1월 대우자동차를 설립하였다. 1998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여 경차부터 대형 승용차, 사륜구동 지프형 차에 걸쳐 전 차종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등으로 영업력이 약화되면서 1999년 8월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처리 이후 승용, 알브이(RV) 부문은 미국 제너럴모터스에 인수되어 한국지엠㈜로,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상용차㈜로, 트럭 부문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각각 분할 매각되었다.
목차
개요
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 자동차공업을 모태로 한다. 미군에서 쓰던 차량을 인수, 개조해 판매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1963년에는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고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업체인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초기의 신진자동차는 일본 토요타와의 제휴를 통해 코로나, 크라운 등의 인기 모델을 생산하고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72년 일본 정부가 중국과의 통상을 하기 위해 저우언라이 4원칙(한국, 대만과의 거래를 끊어야 중국과의 무역이 가능)을 받아들임에 따라 토요타는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었고 신진자동차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토요타의 모델을 생산할 수 없게 된 신진자동차는 미국 지엠과 합작해 지엠 코리아를 설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시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등의 지엠 기반 자동차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엠 계열 차량들은 토요타 계열 차량보다 한국 시장에서 인기가 없었다. 경영 위기에 처한 지엠 코리아는 1976년, 산업은행이 신진자동차 몫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새한자동차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78년에는 대우그룹이 이를 다시 인수하고 지엠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음에 따라 1983년에 대우자동차가 출범하게 된다.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은 넓은 인맥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춘 인물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급격히 사세를 넓혔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했다. 대우자동차 역시 무리해서 완전 신차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 제품의 상품성을 개선한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을 다수 출시하는 마케팅에 주력했다. 새한자동차 시절의 제미니를 개량한 맵시(1982년), 레코드 로얄를 개량한 로얄 XQ(1983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맵시는 최대의 경쟁사인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포니 시리즈에 밀려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로얄 시리즈는 큰 차체와 품위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아 고급 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로얄 프린스(1983년), 로얄 살롱 슈퍼(1986년) 등의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대우자동차는 1997년말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든 아이엠에프 외환위기와 더불어 모 기업인 대우그룹이 경영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오히려 투자를 확대해 1998년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상당수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의 조치를 했으나 대우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우중 회장이 1999년 해외로 도피하는 등의 사태가 겹치면서 대우자동차를 포함한 대우그룹 전체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결국 2000년 대우그룹은 해체를 맞이하게 되고 000년 11월,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 처리되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미국 지엠이 대우자동차의 승용차 부문을 인수하고 2002년 대우자동차는 지엠대우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버스로, 트럭 부분은 인도의 타타자동차가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이름이 바뀐다. 지엠대우는 2011년에 한국지엠으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1]
역사
- 1955년 : 신진 자동차 공업 설립
- 1963년 :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
- 1972년 06월: 김우중에 의하여 신진자동차와 미국 제너럴모터스사의 공동출자(185억 원)로 종합자동차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
- 1972년 09월: 소형승용차 시보레1700을 생산하고, 국내 최초로 신차발표회를 가졌으며, 중형승용차 레코드 1900을 생산
- 1973년 03월: 고속화물차 6.5 톤·8 톤 카고트럭, 대중 승합 자동차 대형버스, 소형화물 2.5 톤 카고트럭을 생산 개시한 후 대원 강철 공업 주식회사를 인수
- 1974년 05월: 가솔린엔진공장을 준공, 중장비차량을 생산 개시
- 1975년 05월: 자동차 종합전시장을 개장
- 1975년 08월: 레코드 로얄을 생산 개시
- 1975년 12월: 작업훈련소를 설립, 10.5톤 덤프트럭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 수출
- 1976년 11월: 새한자동차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
- 1977년 09월: 동양 최대규모의 서울정비센터를 준공, 10월 프레스 공장을 완공, 12월 소형승용차의 생산을 개시
- 1978년 07월: 대우실업이 경영에 참여
- 1979년 05월: 차체조립공장이 완공
- 1980년 06월: 국내 최초의 로얄 디젤 승용차와 픽업트럭 맥스 디젤의 생산을 개시
- 1983년 01월: 대우자동차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
- 1984년 01월: 트랙터(39 톤·53 톤)를 생산
- 1991년 05월: 아이알오십이(IR52) 장영실상을 수상(1.5DOHC 16V 엔진)
- 1992년 10월: 미국 지엠사와 합작 관계를 청산하여 100% 대우그룹 출자회사가 됨
- 1998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여 경차부터 대형승용차, 사륜구동 지프형 차에 걸쳐 전 차종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춤
- 1999년 08월: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
- 2001년 09월: 제너럴모터스와 매각 양해각서를 체결
- 2002년 04월: 신설법인 설립에 대한 최종계약을 체결
대표 모델
지엠코리아
시보레 1700
시보레 1700(Chevrolet 1700)은 1972년 출시해 1975년까지 3년 동안 8105대가 생산됐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소품 차량 대여 업체 금호상사가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 시보레 1700은 독특한 이름처럼 복잡하고 오랜 역사를 담은 모델이다. 시보레는 쉐보레의 옛 표기다. 한국지엠의 전신 신진공업은 1971년 합작사 도요타가 발을 빼자 지엠과 손잡았다. 이 때문에 1971~1976년 잠시 지엠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시보레 1700은 이때 지엠 산하 자회사 호주 홀덴의 엘제이(LJ) 토라나를 들여온 모델이다. 시보레 1700은 미국차답게 연비가 나빴다. 더욱이 출시 이듬해 1차 오일 쇼크로 기름값이 급등했다. 결국 현대 포니 등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2]
카미나
카미나(Kamina)는 기존에 판매되었던 시보레 1700의 저조한 판매량으로 인해 대체 투입이 이루어진 차량이며, 제너럴 모터스가 경영상의 이유로 철수하면서 새한자동차를 통해 판매되었다. 물론, 시보레 1700 역시 카미나가 단종될 때까지 병행 판매가 이루어졌다. 당시 파워트레인은 배기량 1,492cc의 가솔린 직렬 4기통 엔진을 탑재했는데 시보레 1700에 얹힌 엔진을 베이스로 실린더 내경을 5.5mm 줄이고 배기량을 206cc 줄인 엔진으로 4단 수동변속기를 장착해 최고 출력 66마력 / 5,000rpm, 최대 토크 11.2kg°m / 3,100rpm / 최고 시속 140km 의 성능을 냈으며, 앞, 뒤 외관에 크롬 범퍼 장착 등 변화를 주고 실내 콘솔 박스와 헤드 레스트도 적용하는 등 차별화에 나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엔진 및 차체의 부조화와 낮은 지상고 등 기존 시보레 1700이 갖고 있던 단점을 그대로 안고 출시되어 판매 성적은 더 형편없었는데, 총 판매 대수가 992대로 포니와 브리사의 벽을 넘지 못한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단종되었다. 중간에 헤드램프가 4등식으로 변경되는 페이스리프트가 있었고, 새한 카라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3]
새마을트럭
새마을트럭(Saehan Saemaeul Truck)은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한 자동차는 인기가 없어 판매에 실패한 시보레 1700 승용차의 섀시를 이용해 차체를 순 국산 디자인으로 개발한 픽업트럭이다. 튼튼하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파능력이 우수해 새마을 운동 작업장 운반용과 용달용으로 꽤 많이 팔린 트럭이다. 4기통 1700cc 79마력의 시보레 1700 가솔린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5km로 1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 새마을 트럭은 현재 국내 박물관에 두 대가 남아 있다.[4]
새한자동차
로얄
1983년 옛 대우그룹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출범한 대우자동차는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그 배후에는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있었는데,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하는 김우중 회장은 페이스리프트를 대우자동차의 초기 전략으로 세웠다. 최소 6~7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신차 세대교체보다는 추가적인 상품성 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신선함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결국 대우자동차는 성공적인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제품 이미지를 개선하고 판매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대우자동차로 하여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첫 번째 차량은 GM 산하의 오펠 차량을 베이스로 개발된 대우 로얄(Royale)이다. 로얄 시리즈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 고급차로 인식되어 당시 경쟁 차종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그나라다 등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불리며 중형 시장을 평정했다. 고급차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비교적 약세를 보였던 소형차 시장에서 도약을 준비했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자동차 산업이 성숙되던 시기였고, 자연스럽게 마이카 열풍이 불었다. 생애 첫 차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동력 성능, 그리고 실용성을 갖춘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아 말 그대로 소형차의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파생 모델 중 레코드로얄(Record royal)은 80년대 고급 중형차 시장을 장악한 로얄 시리즈의 시조이다. 레코드의 이름이 남아있었지만 새한은 로얄을 더 크게 강조했다. 당시 출시 가격은 535만 원이었으며, 1.9리터 4기통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02마력, 최대토크 16.2kg.m, 최소시속 160km를 발휘했다. 이듬해에는 3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한 '로얄 오토매틱' 출시를 시작으로 다양한 로얄 시리즈가 라인업에 더해진다. 특히 1980년에는 한국 최초의 디젤 승용차 '로얄 디젤'이 출시됐다. 최고출력 65마력, 최대 토크 12.3kg.m의 2.0리터 디젤 엔진을 탑재한 로얄 디젤은 15.4km/L의 고속도로 연비를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5천 원에 불과한 주유비로 갈 수 있는 연료 효율성이었다. 1981년에는 상위 모델인 '로얄 살롱'이 추가된다. 로얄 살롱은 레코드의 상위 모델인 '세나토'의 외관 디자인을 적용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화했고, 2.0리터 4기통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19마력, 최고시속 178km를 기록했다.[5][6]
제미니
제미니(Saehan Gemini)는 1977년 12월에 새한자동차에서 출시된 소형차이다. 기존의 카미나를 대체하는 후속 차종으로, 현대 포니와 기아 브리사가 속한 소형차 시장에 새한자동차는 오펠 카데트 C를 이스즈 자동차에서 개량한 제미니를 내놓았다. 르망의 시초이기도 한 오펠 카데트는 GM의 월드 카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소형차였으며, 새한자동차가 대한민국 여건에 맞게 개량하였다. 이 차는 해외에서 쉐보레 쉬베트로도 판매되었고, 새한 버드라는 차명으로도 수출되었다. 새한자동차는 두꺼운 차체와 충격 흡수식 스티어링 휠 등 제미니의 안전성을 알리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소형차 시장에서 포니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고, 개발 시기가 너무 늦었으며, 무엇보다 연비가 좋지 않아 판매 대수가 경쟁 차종에 비해 적었다. 특히 1.5ℓ 가솔린 엔진은 엔진과 보디의 조화가 맞지 않아 실패했었던 전작인 카미나의 엔진(시보레 1700에 장착되었던 1.7ℓ 가솔린 엔진 기반의 1.5ℓ 가솔린 엔진)이었다. 1979년 8월에는 제미니를 기반으로 만든 0.85톤 픽업트럭인 맥스가 출시되었으며, 오펠제 디젤 엔진을 장착했다. 제미니는 1982년 2월에 페이스 리프트 차종인 맵시가 출시되기 전까지 18,900여 대를 생산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아 있는 차량이 약 13대 정도이며, 그중 1~2대를 올드 카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서 보유 중이다.[7]
대우자동차
맵시나
맵시나(MAEPSY-NA)의 어원인 맵시는 우리말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를 의미한다. 맵시는 기존에 새한 자동차에서 생산하고 있었던 일본 이스즈(Isuzu)사의 제미니(Gemini)를 부분 변경한 모델이었다. 이스즈 제미니는 지엠의 월드카 개념 하에 만들어진 후륜 구동 소형 승용차로, 과거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 시절 생산했던 카미나의 후속 모델로서 도입된 차종이었다. 맵시는 기본적으로 이스즈 제미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차종이었다. 차체 및 섀시 설계는 기존에 생산했던 제미니와 동일했다. 변경 점이라면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 그리고 범퍼 등을 늘려서 차체 전장을 늘린 정도였다. 이미 유럽풍의 깔끔한 스타일이 호평을 얻고 있었던 제미니의 스타일링을 유지하면서도 전면 디자인을 수정하여 충돌 안전성을 조금이나마 더 확보했다. 맵시의 심장은 카미나와 제미니에 사용했던 1.5리터 직렬 4기통 씨아이에이치(CIH) 가솔린 엔진이었다. 최고 출력은 73마력, 최대토크는 12.0kg.m였다. 또한 1983년에는 엉뚱하게도, 당시 기아산업이 브리사에 사용했던 마쯔다제 1.3리터 직렬 4기통 TC 엔진도 추가되었다. 이는 1982년부터 시행된 한국 자동차 산업계 최대의 악재이자, 전두환 정권의 실책 중 하나인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기아산업이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983년 1월, 모기업인 대우 그룹이 새한 자동차의 사명을 대우 자동차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맵시도 변화를 맞게 된다. 1983년 4월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4기통 1.5리터 엑스큐(XQ)엔진을 발표, 5개월 뒤인 9월에 이 엔진을 적용한 '맵시-나'를 출시했다.
차명인 맵시-나의 '나'는 한글의 가나다순에 따른 것으로 '두 번째 맵시'라는 의미가 있다. 맵시-나는 디자인을 보다 대대적으로 손 보고 파워트레인을 변경하는 등, 제미니에서 일부만 고친 정도인 맵시에 비해 한층 굵직한 변화를 겪었다. 디자인의 경우, 전면부를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스타일로 뜯어고쳤다. 후면부 역시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대형의 테일 램프 채용과 더불어, 트렁크 부위를 더 늘려서 기존 맵시보다 한층 더 긴 길이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맵시-나는 성능은 물론, 신뢰성, 연비 등이 불만 사항으로 지적되어 왔었던 기존 씨아이에이치 엔진을 신개발 1.5리터 엑스큐엔진으로 대체했다. 이는 기존 맵시에서 가장 유의미한 변화 내용 중 하나로 꼽힌다. 엑스큐엔진은 기존 씨아이에이피 엔진에 비해 신뢰성과 성능의 향상을 일궈냈다. 최고 출력은 85마력, 최대 토크는 12.5kg.m였다. 맵시-나는 기존 제미니의 전면부를 약간만 손 본 정도의 변화에 그쳤던 맵시와 다르게, 신차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었다. 새로운 인상을 보여준 대대적인 디자인 변화와 새로운 엔진의 채용은 맵시-나의 경쟁력을 크게 끌어 올려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이 시기부터 맵시의 판매량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맵시-나는 1985년 3월 더한 고급 모델, '하이 디럭스'를 라인업에 추가했다. 맵시-나 하이디럭스 모델은 맵시-나의 스타일링이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점에 착안, 동사의 고급 승용차인 로얄 살롱의 화려함을 살린 전용 외장 사양과 로얄의 왕관 엠블럼 등으로 치장한 고급 소형 승용차로 어필했다. 이후 맵시와 맵시-나는 출시 이후 1986년 7월까지 총 42,729대가 생산 되었다. 그리고 1986년 7월 후속 차종인 '르망'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단종된다. 그러나 영업용 택시로는 한동안 병행 생산이 이루어졌다.[8]
르망
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을 선보이며 선두에 서있었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상품으로서 자동차를 개발함에 있어 발생하는 비용과 단가를 낮춰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월드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르망’(Lemans)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르망의 생산은 인건비 측면에서 유리했던 대한민국의 대우자동차에서, 디자인과 설계는 소형차 관련 고급인력이 밀집한 독일 오펠에서, 그리고 판매는 당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던 GM에서 각각 담당했다. 서로가 특출한 분야를 전담함으로써 그 시너지는 배가되었다. 세 회사의 시너지는 말 그대로 엄청났다. 르망은 출시와 동시에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르망은 당시 경쟁 자동차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수한 달리기 성능과 승차감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9]
티코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작지만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를 위한 사업자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국민차 티코(Tico)다. 티코는 일본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통해 개발된 경차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민차 계획을 바탕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진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 요구하는 가격대는 200만 원대였는데, 이는 당시 소형 승용차인 현대 엑셀 5도어의 400~500만원 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우국민차는 편의사양을 덜어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티코는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을 갖춘 차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290만원으로 출시 가격을 맞출 수 있었다. 티코의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 카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기가 서서히 높아졌고, 1995년에는 승용차 판매의 4%를 티코가 홀로 점유하기도 했다.
에스페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업계 1위의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에 독자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의 전반적인 성향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GM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많았다. 이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 혹은 도로 사정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렌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결국 고급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재도약을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과물이 1990년 최초의 고유모델로 내놓은 ‘에스페로’였다. 에스페로(Espero)는 프린스와 르망 사이의 포지션을 담당한 신차였다. 에스페로는 스페인어로 '희망하다, 기대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에스페로는 신차 발표회 이후 10월 23일 첫 출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했다. 가격은 수동 변속기 모델 960만 원, 자동 변속기 모델 1,055만 원이었다. 에스페로의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 베르토네 디자인 센터의 도움을 받아 완성됐다. 차체 라인을 매끈하게 처리하고 앞부분보다 뒷부분을 들어 올린,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형태로 날렵한 세단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라디에이터 그릴을 제거한 전면부와 유리판으로 제작된 씨필러는 인상적인 부분, 그러나 디자인을 따라잡지 못한 기술력의 부재로 씨필러에 센터바를 추가했는데, 이는 최초의 디자인 컨셉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초기 에스페로는 르망 임펙트에 적용됐던 2.0리터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 4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해 각각 13.5km/L, 12.2km/L의 연비를 기록했다. 또한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 컴파운드 링크 서스펜션을 적용해 승차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에스페로의 스펙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시대를 초월한 공기역학적 설계다. 0.29Cd의 공기저항계수는 2008년 현대 제네시스가 0.27Cd를 기록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국산 차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에스페로의 스타일링은 당대에는 실로 혁신적이었으나, 출시 초기부터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대우 에스페로는 중형세단으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차의 크기를 그 차의 위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체 크기에 민감한 시절이었다. 이에 대우차동차는 계획을 변경하여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강점으로 할 수 있었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렵하고 스포티한 스타일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에스페로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에스페로는 애매한 포지션으로 기존의 중형차 시장과 새로 확장된 준중형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자사의 다른 차종과 배기량이 겹치는 딜레마와 마주했다. 잠깐 강세를 보였던 중형차 라인업에서는 편안함을 강조한 현대 쏘나타(Sonata)에게 밀렸으며, 대형차 라인업에서도 그랜저를 앞세운 현대자동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우그룹의 부채가 대우자동차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92년도 GM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사들이면서 자동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이를 성공시켰지만, 아무래도 이전부터 기술개발을 해오던 현대자동차 등 다른 한국 기업에게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우자동차 = 잔고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독자 개발이라는 과정 속에 겪은 각종 시행착오로 인해 완성도 부족 현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판매 부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 따라 에스페로는 상품성 증대와 위기 탈출을 위해 계기판을 디지털로 교체하고 컵홀더를 추가하는 등 편의 장비를 개선했으며, 안테나를 앞 펜더에서 뒤 펜더로 옮기고 분리된 형태의 리어램프를 길게 이어 컴비네이션 형식으로 교체하는 등의 부분 변경을 감행했다. 가장 문제였던 파워트레인은 영국 로터스사의 자문을 구해 1.5리터 디오에이치씨 엔진을 개발해 적용했다. 새로운 엔진은 저속구간과 저회전 영역에서 국내지형에 가장 적합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고속 주행 능력이 경쟁 차종에 비해 부족하다는 단점에 따라 몇 번의 파워트레인 교체 끝에 1994년에는 2.0리터 엔진을 제외하고 1.8리터 엔진을 추가 적용하기도 했다. 에스페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수출 기간 3년 동안 전체 생산량의 43%인 23만 6,882대를 판매했는데, 가격 대비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장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현대 엘란트라와 기아 세피아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997년, 후속 차종인 누비라가 출시되면서 단종을 맞이했다.[10]
각주
- ↑ 김영우, 〈(브랜드 흥망사) 영광과 좌절의 그 이름, 대우자동차〉, 《동아닷컴》, 2018-07-30
- ↑ 김형욱 기자, 〈(그때 그 차들③)시발·시보레 영화소품된 희귀 국산차 10選〉, 《이데일리》, 2015-04-10
- ↑ 세한 카미나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83%88%ED%95%9C%20%EC%B9%B4%EB%AF%B8%EB%82%98
- ↑ 채영석 기자,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
- ↑ 카이즈유, 〈추억의 올드카, 1978 대우 로얄〉, 《네이버 포스트》, 2017-10-21
- ↑ 이지아, 〈한국GM의 전신, 대우자동차〉, 《타고》, 2020-12-01
- ↑ 제미니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8%ED%95%9C_%EC%A0%9C%EB%AF%B8%EB%8B%88
- ↑ 박병하 기자, 〈(특별했던차)새한자동차 맵시〉, 《네이버 포스트》, 2018-05-11
- ↑ 인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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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 ↑ 김정균 기자, 〈추억의 올드카, 1990 대우 에스페로〉, 《네이버 포스트》, 2017-12-26
참고자료
- 이지아, 〈한국GM의 전신, 대우자동차〉, 《타고》, 2020-12-0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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