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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1일 (토) 18:44 판

필라델피아 시청
필라델피아 위치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미국 독립시기인 18세기에 미국의 수도였다. 현재는 미국 북동부에서 뉴욕시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인구는 약 163만 명이고 필라델피아 대도시권의 인구는 625만 명으로 미국에서 7번째로 크고 세계에서 큰 대도시 지역 중 하나이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중심이며 자유의 종을 비롯하여 미국 독립 관련 유적들이 많다.[1]

개요

필라델피아는 델라웨어강과 스퀼킬강에 따라 미국 북동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유일하게 도시와 군이 통합된 곳이다. 1682년 영국 출신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이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1세의 승인을 받아 영장에 따라 정착한 북미 식민지 중 하나인 펜실베니아주의 중심 도시로 삼으며 필라델피아가 형성되었다.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헌법이 기초되고, 1790년부터 10년 동안은 미국 연방의 수도였다. 1876년 만국박람회가 개최될 정도로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로 발전했다. 현재는 미국 제2의 항구 도시로서 무역업이 발전하였다. 주요 수입품은 석유, 원당, 철광석, 양모, 면화 등이고 수출은 석유 정유제품, 철광석, 석탄, 기관차 등이다. 미국의 제조업, 상업, 금융업의 중심이고, 산업은 전통적인 출판업이 유명하다. 유명하며 전통을 지닌 공원, 극장, 교회, 교육기관, 자선시설, 병원 등이 있으며, 동부의 예술 중심지이다. 주변에는 비옥한 농업지대가 있다. 도시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잘 갖추어져 있다. 대중교통의 중심은 1907년 건설된 지하철이다. 고속철도가 필라델피아와 인근 뉴저지주를 연결해 준다. 1963년 이후 전차와 버스 노선도 정교하게 구축되었고, 도심지와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버스 노선도 있다. 필라델피아와 뉴저지주 캠든 카운티 사이에 있는 델라웨어강에는 페리가 운행되고 있다. 델라웨어강에 있는 20개의 다리 가운데 2개는 인도로만 사용된다. 스퀼킬강 밑으로는 지하 터널이 뚫려 있다. 필라델피아국제공항은 도심지에서 11km 떨어져 있다. 2000년대 이후 의료, 의약, 교육, 금융 등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 헌법기념관을 비롯한 역사적 유적과 유물이 많아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2]

지리 및 기후

필라델피아는 펜실베이니아주 동남쪽 끝에 있는 필라델피아는 북위 40도선과 서경 75도선이 만나는 곳에 있다. 필라델피아의 북동부 지역, 북부 지역, 서부 지역이 나란히 40도선 위에 놓여 있다. 도시의 지리적 규모는 369.59k㎡로, 이중 약 6%에 해당하는 21.81k㎡가 강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349.78k㎡는 육지이다.

필라델피아는 대서양 연안 평야지대에 속하는 지역으로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청 건물도 해발 약 9m의 평지에 세워져 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은 서미트 스트리트로서 해발 136m이고, 가장 낮은 저지대 지역은 해수면과 같은 높이다. 필라델피아 동쪽에는 델라웨어강이, 서쪽에는 스퀼킬강이 흐른다. 이외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공원 호수, 콥스(Cobbs) 호수, 위사힉콘크리크, 그리고 페니팩 천(Pennypack creeks)이 있다.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페어마운트 공원에는 도시의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건설된 이스트 파크 저수지가 있다. 페어마운트 공원 외에 60여개 시립 공원이 있으며, 이들을 모두 합하면 37,231k㎡에 이른다.

도시는 북위 40도선에 있지만 대서양 연안 지역이라 온화한 기후이다. 봄과 가을 날씨는 대체로 화창하고, 여름 날씨는 덥고 습한 편이다. 7월 평균 기온은 섭씨 25.9도이다. 겨울은 추운 편으로 1월 평균 기온은 섭씨 0.9도이다. 적설량은 평균 57cm이며, 연도별 적설량의 차이가 심해 눈이 오지 않거나 때로는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비가 자주 내리며 연중 평균 강우량은 1,120mm이다.[3]

역사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현재의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델라웨어족 인디언(Delaware Indians)들이 살고 있었다. 1600년대 초반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항해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했다. 1640년대 스웨덴인들이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설립했다. 그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스웨덴이 필라델피아 지역을 두고 전쟁을 했고, 1674년 승리한 영국이 차지하였다.

초기 식민지

1681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윌리엄 펜(William Penn)에게 펜실베이니아 지역을 식민지로 승인하는 영장을 주었다. 펜은 필라델피아 지역을 펜실베니아 식민지의 중심지역으로 선택하였다. 1682년 윌리엄 펜이 왕의 영장을 지니고 펜실베니아에 도착한 이후에 필라델피아 지역은 1683년 펜실베이니아주의 주도가 되었다.

펜은 영국을 떠나기 전에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지역에도 펜실베니아 지역의 종교적 자유 보증을 광고하였고, 종교적 박해를 당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들었다. 지역은 빠르게 발전하며 이주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필라델피아는 기근, 가난과 전쟁을 피한 유럽의 다양한 지역의 수많은 유럽인들이 모였다. 1700년 기준, 필라델피아인구는 약 4,500명이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1701년 주변 마을(군 지역)을 합병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농업에 적합한 토양으로 수확량이 많아, 생산한 풍부한 곡물과 농산물을 주변지역에 판매하는 무역이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필라델피아는 제조업과 해운업의 중심지가 되어 발전하였다. 170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중요한 산업 지역으로 주변 식민 지역들에 생활제품과 농산물을 제공하는 제조와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독립 운동가인 벤저민 프랭클린과 관련이 깊다. 1723년 17살 인쇄 견습생 프랭클린이 보스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였다. 인쇄업에서 성공한 프랭클린은 불과 25살에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도서관을 기증하는 필라델피아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고, 이후 정치에 참여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되었다. 프랭클린이 발행한 신문과 연감은 필라델피아가 현재까지도 미국의 출판업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760년경에 필라델피아 지역 인구는 대략 20,000명이었으며, 당시 북미 지역의 영국 식민지 가운데 가장 큰 도시였다.

독립 전쟁

1700년대 중반 프랑스와 벌였던 7년 전쟁으로 영국이 재정난을 겪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식민지 세금법(인지세법) 및 교역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 법률로 특히 북미 식민지의 세금이 크게 상승하였다. 북미 식민지 주민은 크게 분노했고, 필라델피아는 영국에 대한 북미 식민지의 저항 중심지가 되었다. 1774년 북미 대륙 식민지 주민들의 대표자가 모였던 첫 ‘대륙 회의’가 카펜터스 홀에서 열렸고, 대표자들은 식민지 주민의 권리에 해가 되는 영국법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1775년 5월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 후, 두번째 ‘대륙 회의’가 펜실베이니아 스테이트 하우스(현재의 인디펜던트 홀)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이 필라델피아에서 작성하여 입안한 미국 독립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의회는 전쟁 대부분 동안에 이 도시에서 열렸다.

1777년 9월 26일 영국군이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이긴 후, 필라델피아를 점령했다. 미군은 도시를 재점령하려고 하였으나 10월 4일 저먼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했다. 1778년 프랑스가 전쟁에서 쪽에 가담하여 미군을 돕는 차원에서 군함을 보냈다. 6월 18일 프랑스 군함을 피하기 위해 영국군은 필라델피아에서 물러갔다. 의회는 그해 7월부터 1783년 6월까지 거기서 회의를 가졌다. 두 명의 필라델피아 재무 전문가인 로버트 모리스와 헤임 설로먼은 독립 전쟁을 수행할 자금을 모금하였다.

1787년 헌법 회의 대표단이 인디펜던스 홀에서 미국 헌법에 서명하였다. 필라델피아는 1790년부터 1800년까지 미국의 수도였다. 1790년 필라델피아의 인구는 대략 42,000명으로 당시 미국 내에서 제일 많았다. 1793년 펜실베이니아 주도는 필라델피아에서 랭카스터로 옮겼다가, 1812년 해리스버그로 옮겼다.

산업의 시작

1800년대에는 필라델피아 북서부의 석탄 광산이 개발되어, 연료 공급이 원활해지자 다양한 산업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였다. 운하철도, 도로 건설로 필라델피아와 당시 미국 중서부 사이의 무역이 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산업은 의류와 철강, 기관차, 기계, 조선, 구두, 섬유 제조였다. 도시의 빠른 산업화로 1800년대 중반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신규 유입 이민자들과 기존 정착민들 사이에 구직 경쟁으로 대립이 발생했다. 1814년 정착민인 개신교 신자와 이민자인 아일랜드 출신 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나 약 30명이 사망했고, 많은 흑인들도 폭동 때 사망하였다.

1854년 주 정부가 필라델피아시를 병합할 때 가까이 있는 11개의 지역들을 필라델피아로 편입했다. 1860년 도시의 인구는 565,529명이었다. 1800년대 중반 필라델피아는 반노예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3년 노예 폐지론 개혁자 루크레티아 모트는 미국 반노예주의 모임을 구성하였다. 2명의 흑인 필라델피아 사업가 제임스 포튼과 로버트 퍼비스가 노예 폐지론 지도자들이 되었다. 남북 전쟁 기간에 필라델피아의 은행들은 북군의 주요 재정을 관리하였다. 도시의 산업 시설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더욱 융성하게 발전했다.

1876년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인 ‘백주년 박람회’를 열었다. 이 박람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열린 박람회였다. 1800년대 후반 산업과 상업이 필라델피아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자본가 앤서니 J. 드렉셀과 사업가 존 워너메이커를 포함한 필라델피아의 사업가들이 ‘마켓 거리’에 도심지 쇼핑 구역을 발달시켰다. 1890년대에 시내 전차가 개통되어 필라델피아 시민들은 도심 지역에서 주변 주택지역까지 이동이 쉬워졌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공장 노동 수요가 늘자 수천 명의 동유럽 유대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이 필라델피아로 들어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미국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필라델피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는 1880년 850,000명에서 1920년 1,800,000명 이상으로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과 전쟁 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구직과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정착하였다. 1950년에 도시의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을 넘었다.

현재

1940년대 후반 필라델피아는 대규모 도시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도시는 주택과 공장 건물이 있던 100에이커를 제거하였다. 사무소 단지 펜 센터는 한번은 철도였던 지역에서 시청의 서부에 올라있다. 1950년대 중반에 도시계획은 병원, 대학과 다른 시설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미 연방정부와 펜실베이니아주 정부의 도움으로 도시는 인디펜던스 홀 북부에 있던 낡은 건물들의 제거하고 드넓은 전망 지역으로 재편하였다. 도시는 이 도시 재개발 노력의 동안에 이웃을 잃은 빈곤한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공공주택 프로젝트들 세웠다. 1959년부터 도시는 인디펜던스 홀 남부에 있는 소시어티 힐에 원기를 회복시키가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1700년부터 시작된 많은 우아한 주택들을 재건하고 버려진 공장과 창고들을 때려 부수었다.

자이언 침례 교회의 목사 라이언 설리번이 지도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민들은 1950년대 동안에 주요 경제적 자조 프로젝트들을 발달시키기 시작하였다. 1964년 설리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직업을 위한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을 준 기회 산업 센터를 설립했다.

1970년대 개발자들은 센터 시티에서 몇몇의 주요 프로젝트들을 발표했다. 도시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식을 위한 준비로서 인디펜덴트 홀 근처에 있는 역사적 지역들을 재건했다. 100만 명의 방문객들을 끌어들인 기념식이 있기 전에 새로운 호텔과 식당들이 기념식 전년에 개업. 1978년 갤러리 1호점으로 알려진 폐문의 쇼핑몰이 시청 근처에 있는 마켓 스트리트 이스트 개발의 일부로서 개장했다. 두번째 몰 갤러리 2호점은 1980년대 초반에 열었다. 마켓 스트리트 프로젝트는 또한 1993년에 개장한 펜실베이니아 집회소를 포함하였다. 1986년 해양 교역 센터가 델라웨어 강에 놓인 펜즈 랜딩 단지의 일부로서 완성되었다. 1991년 도시는 비지니스들이 다운타운을 정화시키는 데 성공적 노력을 후원한 센터 시티 구역을 창조하였다.

1983년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은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장 윌슨 구드를 선출했다. 1985년 5월 13일 도시에서 최악의 손실들 중의 하나가 도시의 경찰과 "무브(MOVE)"라고 불리는 과격파 단체 사이에 직면하면서 일어났다. 단체의 회원들은 웨스트 필라델피아의 주택으로부터 그들을 퇴거시키려 한 경찰들에 불을 질렀다. 경찰 헬리콥터가 폭탄 투하를 하여 140척 이상의 주택들이 파괴되고, 대략 250명의 노숙자들을 나오게 하고 5명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무브의 회원 11명이 사망하였다.

1900년대의 말기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던 거대한 도시 재개발의 재평가를 가져왔다. 비평가들은 빈곤인들을 흥미없는 공동 주택 프로젝트들로 이주시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도시는 공동 주택의 상승의 대부분을 때려부수기 시작하였다.

필라델피아는 그 경제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관광업으로 돌려졌다. 도시는 그 무적의 역사적 지대들과 시설을 촉진시키고 새로운 식당과 호텔들에 용기를주는 데 전념하였다. 필라델피아는 좋은 식사 지역으로 알려졌다. 몇몇의 새 호텔들은 2000년 공화당 전당 회의를 위하여 열었다. 하지만 지역의 고소득 직업들 대부분은 시 외곽에 남아 있었다.

2001년 펜실베이니아 주는 필라델피아의 공동 학교 시스템을 차지하여 그것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수백만 달러를 보증하였다. 시스템은 교사들의 부족과 낮은 시험 점수들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졌다. 계획은 주가 학교를 지켜보고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 최고 경영인을 임명하면서 통제된 5개의 회원 위원회를 요구하였다. 2002년 위원회는 40개 이상의 필라델피아 학교들의 통제를 학교 행정을 경험한 대학들과 회사들을 포함한 비정부 관리인들로 전향시켰다. 2008년 57층의 컴캐스트 센터가 다운타운에 개장되었다. 97m를 솟는 스카이스크래퍼는 필라델피아의 가장 큰 건물이 되었다.[4]

경제

필라델피아는 펜실베이니아주의 경제중심지이다. 필라델피아는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4번째로 큰 미디어 시장 소비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주식 시장의 본거지이며 포춘 500대 기업에 속하는 기업들이 존재하는데,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공급기업인 컴캐스트(Comcast), 보험회사 콜로니얼 펜(Colonial Penn), 시그나(CIGNA) 그리고 링컨 파이낸셜 그룹, 에너지 회사 서노코(Sunoco), 식품기업 아라마크와 크라운 홀딩스, 화학회사 롬 앤 하스 컴퍼니와 FMC, 제약회사인 와이에스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보잉 로터크래프트 시스템스, 자동차 부품 소매기업 펩 보이스 등이다. 필라델피아의 경제 분야는 정보통신, 제조, 정유, 식품가공, 헬스케어와 바이오테크놀러지, 여행 그리고 금융서비스 등이다.

교통

필라델피아 국제공항은 국내선과 국제선을 다루고 있다. 지방적 항공기들은 작은 노스이스트 필라델피아 공항을 이용한다. CSX 교통과 노퍽 서던 철도는 필라델피아로 화물 서비스를 마련한다. 승객 열차는 필라델피아와 미국을 통한 도시들과 연결하는 편이다. 4개의 다른 필라델피아와 뉴저지주를 잇고 있다. 공동적으로 소유된 사우스이스턴 펜실베이니아 교통 당국은 도시의 지방 교통의 대부분을 마련하며, 버스, 고가 열차와 지하철들을 운영하고 통근 열차 서비스를 관리한다.

문화

필라델피아는 식민지 시대 미국의 경제와 문화를 선도하였다. 미국 최초의 공공 도서관과 병원, 최초의 학술단체인 미국 철학학회 등이 경제적 여유 속에서 설립되었다.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으로 인정받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는 이미 1740년에 설립되었다.

1805년 미국 최초로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이 설립되었고, 1857년에는 미국 최초 오페라 극장인 음악원(Academy of Music)이 개관했다. 1900년에 창단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이곳을 주 무대로 연주했다. 현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2001년 이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킴멜 센터(Kimmel Center)를 주 연주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도시에는 역사적 유산들이 많다. 미국 독립선언과 연방 헌법 제정의 장소였던 미국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이 있는 미국독립국립역사공원(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은 1956년에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독립국립역사공원은 1979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의 상징인 ‘자유의 종(liberty bell)’도 이곳에 있다.

독립국립역사공원 인근에는 엘프레스골목(Elfreth’s Alley)이 있다. 이곳에 18세기 초에 지어진 30여 채의 벽돌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어서 살아있는 역사 공간이란 느낌을 준다. 미국 독립을 위한 첫 대륙회의가 개최된 카펜터 홀과 미국철학학회의 철학기념관도 이곳 근처에 있다. 2003년에는 국립헌법센터가 건립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랜드 마크는 시청사(City Hall)이다. 1871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에 완공된 시청사의 높이는 549피트로 33층 건물의 높이다. 시청사 지붕 꼭대기에는 윌리엄 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이 있어 인상적이다. 역사 유산으로 등록된 오래된 건물에서 작은 가게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파인 스트리트에 가면 많은 골동품 가게를 볼 수 있고, 체스너트 스트리트에도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오래된 건축물이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필라델피아 문화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5]

자유의 종

자유의 종(Liberty Bell)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있는 종이다. 예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립청사(현재는 독립기념관으로 명칭 변경)의 첨탑에 있었으며, 이 벨은 런던에 있는 래스터 앤 팩(오늘 날의 화이트체펄 벨 폰드리)에게 1752년 주문 제작한 것이며, “모든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공표하라”(Proclaim LIBERTY throughout all the land unto all the inhabitants thereof)라는 문자(레위기 25:10의 일부인)가 새겨져 주조되었다. 원래는 필라델피아에 도착 후 첫 타종 이후 금이 갔지만, 현지의 장인인 존 패스와 존 스토에 의해 다시 주조되었고 이들의 성이 종에 새겨졌다. 초기에 자유의 종은 의회 회기 동안 의원들을 소환하는 종으로 사용되었지만, 공적인 모임과 공표를 위해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 것으로 바뀌었다.

독립을 위한 제2차 대륙회의 투표에서 즉각적인 어떠한 성명도 발표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이 종은 1776년 7월 4일 울릴 수가 없었다. 1776년 7월 8일 〈미국독립선언〉 낭독을 표시하기 위해 종이 울렸지만, 이 종의 타종에 대한 현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서, 역사학자들은 그냥 평상시처럼 울린 벨일 뿐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독립이 확보된 이후, 몇 년 동안 애매하게 방치된 채 남아 있었다. 1830년대, 이 종은 노예제도 폐지론자 학회에서 상징으로 채택되었고, 그들은 ‘자유의 종’(Liberty Bell)이라고 불렀다. 19세기 초반에 큰 금이 갔으며, 1835년 사법부 존 마셜이 사망한 직후 종을 치다가 금이 갔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이 종은 1848년 나이먹은 타종자가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찬성하는 제2차 대륙회의의 투표 소식을 듣자마자 울렸다고 주장하는 단편소설로 유명해졌다. 7월 4일에 독립에 찬성하여 그 종이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널리 사실과 사건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1885년 이 벨을 소유하고 있던 필라델피아 시의 시작으로 다양한 박람회와 애국 집회에 보내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 종은 어디를 가던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며, 추가로 금이 가고, 기념품 수집가 들에 의해 조각이 유실되었다. 그러한 마지막 순회 전시는 1915년에 이뤄졌으며, 그 이후 필라델피아 시는 더 이상의 요청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라델피아 시는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이 그 종을 보호할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여전히 소유권은 가지고 있다. 이 종은 냉전기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1960년대에는 항의집회의 장소로 인기있는 곳이었다. 이 종은 1976년 오랫동안 있었던 인디펜던스 홀에서 근처의 인디펜던스 몰 내의 유리관 속으로 이전되었으며, 그후 2003년 근처의 더 큰 공간인 ‘자유의 종 센터’(Liberty Bell Center)로 옮겨졌다. 이 종은 동전과 우표에 새겨진 인기 있는 상징물이었으며, 그 이름과 이미지는 많은 기업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6]

지도

미국 행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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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필라델피아〉, 《위키백과》
  2. 필라델피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필라델피아의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4. 필라델피아〉, 《요다위키》
  5. 필라델피아의 사회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6. 자유의 종〉,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북아메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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