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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문화어: 쌘프랜씨스코)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도시]]로, 북부 캘리포니아의 문화, 경제, 상업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공식적인 명칭은 '''샌프란시스코시군'''(영어: City and County of San Francisco)이다. 성 프란치스코에서 이름을 따왔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약 81만 명으로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 [[산호세]]에 이어 캘리포니아주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미국 전체에서는 13번째로 많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3%8C%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 샌프란시스코]〉, 《위키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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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 | 샌프란시스코는 샌프란시스코반도의 북부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작은 군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면적은 121km²,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지역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라고 불리는데,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광역도시권은 860만 명의 인구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광역도시권이다. 샌프란시스코는 1776년 6월 29일 설립되었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크게 성장했으며, 미국 서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856년에는 도시와 군이 통합되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화재로 도시의 4분의 3이 파괴되었지만 빠르게 재건되었고 9년 뒤 파나마-태평양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태평양 전장으로 나가는 군인들을 수송하는 거점 [[항구]]로 쓰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히피" 반문화와 함께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 전후 군인, 대규모 이민자가 섞이며 성혁명, 평화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반대 운동, 사랑의 여름, 성소수자 권익수호 운동을 주도했고,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굳어졌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강세인 곳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기있는 관광지이기도 한데, 시원한 여름, 안개,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언덕, 조화로운 다양한 건축과 골든게이트 교, 케이블카,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 차이나타운과 같은 랜드마크로 잘 알려져있다. 대학으로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계열의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과 예수회대학협회 계열의 샌프란시스코대학교(USF) 등이 있다. 또한 5개의 주요 [[금융]] 기관과 비자카드, 리바이스, 갭, 세일즈포스닷컴, 드롭박스, 레딧, 스퀘어, 에어비앤비, 위블리, 퍼시픽 가스 앤드 일렉트릭, 옐프, 핀터레스트, 트위터, 우버, 모질라, 위키미디어 재단, 크레이그리스트와 같은 여러 기업들의 본사가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여러 별명이 있는데, "시티 바이 더 베이", "안개 도시", "샌 프란", "프리스코"를 포함해 "The City that Knows How", "바그다드 바이 더 베이", "서부의 파리"와 같은 오래 된 별명이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0359&cid=40942&categoryId=34126 샌프란시스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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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 및 기후== | ||
+ |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해안의 샌프란시스코반도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 경계 내에는 [[태평양]]과 [[샌프란시스코만]]의 상당 부분이 포함된다. 알카트라즈(Alcatraz), 보물섬(Treasure iland),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섬, 알라메다(Alameda)섬, 앤젤(Angel)섬 등이 샌프란시코의 일부이다. 골든게이트교에서 48㎞ 떨어진 무인도인 패럴론 제도(Farallon Islands)도 샌프란시스코에 속한다. 남쪽으로는 산마테오 카운티의 베드타운이 있으며 동쪽과 북동쪽에는 만, 서쪽과 북서쪽에는 태평양이 있다. 정방형의 형태인 샌프란시스코에는 50개 이상의 언덕이 있다. 트윈 픽스(Twin Peaks, 282m), 데이비드슨 산(Mount Davidson, 283m), 수트로산(Mount Sutro, 278m) 등 모두 해발 270m가 넘는다. 트윈 픽스와 수트로산 사이에 수트로 타워(298m)가 있다. 그리고 바바리 해안을 내려보는 텔레그래프 힐(Telegraph Hill), 부유한 상류층 ‘노브(nobs)’들이 1870년대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던 노브힐(Nob Hill)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골드러시 이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주거지역으로 건설되었다가 1906년 지진 이후 공업지역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고밀도 주거지역인 린콘힐(Lincon Hill), 고급주택가인 러시안힐(Russian Hill)이 있다. 위의 언덕들은 샌프란시스코 ‘7대 언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에는 언덕이 많아 케이블카(노면전차)를 타고 이동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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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만 자체는 빙하가 녹아 잠긴 강계곡이다. 매립을 통해 1880년 1,800㎢였던 갯벌 면적은 1,125㎢로 줄었다. 만의 절반 이상이 더 채워질 수도 있었지만, 1965년 주의회는 추가적인 매립 프로젝트를 통제할 만 보존 및 개발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마리나(Marina), 미션 베이(Mission Bay), 헌터스 포인트(Hunters Point)와 같은 지역과 엠바케데로(Embarcadero) 등이 매립지에 위치한다. 이러한 매립지들은 지진 발생 시 불안정한 경향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만의 가장 넓은 쪽은 21㎞이며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109m로 반도와 마린 카운티 사이의 좁은 통로인 골든게이트에 위치한다. 골든게이트를 통해 태평양으로 유입되는 하루 최대 수량은 [[미시시피강]] 하구의 7배에 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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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은 북위 37도로, 서안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연중 온화한 편이다. 캘리포니아 해안 특유의 습하고 시원한 겨울과 건조한 여름이 특징이다. 겨울은 비가 오는 가운데 온화하며, 봄은 화창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날씨에 안개가 자주 낀다. 여름은 6월 중순부터 10월 중순으로 평균 일일 고온이 21°C 이상이다. 가장 더운 달은 9월로 평균 기온은 17°C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평균 기온 10°C이다. 공식 최고 기온은 2017년 9월 1일의 41°C였다. 가장 낮은 기온은 1932년 12월 11일의 -3°C였다. 평균적으로 1년에 73일 가량 비가 온다. 평균 강수량의 대부분은 11월과 4월 사이에 내리며 연평균 강수량은 601㎜이다. 가장 비가 많은 달은 2월이며 가장 비가 적게 오는 달은 7월이다. 해마다 강수량의 편차는 큰데 평균 이상의 강수량을 보이는 해는 엘니뇨와 관련이 있다. 종종 라니냐로 인해 강수량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2013년 142mm의 강우량을 기록하였고 이는 1849년 관측 이래 최저치이다. 또한 기후와 기온의 차이가 큰 국지 지역이 존재하는데 1852년 관측 이래 트윈 픽스에 13㎝의 눈이 내리기도 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21&cid=40942&categoryId=33139 샌프란시스코의 기후]〉,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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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
+ | 샌프란시스코 시의 영토내 인간 거주에 관한 가장 초기의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샌프란시스코만을 방문한 첫 유럽인으로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 경이 이끄는 [[스페인]]의 육상 탐험대가 1769년 11월 2일에 도착했고, 당시 몇몇의 작은 마을들에 올로니족의 옐라무 단체가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7년 후 1776년 3월 28일, 스페인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수인 식민지를 설립하였고,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안사에 의하여 설립된 선교 단체 미시온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돌로레스 선교회)로 이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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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이 지역은 [[멕시코]]의 일부가 되었다. 멕시코의 통치하에 선교 제도는 점차 종료되었고, 그 단체의 영토들은 민영화되었다. 1835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리처드슨이 오늘날 포츠머스 스퀘어 지역 보트 정박지 근교에 첫 독립 가옥을 세웠다. 알카데 프란시스코 데 아로와 함께 정착 확대를 위한 거리를 계획했고, 예르바 부에나로 불리는 타운으로 [[미국]]인 정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46년 7월 7일 미국-멕시코 전쟁 기간 동안 존 D. 슬롯 준장은 미국 대표로 캘리포니아를 요구하였고, 이틀 후에 존 B. 몽고메리 대위가 예르바 부에나도 요구하였다. 전쟁 말기인 1847년 1월 30일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미국에게 [[영토]]를 양도하였다. 예르바 부에나는 도시명을 샌프란시스코로 개명하였다. 항구와 해군 기지로서 그 매력적인 위치에 불구하고, 그때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지리적으로 황폐한 작은 정착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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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캘리포니아주 골드러시가 1849년에 있었던 일로서 "포티나이너스"로 알려진 보물 수색자들의 심한 유입을 데려왔다. 사워도와 함께 유입된 시굴자들의 수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사 결과, 경쟁 도시 베니시아를 추월하여 1848년 1,000명에서 1949년 25,000명으로 인구가 올라갔다. 거부의 꿈을 쫓아 선원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타고 온 배를 버리고 금광들로 떠났다. 유기된 약 500척의 선박들 중 일부는 매장, 객실과 호텔들로 이용되었다. 많은 배들은 방치되어 썩었으며, 대체로 물밑 주차장을 연상케 할 만큼 많은 수가 수장되었다. 1870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해안들의 매립공사가 이뤄졌다. 매립지의 신규 건물을 위한 기반 공사에서 수장된 선박들이 때때로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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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캘리포니아는 빠르게 주로 승격되었고, 미국의 군사는 샌프란시스코만을 안전하게 하는 데 골든게이트에 포트포인트와 앨커트래즈섬에 요새를 지었다. 1859년 콤스톡 로드를 포함하여 은의 발견들은 더욱 나아가서 재빠른 인구 성장을 이끌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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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기자들은 골드러시로 인해 발생한 부의 자본화를 추구하였다. 초기 승자들은 1852년 웰스 파고와 1864년 캘리포니아 은행의 창립과 함께 은행업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개발과 새롭게 완료된 퍼시픽 철도를 통하여 동부 미국의 철도 시스템으로 육상 접근이 베이 에이리어를 무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도움을 주었다. 증가하는 인구의 필요성과 취향들의 부응으로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직물 비지니스를 개업하였고, 도밍고 기라델리는 초콜렛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이 도시의 [[차이나타운]]을 창조하면서 이민자 노동자들은 도시를 다국어 문화로 만들었다. 1870년 아시아인들은 인구의 8%를 차지하였다. 1873년 첫 케이블카가 클레이 스트리트로 올라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을 날랐다. 도시의 빅토리아 하우스들의 바다가 형태를 잡기 시작하였고, 시민 지도자들은 광대한 공원을 위하여 캠페인을 벌여 골든게이트 공원을 위한 계획들에 결과를 가져왔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학교, 교회, 극장들과 시민 생활의 전부 특징들을 건설하였다. 프레시디오는 [[태평양]] 해안에 가장 중요한 미국 군사 기지로 개발하였다. 1890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300,000명으로 접근하여 당시 [[미국]]에서 8번째로 가장 큰 도시로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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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년 경에 샌프란시스코는 노브힐에 플랑브와양 형식, 품위 있는 호텔과 야한 맨션들과 번창하는 예술의 장면으로 잘 알려진 주요 도시였다. [[북아메리카]]의 첫 유행성 전염병은 1900년 ~ 1904년의 샌프란시스코 전염병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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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년 4월 18일 새벽 5시 12분. 주요 [[지진]]이 샌프란시스코와 북부 캘리포니아주에 충돌하였다. 건물들이 흔들리면서 무너지면서 파열된 가스라인들이 도시를 가로질러 퍼진 불을 발화시켜 며칠간 통제 불능이었다. 수도관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프레시디오 포병대들은 방화선들을 창조하는 데 건물들의 블록을 동적으로 만들어 지옥 같은 광경을 포함하는 시도를 하였다. 다운타운 중심핵의 거의 전부를 포함한 도시의 4분의 3 이상이 황폐해졌다. 현재 측량들이 몇천명에 수를 놓았어도 그 시대의 평가들은 498명의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보고하였다. 난민들은 골든게이트 공원, 프레시데오, 해변들과 다른 곳들에서 일시적으로 임시 텐트 마을에 정착하였다. 많은이들은 이스트 베이로 영구적으로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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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건은 재빠르고 대규모에 실행되었다. 완전히 거리 바닥을 다시 만드는 데 요구들을 거절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속도를 선택하였다. 후에 아메리카 은행이 되는 아메데오 잔니니의 이탈리아 은행은 생계가 황폐화된 많은이들을 위하여 기부금을 마련하였다. 영향적인 샌프란시스코 계획 도시 연구 협회는 지진이 일어난 후 주택의 품질을 다루는 데 1910년 창설되었다. 지진은 많은 도시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집들을 재건한 퍼시픽하이츠를 포함하여 화재를 생존한 서부 이웃들의 개발을 촉진하였다. 차례로 노브힐의 파괴된 맨션들은 그랜드 호텔들이 되었다. 시청은 화려한 예술 스타일에 다시 솟아올랐고, 도시는 1915년 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에서 그 재생을 축제벌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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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일은 샌프란시스코가 그 가장 중요한 기본적 시설들을 건설했던 이 시기 동안에 있었다. 토목 기사 마이클 오쇼네시는 트윈피크스 저수지, 스탁턴 스트리트 터널, 트윈피크스 터널, 샌프란시스코 자치 철도, 옥실리어리 수도 공급 시스템과 새로운 하수구들의 건설을 감독하는 데 1912년 9월 도시를 위한 주요 공학자로서 제임스 롤프 시장에 의하여 기용되었다. 오늘날 생존하는 J, K, L, M과 N 라인들의 샌프란시스코의 시내 전차 시스템은 1915년과 1927년 사이에 오쇼네시에 의하여 완료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에 가장 큰 효과를 가질 오쇼네시 댐, 헤치 헤치 저수지와 헤치 헤이 수로이다. 풍족한 수도 공급은 샌프란시스코를 오늘날이 된 도시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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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후 도시는 금융의 수도로서 그 입지를 굳혔으며,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이 일어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은행은 단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일은 샌프란시스코가 2개의 토목 공사 계획들을 착수했던 대공황의 절정에 있었으며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와 골든게이트 교를 건설하여 각각 1936년과 1937년에 완공되었다. 그 일은 전 군사 영창 앨커트래즈섬이 연방 최대 경비 교도소로 그 서비스를 시작했던 이 시기에 있었으며 알 카포네와 로버트 프랭클린 스트라우드 같은 유능한 입소자들을 유숙시켰다. 샌프란시스코는 후에 1939년 ~ 1940년 골든게이트 국제 박람회와 함께 그 다시 얻어진 웅장을 축제벌여 그것을 개최하는 데 만의 중간에 보물섬을 창조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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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헌터스포인트 해군 조선소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포트메이슨은 태평양 전쟁으로 나가는 복무 군인들을 위한 승선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직업들의 폭발은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 특히 남부에서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끌어들였다. 전쟁의 종말 후에 많은 군인들은 해외 복무로부터 돌아왔고, 원래 일하러 온 시민들은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유엔을 창조한 유엔 헌장이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안되어 조인되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일본과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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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도시 계획 프로젝트들은 서부 이웃들의 넓게 퍼진 파괴와 재개발, 그리고 시민이 이끈 반대에 의하여 중지되기 전에 짧은 부분들의 일련 만이 지어진 것의 새로운 무료 고속도로들의 건설을 연루시켰다.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시작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부두들을 안 쓰이게 만들었고, 화물 활동은 더욱 큰 오클랜드 항구로 이동하였다. 도시는 산업적인 직업들을 잃기 시작하였고, 그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관광업으로 변하였다. 외곽들이 재빠른 발전을 경험하였고, 백인 인구의 큰 부분이 도시를 떠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의 증가하는 경향에 의하여 대체되면서 의미있는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1950년부터 1980년까지 도시는 그 인구의 10% 이상을 잃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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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기에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반체제 문화의 자석이 되었다. 비트 제네레이션 작가들은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를 야기시켰고 1950년대에 노스비치 이웃에 중심을 두었다. 히피족들은 1960년댜에 하이트애슈버리로 떼지어 들어와 1867년 사랑의 여름과 함께 절정에 도달하였다. 1970년대에 도시는 도시 동성애자 마을로서 카스트로의 출현, 감독 위원회로 하비 밀크의 선출과 1978년 조지 모스콘 시장과 더불어 그의 암살 사건과 함께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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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메리카 은행이 1969년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555 번지에 완료되었고, 1972년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가 완료되어 광대한 고층 개발 다운타운의 시기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맨해트니제이션"의 경향을 발화시켰다. 1980년대는 또한 많은이들이 노숙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데 불구하고 오늘날 남아있는 문제인 도시에서 노숙자들의 수에서 극적인 증가를 보았다. 1989년 로마프리타 지진이 베이 에이리어를 통하여 파괴와 인생의 상실을 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은 마리나와 사우스오브마켓 구역들에서 엄하게 구조물들을 손상시켰고, 손상된 엠바카데로 무료 고속도로와 거의 손상된 센트럴 무료 고속도로의 철거를 촉발하여 엠바카데로를 그 역사적 다운타운 해안 지역으로 개선하는 데 도시를 허용하고 헤이스밸리 이웃을 부흥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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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의 세월은 인터넷 산업에 의하여 몰아진 2개의 붐을 보았다. 첫째는 1990년대 후반의 .com 붐이었으며 스타트업 컴퍼니들이 샌프란시스코 경제를 활기 띠게 하였다. 큰 수의 기업인들과 컴퓨터 적용 개발인들이 도시로 들어와 이주하였고, 마케팅, 디자인과 세일 전문인들에 의하여 이어져 한번 더욱 가난했던 이웃들이 증가적으로 고급화 되면서 사회적 경치를 바꾸었다. 샐로운 주책과 사무실 공간을 위한 요구는 고층 개발의 두번째 경향을 발화시켰는 데 이번에는 사우스오브마켓 구역에서였다. 2000년까지 도시의 인구는 새로운 높이들에 도달하여 1950년에 세워진 이전 기록을 앞섰다. 2001년 환상이 깨질 때 이 많은 회사들이 망하고, 그들의 종업원들이 직업을 잃었다. 아직 기술과 기업가 정신은 샌프란시스코 경제의 주요 생업들로 남아있다. 샌프란시스코가 기술 사무소들의 인기있는 위치와 [[애플]]과 [[구글]] 같은 [[실리콘 밸리]] 회사들에서 고용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데 인기있는 장소가 되면서 2000년대 중반까지 사회 미디어 붐이 시작되었다.<ref>〈[https://yoda.wiki/wiki/San_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요다위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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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 | ||
+ |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유나이티드 항공과 버진 아메리카를 위한 허브 공항이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국제 터미널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는 주요 국제 통로이다. 2011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미국에서 8번째로, 그리고 세계에서 22번째로 가장 바쁜 공항이었으며 4억 9백만 명의 승객들을 다루었다. 만을 가로질러 위치한 오클랜드 국제공항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인기 있는 비용이 낮은 대안이다. 지리적으로 오클랜드 공항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으로서 다운타운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대략 같은 거리이나 샌프란시스코 만을 가로지른 그 위치의 이유로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더욱 거대한 운전 거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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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는 오클랜드와 버클리 등 샌프란시스코 만의 도시와 마린 카운티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교통은 두 개의 큰 다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긴 고가 철교인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릿지는 7.2Km의 길이로 1936년에 완공되었다.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어지는 주홍색 골든 브릿지는 1937년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1280m의 순수 현수교이다. 뉴욕시의 베라자노-내로스(Verrazano-Narrows) 다리가 1964년 개통하기 전까지는 가장 긴 현수교였다. 다리가 개통하기 이전까지는 수많은 페리 항로가 있었다. 늘어난 교통량을 만을 잇는 다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샌프란시스코와 마린 카운티 사이에 페리가 다시 등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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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년 운영을 시작한 도시 간 고속교통시스템 BART(Bay Area Rapid Transit) 또한 주요 교통시스템으로 5.8㎞ 구간을 수중 튜브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와 주변 커뮤니티를 연결한다. 반도 꼭대기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항상 [[철도]] 교통의 종착역이 되어 왔다. 1869년 9월 6일 센트럴퍼시픽 노선으로 서부행 열차가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대륙횡단열차는 승객들을 샌프란시스코로 실러날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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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32%는 하루마다 통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서해안에서 1위, 그리고 미국에서 전체 3위에 들었다. "무니"로 알려진 샌프란시스코 자치 철도는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대중 통행 시스템이다. 무니는미국에서 7번째로 가장 큰 통행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경편 철도와 [[지하철]]을 합친 시슽인 무니 메트로와 큰 버스망을 둘다 운영한다. 추가적으로 그것은 카스트로 스트리트에서 피셔맨스워프로 마켓 스트리트에 달리는 역사적 자동차 선을 달린다. 그것은 또한 미국 국립사적지로서 지정되어 왔고 주요 관광객의 목적지인 유명한 케이블카를 운영하기도 한다.<ref>〈[https://namu.wiki/w/%EC%83%8C%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 샌프란시스코]〉, 《나무위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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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 ||
+ |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주요 기업은 IT 산업의 경우, 세일즈포스, 트위터, 우버, 에어비앤비,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 드롭박스, 이벤트브라이트(Eventbrite), 핀터레스트(Pinterest), 옐프(Yelp), 리프트(Lyft) 등이 있으며, 금융업의 경우, 비자, 웰스파고(Wells Fargo) 등, 의류산업의 경우 갭, 바나나리퍼블릭, 올드네이비(Old Navy), 리바이스 등이 있으며, 엔터테인먼트에는 루카스필름(스타워즈, 카리브의 해적 등 제작), 징가(Zynga) 등이 있다. 또한 연간 2,58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이에 따라 숙박, 요식 및 컨벤션 사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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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업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수입원으로 도시 일자리의 1/7을 차지한다. 금문교, 코이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차이나타운, 노스비치, 빅토리아식 저택, 롬바르드 거리, 페어몬트 호텔이 주요 명소이다. 북쪽 해안가에 기라델리 스퀘어(Ghiradelli Square)에서 피어 35를 잇는 피셔맨스워프도 주요한 명소이다. 샌프란시스코 명물인 케이이블카(노면전차)의 노선은 총 3개인데 이중 유니언스퀘어와 피셔맨스워프 사이를 운행하는 파월-하이드(Powell-Hyde)가 가장 인기있는 구간이다. 피셔맨스워프에서는 거리공연과 해산물식당, 독특한 상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두에서는 알카트라즈 섬으로 가는 보트투어를 제공한다. 또한 피셔맨스워프 일대 최대규모 쇼핑가인 기라델리 스퀘어는 한때 초콜릿 공장이 있던 곳으로 샌프란시스코 해양박물관과 마주보며 노스포인트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80&cid=40942&categoryId=31906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와 산업]〉,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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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 | ||
+ |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 지진 이후 여러 문화시설이 설립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의 시빅센터, 공공도서관, 시민음악당 등이 있다. 출판업자 드 영(M.H de Young)이 골든게이트 [[공원]]에 드영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드영[[박물관]]과 더불어 샌프란시스코에는 링컨 공원내 미술관인 레지옹도뇌르(Region of Honor), 현대미술관 등의 미술관이 있다.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에서 프랑스의 레지옹도뇌르 궁전을 본떠 만든 프랑스관의 매력에 빠졌던 알마 슈프레켈스가 그의 남편과 함께 만든 레지옹도뇌르 미술관 앞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복제품이 있다. 시내에 위치한 현대미술관(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은 1935년 설립되어 1995년 현 위치로 이전했는데 뉴욕 현대미술관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리고 금문교를 왼편에 둔 바닷가 갯벌에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낭만주의 건축물인 예술의 궁전(Palace of Fine Arts Teatre)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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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에는 두 개의 주요한 음악기관이 있다. 1909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교향악단은 데이비스 심포니 홀(Louise M. Davies Symphony Hall)에서 공연을 하며 여름에는 이곳에서 팝 콘서트가 주로 열린다. 또한 전쟁기념오페라극장(War Memorial Opera House)은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의 전초무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전쟁기념오페라극장은 유럽극장과 달리 규모가 크지 않으나, 북미에서 두 번째로 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단이 소속되어 있다. 두 시설은 전쟁기념공연예술센터(War Memorial and Performing Arts Center)의 부속건물이기도 하다. 2013년 문을 연 SFJAZZ 센터는 연중 내내 재즈 공연을 선보인다. 이외에도 시내에는 수많은 극장과 라이브 극장이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79&cid=40942&categoryId=33134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시설]〉,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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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자료==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C%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 샌프란시스코]〉, 《위키백과》 | ||
+ | * 〈[https://namu.wiki/w/%EC%83%8C%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 샌프란시스코]〉, 《나무위키》 | ||
+ | * 〈[https://yoda.wiki/wiki/San_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요다위키》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0359&cid=40942&categoryId=34126 샌프란시스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21&cid=40942&categoryId=33139 샌프란시스코의 기후]〉, 《네이버 지식백과》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80&cid=40942&categoryId=31906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와 산업]〉, 《네이버 지식백과》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47579&cid=40942&categoryId=33134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시설]〉, 《네이버 지식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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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이 보기 == | ||
+ | * [[미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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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문화어: 쌘프랜씨스코)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도시로, 북부 캘리포니아의 문화, 경제, 상업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공식적인 명칭은 샌프란시스코시군(영어: City and County of San Francisco)이다. 성 프란치스코에서 이름을 따왔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약 81만 명으로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 산호세에 이어 캘리포니아주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미국 전체에서는 13번째로 많다.[1]
개요[편집]
샌프란시스코는 샌프란시스코반도의 북부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작은 군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면적은 121km²,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지역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라고 불리는데,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광역도시권은 860만 명의 인구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광역도시권이다. 샌프란시스코는 1776년 6월 29일 설립되었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크게 성장했으며, 미국 서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856년에는 도시와 군이 통합되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화재로 도시의 4분의 3이 파괴되었지만 빠르게 재건되었고 9년 뒤 파나마-태평양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태평양 전장으로 나가는 군인들을 수송하는 거점 항구로 쓰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히피" 반문화와 함께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 전후 군인, 대규모 이민자가 섞이며 성혁명, 평화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반대 운동, 사랑의 여름, 성소수자 권익수호 운동을 주도했고,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굳어졌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강세인 곳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기있는 관광지이기도 한데, 시원한 여름, 안개,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언덕, 조화로운 다양한 건축과 골든게이트 교, 케이블카,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 차이나타운과 같은 랜드마크로 잘 알려져있다. 대학으로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계열의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과 예수회대학협회 계열의 샌프란시스코대학교(USF) 등이 있다. 또한 5개의 주요 금융 기관과 비자카드, 리바이스, 갭, 세일즈포스닷컴, 드롭박스, 레딧, 스퀘어, 에어비앤비, 위블리, 퍼시픽 가스 앤드 일렉트릭, 옐프, 핀터레스트, 트위터, 우버, 모질라, 위키미디어 재단, 크레이그리스트와 같은 여러 기업들의 본사가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여러 별명이 있는데, "시티 바이 더 베이", "안개 도시", "샌 프란", "프리스코"를 포함해 "The City that Knows How", "바그다드 바이 더 베이", "서부의 파리"와 같은 오래 된 별명이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해안의 샌프란시스코반도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 경계 내에는 태평양과 샌프란시스코만의 상당 부분이 포함된다. 알카트라즈(Alcatraz), 보물섬(Treasure iland),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섬, 알라메다(Alameda)섬, 앤젤(Angel)섬 등이 샌프란시코의 일부이다. 골든게이트교에서 48㎞ 떨어진 무인도인 패럴론 제도(Farallon Islands)도 샌프란시스코에 속한다. 남쪽으로는 산마테오 카운티의 베드타운이 있으며 동쪽과 북동쪽에는 만, 서쪽과 북서쪽에는 태평양이 있다. 정방형의 형태인 샌프란시스코에는 50개 이상의 언덕이 있다. 트윈 픽스(Twin Peaks, 282m), 데이비드슨 산(Mount Davidson, 283m), 수트로산(Mount Sutro, 278m) 등 모두 해발 270m가 넘는다. 트윈 픽스와 수트로산 사이에 수트로 타워(298m)가 있다. 그리고 바바리 해안을 내려보는 텔레그래프 힐(Telegraph Hill), 부유한 상류층 ‘노브(nobs)’들이 1870년대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던 노브힐(Nob Hill)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골드러시 이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주거지역으로 건설되었다가 1906년 지진 이후 공업지역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고밀도 주거지역인 린콘힐(Lincon Hill), 고급주택가인 러시안힐(Russian Hill)이 있다. 위의 언덕들은 샌프란시스코 ‘7대 언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에는 언덕이 많아 케이블카(노면전차)를 타고 이동한다.
샌프란시스코만 자체는 빙하가 녹아 잠긴 강계곡이다. 매립을 통해 1880년 1,800㎢였던 갯벌 면적은 1,125㎢로 줄었다. 만의 절반 이상이 더 채워질 수도 있었지만, 1965년 주의회는 추가적인 매립 프로젝트를 통제할 만 보존 및 개발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마리나(Marina), 미션 베이(Mission Bay), 헌터스 포인트(Hunters Point)와 같은 지역과 엠바케데로(Embarcadero) 등이 매립지에 위치한다. 이러한 매립지들은 지진 발생 시 불안정한 경향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만의 가장 넓은 쪽은 21㎞이며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109m로 반도와 마린 카운티 사이의 좁은 통로인 골든게이트에 위치한다. 골든게이트를 통해 태평양으로 유입되는 하루 최대 수량은 미시시피강 하구의 7배에 달한다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은 북위 37도로, 서안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연중 온화한 편이다. 캘리포니아 해안 특유의 습하고 시원한 겨울과 건조한 여름이 특징이다. 겨울은 비가 오는 가운데 온화하며, 봄은 화창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날씨에 안개가 자주 낀다. 여름은 6월 중순부터 10월 중순으로 평균 일일 고온이 21°C 이상이다. 가장 더운 달은 9월로 평균 기온은 17°C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평균 기온 10°C이다. 공식 최고 기온은 2017년 9월 1일의 41°C였다. 가장 낮은 기온은 1932년 12월 11일의 -3°C였다. 평균적으로 1년에 73일 가량 비가 온다. 평균 강수량의 대부분은 11월과 4월 사이에 내리며 연평균 강수량은 601㎜이다. 가장 비가 많은 달은 2월이며 가장 비가 적게 오는 달은 7월이다. 해마다 강수량의 편차는 큰데 평균 이상의 강수량을 보이는 해는 엘니뇨와 관련이 있다. 종종 라니냐로 인해 강수량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2013년 142mm의 강우량을 기록하였고 이는 1849년 관측 이래 최저치이다. 또한 기후와 기온의 차이가 큰 국지 지역이 존재하는데 1852년 관측 이래 트윈 픽스에 13㎝의 눈이 내리기도 했다.[3]
역사[편집]
샌프란시스코 시의 영토내 인간 거주에 관한 가장 초기의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샌프란시스코만을 방문한 첫 유럽인으로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 경이 이끄는 스페인의 육상 탐험대가 1769년 11월 2일에 도착했고, 당시 몇몇의 작은 마을들에 올로니족의 옐라무 단체가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7년 후 1776년 3월 28일, 스페인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수인 식민지를 설립하였고,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안사에 의하여 설립된 선교 단체 미시온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돌로레스 선교회)로 이어졌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이 지역은 멕시코의 일부가 되었다. 멕시코의 통치하에 선교 제도는 점차 종료되었고, 그 단체의 영토들은 민영화되었다. 1835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리처드슨이 오늘날 포츠머스 스퀘어 지역 보트 정박지 근교에 첫 독립 가옥을 세웠다. 알카데 프란시스코 데 아로와 함께 정착 확대를 위한 거리를 계획했고, 예르바 부에나로 불리는 타운으로 미국인 정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46년 7월 7일 미국-멕시코 전쟁 기간 동안 존 D. 슬롯 준장은 미국 대표로 캘리포니아를 요구하였고, 이틀 후에 존 B. 몽고메리 대위가 예르바 부에나도 요구하였다. 전쟁 말기인 1847년 1월 30일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미국에게 영토를 양도하였다. 예르바 부에나는 도시명을 샌프란시스코로 개명하였다. 항구와 해군 기지로서 그 매력적인 위치에 불구하고, 그때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지리적으로 황폐한 작은 정착지였다.
캘리포니아주 골드러시가 1849년에 있었던 일로서 "포티나이너스"로 알려진 보물 수색자들의 심한 유입을 데려왔다. 사워도와 함께 유입된 시굴자들의 수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사 결과, 경쟁 도시 베니시아를 추월하여 1848년 1,000명에서 1949년 25,000명으로 인구가 올라갔다. 거부의 꿈을 쫓아 선원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타고 온 배를 버리고 금광들로 떠났다. 유기된 약 500척의 선박들 중 일부는 매장, 객실과 호텔들로 이용되었다. 많은 배들은 방치되어 썩었으며, 대체로 물밑 주차장을 연상케 할 만큼 많은 수가 수장되었다. 1870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해안들의 매립공사가 이뤄졌다. 매립지의 신규 건물을 위한 기반 공사에서 수장된 선박들이 때때로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캘리포니아는 빠르게 주로 승격되었고, 미국의 군사는 샌프란시스코만을 안전하게 하는 데 골든게이트에 포트포인트와 앨커트래즈섬에 요새를 지었다. 1859년 콤스톡 로드를 포함하여 은의 발견들은 더욱 나아가서 재빠른 인구 성장을 이끌어냈다.
투기자들은 골드러시로 인해 발생한 부의 자본화를 추구하였다. 초기 승자들은 1852년 웰스 파고와 1864년 캘리포니아 은행의 창립과 함께 은행업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개발과 새롭게 완료된 퍼시픽 철도를 통하여 동부 미국의 철도 시스템으로 육상 접근이 베이 에이리어를 무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도움을 주었다. 증가하는 인구의 필요성과 취향들의 부응으로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직물 비지니스를 개업하였고, 도밍고 기라델리는 초콜렛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이 도시의 차이나타운을 창조하면서 이민자 노동자들은 도시를 다국어 문화로 만들었다. 1870년 아시아인들은 인구의 8%를 차지하였다. 1873년 첫 케이블카가 클레이 스트리트로 올라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을 날랐다. 도시의 빅토리아 하우스들의 바다가 형태를 잡기 시작하였고, 시민 지도자들은 광대한 공원을 위하여 캠페인을 벌여 골든게이트 공원을 위한 계획들에 결과를 가져왔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학교, 교회, 극장들과 시민 생활의 전부 특징들을 건설하였다. 프레시디오는 태평양 해안에 가장 중요한 미국 군사 기지로 개발하였다. 1890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300,000명으로 접근하여 당시 미국에서 8번째로 가장 큰 도시로 만들었다.
1901년 경에 샌프란시스코는 노브힐에 플랑브와양 형식, 품위 있는 호텔과 야한 맨션들과 번창하는 예술의 장면으로 잘 알려진 주요 도시였다. 북아메리카의 첫 유행성 전염병은 1900년 ~ 1904년의 샌프란시스코 전염병이었다.
1906년 4월 18일 새벽 5시 12분. 주요 지진이 샌프란시스코와 북부 캘리포니아주에 충돌하였다. 건물들이 흔들리면서 무너지면서 파열된 가스라인들이 도시를 가로질러 퍼진 불을 발화시켜 며칠간 통제 불능이었다. 수도관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프레시디오 포병대들은 방화선들을 창조하는 데 건물들의 블록을 동적으로 만들어 지옥 같은 광경을 포함하는 시도를 하였다. 다운타운 중심핵의 거의 전부를 포함한 도시의 4분의 3 이상이 황폐해졌다. 현재 측량들이 몇천명에 수를 놓았어도 그 시대의 평가들은 498명의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보고하였다. 난민들은 골든게이트 공원, 프레시데오, 해변들과 다른 곳들에서 일시적으로 임시 텐트 마을에 정착하였다. 많은이들은 이스트 베이로 영구적으로 떠났다.
재건은 재빠르고 대규모에 실행되었다. 완전히 거리 바닥을 다시 만드는 데 요구들을 거절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속도를 선택하였다. 후에 아메리카 은행이 되는 아메데오 잔니니의 이탈리아 은행은 생계가 황폐화된 많은이들을 위하여 기부금을 마련하였다. 영향적인 샌프란시스코 계획 도시 연구 협회는 지진이 일어난 후 주택의 품질을 다루는 데 1910년 창설되었다. 지진은 많은 도시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집들을 재건한 퍼시픽하이츠를 포함하여 화재를 생존한 서부 이웃들의 개발을 촉진하였다. 차례로 노브힐의 파괴된 맨션들은 그랜드 호텔들이 되었다. 시청은 화려한 예술 스타일에 다시 솟아올랐고, 도시는 1915년 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에서 그 재생을 축제벌였다.
그 일은 샌프란시스코가 그 가장 중요한 기본적 시설들을 건설했던 이 시기 동안에 있었다. 토목 기사 마이클 오쇼네시는 트윈피크스 저수지, 스탁턴 스트리트 터널, 트윈피크스 터널, 샌프란시스코 자치 철도, 옥실리어리 수도 공급 시스템과 새로운 하수구들의 건설을 감독하는 데 1912년 9월 도시를 위한 주요 공학자로서 제임스 롤프 시장에 의하여 기용되었다. 오늘날 생존하는 J, K, L, M과 N 라인들의 샌프란시스코의 시내 전차 시스템은 1915년과 1927년 사이에 오쇼네시에 의하여 완료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에 가장 큰 효과를 가질 오쇼네시 댐, 헤치 헤치 저수지와 헤치 헤이 수로이다. 풍족한 수도 공급은 샌프란시스코를 오늘날이 된 도시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 도시는 금융의 수도로서 그 입지를 굳혔으며,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이 일어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은행은 단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일은 샌프란시스코가 2개의 토목 공사 계획들을 착수했던 대공황의 절정에 있었으며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와 골든게이트 교를 건설하여 각각 1936년과 1937년에 완공되었다. 그 일은 전 군사 영창 앨커트래즈섬이 연방 최대 경비 교도소로 그 서비스를 시작했던 이 시기에 있었으며 알 카포네와 로버트 프랭클린 스트라우드 같은 유능한 입소자들을 유숙시켰다. 샌프란시스코는 후에 1939년 ~ 1940년 골든게이트 국제 박람회와 함께 그 다시 얻어진 웅장을 축제벌여 그것을 개최하는 데 만의 중간에 보물섬을 창조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헌터스포인트 해군 조선소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포트메이슨은 태평양 전쟁으로 나가는 복무 군인들을 위한 승선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직업들의 폭발은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 특히 남부에서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끌어들였다. 전쟁의 종말 후에 많은 군인들은 해외 복무로부터 돌아왔고, 원래 일하러 온 시민들은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유엔을 창조한 유엔 헌장이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안되어 조인되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일본과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도시 계획 프로젝트들은 서부 이웃들의 넓게 퍼진 파괴와 재개발, 그리고 시민이 이끈 반대에 의하여 중지되기 전에 짧은 부분들의 일련 만이 지어진 것의 새로운 무료 고속도로들의 건설을 연루시켰다.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시작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부두들을 안 쓰이게 만들었고, 화물 활동은 더욱 큰 오클랜드 항구로 이동하였다. 도시는 산업적인 직업들을 잃기 시작하였고, 그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관광업으로 변하였다. 외곽들이 재빠른 발전을 경험하였고, 백인 인구의 큰 부분이 도시를 떠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의 증가하는 경향에 의하여 대체되면서 의미있는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1950년부터 1980년까지 도시는 그 인구의 10% 이상을 잃었다.
이 시기에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반체제 문화의 자석이 되었다. 비트 제네레이션 작가들은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를 야기시켰고 1950년대에 노스비치 이웃에 중심을 두었다. 히피족들은 1960년댜에 하이트애슈버리로 떼지어 들어와 1867년 사랑의 여름과 함께 절정에 도달하였다. 1970년대에 도시는 도시 동성애자 마을로서 카스트로의 출현, 감독 위원회로 하비 밀크의 선출과 1978년 조지 모스콘 시장과 더불어 그의 암살 사건과 함께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메리카 은행이 1969년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555 번지에 완료되었고, 1972년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가 완료되어 광대한 고층 개발 다운타운의 시기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맨해트니제이션"의 경향을 발화시켰다. 1980년대는 또한 많은이들이 노숙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데 불구하고 오늘날 남아있는 문제인 도시에서 노숙자들의 수에서 극적인 증가를 보았다. 1989년 로마프리타 지진이 베이 에이리어를 통하여 파괴와 인생의 상실을 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은 마리나와 사우스오브마켓 구역들에서 엄하게 구조물들을 손상시켰고, 손상된 엠바카데로 무료 고속도로와 거의 손상된 센트럴 무료 고속도로의 철거를 촉발하여 엠바카데로를 그 역사적 다운타운 해안 지역으로 개선하는 데 도시를 허용하고 헤이스밸리 이웃을 부흥시켰다.
20년의 세월은 인터넷 산업에 의하여 몰아진 2개의 붐을 보았다. 첫째는 1990년대 후반의 .com 붐이었으며 스타트업 컴퍼니들이 샌프란시스코 경제를 활기 띠게 하였다. 큰 수의 기업인들과 컴퓨터 적용 개발인들이 도시로 들어와 이주하였고, 마케팅, 디자인과 세일 전문인들에 의하여 이어져 한번 더욱 가난했던 이웃들이 증가적으로 고급화 되면서 사회적 경치를 바꾸었다. 샐로운 주책과 사무실 공간을 위한 요구는 고층 개발의 두번째 경향을 발화시켰는 데 이번에는 사우스오브마켓 구역에서였다. 2000년까지 도시의 인구는 새로운 높이들에 도달하여 1950년에 세워진 이전 기록을 앞섰다. 2001년 환상이 깨질 때 이 많은 회사들이 망하고, 그들의 종업원들이 직업을 잃었다. 아직 기술과 기업가 정신은 샌프란시스코 경제의 주요 생업들로 남아있다. 샌프란시스코가 기술 사무소들의 인기있는 위치와 애플과 구글 같은 실리콘 밸리 회사들에서 고용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데 인기있는 장소가 되면서 2000년대 중반까지 사회 미디어 붐이 시작되었다.[4]
교통[편집]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유나이티드 항공과 버진 아메리카를 위한 허브 공항이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국제 터미널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는 주요 국제 통로이다. 2011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미국에서 8번째로, 그리고 세계에서 22번째로 가장 바쁜 공항이었으며 4억 9백만 명의 승객들을 다루었다. 만을 가로질러 위치한 오클랜드 국제공항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인기 있는 비용이 낮은 대안이다. 지리적으로 오클랜드 공항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으로서 다운타운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대략 같은 거리이나 샌프란시스코 만을 가로지른 그 위치의 이유로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더욱 거대한 운전 거리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오클랜드와 버클리 등 샌프란시스코 만의 도시와 마린 카운티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교통은 두 개의 큰 다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긴 고가 철교인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릿지는 7.2Km의 길이로 1936년에 완공되었다.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어지는 주홍색 골든 브릿지는 1937년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1280m의 순수 현수교이다. 뉴욕시의 베라자노-내로스(Verrazano-Narrows) 다리가 1964년 개통하기 전까지는 가장 긴 현수교였다. 다리가 개통하기 이전까지는 수많은 페리 항로가 있었다. 늘어난 교통량을 만을 잇는 다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샌프란시스코와 마린 카운티 사이에 페리가 다시 등장하였다.
1972년 운영을 시작한 도시 간 고속교통시스템 BART(Bay Area Rapid Transit) 또한 주요 교통시스템으로 5.8㎞ 구간을 수중 튜브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와 주변 커뮤니티를 연결한다. 반도 꼭대기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항상 철도 교통의 종착역이 되어 왔다. 1869년 9월 6일 센트럴퍼시픽 노선으로 서부행 열차가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대륙횡단열차는 승객들을 샌프란시스코로 실러날랐다.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32%는 하루마다 통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서해안에서 1위, 그리고 미국에서 전체 3위에 들었다. "무니"로 알려진 샌프란시스코 자치 철도는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대중 통행 시스템이다. 무니는미국에서 7번째로 가장 큰 통행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경편 철도와 지하철을 합친 시슽인 무니 메트로와 큰 버스망을 둘다 운영한다. 추가적으로 그것은 카스트로 스트리트에서 피셔맨스워프로 마켓 스트리트에 달리는 역사적 자동차 선을 달린다. 그것은 또한 미국 국립사적지로서 지정되어 왔고 주요 관광객의 목적지인 유명한 케이블카를 운영하기도 한다.[5]
경제[편집]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주요 기업은 IT 산업의 경우, 세일즈포스, 트위터, 우버, 에어비앤비,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 드롭박스, 이벤트브라이트(Eventbrite), 핀터레스트(Pinterest), 옐프(Yelp), 리프트(Lyft) 등이 있으며, 금융업의 경우, 비자, 웰스파고(Wells Fargo) 등, 의류산업의 경우 갭, 바나나리퍼블릭, 올드네이비(Old Navy), 리바이스 등이 있으며, 엔터테인먼트에는 루카스필름(스타워즈, 카리브의 해적 등 제작), 징가(Zynga) 등이 있다. 또한 연간 2,58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이에 따라 숙박, 요식 및 컨벤션 사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관광업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수입원으로 도시 일자리의 1/7을 차지한다. 금문교, 코이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차이나타운, 노스비치, 빅토리아식 저택, 롬바르드 거리, 페어몬트 호텔이 주요 명소이다. 북쪽 해안가에 기라델리 스퀘어(Ghiradelli Square)에서 피어 35를 잇는 피셔맨스워프도 주요한 명소이다. 샌프란시스코 명물인 케이이블카(노면전차)의 노선은 총 3개인데 이중 유니언스퀘어와 피셔맨스워프 사이를 운행하는 파월-하이드(Powell-Hyde)가 가장 인기있는 구간이다. 피셔맨스워프에서는 거리공연과 해산물식당, 독특한 상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두에서는 알카트라즈 섬으로 가는 보트투어를 제공한다. 또한 피셔맨스워프 일대 최대규모 쇼핑가인 기라델리 스퀘어는 한때 초콜릿 공장이 있던 곳으로 샌프란시스코 해양박물관과 마주보며 노스포인트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6]
관광[편집]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 지진 이후 여러 문화시설이 설립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의 시빅센터, 공공도서관, 시민음악당 등이 있다. 출판업자 드 영(M.H de Young)이 골든게이트 공원에 드영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드영박물관과 더불어 샌프란시스코에는 링컨 공원내 미술관인 레지옹도뇌르(Region of Honor), 현대미술관 등의 미술관이 있다.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에서 프랑스의 레지옹도뇌르 궁전을 본떠 만든 프랑스관의 매력에 빠졌던 알마 슈프레켈스가 그의 남편과 함께 만든 레지옹도뇌르 미술관 앞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복제품이 있다. 시내에 위치한 현대미술관(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은 1935년 설립되어 1995년 현 위치로 이전했는데 뉴욕 현대미술관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리고 금문교를 왼편에 둔 바닷가 갯벌에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낭만주의 건축물인 예술의 궁전(Palace of Fine Arts Teatre)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두 개의 주요한 음악기관이 있다. 1909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교향악단은 데이비스 심포니 홀(Louise M. Davies Symphony Hall)에서 공연을 하며 여름에는 이곳에서 팝 콘서트가 주로 열린다. 또한 전쟁기념오페라극장(War Memorial Opera House)은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의 전초무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전쟁기념오페라극장은 유럽극장과 달리 규모가 크지 않으나, 북미에서 두 번째로 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단이 소속되어 있다. 두 시설은 전쟁기념공연예술센터(War Memorial and Performing Arts Center)의 부속건물이기도 하다. 2013년 문을 연 SFJAZZ 센터는 연중 내내 재즈 공연을 선보인다. 이외에도 시내에는 수많은 극장과 라이브 극장이 있다.[7]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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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샌프란시스코〉, 《위키백과》
- ↑ 〈샌프란시스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샌프란시스코의 기후〉, 《네이버 지식백과》
- ↑ 〈샌프란시스코〉, 《요다위키》
- ↑ 〈샌프란시스코〉, 《나무위키》
- ↑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와 산업〉, 《네이버 지식백과》
- ↑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시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샌프란시스코〉, 《위키백과》
- 〈샌프란시스코〉, 《나무위키》
- 〈샌프란시스코〉, 《요다위키》
- 〈샌프란시스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샌프란시스코의 기후〉, 《네이버 지식백과》
-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와 산업〉, 《네이버 지식백과》
-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시설〉,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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