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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쉐보레는 1911년 11월 디트로이트에서 지엠의 설립자였던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와 경주차 레이서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에 의해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을 '쉐보레(Chevrolet Motor Car Company)'로 지은 것은 당시 루이 쉐보레가 레이서로서 명성이 높았고, 쉐보레라는 발음이 듣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4년, 쉐보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의 '보타이(BOWTIE)' 로고가 최초로 등장했다. 보타이 로고는 1930년대 후반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의 보타이 엠블렘이 개발되기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ref> 브랜드 스토리 쉐보레 공식 블로그 - https://blog.gm-korea.co.kr/696</ref> 설립 초기부터 쉐보레는 일반적으로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기술과 사양들을 합리적인 가격대의 차량과 트럭들에 적용해 왔다. 최초의 쉐보레 모델인 '시리즈 C 클래스 식스(six)' 모델에는 전기 시동 장치와 헤드램프를 탑재했는데, 이 기능들은 당시 최고급 차량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양이었다. 그 이후 수십년간 세이프티 글래스, 연료 분사식 엔진, ABS, 그리고 전자식 차체 안정화 시스템처럼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혁신적 기술들이 쉐보레의 대중적 모델들에 적용되었다.<ref> 브랜드 히스토리 쉐보레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chevrolet.co.kr/chevy/brand-history.gm</ref> 쉐보레 브랜드 차량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2005년 쉐보레는 한국 지엠대우가 만든 자동차를 주로 유럽에서 재출시했는데, 이는 제너럴모터스가 쉐보레(Chevrolet)를 중심으로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뿌리를 둔 움직임이었다. 유럽에 쉐보레가 재도입되면서 지엠은 쉐보레를 주류 가치 브랜드로 삼고, 지엠의 전통적인 유럽 표준 비어인 독일의 오펠과 영국의 보크홀은 시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엠은 2013년 말 카마로와 코르벳을 제외한 브랜드가 2016년부터 유럽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을 뒤집었다. 쉐보레 차량은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CIS) 주에서 계속 시판될 예정이었다. 제너럴모터스가 2011년 지엠대우를 완전 인수해 한국지엠을 만든 뒤, 대우차 브랜드의 마지막 사용처가 본고장 한국에서 중단되고 쉐보레가 뒤를 이었다. 북미에서 쉐보레는 준중형 승용차부터 중형 상용 트럭까지 다양한 차량을 생산해 판매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글로벌 마커 중 하나로 쉐보레가 유명하고 이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쉐보레, 셰비는 제너럴 모터스나 그 제품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ref name="위키피디아">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evrolet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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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는 1911년 11월 디트로이트에서 지엠의 설립자였던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와 경주차 레이서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에 의해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을 '쉐보레(Chevrolet Motor Car Company)'로 지은 것은 당시 루이 쉐보레가 레이서로서 명성이 높았고, 쉐보레라는 발음이 듣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4년, 쉐보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의 '보타이(BOWTIE)' 로고가 최초로 등장했다. 보타이 로고는 1930년대 후반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의 보타이 엠블렘이 개발되기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ref> 브랜드 스토리 쉐보레 공식 블로그 - https://blog.gm-korea.co.kr/696</ref> 설립 초기부터 쉐보레는 일반적으로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기술과 사양들을 합리적인 가격대의 차량과 트럭들에 적용해 왔다. 최초의 쉐보레 모델인 '시리즈 C 클래스 식스(six)' 모델에는 전기 시동 장치와 헤드램프를 탑재했는데, 이 기능들은 당시 최고급 차량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양이었다. 그 이후 수십년간 세이프티 글래스, 연료 분사식 엔진, ABS, 그리고 전자식 차체 안정화 시스템처럼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혁신적 기술들이 쉐보레의 대중적 모델들에 적용되었다.<ref> 브랜드 히스토리 쉐보레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chevrolet.co.kr/chevy/brand-history.gm</ref> 쉐보레 브랜드 차량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2005년 쉐보레는 한국 지엠대우가 만든 자동차를 주로 유럽에서 재출시했는데, 이는 제너럴모터스가 쉐보레(Chevrolet)를 중심으로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뿌리를 둔 움직임이었다. 유럽에 쉐보레가 재도입되면서 지엠은 쉐보레를 주류 가치 브랜드로 삼고, 지엠의 전통적인 유럽 표준 비어인 독일의 오펠과 영국의 보크홀은 시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엠은 2013년 말 카마로와 코르벳을 제외한 브랜드가 2016년부터 유럽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을 뒤집었다. 쉐보레 차량은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CIS) 주에서 계속 시판될 예정이었다. 제너럴모터스가 2011년 지엠대우를 완전 인수해 한국지엠을 만든 뒤, 대우차 브랜드의 마지막 사용처가 본고장 한국에서 중단되고 쉐보레가 뒤를 이었다. 북미에서 쉐보레는 준중형 승용차부터 중형 상용 트럭까지 다양한 차량을 생산해 판매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글로벌 마커 중 하나로 쉐보레가 유명하고 이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쉐보레, 셰비는 제너럴 모터스나 그 제품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ref name="위키피디아">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evrolet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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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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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듀런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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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듀런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선도적인 선구자였으며, 그는 한 회사가 여러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프레드릭 스미스(Frederic Smith)와 루이스 쉐보레와 함께 제너럴 모터스를 공동 설립했다. 또한 그는 프리기데어(Frigidaire)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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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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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윌리엄 듀란트는 미국 보스톤(Boston)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플린트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의 제재소 일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1885년 24살이 되던 해 우연히 타본 마차에 매료되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마차를 만들던 곳을 인수해 버린다. 그는 플린트 카트 회사를 설립하고 마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03년 마차 제작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윌리엄에게 어느 순간 자동차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자동차란 거칠고 시끄러운 물건으로만 보여 자신의 딸에게 조차 자동차를 타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사업가로서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윌리엄은 사람들이 자동차에 열광하는 모습, 그리고 안전에 관련한 다양한 요구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자동차사업이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을 직감하여 자동차 업계로 들어가 차의 생산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04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뷰익자동차를 매입하게 되었다. 1908년 윌리엄은 지엠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그 안에 자동차 회사들과 부품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해 들여놨다. 뷰익, [[캐딜락]], [[올즈모빌]] 등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노스웨이 모터 앤 매뉴팩처링사와 스파트 플러그를 생산하는 챔피언 이그니션사 및 바퀴와 축을 생산하는 웨스톤 모트등이 그 대상이었다. 1910년 2년 만에 윌리엄은 25개 회사를 매입해 지엠의 골격에 적절하게 배치했다. 이런 개념은 그럴 듯 했지만 돈이 문제였다. 과잉팽창과 재정곤란으로 윌리엄은 결국 회사를 은행 컨소시엄에 넘겨야했다. 1911년 11월 3일 윌리엄은 절망하지 않았다. 뷰익의 레이싱 팀에 몸담고 있던 루이스 쉐보레를 자신의 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루이스 쉐보레라는 이름을 따 ‘쉐보레 자동차’를 만들고 공동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1920년 결국 은행이 다시 개입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지엠에서 두 번째 축출을 당하게 된다. 그의 모든 노력을 지엠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만드는데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조직적 혹은 재정적인 골격이 없어 모든 노력이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1921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듀란트 자동차사를 설립하고 저가차량인 “스타(Star)"를 생산했지만 1933년 실패하고 1935년 부도가 났다. 그의 마지막 사업은 자동차가 아닌 볼링장 체인 사업 이였지만 그것마저도 2차 세계대전으로 실패하는 불운을 겪으며 전 재산이 250불이라며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1947년 지엠이 주는 연금 형식의 돈으로 살아가다 타계한다.<ref>wlswn12u@carlab.co.kr, 〈[http://www.carlab.co.kr/news/2403 윌리엄 C 듀란트 (William Crapo Durant) 1861 - 1947]〉,  《카랩》, 2014-08-19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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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쉐보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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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이스 쉐보레.jpg|썸네일|200픽셀|'''[[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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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쉐보레는 스위스계 미국인 경주용 자동차 운전사였으며, 1911년에 설립된 쉐보레 자동차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며, 1916년에 설립된 프론테낙 자동차 회사의 설립자이다. 쉐보레는 스위스 북서부의 시계 제조 중심지인 뉴차텔의 칸초프퐁에서 태어났다. 1886년, 쉐보레의 가족은 프랑스의 코트도르 주에 있는 발네(Beaune)에서 살기 위해 스위스를 떠났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젊었을 때 기계적인 기술과 자전거 경주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쉐보레는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로빈 메카닉샵(Roblin mechanics shop)에서 일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00년 캐나다 몬트리올으로 이주하기 전에 짧은 시간 동안 일하고 기계공으로 일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 다음 해, 그는 뉴욕에서 그의 동료 스위스 이민자의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잠시 근무한 후, 디온 부턴의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의 브룩클린 영업부로 이사했다. 1905년에 그는 수자네 트레이유스(Suzane Treyvous)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그는 경주용 자동차 운전자 피아트(FIAT)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리고 1907년, 쉐보레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더 오토카 컴퍼니(The Autocar Company)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의 레이싱 경력은 [[뷰익]](Buick)을 위해 운전하면서 계속되었고, 뷰익의 주인 윌리엄 듀런트의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제너럴모터스의 설립자가 된다.<ref >Louis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Chevrolet</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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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로 브랜드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루이스 쉐보레의 명성이 워낙 높았고 발음도 좋아 듀런트가 직접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결실을 맺은 쉐보레의 첫 모델 클래식 식스는 4.9리터 엔진을 장착하고 최고 속도 65마일의 강력한 성능을 바탕으로 제법 큰 인기를 모았고 쉐보레 브랜드를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쉐보레는 당시 최고의 경쟁자였던 포드와 경쟁하기 위해 1914년 2.8리터 엔진을 얹은 '490' 모델을 선보인다. 차량 가격 490달러를 모델명으로 사용한 ‘490’은 1927년 100만대 판매 기록을 세우며 포드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만다. 쉐보레는 이후 콜벳, 카마로 등의 혁신적인 스포츠카와 머슬카를 개발하며 포드와 경쟁을 벌였고 소형차 쉬베트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새한 자동차(대우자동차 전신)에서 제미니는 이름으로 생산돼 국내에서 판매되기도 했다.<ref>김흥식 기자, 〈[http://www.autohera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45 레이서 출신의 루이스 쉐보레와 GM의 만남]〉,  《오토헤럴드》, 2013-01-0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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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랜드 스토리 쉐보레 공식 블로그 - https://blog.gm-korea.co.kr/696
 
* 브랜드 스토리 쉐보레 공식 블로그 - https://blog.gm-korea.co.kr/696
 
*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evrolet
 
*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evr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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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uis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Chevr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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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식 기자, 〈[http://www.autohera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45 레이서 출신의 루이스 쉐보레와 GM의 만남]〉,  《오토헤럴드》,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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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lswn12u@carlab.co.kr, 〈[http://www.carlab.co.kr/news/2403 윌리엄 C 듀란트 (William Crapo Durant) 1861 - 1947]〉,  《카랩》, 2014-08-19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20년 9월 7일 (월) 17:25 판

쉐보레(Chevrolet)
쉐보레(Chevrolet)

쉐보레(Chevrolet)는 1911년부터 출시된 미국 제너럴모터스의 자동차 상표 중의 하나이다. 제너럴모터스 브랜드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셰비'(Chevy)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옛 대우자동차의 승용차 부문이 제너럴모터스에 매각된 이후 흡수되어 현재 한국지엠을 통하여 브랜드가 진출되었다. 쉐보레는 20가지 이상의 자동차를 판매하고 다양한 버전의 모델을 자국 시장에 판매하고 있고, 승용차와 중형 트럭 시장에서 유명하다. 대표적인 픽업 트럭으로는 실버라도가 있다.

개요

쉐보레는 1911년 11월 디트로이트에서 지엠의 설립자였던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와 경주차 레이서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에 의해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을 '쉐보레(Chevrolet Motor Car Company)'로 지은 것은 당시 루이 쉐보레가 레이서로서 명성이 높았고, 쉐보레라는 발음이 듣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4년, 쉐보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의 '보타이(BOWTIE)' 로고가 최초로 등장했다. 보타이 로고는 1930년대 후반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의 보타이 엠블렘이 개발되기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1] 설립 초기부터 쉐보레는 일반적으로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기술과 사양들을 합리적인 가격대의 차량과 트럭들에 적용해 왔다. 최초의 쉐보레 모델인 '시리즈 C 클래스 식스(six)' 모델에는 전기 시동 장치와 헤드램프를 탑재했는데, 이 기능들은 당시 최고급 차량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양이었다. 그 이후 수십년간 세이프티 글래스, 연료 분사식 엔진, ABS, 그리고 전자식 차체 안정화 시스템처럼 고가의 차량에만 적용되던 혁신적 기술들이 쉐보레의 대중적 모델들에 적용되었다.[2] 쉐보레 브랜드 차량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2005년 쉐보레는 한국 지엠대우가 만든 자동차를 주로 유럽에서 재출시했는데, 이는 제너럴모터스가 쉐보레(Chevrolet)를 중심으로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뿌리를 둔 움직임이었다. 유럽에 쉐보레가 재도입되면서 지엠은 쉐보레를 주류 가치 브랜드로 삼고, 지엠의 전통적인 유럽 표준 비어인 독일의 오펠과 영국의 보크홀은 시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엠은 2013년 말 카마로와 코르벳을 제외한 브랜드가 2016년부터 유럽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을 뒤집었다. 쉐보레 차량은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CIS) 주에서 계속 시판될 예정이었다. 제너럴모터스가 2011년 지엠대우를 완전 인수해 한국지엠을 만든 뒤, 대우차 브랜드의 마지막 사용처가 본고장 한국에서 중단되고 쉐보레가 뒤를 이었다. 북미에서 쉐보레는 준중형 승용차부터 중형 상용 트럭까지 다양한 차량을 생산해 판매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글로벌 마커 중 하나로 쉐보레가 유명하고 이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쉐보레, 셰비는 제너럴 모터스나 그 제품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3]

주요 인물

윌리엄 듀런트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

윌리엄 듀런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선도적인 선구자였으며, 그는 한 회사가 여러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프레드릭 스미스(Frederic Smith)와 루이스 쉐보레와 함께 제너럴 모터스를 공동 설립했다. 또한 그는 프리기데어(Frigidaire)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생애

1861년 윌리엄 듀란트는 미국 보스톤(Boston)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플린트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의 제재소 일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1885년 24살이 되던 해 우연히 타본 마차에 매료되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마차를 만들던 곳을 인수해 버린다. 그는 플린트 카트 회사를 설립하고 마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03년 마차 제작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윌리엄에게 어느 순간 자동차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자동차란 거칠고 시끄러운 물건으로만 보여 자신의 딸에게 조차 자동차를 타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사업가로서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윌리엄은 사람들이 자동차에 열광하는 모습, 그리고 안전에 관련한 다양한 요구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자동차사업이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을 직감하여 자동차 업계로 들어가 차의 생산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04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뷰익자동차를 매입하게 되었다. 1908년 윌리엄은 지엠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그 안에 자동차 회사들과 부품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해 들여놨다. 뷰익, 캐딜락, 올즈모빌 등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노스웨이 모터 앤 매뉴팩처링사와 스파트 플러그를 생산하는 챔피언 이그니션사 및 바퀴와 축을 생산하는 웨스톤 모트등이 그 대상이었다. 1910년 2년 만에 윌리엄은 25개 회사를 매입해 지엠의 골격에 적절하게 배치했다. 이런 개념은 그럴 듯 했지만 돈이 문제였다. 과잉팽창과 재정곤란으로 윌리엄은 결국 회사를 은행 컨소시엄에 넘겨야했다. 1911년 11월 3일 윌리엄은 절망하지 않았다. 뷰익의 레이싱 팀에 몸담고 있던 루이스 쉐보레를 자신의 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루이스 쉐보레라는 이름을 따 ‘쉐보레 자동차’를 만들고 공동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1920년 결국 은행이 다시 개입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지엠에서 두 번째 축출을 당하게 된다. 그의 모든 노력을 지엠이라는 거대한 기업을 만드는데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조직적 혹은 재정적인 골격이 없어 모든 노력이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1921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듀란트 자동차사를 설립하고 저가차량인 “스타(Star)"를 생산했지만 1933년 실패하고 1935년 부도가 났다. 그의 마지막 사업은 자동차가 아닌 볼링장 체인 사업 이였지만 그것마저도 2차 세계대전으로 실패하는 불운을 겪으며 전 재산이 250불이라며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1947년 지엠이 주는 연금 형식의 돈으로 살아가다 타계한다.[4]

루이스 쉐보레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

루이스 쉐보레는 스위스계 미국인 경주용 자동차 운전사였으며, 1911년에 설립된 쉐보레 자동차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며, 1916년에 설립된 프론테낙 자동차 회사의 설립자이다. 쉐보레는 스위스 북서부의 시계 제조 중심지인 뉴차텔의 칸초프퐁에서 태어났다. 1886년, 쉐보레의 가족은 프랑스의 코트도르 주에 있는 발네(Beaune)에서 살기 위해 스위스를 떠났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젊었을 때 기계적인 기술과 자전거 경주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쉐보레는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로빈 메카닉샵(Roblin mechanics shop)에서 일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00년 캐나다 몬트리올으로 이주하기 전에 짧은 시간 동안 일하고 기계공으로 일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 다음 해, 그는 뉴욕에서 그의 동료 스위스 이민자의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잠시 근무한 후, 디온 부턴의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의 브룩클린 영업부로 이사했다. 1905년에 그는 수자네 트레이유스(Suzane Treyvous)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그는 경주용 자동차 운전자 피아트(FIAT)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리고 1907년, 쉐보레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더 오토카 컴퍼니(The Autocar Company)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의 레이싱 경력은 뷰익(Buick)을 위해 운전하면서 계속되었고, 뷰익의 주인 윌리엄 듀런트의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제너럴모터스의 설립자가 된다.[5]

쉐보레 설립

쉐보레로 브랜드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루이스 쉐보레의 명성이 워낙 높았고 발음도 좋아 듀런트가 직접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결실을 맺은 쉐보레의 첫 모델 클래식 식스는 4.9리터 엔진을 장착하고 최고 속도 65마일의 강력한 성능을 바탕으로 제법 큰 인기를 모았고 쉐보레 브랜드를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쉐보레는 당시 최고의 경쟁자였던 포드와 경쟁하기 위해 1914년 2.8리터 엔진을 얹은 '490' 모델을 선보인다. 차량 가격 490달러를 모델명으로 사용한 ‘490’은 1927년 100만대 판매 기록을 세우며 포드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만다. 쉐보레는 이후 콜벳, 카마로 등의 혁신적인 스포츠카와 머슬카를 개발하며 포드와 경쟁을 벌였고 소형차 쉬베트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새한 자동차(대우자동차 전신)에서 제미니는 이름으로 생산돼 국내에서 판매되기도 했다.[6]

각주

  1. 브랜드 스토리 쉐보레 공식 블로그 - https://blog.gm-korea.co.kr/696
  2. 브랜드 히스토리 쉐보레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chevrolet.co.kr/chevy/brand-history.gm
  3.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evrolet
  4. wlswn12u@carlab.co.kr, 〈윌리엄 C 듀란트 (William Crapo Durant) 1861 - 1947〉, 《카랩》, 2014-08-19
  5. Louis Chevrolet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Chevrolet
  6. 김흥식 기자, 〈레이서 출신의 루이스 쉐보레와 GM의 만남〉, 《오토헤럴드》, 2013-01-03

참고 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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