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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페르시아어: ایران)은 [[서아시아]]의 이슬람 공화국이다. 정식 국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페르시아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이다. 북서쪽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과 접경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가 있으며 북동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남동쪽에는 [[파키스탄]]이 자리하며, 남부 해안선을 따라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TURKEY)와 [[이라크]]와 접경하고 있다. 서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거대한 국가이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테헤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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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은 대통령제 민주주의를 가미한 신정 국가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종교적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에게 집중되어 있다. 현재 이란의 아야톨라는 1989년 이래 호메이니의 뒤를 이어 오른 하메네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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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은 현재 지역강국이자 중견국이며, 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란은 [[UN]], [[ECO]], [[OIC]], [[OPEC]]의 창립회원국이자, 막대한 양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큰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란에는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천연가스 양이 매장되어 있으며, 원유 매장량은 무려 세계 4위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유구한 역사 덕에 현재 22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으로도 굉장히 다원화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민족들에는 [[페르시아인]],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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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요 == | ||
+ | * 수도: [[테헤란]] | ||
+ | * 면적: 1,648,195km² | ||
+ | * 인구: 86,758,304명(2022년) | ||
+ | * 공용어: 페르시아어 | ||
+ | * 정치체제: 공화제, 대통령제, 단일국가, 신권 정치, 이슬람 국가 | ||
+ | *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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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명 == | ||
+ | ‘이란’이라는 단어는 중세 [[페르시아어]] ‘Ērān’에서 유래하였으며, 3세기에 만들어진 [[낙쉐 로스탐]]의 석비에 처음으로 사용 용례가 발견된 바 있다. ‘이란’이라는 단어는 이란 민족을 일컫는 단어이자 초기 [[인도유럽어족]]의 명칭인 ‘아리아’에서 변형이 일어난 것으로, 중세 파르티아어로 ‘아리아(Ariya)’라고 부르는 것이 중세에 들어와 ‘이란’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이것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면, ‘이란’이라는 국호는 ‘아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최소한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부터 이 단어가 이란 지역을 부르는 데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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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으로 서방 세계는 현재 이란 지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지역을 ‘페르세스’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고대 이란계 부족들이 살던 땅의 이름이 ‘파르사(Parsa)'였던 까닭으로 그리스인들이 이란 쪽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을 통틀어 ’페르세스‘, 혹은 ’페르시아‘라고 쓴 것이 후대에 남겨져 서구 세계에 완전히 정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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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대까지만 해도 서방 세계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이란 지방을 ‘페르시아’라고 칭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935년에 [[레자 샤]]는 국제사회에게 자국을 ‘페르시아’라고 칭하지 말고 현지에서 더 많이 쓰이는 이름인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요청하였고, 이후 점차 국제적으로도 ‘페르시아’라는 단어보다 ‘이란’을 훨씬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란이 완전히 국호로 굳어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 ‘이란’은 국가의 이름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며, ‘페르시아’는 국가를 칭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이란 내부의 문화, 지방, 혹은 역사적인 서술을 할 때 더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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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역사 == | ||
+ | ===선사=== | ||
+ | 이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카샤푸르드나 간즈 파르 등 이란 북부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며, 이에 비추어 추정해볼 때 최소 구석기 초창기부터 인류가 이란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란에서는 최소 구석기 중기부터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들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후 기원전 1만 년과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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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수사 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4395년에서 기원전 3490년 경 사이에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4000년 경부터는 본격적인 고대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거대한 도시들이 들어섰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자 이란 지방에는 [[엘람]], 자얀데루드, 지로프트 등 다양한 고대 문명들이 들어섰으며, 이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엘람 문명은 주로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번영을 누렸으며 이란계 제국들이 들어서기 전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엘람에서는 인근의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000년 경에 쓰기와 쐐기문자 등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하여 활발한 사회 발전과 경제적 진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 경 초반에는 [[아시리아인]]들이 이란 서부 지방에 정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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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 ||
+ | 기원전 2000년경에는 마침내 고대 이란인들이 [[유라시아 스텝]]을 거쳐서 현재의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협력을 하기도 하며 점차 이란 지방의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나중에는 이 고대 이란인들이 갈래가 나뉘어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이 발흥하게 된다. 기원전 1000년에서 700년에 이란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이후 메디아 왕국의 3대 국왕이었던 키악사레스를 중심으로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바빌로니아 왕국]]과 힘을 합쳐 연합을 맺었고, 인근의 [[스키타이인]] 등과도 힘을 합쳐 [[아시리아 제국]]을 침공하였다. 이후 혼란스러운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내전마저 터지며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해졌고, 이때 수많은 민족들이 약 300여 년만에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왕국들을 세워나갔다. 기원전 728년 경에는 [[메디아인]]들이 [[데이오세스 왕]] 하에 통합되었으며, [[메디아 제국]]을 세워 기원전 612년 경에는 현재 이란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까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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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550년에는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던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고, 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인근의 도시 국가들마저 무릎꿇리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후 키루스는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동쪽으로는 [[발칸]]과 [[동유럽]]으로, 서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나가면서 거대한 대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539년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를 꺾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약 400여 년간 지속된 메소포타미아의 주도권을 빼앗아왔고, 이후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대제가 스스로를 메소포타미아의 지도자로 천명하고 문화의 계승, 융합을 선언하면서 이후 이란, 즉 페르시아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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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케메네스 제국]]의 최대 판도는 현대 이란 전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 해안가 대부분, [[그리스]] 북동부, [[불가리아]] 남부, [[북마케도니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을 모두 차지하면서 고대 세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였으며, 심지어 고대 이집트까지 장악하고 그 손길을 [[리비아]]와 [[쿠웨이트]],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까지 뻗치면서 가히 중동 세계의 최고 맹주로 군림하면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480년 경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00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전세계 인구의 44%를 자신의 신민으로 거느리는 압도적인 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그 이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바빌론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을 풀어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왕의 길'과 같은 거대 도로나 선진적인 우편제도를 운용하였고 공식 언어를 제정하여 전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 하기도 했다.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앙집권적, 관료적인 통치 체제를 황제를 정점으로 매우 효율적인 형태로 운용하였으며, 거대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제도는 후대의 제국들보다도 발전된 면을 보일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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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부 국경에서 그리스인들과 점차 분쟁을 겪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기원전 500년 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케메네스 제국은 결국 발칸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서쪽으로 후퇴하고야 말았다.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침공하였고,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다리우스 2세]]가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국도 마침내 멸망하고야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란 지방도 그리스계 정복자들이 세운 헬레니즘 국가 계열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경에는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이란 계열의 [[파르티아 제국]]이 힘을 기르며 그 국력을 신장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방의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마찰을 겪으며 몇 백년에 달하는 갈등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파르티아 제국은 봉건적 군주제를 통하여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224년 경에는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서방 세계와 신경전을 벌였으며, 이 두 국가는 약 40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두 국가들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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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산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토를 대부분 수복할 정도로 그 힘이 강성하였는데, [[크테시폰]]을 수도로 하였으며 인근의 로마 제국과 [[서유럽]], [[아프리카]]와 저 멀리 있는 [[중국]]과 [[인도]]까지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 시기가 이란 문화와 국력의 최절정기로 여겨지며, 실제로 이때 가장 예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은 거의 존속 기간 내내 로마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하여 약 거의 700여 년 동안 [[아나톨리아]], [[캅카서스]],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벌어야만 했다. 이는 사산 제국의 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었고, 이로 인하여 후대에 아랍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등장하였을 때에 이에 대한 방비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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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 ||
+ |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끝없이 길어지고, 특히 602년과 628년에 대대적으로 충돌하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모두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는 7세기경 새롭게 쳐들어온 아랍인 무슬림들의 침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점차 라쉬둔 칼리파조에, [[라쉬둔 칼리파조]] 이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조]], 결국에는 [[아바스 칼리파조]]에 복속당하기 시작한다. 이후 점진적인 이슬람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 조로아스터교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사회가 점차 이슬람 중심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신전과 도서관들이 불에 탔으며, 이슬람교인들을 제외한 타종교인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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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0년에는 아바스 칼리파조가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몰아내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아랍의 이슬람 문화에 상당수 동화가 진행된 상태였고,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떠오른다. 점차 여러 인종들과 민족들이 섞이면서, 페르시아 지역은 코스모폴리탄으로 떠올랐고 아랍인들의 지배적 특권이나 우월성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점차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아랍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요직들과 부를 빼앗아갔고, 아랍 귀족들은 점차 이방인들과 피가 섞여나가면서 아랍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미해졌다. 전통적인 아랍 귀족 세력들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관료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오히려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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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바스 칼리파조는 약 200여 년 동안 페르시아 지방을 지배하였는데, 이때 [[타히르 토후국]], [[사파르 토후국]], [[사만 토후국]], [[부이드 토후국]]과 같이 반쯤은 독립적인 이란계 왕조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틈을 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거의 독립국과 비슷한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이시기 페르시아에서는 찬란한 문학, 철학, 수학, 약학, 천문학, 예술 등 수많은 학문들의 꽃이 피어났으며, ‘이슬람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이슬람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황금기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10세기와 11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시기 페르시아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이자 개척지이기도 했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진흥이 일어나자, 페르시아 내부에서 다시금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아랍 정복자들에 대한 반감이 떠오르면서 점차 이들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는데, 이로 인하여 페르시아 민족주의 계열 시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고 발표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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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세기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수많은 튀르크계 민족들이 이란 고원 지방으로 이주해왔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이들을 노예전사 계급이었던 [[맘루크]]들로 활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자 점차 군사력을 독점하게 된 맘루크들의 힘이 강력해졌고, 999년 경에는 맘루크계 국왕이 다스리는 [[가즈나 제국]]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화레즘 제국]]과 같이 튀르계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셀주크인들로 인하여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술탄국]]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또한 페르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장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튀르크-페르시아 문화가 발흥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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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9년부터 1221년까지, [[화레즘 제국]]의 시기에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가 멸망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대략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달하는, 전 국민의 4분의 3이 사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으며, 이로 인하여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란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인구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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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56년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훌라구 칸]]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일 칸국]]을 건국하였다. 1370년에는 또다른 정복자였던 [[티무르]]가 훌라구 칸의 전례를 따라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을 세워 약 156년 간을 지속하였다. 1370년에는 티무르가 이스파한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이때 약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학살하였다. 일 칸국과 티무르 제국 모두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거의 페르시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완전히 흡수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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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 ||
+ | '''사파비 왕조''' | ||
+ | 1500년 초에는 [[아라다빌]]의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웠으며, 수도는 [[타브리즈]]에 두었다. 이스마일 1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광대한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며 이란 일대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페르시아 사회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는 이를 뒤집고 시아파를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교파를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는 전국민적으로 시아파 신도들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 영향으로 이란은 현대까지도 주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시아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편 사파비 왕조는 서쪽에 접경하고 있는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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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후반부터 16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때 국력은 오스만 제국을 넘어섰으며 [[유라시아]] 서부 지역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과학, 예술 등을 선도하는 국가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코카서스 인종]]이 점차 대규모로 이란 사회에 본격적으로 동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향후 이란의 역사에 지대한 힘을 끼치고는 했다. 어찌 되었든 사파비 왕조는 1600년대 초반에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고, 1600년대 중반을 걸쳐 후반에 이르자 국력의 하락세가 눈에 띄게 심각해졌으며 1700년대 초에는 이전의 영광을 거의 되찾지 못하였다. 이 시기 사파비 왕조 내에서는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가 내우외환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사파비 왕조는 1722년에 [[파슈툰]] 반란군들이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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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샤르 왕조''' | ||
+ | 1729년에는 코라산의 장군이었던 [[나디르 샤]]가 파슈툰 반란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란이 혼란스러운 동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빼앗아갔던 코카서스 지방들을 일부 수복하는 데에도 성공하면서 이란을 재통일하고 [[카자르 왕조]]를 개창하였다. 나디르 샤의 재위기에 이란은 사산 제국 이래 최대 영토를 정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 전역에 이란의 헤게모니를 이룩하였으며, 서부와 중부 아시아를 통틀어 당대 최강의 제국들 중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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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디르 샤는 1730년대 후반에는 [[인도]]를 침공하였으며, [[델리]]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의 이러한 군사적 업적도 반란을 일으킨 레지그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코카서스 북부 원정 이후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였고, 결국 나다르 샤가 암살당하면서 이란 전역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한 내전이 펼쳐지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750년에 [[카림 칸]]이 내전을 진압하고 이란을 다시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후 카림 칸은 [[잔드 왕조]]를 세우면서 다시 이란에 평화를 되찾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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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드 왕조''' | ||
+ | 카자르 왕조 이후 들어선 잔드 왕조의 영토는 이전 이란 제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코카서스 지방의 대부분은 거의 사실상의 자치권을 얻어내어 이란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었으며, 이란 샤의 명령을 듣지 않으며 스스로 칸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다만 모든 봉신들과 토지는 명목상으로는 잔드 왕조에게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였다. 1779년에 카림 칸이 사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졌고, 1794년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등장하여 [[카자르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이 일단락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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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자르 왕조''' | ||
+ | 1795년에 [[조지아인]]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카자르 왕조는 대군을 파병하여 [[티빌리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세력을 코카서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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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1800년대 초중반에 발발한 2차례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이란은 코카서스 지방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때 이란은 몇 백년 동안 이란 고유의 영토라고 여겨졌던 트란스코카서스와 다제스탄 지방을 잃어버렸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여러 이권들마저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이란은 현재의 다제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으며, 이후 코카서스 지방에 일부 남아있던 영토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 코카서스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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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이 점차 무너지고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으로 밀려들어옴에 따라, 코카서스 북부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은 어쩔 수 없이 이란 지방으로 도피해왔다. 1870년대 초에는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인구의 20%에서 25% 가량에 이르는 1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했다. 1872년과 1905년 사이에, 카자르 왕조의 국왕들은 점차 서구 열강의 협박에 못이겨 그들에게 이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05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으로 국회도 열렸다. 당시 헌법에는 이란 내에서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만을 허가된 소수종교로 규정하였으며, 이같은 내용은 심지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한편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들 간의 반발은 갈수록 극심해졌으며, 이로 인하여 결국 1909년에는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며 당시 국왕이었던 [[모함마드 알리 샤]]가 강제로 퇴위하게 된다. 직후 러시아는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으며, 수 년동안 강제로 점령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외세와 무능한 카자르 왕조에 대한 공분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대대적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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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모두 이란 서부를 강제적으로 점령하면서 전투를 벌였으며, 1921년이 돼서야 겨우 군대를 물렸다.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사망하였으며,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이란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경에는 전쟁으로 인한 대기근이 들면서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오스만 제국 군대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보호하려 한 무슬림들마저 학살하면서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고, 특히 코이, 마쿠, 살마스, 우르미아 지방에서 대대적인 살인극이 자행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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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자르 왕조 시기의 이란은 거의 내내 정세가 불안정하였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극도로 약했으며 이 상태가 거의 몇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이러한 빈약한 행정력으로 인하여 이란은 세계 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레자 샤]]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결국 카자르 왕조도 멸망하고야 만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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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라비 왕조''' | ||
+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소련]]은 7월과 8월 사이에 즉시 [[연합국]] 세력과 동맹을 맺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연합국 세력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이란 정부에게 이란 내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레자 샤는 이를 주권 간섭으로 보고 독일인 추방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941년 8월 25일에 영국과 소련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두 강대국에 맞서 싸울 국력이 부족했던 레자 샤는 즉시 항복하였으며, 연합국은 이란의 항복으로 인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공급선을 유지하고 페르시아 만의 유전을 확보하며 독일군이 [[터키]]를 통하여 소련 국경 내로 진군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레자 샤는 침공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9월 16일에 퇴위하였고, 당시 21세의 젊은 왕세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승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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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2차 세계대전기 내내 이란은 [[영국]]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국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며 연합국에게 막대한 양의 자금과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12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난민들을 수용함과 동시에 폴란드 해방군들의 본거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스탈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의 3개국 정상들이 모여 [[테헤란 회담]]을 열기도 하였으며, 이 회담에서 전후 이란의 독립을 확고히하고 이란 국경을 확정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즈음에도 소련 군대는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였고, 이란 북서부 지역에 2개의 위성국을 세웠으니 이 것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인민공화국]]과 [[마하바드 공화국]]이다. 이로 인하여 이란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으며, 소련에게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에야 소련군이 모두 이란 영토에서 퇴각하였다. 참고로 두 위성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으며, 유전 할양은 후에 취소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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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 ||
+ | 1951년에는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이란의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이란의 석유 기업들과 유전들을 국유화한 이후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중세를 탔다. 그러나 모사데그 총리는 영국과 미국이 뒤에서 공모한 1953년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참고로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시기 동안 해외 정부를 전복하는 데에 참여한 첫 사건이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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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마저도 빼앗길 것을 우려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점차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변해갔으며, 일부러 미국과 영국 등과 밀착하면서 서구권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권력을 유지하려 들었다. 팔라비 국왕은 이란의 서구화와 현대화를 내세웠으며, 이란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백색혁명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SAVAK이라는 이름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임의체포, 고문 등을 자행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등 막강한 독재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급진적인 이슬람 율법학자였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에 반대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면서 국왕의 정치적인 반대파로 급부상하였고, 이후 정부를 아예 부정하기까지 하면서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64년에 출소한 이후에도 호메이니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결국 이란에서 추방되고야 만다. | ||
+ | |||
+ | 1973년에 석유가가 정점을 찍자, 이란 경제에는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 1974년에는 이란 경제는 두 자리수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현대화 정책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부정부패가 벌어지면서 정부는 갈수록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1975년과 1976년의 경제 침체로 인하여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특히 1970년대 초에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한 젊은 층들이 경제 침체에 따라 일자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전전하게 되며 사회는 갈수록 불온해져만 갔다. 팔라비 왕조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들은 모두 국왕의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고, 점차 항의 시위를 개최하면서 왕정을 폐지할 뜻까지 드러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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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혁명 이후=== | ||
+ | 1979년에는 팔라비 왕조의 반대세력들이 모여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1979년 2월에는 레자 팔라비 국왕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루홀라 호메이니가 망명 생활에서 벗어나 테헤란으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이란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마저 무너지게 된다. 이후 1979년 4월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이란은 일반국가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였으며, 1979년 12월에는 또 국민투표를 거쳐 신정헌법 제정에도 박차를 가했다. | ||
+ | |||
+ | 이후 이란의 급격한 이슬람화에 반발하여 전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쿠르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쿠제스탄 등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생 이슬람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몇 십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통하여 반대파들을 억누르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정권은 이슬람권이 아닌 세력들을 모두 탄압하였으며, 심지어 무슬림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급진파가 아니면 배척하였다. 초기에는 레자 팔라비 국왕을 쫒아내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이란 신생 정부 구성에 참여하였는데, 나중에는 호메이니의 명에 의하여 반국가주의자라고 누명이 씌워진 후에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패인사라고 몰려 해외로 쫒겨났다. | ||
+ | |||
+ | 미국이 레자 팔라비 국왕이 송환된 직후 처형당할 것이 뻔했기에 국왕의 이란 송환을 거부한 직후인 1979년 11월 4일에 무슬림 학생들 일부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였으며, 52명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에 협박문을 보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즉시 이란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는 동시에 구출 작전을 폈으나 작전은 실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지지도가 폭락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서 실패하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새롭게 취임한다. 이후 호메이니가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인질 협상에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카터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에 모든 인질들이 국내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이 사태도 끝난다. 한편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팔라비 국왕은 이후 미국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 27일에 암으로 이집트에서 그대로 사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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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9월 22일에는 [[이라크]] 군대가 이란 서부 지역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점하였으나, 1982년 중반에 이르자 전세가 역전되어 이란군에 의하여 이라크군이 다시 이라크로 쫒겨 들어가게 된다. 1982년 7월에는 이라크가 수세로 들어갔고, 이란군이 오히려 공세 작전을 펴면서 바스라 등과 같은 이라크의 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이라크가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이라크의 패배로 끝날 때인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란의 전쟁 사상자는 약 23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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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된 후인 1989년에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총리가 취임하였으며, 친자본주의 정책을 피고 경제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정책들을 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슬람 정책에 위배되거나 급진 이슬람 정책을 완화하는 방향으로는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997년에 라프산자니 총리는 중도 개혁주의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하타미 총리는 이란을 조금 더 자유주의적, 민주적으로 만드려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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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주의적인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무부가 현직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전체 표수의 62.63%를 득표했다고 발표하였고, 2위인 모사비 후보가 33.75%를 득표했다고 밝혔으나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도 존재했다. 이로 인하여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와 관련된 정치적 움직임을 '녹색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3년 6월 15일에는 [[하산 로하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로하니 대통령의 재임기에 이란은 타 국가들과 관계를 점차 개선해나가기 시작하였다. 2017년과 2018년에 이란에서는 종교 최고지도자에게 이란이 처한 어려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정부의 통제 탓에 시위의 전반적 규모는 추정키 어렵지만 몇 천명에 달하는 시위자들이 체포되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2019년과 2020년에도 정부가 연료 가격을 300%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후에 시위가 일어났으며, 몇 시간 만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후 정부는 시위자들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1주일 가량 동안 이란 전역의 인터넷을 끊어버렸고, 이로 인하여 이슬람 공화국 창립 이래 최악의 시위 탄압이 이루어졌다. 몇 만명이 체포되었고,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군대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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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1월 3일에는 혁명수비대의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하여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3일 후,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실수로 우크라이나 항공 752편을 군 관련 비행기로 오인하여 176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악수를 두면서 전세계적인 비판을 들었다. 국제적인 조사 끝에 이란 정부 역시 3일 간 사실을 부인하다가 결국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인적 사고’라고 부르며 책임을 회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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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리 == | ||
+ | 북서쪽으로는 약 35km에 달하는 국경을 [[아르메니아]]와 접하고 있으며, 그 옆에 북쪽으로 [[아제르바이잔과]]는 611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북동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자리하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파키스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터키]]와도 동시에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어 상당히 많은 국가들과 서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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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국토의 대부분은 [[이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쿠제스탄 일대와 [[카스피 해]]를 접하고 있는 일부 해안 지대만이 예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가장 산악 지방이 많은 국가이며, 기본적으로 험준한 산맥들이 상대적으로 평평한 분지들을 갈라놓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가장 산들이 많은 지방인 서부 지방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코카서스 산맥]],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등 수많은 산맥들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란의 최고봉은 [[다마반드 산]]으로, 그 높이가 무려 5,610m에 달하여 아시아에서 [[힌두쿠시 산맥]] 서쪽에 있는 산들 중 가장 해발고도가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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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북부 지방은 카스피 해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혼합림이 채우고 있다. 한편 동부 지방은 대체적으로 [[카미르 사막]]과 같이 거대한 사막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끔씩 소금 호수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대 평원들은 카스피 해 근처와 페르시아 만 쪽 해안의 북쪽 근방 지역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다. 나머지 소규모의 평원들은 대부분이 산맥들에 의하여 갈라지고 쪼개진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란에서는 대평원이라고 할 만한 지형은 찾아보기 어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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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이란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속하는데, 평균적으로 리히터 7에 달하는 강진이 매 10년 마다 한 번 꼴로 일어날 정도라고 한다. 이란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지진들은 천발 지진이며, 이 때문에 피해가 더더욱 막심하여 2003년 이란 대지진이라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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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거대한 사막 국가와 달리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 이란의 국토는 남부(자그로스 산맥)와 북부(알보르즈 산맥)에 있는 두 개의 산맥과 함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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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부에선 이란의 최고봉 다마반드 산(5771m)이 있는 알보르즈 산맥(엘부르즈 산맥이라고도 한다.)이 아르메니아 고원에서부터 카스피해 남안을 거쳐 힌두쿠시 산맥으로 이어지며, 남부에선 자그로스 산맥이 [[리자이야 호]] 부근에서부터 페르시아만에 연해서 달리고 있다. 두 산맥을 별도로 할 때, 국토는 알보르즈 산맥과 카스피 해 사이에 낀 협장(狹長)한 평야지대, 알보르즈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에 둘러싸인 이란 고원 본토, 자그로스 산맥 남쪽의 페르시아 만 연안지방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이 중 면적이 가장 큰 지형구가 표고 500 ~ 1,500m의 이란 고원 본토인데, 이 고원 북부에 카비르 사막과 나마크 호수, 동남부에 루트 사막과 소택지 등이 산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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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13개의 기후대들 중, 사막 기후부터 시작해서 아열대 기후까지 약 11개의 기후대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기후가 다양한 국가에 속한다. 카스피 해를 접하고 있는 이란의 북부 지방은 겨울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며, 1년의 나머지 달들에는 카스피 해의 영향으로 대체적으로 습한 기후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는 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자그로스 분지가 있는데, 자그로스 분지 지방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편이며, 혹독한 겨울 날씨가 특징이며 굉장히 강설량이 많다. 또한 동부와 중앙 분지는 사막 기후를 띠고 있으며, 1년에 200mm 밖에 강수량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메마른 지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곳의 평균 여름 기온은 38도이다. 한편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을 접하고 있는 이란 남부 지대는 북부 지방에 비하여 훨씬 기온이 온난하여, 겨울도 그다지 춥지 않으며 여름은 굉장히 덥고 찌는 듯이 습한 편에 속한다. 남부 지방의 평균적인 강우량은 1년에 135mm에서 355mm 정도에 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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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은 현재 사막화 등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가장 심각한 국가들 편에 속하나, 아직까지 파리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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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치 == | ||
+ | 이란에서는 ‘혁명의 지도자’, 혹은 그저 ‘최고지도자’라고 불리는 이슬람 성직자인 [[라흐바르]]가 정치계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며, 이로 인하여 오히려 국민이 선출한 이란의 대통령은 라흐바르에 비하면 훨씬 제한된 권력을 자리고 있다. 현재의 라흐바르인 [[알리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타계 이후 현재까지 이란을 통치해오고 있으며, 환경, 경제,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이뿐만 아니라 선거에도 합법적으로 개입할 권한마저 틀어쥐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인 장관 임명 또한 알리 하메네이의 재가가 있어야 가능하며, 또한 선거에서 선출된 대통령 당선자가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에 역시 하메네이의 허락이 필요하다. 또한 특히 중요한 장관직인 외교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 정보부 장관의 경우에는 거의 하메네이가 직접 후보를 추천하고 대통령은 이들 중에 고르기만 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하메네이의 영향력 하에 있다. 또한 외교 분야 역시 하메네이의 입김이 매우 강력하여, 모든 아랍과 서구 국가들에 파견되는 외교관들 역시 하메네이의 임명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의회에서 매년 심의하여 통과시키는 예산안 역시 하메네이의 허락이 필요하며, 법이나 규제 역시 하메네이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2013년 로이터 통신이 약 95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한 ‘세타드’, 즉 라흐바르의 직속 재산 역시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메네이의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고 한다. | ||
+ | |||
+ | 이란 라흐바르는 이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사 작전과 정보 작전 모두를 총괄하며 전쟁 선포나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 권한도 오직 라흐바르에게만 있다. 또한 국영 방송사와 텔레비전 기업, 사법부 수뇌부, 경찰과 군대 수뇌부 역시 라흐바르가 직접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되며, 이란의 최고 권력기구들 중 하나인 수호자평의회를 구성하는 12명의 위원들 중에서 6명을 라흐바르가 개인적으로 임명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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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라흐바르는 이슬람 최고위 성직자들로만 구성된 ‘전문가 평의회(Assembly of experts)'에서 선출되며, 만일 라흐바르가 지나친 권력 남용을 일삼거나 국민의 신망을 잃었을 경우 라흐바르를 해임할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다만 라흐바르를 견제하기 위한 초기의 목적과는 다르게, 현재까지 전문가 평의회에서 라흐바르의 결정에 한 번이라도 반발한 적은 없으며, 한 번도 라흐바르를 해임하려 시도해본 적조차 없다. 게다가 하메네이가 오랫동안 장기집권을 이어오게 되면서, 사실상 전문가 평의회가 권력이 없는 채로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 역시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오히려 역으로 하메네이가 이 전문가 평의회의 이슬람 성직자들을 비판한 적도 많으며, 심지어 평의회의 위원들을 체포하거나 해임한 적도 여러 차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하메네이는 전문가 평의회의 아흐메드 아자리 쿠오미를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체포하여 회의에서 쫒아낸 적도 있을 정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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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호자 평의회=== | ||
+ | 대통령 후보나 국회의원 후보들은 선거 전에 미리 ‘수호자 평의회(Guardian Council)'의 허락을 받고, 하메네이를 정치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완벽히 인정받고 나서 출마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수호자 평의회가 미리 하메네이에게 반대하는 후보들 대부분을 미리 쳐내기 때문에, 하메네이가 직접 나서서 정적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메네이는 수호자 평의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수호자 평의회는 국회의원들을 제명하거나 쫒아내는 것도 가능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한 적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녀가 히잡을 두르지 않은 채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미누 칼레기 의원이 있다. | ||
+ | |||
+ | ===대통령=== | ||
+ | 이란의 헌법에 의하면 이란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이슬람 법학자이자 성직자인 라흐바르이며, 이 뒤를 이어 이란의 대통령이 그 다음으로 서열이 높다. 대통령은 약 4년 마다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내각을 구성하는 등의 권한이 있으나 다만 의회에서 취임하기 전에 라흐바르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며, 게다가 대부분의 중대결정을 라흐바르의 재가를 받고 시행해야 하기에 일반적인 대통령제 국가들의 대통령들에 비하면 그 권한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또한 라흐바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을 즉시 해임할 수 있는 권한마저 가지고 있다. 이란 대통령은 단 한 번만 재선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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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책무는 최고지도자, 즉 라흐바르의 명을 충실히 본받아 사회 곳곳에 이슬람 기풍을 불어넣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이란 대통령은 타 국가들의 대통령들에 비하여 한없이 약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라흐바르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은 할 수 없기에, 딱히 자신의 뜻대로 정책을 펼쳐나가지만은 못한다. 이란 이슬람 헌법의 9장에는 대통령의 권한과 그 자격에 대하여 명시되어 있는데, 대통령은 라흐바르의 허가를 받았다는 전제 하에 국가 정책 심의, 예산안, 실업, 국제 협약 등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은 의회와 라흐바르의 허락을 받아 장관을 임명하여 내각을 꾸릴 수 있으나, 라흐바르는 만일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 대통령이나 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대통령과 장관 모두를 해임시켜버릴 수도 있다. 대통령 아래에는 8명의 부통령들이 있으며, 내각은 총 22명의 장관들로 구성되고 이들 모두 임명을 위해서는 의회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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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민 == | ||
+ | [[페르시아인]](마잔다란인, 길라키인 포함)이 61%, 아제리인([[아제르바이잔인]])이 16%, [[쿠르드인]]이 10%, [[루르족]]이 6%, [[발루치족]]이 2%, [[아랍족]]이 2%, [[투르크멘족]]이 2%를 차지하며, 그 밖에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시리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란에 사는 약 500명의 [[대한민국]] 교민들은 주로 [[테헤란]] 지역에 거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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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내에 거주하고 있는 민족들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그 종류와 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일단 이란인들 대부분이 페르시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의견이 동일하다.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이란 인구의 79% 정도가 인도유럽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마잔다란인들과 길라키인들을 포함한 페르시아인들이 전체 인구의 61%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 뒤를 쿠르드족이 10%, 루르족이 6%, 발루치인들이 2% 정도로 잇고 있다. 또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이 아닌 사람들도 21% 정도로 꽤나 많은 편에 속하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16%, 아랍인들이 2%, 투르크계 민족들이 2% 정도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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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귀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온순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인 "인샬라"(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정신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매사에 느긋하며 의사결정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 이를 거의 제대로 참기 힘든 면이 있다. 또한 과거 페르시아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술에 정통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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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인의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페르시아어가 이란의 국어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이란계 언어들도 사용되고 있다. 이란에서 페르시아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아제르바이잔어이며, 그 외에도 여러 튀르크계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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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제 == | ||
+ | 이란의 경제는 중앙계획의 국유 석유회사와 국유 기업, 농촌지역의 농업 및 소규모의 상업, 벤처에 의한 서비스업 등의 민영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는 혼합경제며, 전체 경제 비중에서 약 3분의 2가 국영 기업의 몫이다. 석유개발 이전에는 농업이 주요산업이었으며, 공업은 페르시아융단을 생산하는 전통적 수공업이 있을 뿐이었으나, 정부는 이전부터 줄곧 시장화 개혁을 행하여, 석유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여, 수익을 자동차 공업, 우주항공 산업, 가전 제조업, 석유화학 공업, 핵 산업 등 타 부문에 분산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공업력 수준이 낮아 품질이 좋지 못하다. 차바하르 자유무역지역, 키슈 섬 자유무역지역의 설정 등을 통하여 투자환경의 정비에 노력하여 수억 달러 단위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 이란의 중산계층은 두텁고 견실하여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고인플레, 고실업률이 문제이다. 재정적자는 만성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식품, 가솔린 등을 중심으로 년 총계 약 7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이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란은 OPEC 제2위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확인되고 있는 세계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1996년에 매우 견실했던 원유 가격은 이란의 재정적자를 보충하고, 채무원리금 미지급금의 상환에 충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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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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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참고자료 ==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9E%80 이란]〉, 《위키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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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이 보기 == | ||
+ | * [[테헤란]] | ||
+ | * [[이라크]] | ||
+ | * [[페르시아]] | ||
+ | * [[서아시아]] | ||
+ | * [[페르시아만]] | ||
+ | * [[호르무즈해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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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아시아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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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검토 필요}} | ||
+ | [[분류:서아시아]] |
2023년 11월 19일 (일) 02: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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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페르시아어: ایران)은 서아시아의 이슬람 공화국이다. 정식 국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페르시아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이다. 북서쪽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과 접경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가 있으며 북동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남동쪽에는 파키스탄이 자리하며, 남부 해안선을 따라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TURKEY)와 이라크와 접경하고 있다. 서아시아에서는 2번째로 거대한 국가이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테헤란이다.
이란은 대통령제 민주주의를 가미한 신정 국가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종교적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에게 집중되어 있다. 현재 이란의 아야톨라는 1989년 이래 호메이니의 뒤를 이어 오른 하메네이이다.
이란은 현재 지역강국이자 중견국이며, 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란은 UN, ECO, OIC, OPEC의 창립회원국이자, 막대한 양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큰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란에는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천연가스 양이 매장되어 있으며, 원유 매장량은 무려 세계 4위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유구한 역사 덕에 현재 22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으로도 굉장히 다원화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민족들에는 페르시아인,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목차
개요
- 수도: 테헤란
- 면적: 1,648,195km²
- 인구: 86,758,304명(2022년)
- 공용어: 페르시아어
- 정치체제: 공화제, 대통령제, 단일국가, 신권 정치, 이슬람 국가
-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
국명
‘이란’이라는 단어는 중세 페르시아어 ‘Ērān’에서 유래하였으며, 3세기에 만들어진 낙쉐 로스탐의 석비에 처음으로 사용 용례가 발견된 바 있다. ‘이란’이라는 단어는 이란 민족을 일컫는 단어이자 초기 인도유럽어족의 명칭인 ‘아리아’에서 변형이 일어난 것으로, 중세 파르티아어로 ‘아리아(Ariya)’라고 부르는 것이 중세에 들어와 ‘이란’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이것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면, ‘이란’이라는 국호는 ‘아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최소한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부터 이 단어가 이란 지역을 부르는 데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서방 세계는 현재 이란 지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지역을 ‘페르세스’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고대 이란계 부족들이 살던 땅의 이름이 ‘파르사(Parsa)'였던 까닭으로 그리스인들이 이란 쪽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을 통틀어 ’페르세스‘, 혹은 ’페르시아‘라고 쓴 것이 후대에 남겨져 서구 세계에 완전히 정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서방 세계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이란 지방을 ‘페르시아’라고 칭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935년에 레자 샤는 국제사회에게 자국을 ‘페르시아’라고 칭하지 말고 현지에서 더 많이 쓰이는 이름인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요청하였고, 이후 점차 국제적으로도 ‘페르시아’라는 단어보다 ‘이란’을 훨씬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란이 완전히 국호로 굳어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 ‘이란’은 국가의 이름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며, ‘페르시아’는 국가를 칭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이란 내부의 문화, 지방, 혹은 역사적인 서술을 할 때 더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역사
선사
이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카샤푸르드나 간즈 파르 등 이란 북부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며, 이에 비추어 추정해볼 때 최소 구석기 초창기부터 인류가 이란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란에서는 최소 구석기 중기부터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들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후 기원전 1만 년과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사 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4395년에서 기원전 3490년 경 사이에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4000년 경부터는 본격적인 고대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거대한 도시들이 들어섰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자 이란 지방에는 엘람, 자얀데루드, 지로프트 등 다양한 고대 문명들이 들어섰으며, 이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엘람 문명은 주로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번영을 누렸으며 이란계 제국들이 들어서기 전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엘람에서는 인근의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000년 경에 쓰기와 쐐기문자 등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하여 활발한 사회 발전과 경제적 진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 경 초반에는 아시리아인들이 이란 서부 지방에 정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대
기원전 2000년경에는 마침내 고대 이란인들이 유라시아 스텝을 거쳐서 현재의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협력을 하기도 하며 점차 이란 지방의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나중에는 이 고대 이란인들이 갈래가 나뉘어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이 발흥하게 된다. 기원전 1000년에서 700년에 이란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이후 메디아 왕국의 3대 국왕이었던 키악사레스를 중심으로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바빌로니아 왕국과 힘을 합쳐 연합을 맺었고, 인근의 스키타이인 등과도 힘을 합쳐 아시리아 제국을 침공하였다. 이후 혼란스러운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내전마저 터지며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해졌고, 이때 수많은 민족들이 약 300여 년만에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왕국들을 세워나갔다. 기원전 728년 경에는 메디아인들이 데이오세스 왕 하에 통합되었으며, 메디아 제국을 세워 기원전 612년 경에는 현재 이란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까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기원전 550년에는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던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고, 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인근의 도시 국가들마저 무릎꿇리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후 키루스는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동쪽으로는 발칸과 동유럽으로, 서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나가면서 거대한 대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539년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를 꺾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약 400여 년간 지속된 메소포타미아의 주도권을 빼앗아왔고, 이후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대제가 스스로를 메소포타미아의 지도자로 천명하고 문화의 계승, 융합을 선언하면서 이후 이란, 즉 페르시아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최대 판도는 현대 이란 전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 해안가 대부분, 그리스 북동부, 불가리아 남부, 북마케도니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을 모두 차지하면서 고대 세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였으며, 심지어 고대 이집트까지 장악하고 그 손길을 리비아와 쿠웨이트,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까지 뻗치면서 가히 중동 세계의 최고 맹주로 군림하면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480년 경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00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전세계 인구의 44%를 자신의 신민으로 거느리는 압도적인 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그 이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바빌론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을 풀어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왕의 길'과 같은 거대 도로나 선진적인 우편제도를 운용하였고 공식 언어를 제정하여 전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 하기도 했다.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앙집권적, 관료적인 통치 체제를 황제를 정점으로 매우 효율적인 형태로 운용하였으며, 거대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제도는 후대의 제국들보다도 발전된 면을 보일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부 국경에서 그리스인들과 점차 분쟁을 겪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기원전 500년 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케메네스 제국은 결국 발칸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서쪽으로 후퇴하고야 말았다.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침공하였고,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다리우스 2세가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국도 마침내 멸망하고야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란 지방도 그리스계 정복자들이 세운 헬레니즘 국가 계열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경에는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이란 계열의 파르티아 제국이 힘을 기르며 그 국력을 신장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방의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마찰을 겪으며 몇 백년에 달하는 갈등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파르티아 제국은 봉건적 군주제를 통하여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224년 경에는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서방 세계와 신경전을 벌였으며, 이 두 국가는 약 40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두 국가들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다.
사산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토를 대부분 수복할 정도로 그 힘이 강성하였는데, 크테시폰을 수도로 하였으며 인근의 로마 제국과 서유럽, 아프리카와 저 멀리 있는 중국과 인도까지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 시기가 이란 문화와 국력의 최절정기로 여겨지며, 실제로 이때 가장 예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은 거의 존속 기간 내내 로마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하여 약 거의 700여 년 동안 아나톨리아, 캅카서스,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벌어야만 했다. 이는 사산 제국의 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었고, 이로 인하여 후대에 아랍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등장하였을 때에 이에 대한 방비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중세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끝없이 길어지고, 특히 602년과 628년에 대대적으로 충돌하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모두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는 7세기경 새롭게 쳐들어온 아랍인 무슬림들의 침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점차 라쉬둔 칼리파조에, 라쉬둔 칼리파조 이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조, 결국에는 아바스 칼리파조에 복속당하기 시작한다. 이후 점진적인 이슬람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 조로아스터교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사회가 점차 이슬람 중심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신전과 도서관들이 불에 탔으며, 이슬람교인들을 제외한 타종교인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750년에는 아바스 칼리파조가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몰아내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아랍의 이슬람 문화에 상당수 동화가 진행된 상태였고,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떠오른다. 점차 여러 인종들과 민족들이 섞이면서, 페르시아 지역은 코스모폴리탄으로 떠올랐고 아랍인들의 지배적 특권이나 우월성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점차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아랍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요직들과 부를 빼앗아갔고, 아랍 귀족들은 점차 이방인들과 피가 섞여나가면서 아랍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미해졌다. 전통적인 아랍 귀족 세력들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관료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오히려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약 200여 년 동안 페르시아 지방을 지배하였는데, 이때 타히르 토후국, 사파르 토후국, 사만 토후국, 부이드 토후국과 같이 반쯤은 독립적인 이란계 왕조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조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틈을 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거의 독립국과 비슷한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이시기 페르시아에서는 찬란한 문학, 철학, 수학, 약학, 천문학, 예술 등 수많은 학문들의 꽃이 피어났으며, ‘이슬람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이슬람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황금기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10세기와 11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시기 페르시아는 세계 과학의 중심지이자 개척지이기도 했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진흥이 일어나자, 페르시아 내부에서 다시금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아랍 정복자들에 대한 반감이 떠오르면서 점차 이들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는데, 이로 인하여 페르시아 민족주의 계열 시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고 발표하기도 했다.
10세기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수많은 튀르크계 민족들이 이란 고원 지방으로 이주해왔다. 아바스 칼리파조는 이들을 노예전사 계급이었던 맘루크들로 활용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자 점차 군사력을 독점하게 된 맘루크들의 힘이 강력해졌고, 999년 경에는 맘루크계 국왕이 다스리는 가즈나 제국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화레즘 제국과 같이 튀르계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셀주크인들로 인하여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술탄국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또한 페르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장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튀르크-페르시아 문화가 발흥하게 된다.
1219년부터 1221년까지, 화레즘 제국의 시기에 페르시아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가 멸망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대략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달하는, 전 국민의 4분의 3이 사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으며, 이로 인하여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란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인구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1256년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훌라구 칸이 페르시아 지방에서 일 칸국을 건국하였다. 1370년에는 또다른 정복자였던 티무르가 훌라구 칸의 전례를 따라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을 세워 약 156년 간을 지속하였다. 1370년에는 티무르가 이스파한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이때 약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학살하였다. 일 칸국과 티무르 제국 모두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거의 페르시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완전히 흡수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근대
사파비 왕조 1500년 초에는 아라다빌의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웠으며, 수도는 타브리즈에 두었다. 이스마일 1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광대한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며 이란 일대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페르시아 사회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는 이를 뒤집고 시아파를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교파를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는 전국민적으로 시아파 신도들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 영향으로 이란은 현대까지도 주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시아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편 사파비 왕조는 서쪽에 접경하고 있는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후반부터 16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때 국력은 오스만 제국을 넘어섰으며 유라시아 서부 지역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과학, 예술 등을 선도하는 국가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코카서스 인종이 점차 대규모로 이란 사회에 본격적으로 동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향후 이란의 역사에 지대한 힘을 끼치고는 했다. 어찌 되었든 사파비 왕조는 1600년대 초반에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고, 1600년대 중반을 걸쳐 후반에 이르자 국력의 하락세가 눈에 띄게 심각해졌으며 1700년대 초에는 이전의 영광을 거의 되찾지 못하였다. 이 시기 사파비 왕조 내에서는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가 내우외환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사파비 왕조는 1722년에 파슈툰 반란군들이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아프샤르 왕조 1729년에는 코라산의 장군이었던 나디르 샤가 파슈툰 반란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란이 혼란스러운 동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빼앗아갔던 코카서스 지방들을 일부 수복하는 데에도 성공하면서 이란을 재통일하고 카자르 왕조를 개창하였다. 나디르 샤의 재위기에 이란은 사산 제국 이래 최대 영토를 정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 전역에 이란의 헤게모니를 이룩하였으며, 서부와 중부 아시아를 통틀어 당대 최강의 제국들 중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나디르 샤는 1730년대 후반에는 인도를 침공하였으며, 델리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의 이러한 군사적 업적도 반란을 일으킨 레지그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코카서스 북부 원정 이후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였고, 결국 나다르 샤가 암살당하면서 이란 전역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한 내전이 펼쳐지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750년에 카림 칸이 내전을 진압하고 이란을 다시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후 카림 칸은 잔드 왕조를 세우면서 다시 이란에 평화를 되찾아왔다.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 이후 들어선 잔드 왕조의 영토는 이전 이란 제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코카서스 지방의 대부분은 거의 사실상의 자치권을 얻어내어 이란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었으며, 이란 샤의 명령을 듣지 않으며 스스로 칸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다만 모든 봉신들과 토지는 명목상으로는 잔드 왕조에게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였다. 1779년에 카림 칸이 사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터졌고, 1794년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등장하여 카자르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이 일단락된다.
카자르 왕조 1795년에 조지아인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카자르 왕조는 대군을 파병하여 티빌리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세력을 코카서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1800년대 초중반에 발발한 2차례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이란은 코카서스 지방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때 이란은 몇 백년 동안 이란 고유의 영토라고 여겨졌던 트란스코카서스와 다제스탄 지방을 잃어버렸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여러 이권들마저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이란은 현재의 다제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으며, 이후 코카서스 지방에 일부 남아있던 영토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 코카서스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란이 점차 무너지고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으로 밀려들어옴에 따라, 코카서스 북부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은 어쩔 수 없이 이란 지방으로 도피해왔다. 1870년대 초에는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인구의 20%에서 25% 가량에 이르는 1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했다. 1872년과 1905년 사이에, 카자르 왕조의 국왕들은 점차 서구 열강의 협박에 못이겨 그들에게 이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05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으로 국회도 열렸다. 당시 헌법에는 이란 내에서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만을 허가된 소수종교로 규정하였으며, 이같은 내용은 심지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한편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들 간의 반발은 갈수록 극심해졌으며, 이로 인하여 결국 1909년에는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며 당시 국왕이었던 모함마드 알리 샤가 강제로 퇴위하게 된다. 직후 러시아는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으며, 수 년동안 강제로 점령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외세와 무능한 카자르 왕조에 대한 공분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대대적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이란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모두 이란 서부를 강제적으로 점령하면서 전투를 벌였으며, 1921년이 돼서야 겨우 군대를 물렸다.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사망하였으며,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이란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경에는 전쟁으로 인한 대기근이 들면서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오스만 제국 군대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보호하려 한 무슬림들마저 학살하면서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고, 특히 코이, 마쿠, 살마스, 우르미아 지방에서 대대적인 살인극이 자행되었다.
카자르 왕조 시기의 이란은 거의 내내 정세가 불안정하였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극도로 약했으며 이 상태가 거의 몇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이러한 빈약한 행정력으로 인하여 이란은 세계 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레자 샤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결국 카자르 왕조도 멸망하고야 만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팔라비 왕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소련은 7월과 8월 사이에 즉시 연합국 세력과 동맹을 맺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연합국 세력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이란 정부에게 이란 내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레자 샤는 이를 주권 간섭으로 보고 독일인 추방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941년 8월 25일에 영국과 소련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두 강대국에 맞서 싸울 국력이 부족했던 레자 샤는 즉시 항복하였으며, 연합국은 이란의 항복으로 인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공급선을 유지하고 페르시아 만의 유전을 확보하며 독일군이 터키를 통하여 소련 국경 내로 진군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레자 샤는 침공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9월 16일에 퇴위하였고, 당시 21세의 젊은 왕세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승계하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기 내내 이란은 영국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국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며 연합국에게 막대한 양의 자금과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12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난민들을 수용함과 동시에 폴란드 해방군들의 본거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스탈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의 3개국 정상들이 모여 테헤란 회담을 열기도 하였으며, 이 회담에서 전후 이란의 독립을 확고히하고 이란 국경을 확정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즈음에도 소련 군대는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였고, 이란 북서부 지역에 2개의 위성국을 세웠으니 이 것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인민공화국과 마하바드 공화국이다. 이로 인하여 이란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으며, 소련에게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에야 소련군이 모두 이란 영토에서 퇴각하였다. 참고로 두 위성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으며, 유전 할양은 후에 취소되었다.
현대
1951년에는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이란의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이란의 석유 기업들과 유전들을 국유화한 이후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중세를 탔다. 그러나 모사데그 총리는 영국과 미국이 뒤에서 공모한 1953년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참고로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시기 동안 해외 정부를 전복하는 데에 참여한 첫 사건이기도 하였다.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마저도 빼앗길 것을 우려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점차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변해갔으며, 일부러 미국과 영국 등과 밀착하면서 서구권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권력을 유지하려 들었다. 팔라비 국왕은 이란의 서구화와 현대화를 내세웠으며, 이란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백색혁명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SAVAK이라는 이름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임의체포, 고문 등을 자행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등 막강한 독재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급진적인 이슬람 율법학자였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에 반대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면서 국왕의 정치적인 반대파로 급부상하였고, 이후 정부를 아예 부정하기까지 하면서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64년에 출소한 이후에도 호메이니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결국 이란에서 추방되고야 만다.
1973년에 석유가가 정점을 찍자, 이란 경제에는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 1974년에는 이란 경제는 두 자리수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현대화 정책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부정부패가 벌어지면서 정부는 갈수록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1975년과 1976년의 경제 침체로 인하여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특히 1970년대 초에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한 젊은 층들이 경제 침체에 따라 일자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전전하게 되며 사회는 갈수록 불온해져만 갔다. 팔라비 왕조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들은 모두 국왕의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고, 점차 항의 시위를 개최하면서 왕정을 폐지할 뜻까지 드러내었다.
이슬람 혁명 이후
1979년에는 팔라비 왕조의 반대세력들이 모여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1979년 2월에는 레자 팔라비 국왕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루홀라 호메이니가 망명 생활에서 벗어나 테헤란으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이란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마저 무너지게 된다. 이후 1979년 4월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이란은 일반국가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였으며, 1979년 12월에는 또 국민투표를 거쳐 신정헌법 제정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후 이란의 급격한 이슬람화에 반발하여 전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쿠르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쿠제스탄 등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생 이슬람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몇 십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통하여 반대파들을 억누르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정권은 이슬람권이 아닌 세력들을 모두 탄압하였으며, 심지어 무슬림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급진파가 아니면 배척하였다. 초기에는 레자 팔라비 국왕을 쫒아내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이란 신생 정부 구성에 참여하였는데, 나중에는 호메이니의 명에 의하여 반국가주의자라고 누명이 씌워진 후에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패인사라고 몰려 해외로 쫒겨났다.
미국이 레자 팔라비 국왕이 송환된 직후 처형당할 것이 뻔했기에 국왕의 이란 송환을 거부한 직후인 1979년 11월 4일에 무슬림 학생들 일부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였으며, 52명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에 협박문을 보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즉시 이란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는 동시에 구출 작전을 폈으나 작전은 실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지지도가 폭락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서 실패하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새롭게 취임한다. 이후 호메이니가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인질 협상에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카터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에 모든 인질들이 국내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이 사태도 끝난다. 한편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팔라비 국왕은 이후 미국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 27일에 암으로 이집트에서 그대로 사망하였다.
1980년 9월 22일에는 이라크 군대가 이란 서부 지역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점하였으나, 1982년 중반에 이르자 전세가 역전되어 이란군에 의하여 이라크군이 다시 이라크로 쫒겨 들어가게 된다. 1982년 7월에는 이라크가 수세로 들어갔고, 이란군이 오히려 공세 작전을 펴면서 바스라 등과 같은 이라크의 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이라크가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이라크의 패배로 끝날 때인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란의 전쟁 사상자는 약 23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된 후인 1989년에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총리가 취임하였으며, 친자본주의 정책을 피고 경제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정책들을 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슬람 정책에 위배되거나 급진 이슬람 정책을 완화하는 방향으로는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997년에 라프산자니 총리는 중도 개혁주의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하타미 총리는 이란을 조금 더 자유주의적, 민주적으로 만드려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주의적인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무부가 현직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전체 표수의 62.63%를 득표했다고 발표하였고, 2위인 모사비 후보가 33.75%를 득표했다고 밝혔으나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도 존재했다. 이로 인하여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와 관련된 정치적 움직임을 '녹색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3년 6월 15일에는 하산 로하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로하니 대통령의 재임기에 이란은 타 국가들과 관계를 점차 개선해나가기 시작하였다. 2017년과 2018년에 이란에서는 종교 최고지도자에게 이란이 처한 어려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정부의 통제 탓에 시위의 전반적 규모는 추정키 어렵지만 몇 천명에 달하는 시위자들이 체포되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2019년과 2020년에도 정부가 연료 가격을 300%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후에 시위가 일어났으며, 몇 시간 만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후 정부는 시위자들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1주일 가량 동안 이란 전역의 인터넷을 끊어버렸고, 이로 인하여 이슬람 공화국 창립 이래 최악의 시위 탄압이 이루어졌다. 몇 만명이 체포되었고,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군대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
2020년 1월 3일에는 혁명수비대의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하여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3일 후,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실수로 우크라이나 항공 752편을 군 관련 비행기로 오인하여 176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악수를 두면서 전세계적인 비판을 들었다. 국제적인 조사 끝에 이란 정부 역시 3일 간 사실을 부인하다가 결국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인적 사고’라고 부르며 책임을 회피했다.
지리
북서쪽으로는 약 35km에 달하는 국경을 아르메니아와 접하고 있으며, 그 옆에 북쪽으로 아제르바이잔과는 611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북동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자리하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파키스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터키와도 동시에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어 상당히 많은 국가들과 서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이란 국토의 대부분은 이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쿠제스탄 일대와 카스피 해를 접하고 있는 일부 해안 지대만이 예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가장 산악 지방이 많은 국가이며, 기본적으로 험준한 산맥들이 상대적으로 평평한 분지들을 갈라놓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가장 산들이 많은 지방인 서부 지방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코카서스 산맥,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등 수많은 산맥들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란의 최고봉은 다마반드 산으로, 그 높이가 무려 5,610m에 달하여 아시아에서 힌두쿠시 산맥 서쪽에 있는 산들 중 가장 해발고도가 높다.
이란 북부 지방은 카스피 해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혼합림이 채우고 있다. 한편 동부 지방은 대체적으로 카미르 사막과 같이 거대한 사막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끔씩 소금 호수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대 평원들은 카스피 해 근처와 페르시아 만 쪽 해안의 북쪽 근방 지역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다. 나머지 소규모의 평원들은 대부분이 산맥들에 의하여 갈라지고 쪼개진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란에서는 대평원이라고 할 만한 지형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이란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속하는데, 평균적으로 리히터 7에 달하는 강진이 매 10년 마다 한 번 꼴로 일어날 정도라고 한다. 이란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지진들은 천발 지진이며, 이 때문에 피해가 더더욱 막심하여 2003년 이란 대지진이라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거대한 사막 국가와 달리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 이란의 국토는 남부(자그로스 산맥)와 북부(알보르즈 산맥)에 있는 두 개의 산맥과 함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북부에선 이란의 최고봉 다마반드 산(5771m)이 있는 알보르즈 산맥(엘부르즈 산맥이라고도 한다.)이 아르메니아 고원에서부터 카스피해 남안을 거쳐 힌두쿠시 산맥으로 이어지며, 남부에선 자그로스 산맥이 리자이야 호 부근에서부터 페르시아만에 연해서 달리고 있다. 두 산맥을 별도로 할 때, 국토는 알보르즈 산맥과 카스피 해 사이에 낀 협장(狹長)한 평야지대, 알보르즈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에 둘러싸인 이란 고원 본토, 자그로스 산맥 남쪽의 페르시아 만 연안지방의 3개의 지형구로 구분된다. 이 중 면적이 가장 큰 지형구가 표고 500 ~ 1,500m의 이란 고원 본토인데, 이 고원 북부에 카비르 사막과 나마크 호수, 동남부에 루트 사막과 소택지 등이 산재한다.
이란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13개의 기후대들 중, 사막 기후부터 시작해서 아열대 기후까지 약 11개의 기후대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기후가 다양한 국가에 속한다. 카스피 해를 접하고 있는 이란의 북부 지방은 겨울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며, 1년의 나머지 달들에는 카스피 해의 영향으로 대체적으로 습한 기후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는 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자그로스 분지가 있는데, 자그로스 분지 지방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편이며, 혹독한 겨울 날씨가 특징이며 굉장히 강설량이 많다. 또한 동부와 중앙 분지는 사막 기후를 띠고 있으며, 1년에 200mm 밖에 강수량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메마른 지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곳의 평균 여름 기온은 38도이다. 한편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을 접하고 있는 이란 남부 지대는 북부 지방에 비하여 훨씬 기온이 온난하여, 겨울도 그다지 춥지 않으며 여름은 굉장히 덥고 찌는 듯이 습한 편에 속한다. 남부 지방의 평균적인 강우량은 1년에 135mm에서 355mm 정도에 달한다.
이란은 현재 사막화 등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가장 심각한 국가들 편에 속하나, 아직까지 파리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치
이란에서는 ‘혁명의 지도자’, 혹은 그저 ‘최고지도자’라고 불리는 이슬람 성직자인 라흐바르가 정치계에서 가장 배분이 높으며, 이로 인하여 오히려 국민이 선출한 이란의 대통령은 라흐바르에 비하면 훨씬 제한된 권력을 자리고 있다. 현재의 라흐바르인 알리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타계 이후 현재까지 이란을 통치해오고 있으며, 환경, 경제,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이뿐만 아니라 선거에도 합법적으로 개입할 권한마저 틀어쥐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인 장관 임명 또한 알리 하메네이의 재가가 있어야 가능하며, 또한 선거에서 선출된 대통령 당선자가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에 역시 하메네이의 허락이 필요하다. 또한 특히 중요한 장관직인 외교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 정보부 장관의 경우에는 거의 하메네이가 직접 후보를 추천하고 대통령은 이들 중에 고르기만 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하메네이의 영향력 하에 있다. 또한 외교 분야 역시 하메네이의 입김이 매우 강력하여, 모든 아랍과 서구 국가들에 파견되는 외교관들 역시 하메네이의 임명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의회에서 매년 심의하여 통과시키는 예산안 역시 하메네이의 허락이 필요하며, 법이나 규제 역시 하메네이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2013년 로이터 통신이 약 95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한 ‘세타드’, 즉 라흐바르의 직속 재산 역시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메네이의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란 라흐바르는 이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사 작전과 정보 작전 모두를 총괄하며 전쟁 선포나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 권한도 오직 라흐바르에게만 있다. 또한 국영 방송사와 텔레비전 기업, 사법부 수뇌부, 경찰과 군대 수뇌부 역시 라흐바르가 직접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되며, 이란의 최고 권력기구들 중 하나인 수호자평의회를 구성하는 12명의 위원들 중에서 6명을 라흐바르가 개인적으로 임명한다.
한편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라흐바르는 이슬람 최고위 성직자들로만 구성된 ‘전문가 평의회(Assembly of experts)'에서 선출되며, 만일 라흐바르가 지나친 권력 남용을 일삼거나 국민의 신망을 잃었을 경우 라흐바르를 해임할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다만 라흐바르를 견제하기 위한 초기의 목적과는 다르게, 현재까지 전문가 평의회에서 라흐바르의 결정에 한 번이라도 반발한 적은 없으며, 한 번도 라흐바르를 해임하려 시도해본 적조차 없다. 게다가 하메네이가 오랫동안 장기집권을 이어오게 되면서, 사실상 전문가 평의회가 권력이 없는 채로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 역시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오히려 역으로 하메네이가 이 전문가 평의회의 이슬람 성직자들을 비판한 적도 많으며, 심지어 평의회의 위원들을 체포하거나 해임한 적도 여러 차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하메네이는 전문가 평의회의 아흐메드 아자리 쿠오미를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체포하여 회의에서 쫒아낸 적도 있을 정도이다.
수호자 평의회
대통령 후보나 국회의원 후보들은 선거 전에 미리 ‘수호자 평의회(Guardian Council)'의 허락을 받고, 하메네이를 정치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완벽히 인정받고 나서 출마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수호자 평의회가 미리 하메네이에게 반대하는 후보들 대부분을 미리 쳐내기 때문에, 하메네이가 직접 나서서 정적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메네이는 수호자 평의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수호자 평의회는 국회의원들을 제명하거나 쫒아내는 것도 가능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한 적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녀가 히잡을 두르지 않은 채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미누 칼레기 의원이 있다.
대통령
이란의 헌법에 의하면 이란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이슬람 법학자이자 성직자인 라흐바르이며, 이 뒤를 이어 이란의 대통령이 그 다음으로 서열이 높다. 대통령은 약 4년 마다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내각을 구성하는 등의 권한이 있으나 다만 의회에서 취임하기 전에 라흐바르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며, 게다가 대부분의 중대결정을 라흐바르의 재가를 받고 시행해야 하기에 일반적인 대통령제 국가들의 대통령들에 비하면 그 권한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또한 라흐바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을 즉시 해임할 수 있는 권한마저 가지고 있다. 이란 대통령은 단 한 번만 재선할 수 있다.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책무는 최고지도자, 즉 라흐바르의 명을 충실히 본받아 사회 곳곳에 이슬람 기풍을 불어넣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이란 대통령은 타 국가들의 대통령들에 비하여 한없이 약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라흐바르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은 할 수 없기에, 딱히 자신의 뜻대로 정책을 펼쳐나가지만은 못한다. 이란 이슬람 헌법의 9장에는 대통령의 권한과 그 자격에 대하여 명시되어 있는데, 대통령은 라흐바르의 허가를 받았다는 전제 하에 국가 정책 심의, 예산안, 실업, 국제 협약 등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은 의회와 라흐바르의 허락을 받아 장관을 임명하여 내각을 꾸릴 수 있으나, 라흐바르는 만일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 대통령이나 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대통령과 장관 모두를 해임시켜버릴 수도 있다. 대통령 아래에는 8명의 부통령들이 있으며, 내각은 총 22명의 장관들로 구성되고 이들 모두 임명을 위해서는 의회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주민
페르시아인(마잔다란인, 길라키인 포함)이 61%, 아제리인(아제르바이잔인)이 16%, 쿠르드인이 10%, 루르족이 6%, 발루치족이 2%, 아랍족이 2%, 투르크멘족이 2%를 차지하며, 그 밖에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시리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란에 사는 약 500명의 대한민국 교민들은 주로 테헤란 지역에 거주한다.
이란 내에 거주하고 있는 민족들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그 종류와 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일단 이란인들 대부분이 페르시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의견이 동일하다.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이란 인구의 79% 정도가 인도유럽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마잔다란인들과 길라키인들을 포함한 페르시아인들이 전체 인구의 61%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 뒤를 쿠르드족이 10%, 루르족이 6%, 발루치인들이 2% 정도로 잇고 있다. 또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이 아닌 사람들도 21% 정도로 꽤나 많은 편에 속하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16%, 아랍인들이 2%, 투르크계 민족들이 2% 정도가 있다.
'고귀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온순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인 "인샬라"(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정신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매사에 느긋하며 의사결정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 이를 거의 제대로 참기 힘든 면이 있다. 또한 과거 페르시아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술에 정통하다.
이란인의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페르시아어가 이란의 국어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이란계 언어들도 사용되고 있다. 이란에서 페르시아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아제르바이잔어이며, 그 외에도 여러 튀르크계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경제
이란의 경제는 중앙계획의 국유 석유회사와 국유 기업, 농촌지역의 농업 및 소규모의 상업, 벤처에 의한 서비스업 등의 민영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는 혼합경제며, 전체 경제 비중에서 약 3분의 2가 국영 기업의 몫이다. 석유개발 이전에는 농업이 주요산업이었으며, 공업은 페르시아융단을 생산하는 전통적 수공업이 있을 뿐이었으나, 정부는 이전부터 줄곧 시장화 개혁을 행하여, 석유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여, 수익을 자동차 공업, 우주항공 산업, 가전 제조업, 석유화학 공업, 핵 산업 등 타 부문에 분산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공업력 수준이 낮아 품질이 좋지 못하다. 차바하르 자유무역지역, 키슈 섬 자유무역지역의 설정 등을 통하여 투자환경의 정비에 노력하여 수억 달러 단위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 이란의 중산계층은 두텁고 견실하여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고인플레, 고실업률이 문제이다. 재정적자는 만성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식품, 가솔린 등을 중심으로 년 총계 약 7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이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란은 OPEC 제2위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확인되고 있는 세계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1996년에 매우 견실했던 원유 가격은 이란의 재정적자를 보충하고, 채무원리금 미지급금의 상환에 충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참고자료
- 〈이란〉, 《위키백과》
같이 보기
서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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