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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1일 (토) 23: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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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는 동유럽의 내륙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동쪽 및 남쪽 국경,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와 서쪽 국경, 벨라루스와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키이우(Київ, Kyiv)이다.
개요[편집]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국가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이우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고, 인구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동부 인구(주로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 오데사 지역)는 러시아어 사용자이기도 하다. 주요 도시로는 키이우,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르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크름 반도이라고도 불린다)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중세 초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루스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투르크족·몽골족 등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대다수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제 아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 적용을 받으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의 구성국으로 존재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지하 자원이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 생산에서 중요성 있다. 풍부한 수력 전기를 이용하여 기계 제조 공업·화학 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 공업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 제조업, 화학 공업 중심은 돈바스·드니프로 주이며, 드니프로 강 하구에서 키이우 사이 6개 수력 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 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 반도 남단과 광천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 배경으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우크라이나인 대다수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다.
국가 상징[편집]
국호[편집]
-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 (Ukrajína)
- 벨라루스어: Украі́на (Ukraína)
- 러시아어: Украи́на (Ukraína)
- 크림 타타르어·폴란드어: Ukraina
- 영어: Ukraine ([juːˈkreɪn])
- 에스페란토: Ukrainio·Ukrainujo
- 한자: 烏克蘭 (오극란)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 / Ukrajina)라는 국호는 고대 동슬라브어 표현인 Оукраина / Oukraina에서 유래하였다. 우(Оу)는 전치사에 해당되고 크라이(краи)는 땅 또는 변경, 경계를, 나(на)는 접미사에 해당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Україна와 함께 Вкраїна / Vkrajina로 표기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어에서 자음에 선행하는 В는 [v]가 아닌, [u̯] 발음이므로 Україна [ʊkrɐˈjinɐ]와 그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 역사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지역 중심지를 소러시아(Малоросія)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소러시아 용어에 대해 자국을 러시아의 속령으로 지칭하는 러시아 제국주의적 단어로 여겨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우크라이나어의 크라이나(країна)는 러시아어의 크라이(край)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동슬라브 계통의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로 국가, 땅, 영토,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연해주라는 의역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지방도 원어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다. 크라이가 러시아 내부 일개 주(행정구역)에 대응하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크라이나를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로 해석해 우크라이나를 '변방에 있는 나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름의 이런 어감도 일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가 나라가 아닌 일개 지방이라고 해석하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의 민족·나라 이름을 '변방'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싫어하며, 크라이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 반박한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가 몽골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는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계이기도 했고 이후로도 오랜 기간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폴란드어(서슬라브) 및 구 유고권(남슬라브)[2]도 슬라브 슬라브어 계통이기 때문에 똑같이 우크라이나라는 표현을 '주변 땅'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 같은 경계의 땅에서 삶을 영위해나간 공동체인 카자크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수도 키이우 및 우크라이나의 국장에서 알 수 있듯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고 키예프 루스를 자국의 모태 국가로 보지만, 키예프 공국 시절 영토와 비교하면 우크라이나 지역은 상당히 남쪽에 있다. 또 그 바탕 민족이 바이킹의 일파인 바랑인과 루스인이기 때문에 같은 루스 국가인 러시아, 벨라루스도 이 키예프 루스를 공통조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도 키예프 루스를 모태로 본다. 때문에 예전에는 우크라이나인들 본인들을 우크라이나 루스(Україна русь)로 부르기도 했다.
국기[편집]
우크라이나 국기는 청색과 황색이 가로로 결합된 이색기이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 20조에 따라 국기로 규정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흔히 '조우토블라키트니 프라포르(Жовто-блакитний прапор, 황색-청색기)'라고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황색-청색기라고는 하지만 실제 국기의 색깔 배열은 위에서부터 청색-황색인데, 실제로 황색-청색 도안도 비공식적으로 쓰였던 역사가 있다.
이 깃발의 역사적 연원은 12세기에 우크라이나에 있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에서 청색/황색 조합 국기를 쓴 것이다. 현재의 이색기 형태는 르비우에서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쓰인 것이 최초이며, 1918년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생겨나면서 이 이색기 형태를 공식 국기로 채택했다.
국기에 담긴 청색과 황색의 의미에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청색이 물을 상징하고 황색이 불을 상징한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청색이 하늘, 황색이 초원의 다 자란 밀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원의 밀과 하늘이 담긴 풍경을 보면 두 번째 설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켐니츠 시기와 비슷하나 비율이 조금 다르다.
국장[편집]
1992년 2월 19일부터 최고 라다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1996년 우크라이나 헌법을 통해 공식 국장으로 지정되었다.
문장의 유래는 키예프 루스인데 당시 루스의 지배가문이었던 류리크 왕조의 인장이었으며, 스뱌토슬라프 1세가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고정되지 않고 대공마다 모두 그 형태가 달랐다. 현 우크라이나의 국장은 각 대공들의 인장 중에서도 블라디미르 1세의 인장에서 본떴다. 공식적으로 칭하는 명칭은 작은 우크라이나 국장(Малий герб України)이며, 현지에서는 트리주브(Тризуб/삼지창)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명칭이 작은 국장이니만큼 큰 국장도 있는데, 이건 헌법 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재는 아직 논의중에 있다. 일단 헌법 상으로는 총든 코자크(Козак з мушкетом)[18]와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유리 1세의 인장인 루스 사자(Руський лев), 그리고 위 삼지창이 모두 들어간 문장이어야 한다. 갈리치아-볼히니아와 코자크 헤트만국은 중세와 근세에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기에 각각 우크라이나의 중세, 근세를 상징하는 문양인 셈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시절부터 논의되어 온 것으로, 당시에도 작은 문장과 큰 문장이 분리되어 있었고 현재도 이를 따라서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아직 공식 문장이 나오지는 않은 것.
이 문장은 의지나 자유를 뜻하는 우크라이나어 단어인 'воля'를 이루는 각 글자를 조합하여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в(v)는 왼쪽 창 끝, о(o)는 문장의 중심 쪽의 둥근 모양, л(l)는 가운데 창 끝, я(ya)는 오른쪽 창 끝으로 나타내어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편집]
국가는 'Ще не вмерла Українa(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이다.
이 곡은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인 파울로 추빈스키(Павло Платонович Чубинський, 1839년 1월 27일 ~ 1884년 1월 29일)가 1862년 발표한 시에 음악가 미하일로 베르비츠키(Михайло Михайлович Вербицький, 1815년 3월 4일 ~ 1870년 12월 8일)[1]가 1863년 곡을 붙이면서 탄생되었다. 추빈스키는 당시 불어닥치던 슬라브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시를 써내려 갔다고 한다.
추빈스키의 시는 쓰자마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년 뒤인 1863년 르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잡지인 메타(Мета)에 실렸다. 곧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 시는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신부였던 베르비츠키는 시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기로 결심하였고 1864년 리비우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1865년 추빈스키의 시에 베르비츠키의 곡을 붙인 악보가 발간되면서 우크라이나의 국가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당연히 당시 우크라이나를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이 노래를 심히 불편해하셨다. 곡을 작사한 추빈스키는 1862년 10월 "농민들에게 부정적 사고를 퍼뜨린다."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추방되어 7년 동안 유배되는 등 고생을 하다 말년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하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884년 사망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때문에 이 노래는 우크라이나 본토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에서 유행하였다.
처음 국가로 제정된 것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7-1920) 시기였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외에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8-1919), 1939년 잠시 수립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이 곡을 국가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이 곡은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수는 있었으나 이 곡은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를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며 파울로 티치나(Павло Григорович Тичина, 1891년 2월 23일 ~ 1967년 9월 16일)가 작사하고 안톤 레베디네츠(Антон Дмитрович Лебединець, 1895년 1월 7일 ~ 1979년 3월 17일)가 작곡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ської Радянської Соціалістичної Республіки)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내건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해금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 9일 해금된 이후 처음으로 공식 연주가 되었다. 당시 연주 영상. 본래 쓰이던 국가로 환원된 것은 독립 직후인 1992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본래는 3절까지 가창하였으나, 2003년 3월 6일부터 1절만 가창하고 있으며, 가사가 일부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3년 이전 가사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다.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단조로 된 국가 중 하나이다. 단조로 된 국가를 쓰는 다른 나라로는 튀르키예,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이스라엘, 카자흐스탄, 몬테네그로 등이 있다. 또한 과거 대한제국의 국가였던 대한제국 애국가도 단조로 되어 있었다.
지리[편집]
국토 면적 603,700km²에 576,700km²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제외시)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초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 위치 : 위도 44”20’-52”20’, 경도 22”5’-41”15’
- - 남북 연장 : 893km, 동서 연장 : 1,316km
○ 면적 : 603,500km²(한반도의 약 3.5배)
- - 국경선 길이 : 4,566km, 해안선 길이 : 2,787km
- - 유럽 대륙의 5.7%, 전세계 육지면적의 0.44% 차지
- - 국경 인접국
- · 서쪽 :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 · 북동쪽 : 러시아
- · 남서쪽 : 몰도바, 루마니아
- · 북쪽 : 벨라루스
- - 흑해와 아조프해 접경국 : 터키, 불가리아, 조지아
○ 지형 : 국토의 95%가 평지
- -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며 이중 60%가 비옥한 흑토 지대(전 세계 흑토의 25%에 해당)
- - 서부의 카르파티야 산맥, 크림 반도 등 일부는 산악지대(최고높이 2,061m)
- - 드니프로(Dnipro) 강은 유럽에서 세번째로 긴 강
- ○ 천연자원 :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원유, 리튬, 니켈, 코발트, 소금, 유황, 흑연, 티타늄
기후[편집]
○ 기후 일반
- -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
- -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아열대성 기후
- - 남서부의 카르파티야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이 우기
○ 평균기온
- - 겨울 : -5--10℃(남부지역은 0℃)
- - 여름 : +15-26℃(최고기온은 39℃)
전체적으로 냉대 습윤 기후를 보이며, 수도인 키이우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보다는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좀 더 춥다. 하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온난 습윤 기후를 나타낸다. 그리고 키이우는 위도 50도에 위치 위도 37.5도에 위치한 서울보다 한참 북쪽에 있다. 다만 겨울이 길고 일교차가 적어 낮기온이 낮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기 쉬우며, 실제로 러시아와 접경하는 동부는 강원도 내륙과 비슷하게 춥다.
역사[편집]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소비에트 시절에는 크게 두 개의 역사학파가 주도하였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동슬라브족으로 묶고 동슬라브족을 러시아와 일치해 해석하려는 학파와 우크라이나의 존재 목표를 소비에트 통합으로 해석하려던 학파이다. 하지만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두 학파는 사라지고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되어 생각하는 학파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시켜 보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사료편찬, 역사기술을 서구식 방법인 영토접근법(Territorial approach)으로 사용하여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사건과 그 지역을 거쳐 간 모든 종족, 민족을 우크라이나 역사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영토접근법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역사학부 마고시(Paul Magocsi)교수가 창조하여 주로 사용하던 방법으로서 현대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며 국가의 민족주의화를 위한 역사적 접근 방법이다. 이러한 영토적 접근 방법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키메르족, 트리필리안, 스키타이인, 사마르티안 등 루스인 이전의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던 종족들을 우크라이나 조상으로 포함시키게 된다.
고대[편집]
기원전[편집]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 기원전 5000년 경부터이며, 기원전 10세기부터는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우크라이나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우크라이나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동유럽 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동슬라브족[편집]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 서, 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 원주민들 중 동슬라브족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슬라브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족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족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동슬라브족은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튀르크족의 동슬라브족 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족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와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유목화된 동슬라브족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동슬라브족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튀르크족의 정복에 의해 하자르 한국에 정복당하였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슬라브족 사람들은 노르만인과 튀르크 하자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중세[편집]
키예프 루스[편집]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원형인 키예프 루스는 882년 노브고로드의 2대 공작인 올레그 베시가 키이우를 점령한 후 형성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는 키예프 루스의 남부 지방이었다. 키예프 루스와 류리크 왕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루스인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동슬라브인들에게 흡수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근대[편집]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1932년~1933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여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처럼 포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여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의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스텝 지방의 금빛 밀밭 위 푸른 하늘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청색과 황색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통적으로 깃발에 많이 쓰던 색이다.
2005년 1월에 빅토르 유시첸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율리아 티모셴코는 2, 3차례나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0년 2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7월 4일에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러시아어를 지역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하고 준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러시아어를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2012년 8월 8일에 야누코비치가 동남부에서 러시아어를 공식언어로 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러시아어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총선을 치른지 2주만인 2012년 11월 11일에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에 EU와의 협정이 무산되자 친EU시위가 발생되었고, 시위진압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2013년 12월 8일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 레닌상이 철거되었다.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한 결과, 친러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망하였다. 이로 인해서 친러 성향이 강했던 크림 반도의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선언과 함께 러시아로의 편입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2014년 3월 18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 연합과 미국 등 서방 진영은 이 합병을 불법으로 간주하였으며,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주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 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독립 결정을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돈바스 지역을 비롯한 동부 지방에 대해선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국과 유럽 연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고 있으며, 결국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정치[편집]
우크라이나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이 분리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인데, 1번의 중임이 가능해 최대 임기는 10년이다. 대통령이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는데,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야당이 의회가 절대다수일 경우 총리가 대신 권력을 독점한다.
의회와 정당[편집]
우크라이나 의회는 단원제 최고회의(Verkhovna Rada)이며, 총 450석 중 225석은 전체 유권자의 4% 이상 지지를 얻은 정당에게 비례로 배정된다. 나머지 225석은 선거구에서 직접선거로 결정된다. 모든 의원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총리를 뽑고, 법률을 발의하고, 국제 협정을 비준하며 예산안을 승인한다. 2020년 6월 구성은 다음과 같다(정렬은 2019년 7월 21일 총선거의 결과 순).
- 국회(최고회의)구성
- 인민의 종 254석, 43.16%
-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 43석, 13.05%
- 전우크라이나 연합 "조국" 26석, 8.18%
- 유럽연대 25석, 8.10%
- 목소리 20석, 5.82%
우크라이나의 주요 정당으로는 페트로 포로센코 블록당(Petro Proshenko Bloc), 국민전선당(People’s Front), 야권블록당(Opposition Bloc), 자립당(Samopomich), 급진당(Radical Party), 조국당(Batkivshchyna), 국민의지(People's Will), 재건당(Revival) 등이 있다.
행정부[편집]
우크라이나 내각 정부각료회의는 최고 행정기관으로, 총리, 제1부총리, 부총리 5명 그리고 각 부처 장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인 장관을 임용하기도 한다. 내각은 국회에 책임을 지며, 외교부 장관, 국방부장관, 국가안보국장, 검찰총장은 국회뿐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책임을 진다. 즉, 후보자 명단은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다. 그 외 각 부처 장관의 후보자 명단은 행정 수반인 총리가 국회에 제출하는 형식이다. 정부각료회의는 각 지방 주지사와 시장을 임명하고 해임하는데 동의 여부를 결정한다. 내각은 국회가 내각을 불신임하거나, 총리가 사임 되거나, 총리의 사망 시 총사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총사퇴가 결정되면 신내각 구성은 60일 이내에 이루어져야 한다.
-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 총리: 데니스 시미할
- 제1부총리
- 부총리
- 디지털전환부
- 내무부
- 외무부
- 보훈부
- 청소년체육부
- 커뮤니티지역인프라정책부: 기존의 인프라부와 커뮤니티지역개발부(Ministry of Communities and Territories Development)를 통합해 출범했다.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와 유사한 부서이다.
- 사회정책부
- 법무부
- 국방부
- 보건부
- 교육과학부
- 에너지부
- 환경보호천연자원부
- 농림식품부
- 문화정보정책부
- 내각장관부: 일본의 내각관방과 비슷한 기구가 있다.
- 일시점령지역재통합부: 러시아 점령을 받았던 지역에 대한 사회 통합(민사작전)을 지휘하는 부서.
헌법과 정부[편집]
1996년 6월 28일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정체는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형태의 이원집정부제이다. 우크라이나의 헌법은 1991년 12월 독립 후에 구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 헌법을 일부만 수정하여 적용해 오다가 1996년 새로이 헌법을 제정하였다. 우크라이나 헌법이 제·개정 된 과정을 보면 1996년 신헌법 제정 이후 2004년 12월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한 헌법 개정 법률안이 발효되었고, 2016년 6월, 사법개혁에 대한 헌법 개정이 채택·발효되었는데, 개정의 요지는 복잡한 법원과 재판과정을 간소화하고, 판사들의 특권과 면제 폐지 및 재산공개의무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2019년 2월에는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우크라이나 민족의 유럽 정체성과 우크라이나의 EU, NATO 정회원국 지위 획득 전략 이행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였다.
우크라이나의 헌법 개정 절차는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의 1/3 이상과 국민대표들이 참여하는 헌법위원회가 헌법개정법류안(Draft Law on making amendments to the Constitution)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는 없는지 심사한 뒤, 국회 재적의원 2/3 이상이 찬성할 시 헌법개정법률안을 의결하고 채택하게 된다. 국민투표와 같은 과정을 통해 개정을 확정하며, 마지막 절차로 대통령이 서명하면 국회를 통해 대국민에게 공포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헌법은 정치체제가 이원집정부제이며,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단일국적이고, 3권 분리의 법치주의를 준수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를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러시아어와 기타 소수민족의 언어를 자유로이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을 보호하고 보장한다. 토지의 재산권에 대해서도 명시하고 있는데, 배타적 경제 수역 내 천연자원은 국민이 재산권의 대상이 된다. 토지는 국가의 특별보호 하에 두고,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보장하고 있지만, 국가와 법인체가 토지 재산권을 취득하고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 법률로 규정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8세 이상 국민이 선거권을 가지며,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35세 이상, 국회의원은 21세 이상이어야 한다. 국민투표는 국회, 대통령, 300만 명 이상의 국민 또는 전체 주(州)의 2/3 이상 주민이 요청할 시 실시하는데, 영토 변경에 관한 사항에서는 국민투표에 의해서만 결정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24개주(ovlasts) 및 크림자치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와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 세바스토폴은 특별 지위를 가지며, 각 주, 각 군의 행정권한은 각 지방행정부에서 수행한다. 지방행정부장이 지방행정부의 직원을 임명하고 구성하며, 지방행정부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과 국회가 책임을 진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로 뽑히며, 임기는 5년이고, 1회 연임이 가능하다. 총리도 역시 5년 중임제로 1회 연임이 허용된다. 대통령은 총리와 내각을 지명할 수 있는데, 국회 내 정치연합이 제출한 총리 후보와 중앙선관위원 후보들을 국회에 제안하는 식이다. 지명한 인물에 대해서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 밖에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국가대표로서 외교/국방활동 수행, 조약체결, 외교와 국방부장관, 검찰총장 등에 대한 임명/해임을 국회에 요청할 수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과 군 통수권자 역할을 수행한다.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며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정부각료회의 동의를 받아 각 지방 주지사와 시장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 위원 중 1/3인 6명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 또한 헌법개정안을 발의하고 고등법관회의의 추천에 따라 판사를 임명하며, 반대로 판사 해임을 고등법관회의에 제안할 수 있다. 대통령이 임기 중 해임하는 경우는 국회의 탄핵 결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법부[편집]
우크라이나 사법부는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세 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은 일반법원의 최고심 법원이다. 48명의 판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2016년 사법개혁 이후 대폭 증원된 것이다. 판사는 대통령, 국회, 판사협회, 변호사 협회, 고등법률대학 및 기관 등이 각각 3명, 검찰협회가 2명을 임명한다. 고등법원은 일반 고등법원과 특별 고등법원으로 나뉜다. 일반 고등법원은 24개주를 비롯해 크림자치공화국과 키이우시, 세바스토폴시 등 지역별로 설치되어 있으며, 특별 고등법원은 특별법원의 최고심 법원으로 자리한다. 지방법원은 행정구역별로 전국에 총 74개 법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국내외 상거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상사중재원(Commercial Arbitration Board)이 여기에 속한다.
헌법재판소는 판사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통령, 의회, 법관회의가 각 1/3씩 임명한다. 헌법재판소 판사는 임기가 9년으로 연임은 불가하다. 여기서는 대통령, 국회, 대법원 등이 제소하는 헌법 관련 사항을 심의 결정하고, 대통령 탄핵여부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특징[편집]
크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까지는 내부 갈등이 심한 막장이었으나 러시아의 참공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내부 결속력이 매우 강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동안 정치 갈등이 매우 심한 나라로 꼽혀왔다.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낮은 민주주의 지수를 기록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경우 소련 독립후에 야당과 여당에는 오랜 불타협의 역사가 있으며 지금도 여당과 야당, 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다. 그들은 티비와 신문을 통해 대단한 네가티브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폭력 사건까지 흔하게 일어난다. 특히 친러시아계를 우크라이나 의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친서방파 의원들이 대립각을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정치에서 통치방식이나 대화와 타협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으며, 정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국가분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여파로 국회 공성전이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도 정부와 국회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크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오렌지 혁명의 율리야 티모셴코를 이기자 기존의 율리야 티모셴코는 친유럽 정책을 펼쳤지만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2019년 4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당선되었다. 특이점은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일대, 재외국민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이겼다. 이는 친러나 친서방을 떠나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기성정치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도망치지 않고 키이우에 남아 항전하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단결하기 시작하고, 러시아군이 점령지 각지에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름에 따라 아예 러시아로 넘어가버린 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우크라이나인들이 전례없이 단결하며 새로운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
정치사건[편집]
- 2004년 오렌지 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이다. 레오니드 쿠치마가 임기만료에 따라 물러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은 쿠치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Віктор Янукович)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Віктор Ющенко)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쿠치마는 이미 레임덕에 시달렸지만 야누코비치가 총리직을 지내면서 동부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며 공산당 지지층을 뺐어오는데 성공했고, 유센코도 2002년 총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극한 상태였다.
대선을 두달 반 정도 남겨둔 2004년 9월 5일, 유셴코 후보는 독살을 당할 뻔했다. 사건 후 유셴코의 혈액에서는 기준치의 1천 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 이 암살기도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이고르 스메쉬코 전 국장, 블라디미르 사추우크 전 차장과 식사를 한 후 일어난 것이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우크라이나 보안국이나 러시아 측에서 친러파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을 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유셴코는 목숨을 건졌다. 결국 2004년 11월 대선 결선투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되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지만 유셴코와 러닝메이트인 율리야 티모셴코 지지자들은 투표에서 대규모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했다. 이에 키이우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우크라이나 대법원과 중앙선거위원회가 개입한 끝에 재투표를 거쳐 유셴코가 51.99%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했다.
- 유로마이단 혁명
2013년 11월 21일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反독재 혁명. 2013년 11월 21일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시 진행 중이던 EU 가입 논의를 전면 중단하고 친러 정책을 천명한 것에 반대하여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대적인 시위가 유로마이단 혁명의 시발점이다.
시위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포하는 등 야누코비치 정부의 폭동적 시위진압과 이에 자극 받은 시위대의 봉기로 시위는 유혈 사태로까지 격화되었다. 여기에 야누코비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괴하고 경찰의 범죄행위를 대놓고 합법화하는 반시위법 패키지를 입법 절차를 무시해가며 날치기로 통과시켰다[2]. 2014년 2월 경찰은 자동소총과 저격총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3] 이때를 기점으로 민중들의 목적이 친러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독재정권의 축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혁명으로 급변했다. 결국 야누코비치와 그 측근들이 키이우에서 러시아로 야반도주 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독재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모든 의원의 만장일치 표결에 따라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고 새로운 과도정권을 수립하였다.
친서방 정책에 회의적인 지역들에서도 야누코비치는 이미 지지를 잃어버렸기에 대부분의 지자체와 군경은 과도정부를 인정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속국으로 여겨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이탈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2013년에 야누코비치의 무능한 대처를 보고 실망한 러시아는 친러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직접적인 개입과 하이브리드 전쟁을 통하여 '말 안 듣는' 우크라이나 민주정부를 뒤엎기로 결정했다. 이후 일어난 2014년 크림 위기로 러시아는 자신감을 얻었으나, 뜻대로 풀리지 않은 돈바스 전쟁은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치명적인 자충수로 이어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으로 시작되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벌어지는 전쟁. 신냉전의 일부로, 줄여서 러우전쟁 또는 우러전쟁으로도 불린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특별 군사작전 개시 명령을 선언한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자 21세기 첫번째의 유럽 국가 간 전쟁이다.
러시아 정부는 해당 전쟁이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아니라 단지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입장이다. 추후 러시아가 계엄령 또는 국가 총동원령 선포를 통해 공식적인 전쟁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2024년 임기가 만료되는 푸틴이 종신집권을 위한 치적을 쌓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병합해 러시아의 지정학적 입지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개시한 전쟁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
외교[편집]
우크라이나는 루마니아, 몰도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주변국들과는 하나같이 사이가 좋지 않다. 물론 러시아에 비하면 나은 편이며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이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들을 괴롭혀온 폴란드, 헝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루마니아, 몰도바와도 정치적인 문제와 영토 분쟁이 있다. 슬로바키아와도 갈등이 있지만 그나마 나은 상태이다.
대외정책 기조[편집]
2014년 2월 마이단 혁명(親서방 반정부 시민운동)이 성공하여 親서방정권이 들어선 이후, 기존의 親러 및 親CIS 정책을 폐기하고, 反러 및 親서방 정책기조로 근본적으로 변화(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등)
대서방 정책[편집]
○ 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노력
- - EU와 제휴협정(Association Agreement) 체결(2014.6.27.) 및 예비발효 과정을 거쳐 완전 발효(2017. 9. 1.)
- - EU와의 포괄적 자유무역협정(DCFTA) 발효(2016. 1. 1.)
- - EU와의 단기 무비자 사증면제협정 발효(2017. 6. 11.)
- - 對EU, 對NATO 가입 목표를 "대외정책노선에 관한 법률" 개정시 반영(2017.6월)
- - "우크라이나 민족의 유럽정체성과 우크라이나의 對유럽, 對유로/대서양 통합 정책의 불가역성 확인" 및 "우크라이나의 EU, NATO 정회원국 지위 획득 전략 이행"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기 위한 개헌(2018.12월)
○ 對美 우호 · 협력 관계 추구
- - 우크라이나는 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등 親서방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지지확보를 추구하면서, 미국과 고위인사교류, 군사교류확대, 각종 경제원조 수령 등 실리 추구
- - 미국은 2014-18간 우크라이나에 약 40억불에 이르는 경제적 · 인도적 · 군사적 원조 제공
대러시아 정책[편집]
○ 2014.2월 마이단혁명 성공 및 친서방정권 등장 이후 對러 관계 급속 냉각
○ 정치/군사/정보/인적교류 등 각종 對러 우호협력조약/협정을 종료/중단
- - 2014.1월-2018.11월간 총 48개 조약/협정을 종료 또는 중단
○ 항공노선 중단 및 인적교류 감소
- -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2014.3월) 및 동부 Donbas 반군 지원에 관련된 러시아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제재령을 발표하자(2015.9월), 러시아정부는 우크라이나 항공사에 대한 러시아 영공통과 불허방침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자국 항공사에 對러시아 항공노선 중단조치를 취하여 (2015.10월), 러시아-우크라이나간 직항 노선 부재 상태 지속
-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러시아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일련의 제재령 발동에 대응, 우크라이나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경제제재령(개인 322명, 법인 68개 제제 리스트) 발표 (2018. 11. 1.)
- - 양국간 철도/버스 노선은 운영되고 있으나, 이용 승객수가 계속 감소하여, 2017년 양국을 오가는 철도 승객수는 2013년 대비 20% 수준으로 감소
○ 對러시아 경제의존도 급감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무역상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對러 무역액 및 비중은 대폭 감소
- - 우크라이나의 대외수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수입액은 2013년 151억불(전첵 금액의 24.7%)에서 2017년 39억불(8.5%)로 격감하였고, 수입액도 2013년 232억불(23.2%)에서2017년 72억불(14.3%)로 격감
- -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도 2013년 러시아가 제3위 대상국이었으나, 2017년에는 對러 농산물 직접수출 전무
- -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수입은 2013년 총 수입량 대비 對러 수입량이 92%에 달했으나, 2017년에는 對러 직접 수입량이 전무하고, 유럽 국가를 통해 러시아산 가스를 일부 간접 수입중
○ 러시아의 對우크라이나 경제제재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反러정책에 대응, 2016.1월부터 對우크라이나 경제제재시행
- - 우크라이나와의 FTA 관계 폐기, 우크라이나산 식료품 금수 조치, 러시아 영토를 경유하는 對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내륙 운송 금지
- -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내륙운송을 통한 수출희망시 벨라루스를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토록 조치
- - 6개월 단위로 동 경제제재 조치를 연장
우크라이나는 이웃 국가 러시아와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좋지 않았으며, 몽골 제국 점령기 이후에 민족이 갈라졌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으며, 러시아가 나중에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병합하여 수백년간 자국의 영토에 흡수하였으며,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SSR이 되고 말았으며, 해방이 된 1991년 이후에, 협상 아래에 독립국가연합에 가입 했으나, 결국 관계 악화로 단체를 탈퇴하고 말았다. 양국이 여러번 함께 가스 협상을 여러번 치루었으나, 협상이 결렬 된적도 있었다. 자국의 동서 갈등이 충돌한 2013년에 이후에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EU가 재협상을 연기하는 동시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유로마이단 사태와 남동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의 영향으로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국교가 단절되었으며,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이르고 있다.
CIS와의 관계[편집]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CIS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2014년 이후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CIS와의 관계 단절(2018. 5. 19. 모든 CIS 관련기관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부 철수)
○ 舊소련연방 구성국들이 창설한 CIS는 EU와 같은 통합을 목표로 출발했으나, 러시아 패권 주의에 대한 회원국들의 우려, 2008.8월 러-조지아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신뢰 하락, 러 국내경제의 어려움 지속 등으로 인해 그 발전은 난망
민스크 휴전 합의 경과 및 전망[편집]
○ 제1차 민스크 휴전 의정서 체결(2014.9월)
- - 민스크접촉그룹회의(우크라이나/러시아/OSCE/반군세력 참여)에서 휴전 의정서(protocol) 서명 및 발효(△교전중단 △협상참가자 안전보장 △국경 10km 완충지대 설치 △중화기 철수 △휴전감시 △포로석방/교환 등 포함)
- - 민스크 개최 제3차 접촉그룹회담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각각 전선에서 15km씩 물러나 총 30km의 완충지대 설치 합의(9. 19.)
- 우크라이나정부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대규모 자치를 허용하는 지방분권화 특별지위법 채택(2014. 9. 16.)
○ 제2차 민스크 휴전 합의(2015.2월)
- - 우크라이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정상들간 합의(△2. 15. 교전 중단 △중화기 철수 △외국군대/군사장비 철수와 OSCE 모니터링 △우크라이나법 및 동부특별지위법에 의한 지방선거 실시 △포로석방/교환 △국경통제 △돈바스지역 사회 및 경제관계 복원 등)
- - 동 합의 발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및 반군들은 일부 거점에 대한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정부군은 2. 18. 교통/전략 요충지인 디발쵸바를 포기하고 철수
- - 2. 18. 포로센코 대통령은 유엔평화유지군 파병 요청
- -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유엔평화유지군 파병은 우크라이나정부와 반군간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이에 반대(3. 21.)
○ 베를린 개최 노르망디포맷(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민스크 합의 이행 촉구, 4개분야 실무그룹(안보, 정치, 경제, 인도지원) 조속 개최, OSCE 모니터링 인력 증원 등에 합의(2015. 4. 13.)
○ 두 차례 민스크휴전합의 이후에도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고, 민스크휴전합의 이행 관련 해서도 상호 이견으로 불안정 지속
○ 민스크접촉그룹회의 및 노르망디 포맷 외교장관회담/정상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 노력을 경주해오고 있으나 진전 별무
- - 우크라이나는 완전한 휴전 준수, 중화기 철수, 포로교환, OSCE 감시/검증 보장 등 휴전 합의 내용이 선행되어야만 대화를 통한 정치과정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반군을 대화 상대로 불인정, 민스크접촉그룹 내에서만 반군과 대화)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정부의 반군과의 직접 대화 및 즉각적인 정치 협상 개시를 주장하면서 반군에 대한 병력, 전차 및 대포 등 무기를 계속 공급
○ 향후 전망
- -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동 내전으로 양측 군인 · 민간인 10,600명 이상 사망 및 약 200만 명의 이재민 발생 (2018.11월 기준)
- - 민스크휴전협정에 대한 우크라이나-러시아간 현저한 인식차이로 인해 동 휴전협정이 온전히 준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 전망
- - 러시아 영향권 아래 있는 Donbas지역 국경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는 계속되고, 러시아측도 동 지역 개입의 직접적 목적인 對우크라이나 국경 통제를 포기하지는 않을 전망
- - 우크라이나내 민족주의자들은 친러반군에 대해 일체의 양보도 하지 않으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어 향후 우크라이나정부의 러시아와 정치 협상에도 큰 부담이 되어 획기적인 정치적 타결이 어려운 상황
- - 정치적 부담이 적은 인도주의 구호 및 반군과의 경제적 교류 등은 진전 가능
크림반도, 흑해, Azov海를 둘러싼 분쟁[편집]
○ 1997.5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정부간 "흑해함대 분할협정" 체결
- - 동 함대의 81.7%는 러시아로, 18.3%는 우크라이나로 분할
- - 러시아는 세바스토폴港의 부두시설 및 함대관련 시설을 임차하여 계속 사용
○ 러시아는 2014.3월 크림반도 점령 · 병합 후 “흑해함대 분할협정(1997년)” 파기
- - 세바스토폴港 부두시설 및 함대관련 시설 등 크림반도내 모든 군사시설/장비 장악
- - 이후 우크라이나 소유 군함 50척중 35척만 우크라이나측에 인도
○ 러시아는 2018.4월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잇는 대교(Kerch Bridge) 완공 및 개통
- - 동 대교는 흑해에서 Azov海를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에 건설
- - 동 대교의 높이가 낮아, 높이 33미터 이상의 선박은 출입 불가
- - 러시아는 크림반도 및 Azov海에서의 정찰장비/대공장비 등 군사력을 증강하고, Azov海 우크라이나 항구(Mariupol港, Berdyansk港)로 출입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해 검문 등 출입통제 조치 시행(출입허가 발급에 5-7일 소요)
- - 동 대교건설 및 출입통제 조치로 Azov海 우크라이나 항구 이용 화물 물동량이 30% 감소
- ※ 우크라이나-러시아간 체결된 "Azov海와 Kerch해협 사용에 관한 협정"(2003년) 에 따르면 양국 함정의 자유항행이 가능한바, 우크라이나측은 러측이 동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간주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상기 점령 및 출입통제조치에 대응, Berdyansk港에 군사기지 건설 추진, 경비정 배치 등 노력하고 있으나,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역부족인 상태 인바, 국제사회에 러시아측 조치의 부당/불법성을 호소중
- - 2018. 2. 20. 국제상설중재법원(PCA)에 러시아 유엔해양법협약 위반 제소
- - EU, 미국 등에 對러 제재 등 공동대응 및 對함 무기장비 제공 등을 요청
- - UN 총회에 "크리미아 자치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흑해 일부 및 Azov海의 군사 문제" 관련 결의안 제출(2018.11월) 및 통과(2018.12월)
- - Kerch대교 인근해역에서 러시아 함정이 Azov海로 진입하려던 우크라이나 해군 선박 3척(장병/선원/정보원 등 24명 포함)을 공격/나포한 사태(11. 25.)로 인해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對러 접경/인접 10개州에서 30일간 계엄령 시행 (2018. 11. 26-12. 26.)
- - 우 · 러 상호 포로 교환시 24명 승조원 전원 석방(19.9월) 및 나포 선박 반환(19.11월)
○ 국제사회의 러시아의 상기 점령 및 출입통제조치에 대해 비난 성명 등 발표
- - EU는 러시아의 불법점령/병합한 크림반도 강제통합조치 및 Kerch대교 선박통행 제한 조치 등을 비난하는 성명 발표(2018.5월, 2018.7월)
- - 미 국무부는 러시아의 Azov海 출입 통제조치 비난성명 발표(2018.9월)
- - 유럽의회는, 러시아의 불법적 Kerch 대교 건설에 관련된 러측 6개 회사를 제재키로 한 유럽이사회 결정을 환영하고, 러시아의 크림/Azov海에서의 군사력 증강 및 불법적 석유/가스 채굴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향후 Azov海에서의 긴장/갈등 심화시 對러 추가 제재해야 할 것이라면서, EU집행위 등에 관련 상황 조사/평가 및 출입통제조치 피해 지원 방안 검토 등을 요청하는 결의안 통과(2018. 10. 25.)
對몰도바 관계[편집]
○ 우크라이나는 몰도바와 같이 親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對몰도바 협력관계도 강화하는 추세
- - 몰도바 Transdniestria 지역주둔 러시아군 철수 필요성에 대한 現 몰도바 친서방 정부의 입장 지지
- - 안정적인 對몰도바 전기공급 복원, 상호 국경관리 협조, 몰도바내 Dniester 江 환경보호 협조 등
○ 몰도바는 對우크라이나 우호협력 강화를 추진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反러 정책에는 전면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
- - △Transdniestria 지역내 러軍 주둔, △몰도바내 러시아계 언론의 영향력, △러시아는 몰도바의 최대 FDI투자국이자 2위 무역상대국, △천연가스의 절대적인 對러 의존, △러시아내 몰도바 노동자들의 연간 4억불에 달하는 송금 등 감안
기타 대외 관계[편집]
- 대한민국
우크라이나는 1992년 2월 10일에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2022년 현재에도, 양국을 이어주는 직항 항공 노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제3국을 경유하여 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2022년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사전에 허락없이는 입국을 불허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크라이나는 1992년 1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과거 1998년에 우크라이나 현지에 있는 대사관을 폐쇄, 철수하였으며, 2022년 7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주권 국가로 승인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양국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1992년에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러시아에 비해서 약간 양호적이기도 했으나, 벨라루스 정부와 루카셴코 대통령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고 말았으나, 벨라루스의 반정부 세력은 우크라이나에 동조하기도 한다.
- 미국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더불어서, 친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해왔으며, 2022년에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피해로 의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인 군사ㆍ경제적인 지원을 시행하는 준비에 이르고 있다.
- 독일
독일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지만, 우크라이나인들도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던 과거 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해선 반독감정도 있는 편이다. 다만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독일에 호감을 가진 이들도 많은 편. 또한 우크라이나의 친유럽주의자들은 유럽연합 가입을 바라며 독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네오 나치들이 존재한다. 이와 별개로 우크라이나에는 독일계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고 있다.
- 중국과의 관계
본격적 관계는 1992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이후이다.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키이우와 베이징은 자매 도시이기도 하다. 2013년에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비핵국가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에 돈바스 전쟁과 관련해서 주 중국 우크라이나 대사가 중국이 원한다면 중국의 평화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중국이 친러국가이고 러시아는 친중국가이니 우크라이나와 중국도 사이가 나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는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합병 시도를 불편해 하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병합하건 말건 관심 없어하는 상황 속에서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우크라이나 보건부에서 스푸트니크 V 백신은 절대 사용도 인정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대신 스푸트니크 V 백신보다 그닥 싸지도 않으면서 성능이 훨씬 더 안 좋은 게 확실한 중국산 백신을 수입한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2021년에 우크라이나가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며 신장 지역 인권상황 성명에서 빠진 것에 대해 중국 측이 환영의 뜻을 밝혔다. 2021년 7월 13일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를 하여 양국의 협력방안을 논의 하였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관련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를 위해 UN 안보리가 소집되었으나 예상대로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 중국이 기권하여 기각되었다. 중국측은 우크라이나 내 중국인들의 철수를 진행하고 있다. 3월 1일에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중국 측에 전쟁을 중단하도록 설득을 요청했다. 3월 7일에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을 할 의사를 밝혔다. 3월 9일에 중국 적십자사가 위챗 공식 계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에 10억원 상당의 구호 물품을 전달한다고 밝혔다. 3월 19일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은 중국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비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3월 21일에 중국측이 우크라이나에 구호물품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6월 15일에 시진핑 주석은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해 협력한다고 밝혔다. 중국 측은 러시아, 이란과 공조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자도 맡을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군사[편집]
구 소련군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식 군편제였으나 독립 이후 지속적인 서방식 개혁을 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 병합 이후 우크라이나군은 소련(러시아)의 잔재를 청산하고 서방 NATO식 표준에 맞게 군대를 개혁해 나가고 있다. 1992년 우크라이나 독립 당시 소련군 16개 군구 중 3개를 이어받은 만큼 초창기 우크라이나군의 규모와 전력은 상당하였으나, 이후 지속적인 경제난과 러시아 비위 맞추기로 인해 2013년까지 지속적인 감군이 이루어져 왔다.
육군의 규모가 크며 동유럽에서는 폴란드 육군 다음가는 강군이다. 인적 자원은 폴란드군 못지 않으며, 기계화 전력도 수적으로는 상당하나, 장비가 매우 노후화되어 있다. 공군 또한 중~동유럽에서 상당한 규모다. 해군은 소련 흑해 함대를 러시아와 나누어 물려받은 만큼 초기에는 동유럽 최강의 해군이었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 및 강제 합병으로 인해 크림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세바스토폴 해군본부와 대다수의 해군기지, 전투함이 통째로 러시아로 넘어가며 해군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전투함으로 3천 톤급 호위함 단 1척만 존재하여 해군이 명맥만 이어가는 수준이었으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개전 후 러시아의 노획 우려로 그마저 자침시켜 현재 해군 전력이 사실상 와해된 상황이다. 한편 구 소련 국경군의 후신인 해안경비대가 별도로 존재하여 해군과 해상 임무를 분할한다. 해병대는 해군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소련식 편제의 영향으로 공수군, 특수작전군이 별도로 있고, 러시아의 위협 강화로 예비군인 국토방위군이 정식 군 편제로 승격되었다. 소련 국경군의 후신인 국경수비대는 2003년 법령 개편으로 국방부에서 떨어져 나와 준군사조직으로 분류되지만 전시에는 국방부로 지휘가 이관되어 정규군 역할을 한다. 국가방위대(내셔널 가드)는 내무부 소속으로 돈바스 내전에 참전하였다.
소련의 일원이었던 만큼 동구권 무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서방제 무기를 많이 구입하거나 구 소련 무기를 개량해서 사용하는 중이다.[8] 전차만 해도 구 소련의 주요 설계국이었던 하리코프 모로조프 설계국이 있던 곳이라 T-64 계열차량과 개량형이 많으며 T-80 전차를 기반으로 디젤 엔진을 장착한 T-84를 수출을 위해 서방 표준인 120 mm 주포와 버슬 탄약고를 장착한 수출용 전차인 T-84-120 야타간을 개발하기도 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우크라이나가 소련 붕괴 당시의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던 구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갓 설립된 국방부는 이러한 큰 규모의 군대를 다시 재편성하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Tu-22M 등 다양한 무기들을 스리슬쩍 인수했기 때문에 가진 것은 많은 편이다.
복합 전쟁인 돈바스 내전을 통해 해군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실전 경험을 쌓고 있는 군대다. 원래 소련식 군편제를 가졌으나 이후 미국과 나토군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서방 나토식 편제로 꾸준히 개편을 해왔고, 부족한 재정 속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의 복합전에 대응해야 하다보니 편제의 개편과 통폐합이 매우 빈번히 이루어지고, 다양한 형태의 조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실전을 통한 빠른 개선과 개혁 과정을 거치며 우크라이나군은 효율성과 유연성이 높고 임기응변에 강한 면모가 나타나고 있다. 육해공 등 군종이 6개나 되지만 실질적으로 해군을 제외한 5개 군종이 4개 지역 사령부에 혼합군으로 편제되어 유기적인 지휘 체계와 작전 능력을 보유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대규모로 침공해온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고 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만큼 우크라이나군의 전망은 가히 절망적이었으나 예상과 달리 엄청난 전투력과 전략전술의 구사, 국토수호를 위한 굳건한 항전 의지를 보이며 러시아군을 상대로 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동안 과소평가받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서방제 무기들을 적재적소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서방제 무기 재평가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 특히나 서방에서 2선급으로 물러난 무기들을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에 어울리게 굉장히 잘 사용하고 있다.
재블린과 스팅어의 경우에는 비싼 가격과 노후화를 이유로 생산라인이 멈추었거나 2선급으로 물러난 무기들이지만 초반 키이우 방어전에서 러시아군의 전차와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모습을 연출하며 단박에 인기상품이 되어 미국내 생산라인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10년 전에 독일에서 퇴역시킨 나토군의 구형 무기체계인 게파트 자주대공포 역시 유용하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고성능 무기에 속하는 HIMARS로 러시아의 탄약고와 기지를 핀포인트 타격하며 전황을 뒤집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서방국가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당연히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모두 우크라이나군이 자기들이 만든 재블린, 스팅어, 하이마스, 하푼, AGM-88 HARM 대함미사일, 대레이더 미사일 등을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쓰는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이를 본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주문량이 폭주해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으며 독일의 경우에는 자국이 퇴역시킨 구형무기인 게파트 자주대공포를 우크라이나군이 유용하게 쓰자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또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들도 노획한 후 재정비 및 수리하여 유용하게 잘 활용하고 있다.
거기다 10월 29일에는 세바스토폴 항에 몰래 드론들을 잠입시켜 흑해함대의 여러 함선을 파손하고, 10월 31일엔 러시아 프스코프 주의 비행장에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이 침투 및 잠입해 헬기 5대를 완파 혹은 중파하는 사보타주를 성공하는 등 특수전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2023년에는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GDP의 13%를 국방비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행정구역[편집]
최상위 행정구역은 24개 주(область), 1개 자치공화국(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 2개 특별시(місто зі спеціальним статусом)의 27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은 2014년 이후부터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다.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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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 공화국
- 특별시
경제[편집]
1인당 GDP는 2021년 10월 IMF 기준, $4,384로 유럽에서 가장 빈국이다. 다만 여기에는 지하 경제가 빠져있어 실제 1인당 GDP는 이보다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내전을 겪으면서 화폐가치와 경제가 붕괴하면서 2014년 1월 1달러당 7흐리우냐 수준에서, 2016년 4월 1달러당 25흐리우냐로 1/3 이하로 폭락하였으며, 2021년에도 1달러당 27흐리우냐 수준으로 경제붕괴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유럽권 내에서 가장 심하게 폭락한 화폐이며, 2위는 우크라이나와 싸우던 러시아 루블이다. 러시아 루블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으면서 반토막났다. 2016년 2월 기준 월평균 급여는 약 165달러로 작년보다 떨어졌다고 한다. 최저임금은 1,378흐리우냐로 약 50달러 수준이다. 한국 환율로 따지면 56,800원인데, 하루치가 아니다. 월급이다. 실제 대부분 사람들의 월급은 20~30만원 정도라고 보면 된다. 2017년 최저임금의 대대적인 인상으로 2020년 기준 최저임금은 4,723흐리우냐로 약 170달러이다. 한화로는 약 20만원. 2019년 6월 기준 평균 월급은 $431로 한화 50만원 정도로 올랐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장바구니 물가는 대한민국의 1/4 ~ 1/3 수준이다. 다만 이는 우크라이나산 식료품에 한정된 이야기이며, 공산품의 경우 수입품이 대부분이라 대체로 가격이 높은 편이다. 특히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공산품들은 환율에 따라 변동이 심하며 대한민국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 또한 유럽이 대체로 다 그렇듯 마트의 식재료는 매우 싸지만 식당에서 하는 외식은 상대적으로 비싸다. 이렇게 물가가 싼 우크라이나에서도 전통 요리 같은 걸 먹으려면 한끼에 최소 한화로 5천원 정도는 써야 한다. 푸드트럭이나 키오스크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은 한화로 2천원 정도.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진 농업과 소련 시절 지어진 대규모 중공업단지나 제철소, 탄광을 가지고 있어 경제가 발전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하지만 이웃 슬라브 3국 중에서도 경제발전이 많이 뒤처지는 편이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전후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인 소련제 무기와 군수물자를 구입하던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그만두었고, 세계적인 군축 분위기에 힘입어 각국이 군축에 전념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력산업인 방위산업의 판로가 죄다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발트 3국을 위시한 중유럽, 북유럽 국가들은 원래 산업 기반이 잡혀있던 지역이었고 체제 전환에 따른 충격을 1990년대 초에 이미 극복하지만, 우크라이나는 1993년까지 수천~1만%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1996년에야 비로소 두자리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는 등 혼란을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심각하게, 그것도 오랫동안 겪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부터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지만 이 전환도 2000년에 가서야 완료되는 등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과 전환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 결과 1999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마이너스 성장률을 달성하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문제도 있겠지만, 하술할 지역간 산업 차이 문제, 그리고 너무나도 뒤늦은 경제개혁을 이유로 들 수 있다. 1994년까지 우크라이나는 이미 붕괴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때문에 소련 붕괴에 따른 국내외적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29] 이 시기 우크라이나는 -10~-20%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994년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당선 후 IMF와 세계은행의 조언에 따라 기초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1999년 쿠치마 대통령 재선 후 총리로 전격 발탁된 빅토르 유셴코가 재정과 에너지 제도를 개혁하고 대기업 및 토지사유화를 단행하여 시장경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경제성장률이 올라갔다. 물론 경제성장의 스타트라인 자체를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늦게 끊었으므로 이미 벌어진 격차는 어쩔 수 없었고.
1991년 독립 이후 다른 소련 국가와 같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 변환을 거치는 과정에서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특히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은 1996년 카르보바네츠(Карбованець)를 오늘날 쓰이는 흐리브냐(Гривня)로 교체했다. 하지만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등으로 인해 2000년 초반까지 통화 불안정을 겪었다.
이후 2001년부터 경기가 점차 회복세로 돌아서 2007년 통계에 의하면, 2001년 빈곤율 32%에서 2005년 8%로 급감했다. 출처 (세계은행 보고서) 특히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수출량이 50% 증가하면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2014년 크림 위기 이후 주요 교역국이었던 러시아와 무역이 중단되면서 GDP에서 약 10.4%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출처(UA Today) 2016년 5월에는 IMF가 우크라이나의 부패 청산과 경제 개혁을 조건으로 하여 175억 달러 가량의 대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로도 자주 연결이 되는데, 농업이 주산업인 중부 지방은 소련 시절에 농민들을 탄압해 온 역사(라스쿨라치바니예, 홀로도모르 참조.) 때문에 러시아에 반감이 상당히 심한 반면, 광공업이 주산업인 동부 지방은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소련 시절 동부 우크라이나 공업지대는 소련 중화학공업/군수공업의 한 축을 이루었다. 소련 주요 우주발사체 로켓을 설계한 하르트론 설계국, R-36 미사일(NATO명 SS-18 사탄)을 제작한 유즈노예 설계국, An-225로 유명한 안토노프 설계국과 T-64를 제작한 하르코프 공장이 전부 우크라이나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에도 한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양의 기계류를 수입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지하 경제 규모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체 GDP의 최소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때문에 공식적인 소득 수준만 본다면 우크라이나가 매우 가난한 국가로 보이고 실제로도 가난한 국가가 맞지만 그래도 다른 개발도상국들보다는 잘 사는 편이다. 1인당 GDP만 놓고 보면 동남아 수준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학 진학률 등은 동남아 보다 훨씬 높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과 거의 차이 없다. 물론 그렇다 해도 우크라이나의 생활수준은 동유럽을 기준으로 봐도 매우 뒤떨어진다. 폴란드나 러시아, 서유럽, 미국 등지로 일하러 나가는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으며 두뇌 유출 문제가 심각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2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경제가 크게 불안해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2021년 10월에도 1인당 GDP가 꼴찌였다는 점에서, 전후 미국이나 유럽에서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계속 유럽의 최빈국으로 남을 우려가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미국, 유럽등 서방에서 우크라이나의 전쟁 승패에 상관없이, 전쟁이 끝난 이후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우크라이나 경제에도 어느정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몰도바와 함께 EU 회원 후보국으로 공식 확정되는 호재도 생겼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막대한 경제손실을 겪었고, 또한 겪을 예정이다. 3월 10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수석경제고문 올레흐 우스텐코(Олег Устенко)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물적 자산에 입힌 손실이 이미 1,000억 달러를 넘는다고 추산했다. 4월 10일 세계은행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GDP가 전년 대비 45.1%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2022년 7월 17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쟁 시작부터 지금까지 총 124억 달러치의 금을 팔았다고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부총재가 밝혔다.
2022년 7월 26일 우크라이나 국영가스기업이 재정난으로 인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2022년 7월 29일 S&P는 우크라이나의 신용등급을 디폴트 수준으로 3단계 강등했다.
2022년 8월 2일 우크라이나의 싱크탱크인 키이우 경제연구소에서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1,083억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경제부는 2022년 GDP 감소율이 30.4%이며 예상보다 양호한 수치라고 발표했다.
농업[편집]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흑토의 30%를 보유하고 있어 농업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의 강국이다. 상술하듯이 소련 시절에도 소련 밀 생산량의 절반 가까운 수치를 우크라이나에서 생산했을 정도였고, 소련 해체 이후로 경제혼란과 집단농장 해체로 잠시 생산량이 크게 줄기도 했지만 2000년대에 회복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 2018년 유엔식량농업기구 자료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곡물이 수확되고 있다. 세계 3위의 감자(2,250만 톤)와 메밀(13만 7천 톤), 세계 5위의 옥수수(3,580만 톤), 세계 7위의 보리(730만 톤)과 호밀(39만 3천 톤), 세계 8위의 밀(2,460만 톤)의 생산국이다. 특히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해바라기씨는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또한 유럽 최대의 양봉업 국가이다.
우크라이나가 2020년 한 해동안 6540만톤의 곡물과 콩류를 수확했으며 이는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 줄어든 양이지만 국내수요의 3배가 넘는다고 밝혔다.
2020년 3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농지 판매 금지를 해제했다.[38] 토지 시장은 2021년 7월 1일 처음으로 완전히 개방되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식량생산량이 상당히 감소할 것이며, 그 이상으로 흑해가 봉쇄되어 기껏 생산한 식량의 유통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량이 절반에 그칠것으로 우려된다고 밝혔다.
공업[편집]
소련의 대표적인 중공업 지역이었기 때문에 낮은 국민 소득과 달리 일부 중공업(철강&항공)과 방산업 기술 수준은 높은 편이다. 항공기를 제작하는 안토노프, 항공엔진과 우주발사체를 설계 및 제작하는 유즈노예와 유즈마쉬, 터빈 기술 등이 유명하다. 대한민국도 우크라이나와 항공우주, 터빈 등의 분야에서 기술 교류를 하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기술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고 북한 등 불량국가들도 우크라이나 기술을 눈독들이고 있는 것이다.
광업[편집]
우크라이나는 매장 범위와 규모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광물 생산국 중 하나이다. 약 90개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중 약 20개가 경제적으로 중요하다. 알려진 모든 예금의 약 절반이 착취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석탄 매장량은 471억 톤에 달한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 연간 국내 수요는 약 1억 톤이며, 이 중 85%는 국내 생산이 만족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석유와 가스 소비량의 각각 10%와 20%를 충족시키는 가스전을 보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39조6000억 입방피트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국내 생산량은 국가 수요의 20%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에는 철광석(280억 톤으로 추산), 망간광석(30억 톤), 분필, 석회석(15억 톤)이 매장되어 있다. 국내 산업 부문은 지속적인 에너지 부족과 1995년 말에 총 7억 9천 2백만 달러의 에너지 공급 상환 부채로 고통 받고 있다.
2019년에는 세계 7위의 철광석 생산국,세계 8위의 망간 생산국, 6위의 티타늄 생산국, 7위의 흑연 생산국이었다. 2018년에는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우라늄 생산국이었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인구 면에서, 아니 생존 자체에서 비참한 경험을 했다. 인구 구조 자체는 러시아나 벨라루스와 비슷하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더 안 좋은데, 우선 적백내전이 끝나고 겨우 독립을 하나 싶더니 폴란드와 소비에트가 쳐들어와 땅을 낼름해버렸다. 그냥 얌전히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양측에서 저지른 '정리 작업'으로 인해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민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이는 애교로 보일 정도의 대사건이 터졌으니, 1930년대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굶어죽은 것이다. 1933년의 평균 수명이 남자 7세, 여자 10세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근을 넘겼나 했더니 이번에는 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 통에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 특히 이번에 쳐들어온 이들은 폴란드와 소련보다 몇 배는 악랄한 나치 독일. 이들의 학살 스케일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무려 시체로 이루어진 퇴적층이 만들어졌고 이게 아직까지도 우크라이나에서 종종 발견될 정도이다. 이 때문에 현지 거주 유대인을 포함하여 7백만 명이 전쟁 중에 죽었는데, 이는 당시 인구수의 1/6이 넘는 숫자다. 그로 인해 1941년~1944년의 기대수명은 남자 15세, 여자 25세에 그쳤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후 베이비붐과 크림 반도 획득으로 1950년대 중후반에 대기근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구손실을 만회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1.9-2.1명 정도의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인구성장은 점차 주춤해졌다. 소련 붕괴 직후의 인구는 5,200만을 찍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출산율의 급속한 감소와 해외로의 이민 문제까지 겹치면서 인구 감소가 시작되더니 1999년에 인구 5,000만 선이 붕괴되었고 이후로도 인구가 쭉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구는 2021년 3월 기준 4,354만 명이며 1992년에 5천2백만 명을 넘긴 이래 급격한 감소 추세에 있다. 이는 소련 붕괴 이후 크게 낮아진 출산율과 높은 사망률(영아 제외시 천 명당 14.7명)을 기록하는 인구구조를 띠기 때문으로, 영아 사망률(천 명당 8.4명)이 상당히 높다. 출산율 자체는 이미 2001년(1.08명)에 저점을 찍었고, 이후에는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상승하였으며 이에 따라 출생아수도 30만 명대 후반 정도에서 50만 명선까지 올랐으나 2014년부터는 크림 반도 분리의 영향으로 다시 40만선으로 떨어졌고 2020년에는 아예 30만도 무너져버렸다. 게다가 사망률이 워낙 높다보니 현재까지도 인구 감소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고령화가 그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은데, 이는 사망율이 높아서 평균 수명이 워낙 짧기 때문이다. 이건 더 빠르게 인구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므로 좋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평균 수명이 마냥 짦은 것은 아닌데 2016년에 집계된 우크라이나의 기대수명은 72세이다.
주별로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우크라이나 서부는 농촌지역이 많아서 비교적 출산율이 높은 편이고, 도시화가 이루어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출산율이 낮은 편이다.
이민 나가는 사람도 많고 이민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1991년~2004년 동안 220만 명이 우크라이나로 이민을 왔고(주로 구소련권의 우크라이나계를 중심으로), 250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이민온 사람이 많다 보니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4.7%가 이민자 출신이다. 그리고 2014년 이후의 혼란으로 백만 단위의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러시아로 이주했다고 한다.
평균 수명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정체중이다.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 의존증 문제도 심각한데다가 환경오염 문제까지 겹쳤다. 러시아와는 다르게 소련 붕괴 이후에 평균수명이 대폭 감소하는 참사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50] 이후로도 평균수명이 크게 연장되지 않아서 현재까지도 70대 초반에 머무르고 있으며[51] 이러한 탓에 2012년 기준 세계 제2위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천명당 15.76명이 사망했다.
총 인구의 77.8%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 외에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 약 17.3% 되는데 이들은 주로 동부와 남부에 거주한다. 서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거의 단독으로 사용되며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중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둘 다 사용된다. 나머지 4.9%의 소수민족은 0.8%의 몰도바계-루마니아계, 0.6%의 벨라루스인, 0.5%의 크림 타타르계, 기타 불가리아계, 헝가리인, 폴란드계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유대계, 아르메니아계, 우룸인(크림 그리스-고트족 후손), 가가우즈인, 흑해 그리스인 등이다.
세계에서 인구 감소가 가장 빠른 나라 1위로 꼽혔다. 아무런 추가적 요인 없이 수학적으로만 계산한다면 2020년 4,200만에서 2,100년 2,441만으로 무려 42.9% 감소할 것이다. 한국(5,130만 → 2,954만, 42.4%), 일본(1억 2,600만 → 7,496만, 40.5%) 보다 크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나라가 내전 중이라 어려울 것으로 평가된다. 2013년 이후 출생아 수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2015년 통계 기준으로 정세 불안에 의해 출산율이 급락해서 1.31로 더 떨어진 데다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률까지 올라가면서 평균 수명도 오히려 더 짧아지고 말았다. 인구학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한 것이다.
대한민국, 일본과 함께 최근 5년 간 출생아 수가 가장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서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는데 현재 4,200만 명대로 감소했지만 감소세가 오히려 더욱 더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출생아 수가 사망자 수의 38%에 불과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치안[편집]
경제난으로 범죄조직과 부정부패가 심해서 우크라이나 마피아와 레드 마피아의 조직범죄가 심한 편이었다. 호텔이나 관광지에는 유럽국가들이 다 그렇듯이 소매치기나 절도 범죄가 있는 편이다. 동양인 상대로 사기 범죄나 갈취 범죄도 간간히 발생한다.
2022년 2월 12일, 우크라이나 위기 고조로 인해 대한민국 외교부는 우크라이나를 여행경보 최고 단계인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여행금지 국가 지정일부터 한국여권을 이용해서 우크라이나 입국시, 여권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현지 교민 및 체류 국민들에게 철수권고가 내려졌으며, 2월 27일 기준 57명이 잔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12명은 폴란드, 루마니아 등 인접국으로 철수중이다.
- 총기 소지
모 방송에서 누구나 쉽게 총을 살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AK-47 VS M16 농담에서 나온 것처럼 땅파면 총이 나올 정도는 아니어도 총이 흔한 셈으로, 그 결과는 유로마이단 당시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에서 입증되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회인 최고 라다는 민간인의 총기소지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수도 키이우 방위를 위해 장비와 자동소총을 시민들에게 불출했다.
종교[편집]
역사적인 이유로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화권에 속해 왔으며 대체적으로 정교회가 우세하다. 정교회 내에서 교회법상 위치를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교회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뿐이었다. 다만 설문조사의 주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가 더 우세한지, 아니면 그 라이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가 우세한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자들 상당수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특별히 구별하지 않으며, 출석하는 성당의 소속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게 따지면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정교회 인구가 72%로 절대 다수이고, 여기에 서부에 주로 분포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14.1%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상당수 정교회가 실질적 총대주교 관할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를 두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간에 정교회 대립이 있다. 지역별로 종교 분포를 볼때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가 상당히 높고, 이외에 남서부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높으며, 이외 모든 지역은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가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2018년 12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러시아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취소하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독립교회로 인정하며, 러시아 정교회가 내린 파문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여기에 분노하여 동월 15일 교회회의(시노도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성사교류 단절을 선언했다.
동년 동월 15일, 우크라이나의 통합 정교회 추진위원회는 키이우 총대주교청 정교회 산하 주교였던 에피파니를 우크라이나의 첫 독립정교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19년 1월 5일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포로셴코와 에피파니 주교가 함께 터키로 가서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독립교회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참관했다.
우크라이나 내에도 크림 타타르인, 볼가 타타르인 등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수니파 무슬림 인구도 있다.
언어[편집]
우크라이나 헌법에 규정된 국어는 우크라이나어 뿐이며, 역사 및 지리적인 이유로 러시아어도 널리 사용된다. 주로 동부와 남부 지역에서 러시아어 화자가 많은 편이고 특히 크림 반도는 러시아어가 주로 사용되는 지역이다. 서부는 우크라이나어 위주이며, 가운데 쯤에 있는 수도 키이우와 중부지역은 반반 경계선 느낌이다. 돈바스 전쟁 이후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어가 러시아의 언어라고 반감을 품고 보이콧하는 국민들이 간혹 있는데 특히 르비우 같은 서부에서 그런 경향이 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양쪽 언어 모두를 모국어로 인식하는 편이다.
제1언어가 러시아어라고 해서 모두 러시아계인 건 아니고 우크라이나계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러시아어가 제1언어인 사람도 꽤 많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 민족 구분과 언어 구분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 당장 친서방 성향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조차도 모국어는 러시아어고, 우크라이나어는 의사소통까진 가능하지만 비교적 서툴다.
2012년에 러시아어의 지역 공식어 지정에 대해 우크라이나 야당 의원들이 항의해 집단난투극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2013년 유로마이단, 2014년 러시아의 크름 반도 병합과 돈바스 전쟁, 2022년 전면전을 겪으면서 러시아어 사용자 수가 감소하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러시아어 화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크름 반도와 도네츠크, 루간스크 시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러시아어 화자가 물리적으로 감소했다는 점과 러시아어를 쓰던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러시아어 사용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하거나, 최소한 두 언어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 꼽힌다.
우크라이나어(전체 인구의 약 67%가 사용)는 동슬라브어파에 속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러시아어와도 매우 밀접하다. 동부 지역과 남부 지역, 수도인 키이우에서는 오히려 러시아어가 더 널리 쓰인다 한다. 가까운 언어라서 그런지 우크라이나어로 말걸면 러시아어로 대답하고 그러는 일도 흔하다. 러시아어 사용자는 30%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민족보다 우크라이나어 사용자가 더 적은 편인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이면서도 15% 정도인 554만 명은 러시아어를 쓰기 때문이다(전체 러시아어 사용자의 40% 가량을 차지). 또한, 우크라이나사람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중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쓸 줄 아는 경우에는 러시아와 가까운 동부와 남부지역, 키이우이고 동부와 남부지역의 주들에선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지역공식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쓰이는 러시아어의 경우에는 우크라이나어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고 우크라이나어에서 쓰이는 어휘도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발음조차도 우크라이나어에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г라는 문자를 h발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편이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와 매우 비슷하다보니 우크라이나의 도시와 동부지역에서는 수르지크라는 혼합언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도에서 보듯 크림 반도와 일부 동부지역을 제외하면 우크라이나어가 강세인 지역이 많다. 인터넷 웹사이트나 학교/직장에서는 양쪽 언어 모두를 사용/병기 하는것이 일반적이다. [70] 수도 키이우와 중부, 동부 도시에서는 민족주의자 또는 고위 공직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서 오직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내 SNS에선 러시아어가 사용되고 있다.
교육[편집]
소비에트 체제의 평등이념에 따라 전반적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독립이후 경제난의 영향으로 교육재정 또한 어려워 상당수 학교 폐교, 교사 직장이탈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대학으로는 키이우 대학교, 하르키우 대학교, 키이우 공과대학교 등이 있다.
과거 구소련식교육인 11학제에서 미국식 학제인 4-5-3 학제(12학년제)로 교육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는 교육 개혁을 실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중등교육 개혁 국가로 인정받는 핀란드가 적극 지원하며, 600만 유로 지원에 합의를 했다. 변경된 새로운 학제의 적용은 기본단계 2018년 9월 1일부터, 기본중등단계 2022년 9월1일부터, 전문중등단계는 2027년 9월1일부터 순차적으로 단행할 예정이다.
취학 전 교육(유치원)
- 5~6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취학전 교육기관으로 2010년 기준 해당 연령 아동 약 56%가 취학했다.
중등교육: 우크라이나의 중등교육은 초등, 중등, 고등학교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 제1수준: 초등학년(1-4학년)
- 제2수준: 중등학년(5-9학년)
- 제3수준: 고등학년(10-12학년)
직업 교육학교
- 직업학교(2년): 한국의 특성화고등학교에 해당. 직업 교육학교는 중등학년 9학년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현장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 상업, 예술, 농업 학교 등에 입학하여 직업교육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특수목적고등학교로 분류하는 예술고등학교가 직업학교에 포함되기에 이를 특이하게 느끼기도 하는 듯.
고등교육
- 제1수준: 2-3년 과정의 전문대학
- 제2수준: 4년 과정의 단과대학, 음악대학, 종합대학
- 소련 시절에는 50%에도 못 미쳤으나, 독립 이후 빠르게 증가하여 2010년대에는 80% 이상의 학생들이 고등교육과정에 등록하고 있다.
박사과정과 박사 후 과정
- 박사과정은 3년이며 학위 취득 이후 박사 후 과정에 입학할 수 있다.
고등교육에서 취득할수 있는 기존 학위는 학사, specialist, 석사, 박사였으나 교육개혁 이후 구소련 학위인 'specialist' 는 없어질 예정이라고 하는데 2022년 10월1일 현재도 소식이 없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침공 당일인 2월 24일부터 각종 교육기관들이 운영을 중단했으나, 키이우 전투가 끝난 4월부터 하나 둘씩 재개교하고 있다. 캠퍼스 대부분이 초토화 당한 하르키우 대학교 등도 운영을 재개하고 있다.
문화[편집]
문학[편집]
우크라이나의 문학적 전통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구체적인 기원은 12세기의 《이호르의 군대이야기》와 같은 중세 슬라브족의 연대기에 두고 있다. 현대문학의 시작은 18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의 소크라테스라 불리는 하리호리 스코보로다이다. 스코보로다는 엘리트보다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시와 철학 논문을 썼다. 1814년 농노로 태어난 열렬한 국가주의자인 타라스 셰프첸코는 국민적 영웅자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작가가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우크라이나 문학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20세기 초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는 이반 프랑코로서 소설, 시, 드라마, 철학 등에 관한 책을 썼다. 키이우에 있는 우크라이나 작가 연맹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음악[편집]
우크라이나의 음악은 아주 생명력이 넘치는데, 기병대의 공적을 찬양하는 장편의 서정적 발라드인 두마스와 서사시적인 빌리니의 구술양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민속음악은 16세기와 17세기에 류트처럼 생긴 악기인 코즈바를 가지고 영웅적 공헌을 찬양하던 음유시인들의 전설적인 코즈바르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에 코즈바는 45현까지 가질 수 있는 반두라로 바뀌었고, 반두라 성가대는 곧 유행이 되었으며 국민적 심벌이 되었다. 키이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반두라 합창단은 세계 공연을 한다. 미콜라 리센코는 가장 장 알려진 고전 작곡가이며, 현대 작곡가로는 콘스탄틴 얀케비치, 율리 메이투스, 유리 마이보로다와 플라톤 마이보로다 형제 등이 유명하다.
건축 양식[편집]
키이우에 있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건축 양식의 예로 들 수 있다. '피산키'라고 불리는 부활절 달걀의 전설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다. 부활절 달걀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왁스(또는 촛농)로 그림을 그리며, 염색을 함으로써 달걀에 산뜻한 색을 불어넣으며, 염색은 그 전 왁스칠한 부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달걀이 완전히 염색된 후에는 왁스칠 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색깔 패턴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기독교 수용보다도 선행한다. 2000년에는 카르파티야 산맥 근처에 있는 코로먀라는 도시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로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상징으로 선별된 피산카 박물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요리[편집]
우크라이나의 전통 요리는 러시아 요리랑 상당부분 겹치지만, 날씨가 덜 춥기 때문에 녹색 채소를 좀 더 많이 사용하는 편이며,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많이 먹던 러시아에 비해서 전통적으로 닭고기를 많이 먹는 편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초르노젬 이른바 흑토 지대를 중심으로 전통적으로 수산업과 농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고대 그리스에 이 지역의 스키타이인들이 밀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고대부터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근세 해당 지역은 농노제가 발달한 이유로 밀의 재배와 수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정작 현지의 우크라이나인 농민들 중 밀가루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일반적인 우크라이나인들의 주식은 감자나 호밀, 메밀이나 귀리와 같은 지주들이 따로 과세를 하지 않는 작물들이 주가 되었다.
또한 척박한 땅이 많은 러시아에서는 양과 염소를 키우는 경우도 많았을 뿐더러,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지방 공급원으로 돼지 비계를 선호했던 것과 다르게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양 덕분에 집약적인 토지 이용이 이루어지면서 양이나 염소보다는 닭의 비중이 더 컸고 러시아보다 날씨도 덜 추웠으므로 돼지 비계에 대한 수요도 상대적으로 적었음은 물론이다. 러시아에 비해서 닭고기 요리가 맛있는 편이다.
우크라이나 요리 중 제일 유명한 요리는 보르시와 해외의 우크라이나인 이민자들에 의해 유명해진 치킨 키이우(코틀레트 포 키이우스키;котлета по-київськи)가 있다. 버터와 시금치를 얇게 저민 닭가슴살로 겹겹이 싼 후 튀김옷을 입힌 요리이다. 그냥 흔한 치킨까스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직접 시식해보면 예기가 달라진다. 물론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키이우 치킨 말고도 우크라이나 요리 중에는 맛있는 요리가 많다고 주장하겠지만, 해외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가 러시아인 아니면 아슈케나짐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상당부분 겹치고, 우크라이나 요리만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같은 동유럽 문화권인데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밀접한 사이였던 만큼 우크라이나 요리와 러시아 요리는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는 사실 거리만 가깝다면 미식 관광으로도 적합한 나라인데, 우크라이나 자체가 원체 물가가 저렴한데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바가지가 아직 활성화되지 못해서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 가격이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다. 4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런치 세트가 100 흐리우냐(한화로 약 4천원) 정도인데, 한국으로 치면 4만원 정도를 내도 먹기 힘든 수준으로 요리가 고급지게 나온다. 고급 레스토랑 말고 일반적인 카페나 빵집에서 파는 치즈 샌드위치 등도 맛이 무척 훌륭한 편인데, 50 흐리우냐 정도면 과일 주스랑 샌드위치를 같이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바다 건너 이웃한 조지아가 동유럽에서 제일 요리가 맛있는 나라이다보니, 현대에는 조지아 요리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다고 한다.
스포츠[편집]
축구에서는 변방국으로 인식되었으나, 자국 명문구단 디나모 키이우와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국제무대 선전과 올레흐 블로힌과 이고리 벨라노프, 안드리 셰브첸코라는 국가적 영웅들이 등장, 2006 독일 월드컵에는 처음으로 출전해 8강까지 올랐다. 발레리 로바노브스키라는 UEFA 선정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에 선정되는 감독도 배출해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배우자가 축구선수이다.
세계적인 체스 초강국이다. 현재 러시아에 이어서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1명 있는 그랜드 마스터를 74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사실 대한민국에 있는 그랜드 마스터도 온전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그랜드 마스터는 알렉세이 김으로 우즈벡 고려인 4세로 러시아에서 GM 타이틀을 취득했다.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와전된 것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고 연맹 등록만 한국체스연맹으로 한 것이다. FIDE에서는 국가별 체스 통계를 개인 국적이 아닌 국가 연맹 소속에 따라 내기 때문에 한국에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고 집계된 것이다. 한국이 세계 90등(2020기준)이나마 해주고 있는 것도 알렉세이 덕분으로 알렉세이가 없었다면 랭킹에서 진작에 밀려 100위권 후반대라는 평을 받고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맞붙는 체스 대회가 열리면 국민감정이 심하게 악화하기도 한다. 유튜브를 통해 중계되곤 하는데 유튜브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시청자가 서로 욕설 배틀을 하는 건 일상이다.
하계 올림픽 강국이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9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13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12위, 2012 런던 올림픽 15위의 성적을 올렸다. 동계 올림픽 기준으로는 2014년, 2018년에 금메달 하나씩을 땄다. 근연 관계의 이웃 국가인 벨라루스와 비교하자면 하계 올림픽 성적은 우크라이나가 훨씬 우위이지만, 동계 올림픽에서는 벨라루스가 훨씬 우위이다.
복싱에 헤비급 챔피언 비탈리 클리츠코, 볼로디미르 클리츠코 형제가 있다. 형 비탈리는 1999년 처음으로 WBO챔피언에 오른 뒤 통산 45승 2패 41KO를 기록하고 헤비급을 천하통일한 뒤 2012년 은퇴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복싱 슈퍼헤비급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동생 블라디미르는 그 후 헤비급 통산 2위의 타이틀 보유기록을 썼으며 WBA,WBO,IBF 헤비급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센 형제 중 하나이다. 형 비탈리는 복싱 은퇴후 현 야당인 우크라이나 개혁민주동맹당의 당수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통령 출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지지를 얻어 2014년 6월 키에프 시장에 당선되었다. 경량급에서 활약중인 세계적인 프로복서 바실 로마첸코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종합격투기에서는 90년대 무규칙격투를 주름잡았던 이고르 보브찬친이 대표적이다. 격투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그 동생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펜싱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 은퇴한 남자 플뢰레의 세르히 홀루비츠키는 김영호와의 1997년 세계선수권 결승전에서 연장혈투 끝에 금메달을 거미쥐었다. 3년 후 김영호와 홀루비츠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에서 만났는데, 홀루비츠키는 이 경기에서 5대 15로 대패한 뒤 그대로 은퇴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 여자 사브르 단체전의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당시 올가 카를란가 마지막 바우트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에 힘입어 홈팀인 중국을 1점차로 잡고 우승하였다. 바로 앞선 준결승전에서는 매리얼 재거니스를 필두로 사브르 개인전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휩쓴 당시 세계랭킹 1위 미국을 6점차로 꺾었고, 더 전으로 돌아가 8강에서는 현재 세계랭킹 1위(당시 세계랭킹 4위)에 군림하는 러시아를 꺾었다. 이후 카를란은 크게 성장하였고, 여자 사브르 내에서 가장 꾸준한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여자 에페의 야나 솀야키나는 런던 올림픽 여자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을 연장전에 꺾고 우승하였다.
리듬체조를 상당히 잘 하는 국가. 특히 90년대 초반엔 러시아가 부럽지 않을만큼 최정상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현재는 이 바닥 1인자인 러시아가 굳게 버티고 있고 점점 선수들의 질적 저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오긴 하지만 아직까진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리듬체조 빅3로 꼽힌다.
야구도 한다. 세미프로 수준이지만 지역 팀간 리그가 있으며 유러피언 컵에도 수차례 진출할 정도로 실력이 나쁘지는 않은 편. 특이하게도 키로보흐라드 주의 야구팀인 Biotechkom-KNTU가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22번이나 우승하고 유럽 대회에도 나갈 정도로 국가대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 영상의 우크라이나 선수들도 Biotechkom-KNTU소속 선수들이다. 2019년에는 디비전 B에 속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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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우크라이나〉,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 《두산백과》
- 〈우크라이나/외교〉, 《나무위키》
- 〈중화권-우크라이나 관계〉,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정치〉, 《나무위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나무위키》
- 〈유로마이단 혁명〉, 《나무위키》
- 〈오렌지 혁명〉,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국호〉, 《나무위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의 대외 관계〉, 《위키백과》
- 〈우크라이나〉, 《위키백과》
- 〈우크라이나의 경제〉, 《위키백과》
- 〈우크라이나의 역사〉, 《위키백과》
- 〈우크라이나의 외교 정책〉, 《우크라이나 개황》
- 〈우크라이나군〉,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 요리〉, 《나무위키》
- 〈우크라이나의 의회와 정당〉, 《두산백과》
- 〈우크라이나의 헌법과 정부〉, 《두산백과》
- 〈우크라이나의 행정〉, 《두산백과》
- 〈우크라이나의 사법부〉, 《두산백과》
- 〈우크라이나의 문화〉, 《두산백과》
- 〈마린스키궁 (키이우)〉, 《위키백과》
- 〈국제 전시 센터〉, 《위키백과》
- 〈독립기념비 (키이우)〉, 《위키백과》
-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위키백과》
- 〈황금문 (키이우)〉,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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