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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미에는 조지아 최대의 항구가 있고, 중요한 상공업 도시이다. [[터키]]와의 국경으로부터는 약 20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열대 기후로 레몬이나 오렌지, 차를 재배한다. 조선, 식품가공, 경공업 등의 산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관광이다. | 바투미에는 조지아 최대의 항구가 있고, 중요한 상공업 도시이다. [[터키]]와의 국경으로부터는 약 20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열대 기후로 레몬이나 오렌지, 차를 재배한다. 조선, 식품가공, 경공업 등의 산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관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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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미에 대해 별도로 제공되는 종교 데이터는 없지만,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이며, 주로 국가 조지아 정교회를 신봉한다. 또한 무슬림, 카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유대인 공동체도 있다. | 바투미에 대해 별도로 제공되는 종교 데이터는 없지만,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이며, 주로 국가 조지아 정교회를 신봉한다. 또한 무슬림, 카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유대인 공동체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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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화) 01: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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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미(조지아어: ბათუმი, Batumi)는 흑해에 면한 조지아의 항만 도시로, 아자리야의 주도이다.
바투미에는 조지아 최대의 항구가 있고, 중요한 상공업 도시이다. 터키와의 국경으로부터는 약 20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열대 기후로 레몬이나 오렌지, 차를 재배한다. 조선, 식품가공, 경공업 등의 산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관광이다.
옛날에는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였다. 17세기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고, 주민의 이슬람교화가 진행되었다. 1878년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에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에 의해서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01년에는 스탈린이 바투미에서 파업을 일으켰다. 러시아 혁명 뒤에는 터키군이나 영국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1921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
조지아 정교회나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많은 종교가 혼재하는 도시이며 각각의 종교의 사원·교회를 볼 수 있다.
목차
개요
- 행정 단위: 아자리야 공화국 주도
- 면적: 64.9km²
- 인구: 179,185명 (2023년)
- 시장: Archil Chikovani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batumi.ge/en/
역사
초기 역사
Batumi는 " Bathus" 또는 " Bathys" 라고 불리는 Colchis의 고대 그리스 식민지 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 이는 그리스어 : βαθύς λιμεν , Bathus Limen ; 또는 βαθύς λιμήν , Bathys limēn , 문자 그대로 '깊은 항구')에서 파생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이곳은 요새화된 로마 항구 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건설된 페트라 요새로 버려졌다. 로마- 비잔틴 군대가 주둔한 이 곳은 공식적으로 라지카 왕국의 소유였으나 아랍인들이 잠시 점령하기 전까지 라지카 왕국은 이를 소유하지 않았다. 780년에 라지카는 왕조 연합을 통해 압하지야 왕국에 떨어졌다. 후자는 11세기에 조지아 군주제의 통일을 이끌었다.
1010년부터 조지아 왕의 에리스타비 ( ერისთავი , 총독) 의 통치를 받았다. 15세기 후반, 조지아 왕국이 붕괴된 후, 바투미는 이메레티 왕들의 주권 아래 있는 서부 조지아 공국인 구리 아의 왕자들( mtavari , მთავარი ) 에게 넘겨졌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15세기 카카베르 구리엘리(Kakhaber Gurieli) 왕자의 통치 기간에 오스만 제국은 이 도시와 그 지역을 정복했지만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100년 후에 다시 효력을 발휘했고 소호이 스타에서 조지아 군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가했다. 바투미는 여러 차례 조지아인들에 의해 탈환되었는데, 처음에는 1546년 로스톰 구리엘리(Rostom Gurieli) 왕자에 의해 처음으로 탈환되었으나 곧 이를 잃었고, 1609년에 마미아 2세 구리엘리 (Mamia II Gurieli) 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다. 1703년에 바투미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150년 동안 이곳은 흑해 동쪽 변두리에 있는 제국 배후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방 항구로 성장 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 지역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으나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이후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 조지아에 합병된후 다시 기독교 지역으로 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
이곳은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러시아가 합병한 마지막 흑해 항구였다.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바투미는 러시아 제국 에 합병되었다. 1878년 8월 28일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된 이 도시는 1886년까지 자유항으로 선언되었다. 1883년 6월 12일 쿠타이시 에 통합될 때까지 특별 군사 구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03년 6월 1일 Artvin Okrug , Batum Okrug는 Batum Oblast 로 설립되었으며 코카서스 총독의 직접 관리하에 놓였다.
바투미의 확장은 바투미- 티플리스 - 바쿠 트랜스코카서스 철도와 1907년 개통된 바쿠 - 바투미 파이프라인 건설로 시작됐다. 흑해의 석유 항구, 인구는 20년 만에 두 배로 빠르게 증가했다. 1882년 8,671명에서 1889년 12,000명으로 늘어났다. 1902년까지 인구는 16,000명에 달했고 1,000명은 Baron Rothschild 의 Caspian and Black Sea Oil Company 의 정유소에서 일했다.
1880년대 후반과 그 이후에는 정부가 이민을 허용하기로 동의한 후 7,400명 이상의 Doukhobor 이민자들이 바투미에서 캐나다로 항해했다. 퀘이커교도와 톨스토이교도는 군대 복무와 기타 직위에 대한 거부로 인해 제국 정부와 갈등을 겪은 소수 종교인의 이주를 위한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캐나다는 매니토바 와 서스캐처원 에 정착했습니다 .
러시아 내전, 소련, 그리고 1991년 독립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16년 전인 1901년에 소련 의 미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도시에 살면서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도시가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으며, 이는 1918년 6월 오스만 제국과 새로운 조지아 민주공화국 사이의 바툼 조약에서 확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결과 영국군은 1918년 12월부터 바투미를 장악했고 1920년 7월 도시와 지방이 조지아 민주 공화국으로 이관되어 아자리야에게 자치권을 부여할 때까지 머물었다. 1921년 케말 아타튀르크는 바투미를 포함한 아자리야 북부 지역을 볼셰비키에게 넘겨주었고, 볼셰비키는 트랜스코카서스 공화국을 정복했다. 조건은 바투미의 혼합 인구 중 무슬림을 위해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조건이었다.
1991년 조지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되찾았을때, 아슬란 아바시제는 아자리야 통치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1990년대의 소요 기간 내내 권력을 유지했다.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지역은 조지아 국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아자리야는 공화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있었다. 대신 Abashidze는 Adjara를 자신의 개인 영지로 만들었다. 2004년 5월, 그는 바투미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후 2004년 아자리야 위기를 종결시킨 후 러시아로 도피했다.
1991년 이후
오늘날 바투미는 조지아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조지아를 통해 운송되는 석유와 같은 물질을 수용할수 있는 80,000톤급 유조선을 수용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 도시는 지역 농산물을 수출한다. 1995년 이후 항구의 화물 전환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1년에는 약 800만 톤에 달했다. 항구의 연간 수익은 2억 달러에서 3억 달러 사이로 추산된다.
조지아의 흑해 연안이 계속 발전함에 따라 바투미의 전통적이고 고전 적인 도시 경관사이에 고층 건물이 건설되고 있었다.
바투미는 러시아 제12군사기지의 주둔지였다. 장미 혁명이후 중앙 정부는 이들 세력의 제거를 추진했고 2005년 모스크바와 합의를 이루었다. 합의에 따르면 철수 과정은 2008년 완료될 예정이었지만 러시아는 예정보다 앞선 2007년 11월 13일 바투미 기지를 조지아로 이전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기후
바투미는 쾨펜 (Köppen)의 분류에 따르면 습한 아열대 기후(Cfa)를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기후는 흑해의 육지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고 인근 언덕과 산의 지형 효과에 영향을 받아 일년 내내 많은 비가 내린다. 이로 인해 바투미는 조지아와 코카서스 전체에서 가장 습한 도시가 되었다.
바투미의 연평균 기온은 약 14°C(57°F)이며 1월은 평균 기온이 7°C(45°F)로 가장 추운 달이다. 8월은 가장 더운 달로 평균 기온이 22°C(72°F)이다. 기록된 절대 최소 온도는 −6°C(21°F)이고 절대 최대 온도는 40°C(104°F)이다. 일일 기온이 10°C(50°F)를 넘는 날은 239일이다.
바투미의 연평균 강수량은 2,435mm(95.9인치)이다. 11월은 평균 강수량이 312mm(12.3인치)로 가장 습한 달이고, 5월은 평균 강수량이 84mm(3.3인치)로 가장 건조한 달이다.
종교
1872년 주민 4,970명 중 약 4,500명은 무슬림(아자리야인, 투르크인, 체르케스인, 압하지야인)이었다. 1897년 인구 조사에서 정교회 인구는 15,495명(주로 슬라브인)이었고 이슬람교도는 3,156명(일부 터키 시민 포함)이었다.
바투미에 대해 별도로 제공되는 종교 데이터는 없지만,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이며, 주로 국가 조지아 정교회를 신봉한다. 또한 무슬림, 카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유대인 공동체도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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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캅카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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