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티
부가티(Bugatti)는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프랑스인 에토레 부가티가 1909년에 설립한 프랑스의 최고급 고성능 수공 자동차 제조업체이다. 현재 독일의 폭스바겐 그룹 산하에 있으며 본사는 프랑스 알자스의 소도시인 몰샤임(Molsheim)에 위치해 있다. 과거에는 초고성능 경주차에서 최고급 세단까지 각종 최고급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현재는 하이퍼카를 전문으로 생산한다.[1] 이탈리아의 기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Romano Artioli)는 1987년에 부가티 브랜드를 인수했고 부가티 오토모빌리(Bugatti Automobili SpA)를 설립했다. 폭스바겐은 1998년 6월 부가티 상표를 구매했고 1999년 부가티 자동차 S.A.S를 법인화했다.[2] 현재 CEO는 스테판 빈켈만(Stephan Winkelmann)이다.[3]
2019년 3월에는 스위스 제네바 팔렉스포 전시장에서 개막한 제 89회 제네바 모터쇼에서 브랜드 1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신차 '라 부아튀르 누와르'(La Voiture Noire·검은 차)를 공개했다. 모터쇼에서 공개되기도 전에 약 1890만 달러(약 213억원)에 팔려 라 부아튀르 누와르는 1300만 달러(146억원)에 팔린 롤스로이스의 스웹테일(Sweptail)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차가 됐다.[4]
목차
개요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인 엔지니어 에토레 부가티가 설립한 자동차 회사이다. 당시 독보적인 최고급 차량을 생산했으나, 시장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지나치게 비싸고 사치스러운 모델만 생산했기 때문에 2번의 우여곡절을 겪고 이스파노-수이자와 폭스바겐 그룹에 팔려 다니곤 했다.
그것도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 인수처럼 사원은 그대로 있고 경영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명맥이 끊겼던 것을 상표권만 사와 "부활"시키는 형식이었기에 부가티 매니아 중 일부는 원래의 에토레 부가티가 세운 회사만 부가티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는 폭스바겐 그룹 산하 회사며, 공장에서는 조립만 하고 핵심 부품인 엔진은 독일 폭스바겐 공장에서 제작한 것을 가져다 쓴다.
또한 엄청난 브랜드 가치를 지닌 회사답게, 현재도 클래식 카 경매에서 최고가로 팔리는 차량들이 많다. 일례로, Type 57SC Atlantic이라는 모델은 무려 3000만달러에 팔렸다. 경매 최고가 차량들은 부가티를 포함한 파가니,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 메르세데스-마이바흐, 맥라렌 등의 브랜드가치가 뛰어난 프리미엄 브랜드의 차량들인데, 이 중에서도 부가티 클래식카의 가치는 독보적이다. 하지만 57SC Atlantic의 3000만달러를 2012년에 페라리의 1962년형 250 GTO가 3500만 달러로 넘어섰으며, 2014년에 다시 1962년형 250 GTO가 3811만5000달러로 경신했고, 2016년에 1957년 제작된 335S Spider Scaglietti가 3200만유로로 다시 한번 최고가를 경신했다.
반면 57sc의 다른 버전은 2016년에 973만 달러에 팔렸다. 페라리는 오랜 역사와 역사에 비례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모델들이 존재하고, 아직까지도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은 자동차 브랜드이므로 당연히 세계 경매가 최상위권에 많이 랭크 될 수 밖에 없다. 반면 부가티는 시작은 1909년으로 페라리보다 앞서지만 1940년대를 전후로 장남 장 부가티와 설립자 에토레 부가티의 사망과 제2차 세계 대전등으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여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데다 그 완벽주의로 인해 판매량이 적어 경매에 상대적으로 덜 나오며, 팬층도 페라리에 비하면 빈약하다.
물론 희소가치가 높아 향후 경매시장에 나올 경우 얼마든지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은 있다.참고로 경매가 아닌 거래로 판매된 자동차 중 가장 비싼 것도 페라리 250 GTO로 폴 파팔라도가 2013년10월에 무려 5200만 달러에 판매한 것이다. 브랜드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 이와 함께 2020년 한국 진출을 선언하고 인증용 모델도 들어와있다.[1]
주요인물
- 스테판 빈켈만(Ettore Bugatti) : 부가티의 엔지니어, 디자이너이자 설립자이다. 부가티 Type 2부터 수많은 명차들을 제작하여 지금도 자동차인들에게 존경을 마지않는 자동차 제작자이다.
- 스테판 빈켈만(Stephan Winkelmann): 부가티의 사장이다.
역사
Automobiles Ettore Bugatti(1909 ~ 1963)
1909년 이탈리아 태생의 산업디자이너 에토레 부가티가 당시 독일 알자스주 몰셰임시에 설립한 프랑스의 고성능 자동차 제조업체다. 이 차들은 디자인적인 아름다움과 많은 경주 승리로 유명했다. 부가티는 3Type 35 Grand Prix, Type 41 "Royale", Type 57 "Atlantic", Type 55 등 유명한 스프츠카를 만들었다.
1947년 에토레 부가티의 죽음은 그 마르크의 종말임이 증명되었고, 1939년 아들 장 부가티의 죽음으로 공장을 이끌 후임자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만들어진 자동차가 8,000대도 안된다. 회사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50년대에 마지막 모델을 출시했고, 결국 1963년에 비행기 부품 사업을 위해 인수되었다.
1987년 한 이탈리아 기업가가 이 브랜드를 구입해 모데나에 기반을 둔 한정생산 전용 스포츠카 제조업체로 부활했다. 1998년 폭스바겐 그룹은 부가티 브랜드에 대한 권리를 매입하였고 알자스 주 몰셰임에 자회사를 설립했다.[2]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
전쟁 중에 에토레 부가티는 처음에는 밀라노로, 나중에는 파리로 보내졌으나, 적대관계가 종결되자마자 몰셰임 공장으로 돌아갔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자스가 독일에서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을 공식화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부가티는 1919년 10월 제15회 파리 모터쇼에서 막판에 스탠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3대의 경차를 전시했는데, 모두 전쟁 전 등가물을 바탕으로 촘촘히 짜여져 있었고, 각각 실린더당 4개의 밸브가 달린 동일한 오버헤드 캠축 4기통 1,368cc 엔진을 장착했다. 세 가지 중 가장 작은 것은 경주용 차체를 가진 (부가티 자신이 시공한) 'Type 13'이었고, 축간거리 2,000mm(78.7인치)의 섀시를 사용한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각각 2,250mm, 2,400mm(88.6인치, 94.5인치)의 휠베이스를 가진 'Type 22'와 'Type 23'이었다.[2]
레이싱 성공
부가티는 1929년 비공개로 참가한 모나코 그랑프리 대회에서 최초로 우승하는 등 그랑프리 초반의 자동차 경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레이싱의 성공은 드라이버 장 피에르 위밀(Jean-Pierre Wimille)이 르망 24시간 경기에서 두 번(1937년 로버트 베노아(Robert Benoist)와 1939년 피에르 베이론(Pierre Veyron) 함께) 우승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부가티 자동차는 경주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소형 부가티 타입10이 첫 경주에서 상위 4위를 차지했다. 1924년형 부가티 타입35는 가장 성공적인 경주용 자동차 중 하나이다. 35타입은 부가티가 1924년 리옹에서 처음 열린 그랑프리에서 마스터 엔지니어 겸 레이싱 드라이버 장 샤사뉴(Jean Chassagne)와 함께 개발했다. 부가티스는 1925년부터 1929년까지 5년 연속으로 타르가 플로리오( Targa Florio)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루이시론(Louis Chiron)은 부가티 자동차에서 가장 많은 시상대를 열었고, 현대의 유명 리바이벌 Bugatti Automobiles SAS는 그의 명예를 걸고 1999년 부가티 18/3 시론( Bugatti 18/3 Chiron)으로 컨셉트카를 명명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르망에서의 마지막 레이싱 성공이었다. 장 피에르 위밀과 피에르 베이론(Pierre Veyron)은 1939년 경주에서 단 한 대의 자동차와 미미한 자원으로 우승했다.[2]
비행기 경주
1930년대에 에토레 부가티는 독일인들을 이기기를 바라면서 경주용 비행기 제작에 관여했다. 모델명은 Bugatti 100P으로 결코 날지 않았다. 이건은 "Type 7.5"리프팅 차체에 부가티 브레시아 엔진을 적용한 벨기에 엔지니어 루이 드 몽주(Louis de Monge)에 의해 설계됐다.[2]
철도차량
에토레 부가티는 또한 성공적인 전동열차인 오토레일 부가티(Autorail Bugatti)를 설계했다.[2]
가족참사
1939년 8월 11일, 에토레 부가티의 아들 장 부가티(Jean Bugatti)가 사망하면서 회사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장 부가티는 몰샤임 공장 근처에서 Type 57 탱크 바디 차체의 경주용 자동차를 테스트하던 중 사망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몰샤임 공장은 폐허가 되었고 회사는 그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전쟁 중에 부가티는 파리 북서쪽 교외인 르발루아에 새로운 공장을 계획했다. 전쟁 후 부가티는 Type 73로드 카와 Type 73C 싱글 시트 레이싱카 등 일련의 신차를 설계하고 제작할 계획이었으나, 모든 면에서 부가티는 Type73 자동차 5대 만 제작했다.
1947년 8월 21일, 에토레 부가티가 사망하면서 375cc 슈퍼차지드(supercharged) 자동차의 개발은 중단되었다. 에토레 부가티의 사망 이후 사업은 더욱 쇠퇴하여 1952년 10월 파리 모터쇼에서 자체 사업으로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쇠퇴 끝에 1952년 부가티의 원신은 운영을 중단했다.[2]
디자인
부가티스는 눈에 띄게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엔진 블록을 손으로 긁어서 표면이 너무 평평해서 개스킷을 밀봉할 필요가 없었는지 확인하였고, 엔진실의 많은 노출된 표면은 그 위에 기요세(guilloché) 마감 처리가 되어있으며, 안전 와이어는 복잡하게 레이싱된 패턴으로 거의 모든 고정 장치에 나사선으로 연결되었다. 대부분의 제조업체가 그랬던 것처럼 스프링을 차축에 고정시키는 대신, 부가티의 차축은 스프링이 차축의 세밀한 크기의 개구부를 통과하도록 만들어졌고, 이는 보다 적은 부품이 필요한 훨씬 우아한 솔루션이다. 그는 주요 경쟁사인 벤틀리는 내구성에 초점을 맞춘 "세계에서 가장 빠른 트럭"이라고 묘사했다. 부가티에 따르면, "무게는 적이었다"고 한다.[2]
부활 시도
1950년대 중반 미드엔진 Type 251 경주차로 롤랜드 부가티(Roland Bugatti)에서 컴백을 시도했다. 조아키노 콜롬보(Gioacchino Colombo)의 도움을 받아 설계된 이 차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자동차 생산 시도는 중단됐다.
1960년대에 버질 엑스너(Virgil Exner)는 그의 "Revival Car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부가티를 디자인했다. 이 차의 쇼 버전은 실제로 기아(Ghia)가 마지막 Bugatti Type 101 섀시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1965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였다. 자금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그 후 엑스너는 스터츠(Stutz)의 부활로 관심을 돌렸다.
부가티는 비행기 부품을 계속 제조했으며 1963년 항공기 공급업체로 변신한 전 자동차 제조업체인 이스파노 수이자(Hispano-Suiza)에 매각되었다. 스네크마(Snecma )는 1968년 이스파노 수이자를 인수했다. Messier Bugatti Dowty(SAFRAN group)를 인수한 뒤 스네크마는 1977년 메시에와 부가티를 메시에-부가티(Messier-Bugatti로)로 합병했다.[2]
Automobili Bugatti S.p.A.(1987 ~ 1995)
이탈리아의 기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Romano Artioli)는 1987년에 부가티 브랜드를 인수했고 부가티 오토모빌리(Bugatti Automobili SpA)를 설립했다. 아르티올리는 건축가 지암파올로 베네디니 (Giampaolo Benedini)에게 이탈리아 모데나의 캄포갈리아노에 건설된 공장을 설계하라고 의뢰했다. 그 공장의 건설은 1988년에 첫 번째 모델의 개발과 함께 시작되었고, 2년 후인 1990년에 시작되었다. 1989년까지 새로운 부가티 부흥 계획은 람보르기니 미우라(Miura)와 람보르기니 쿤타치(Lamborghini Countach)의 디자이너인 파올로 스탄자니(Paolo Stanzani)와 마르첼로 간디니(Marcello Gandini)가 발표했다.
첫 번째 생산 차량은 3.5리터, 실린더당 5밸브, 쿼드 터보차지 60°V12 엔진, 6단 기어박스, 4륜 구동 등이 특징인 부가티 EB110 GT였다. 스탠자니는 모든 초기 프로토타입에 사용되는 알루미늄 벌집형 섀시를 제안했다. 그와 아르티올리는 공학적 결정을 놓고 충돌하여 스탠자니는 프로젝트를 그만뒀고 아르티올리는 1990년 6월 니콜라 마테라치( Nicola Materazzi)를 후임자로 물색했다. 그동안 페라리 288 GTO와 페라리 F40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테라치는 알루미늄 섀시를 프랑스항공우주계획청(Aerospatiale)에서 제조한 탄소 섬유로 교체했고, 자동차의 토크 분배를 40:60에서 27:73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그는 1992년 말까지 엔지니어 감독으로 재직했다. 레이싱카 디자이너 마우로 포르기에리(Mauro Forghieri)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부가티의 기술 감독으로 재직했다. 1993년 8월 27일, 지주회사인 룩셈부르크의 ACBN 홀딩스 S.A.를 통해 로마노 아르티올리는 제너럴 모터스로부터 로터스카를 구입했다. 부가티 주식을 국제 증권거래소에 상장할 계획을 세웠다.[2]
부가티는 1993년 EB112라는 프로토 타입 대형 세단을 선보였다. 디자이너는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 말 그대로 컨셉카였기 때문에 단 두대만 생산되었는데, 이중 한대는 행방이 묘연하고 나머지 한대는 모나코에서 가끔 보인다. 비록 컨셉카로 끝나버렸지만, EB112의 디자인은 후에 폭스바겐이 부가티를 인수한 이후 발표한 컨셉카 EB118, EB218, EB18/3 등으로 이어져내려왔으며, 베이론의 디자인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차라고 할수 있다.[1]
아마도 가장 유명한 Bugatti EB110 소유주는 1994년에 EB110을 구입한 7번의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 경주 드라이버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이다. 슈마허는 1994년 심각한 충돌 사고 이후 수리한 자신의 EB110을 독일의 페라리 서비스 및 레이스 준비 차고인 모데나 모터스포츠에 팔았다.[2]
EB110이 시장에 나올 무렵 북미와 유럽 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다. 열악한 경제 환경으로 인해 회사는 파산할 수밖에 없었고 1995년 9월에 영업을 중단했다. '부가티 아메리카'라는 미국 시장에 특화된 모델은 이 회사가 영업을 중단했을 때 준비 단계에 있었다.[2]
부가티의 청산인은 말레이시아의 프로톤에게 로터스카를 팔았다. 독일 기업 다우어 레이싱(Dauer Racing)은 1997년 EB110 라이선스 및 잔여 부품 재고를 구입해 EB110 SS 차량 5대를 추가로 생산했다. 이 5대의 SS 버전의 EB110은 다우어에 의해 크게 개선되었다. 캄포갈리아노 공장은 입주 전에 폐업한 가구제조회사에 매각돼 건물이 텅 비어 있었다. 2011년 다우어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 후 독일의 토스카나 모터스(Toscana-Motors GmbH)는 다우어로부터 나머지 부품 재고를 매입했다.
전 부사장 장 마르크 보렐(Marc Borel)과 전 직원 페데리코 트롬비(Federico Trombi), 지안니 레미놀피(Gianni Sighinolfi), 니콜라 마테라치(Nicola Materazzi) 등이 B 엔지니어링 회사를 설립해 부가티 EB110 SS의 섀시와 엔진을 이용해 에도니스(Edonis)를 설계·구축하되 터보차징 시스템과 드라이브라인(4WD~2WD)을 단순화했다.[2]
Bugatti Automobiles S.A.S. (1998–present)
프리 베이론
폭스바겐은 1998년 6월 부가티 브랜드를 인수했다. 부가티 오토모빌리 S.A.S.는 이탈리아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에게 부가티자동차의 첫 컨셉트카인 1998년 파리오토쇼에서 데뷔한 쿠페 EB118을 제작 의뢰했다. EB118 컨셉트는 408 Kw(555 PS; 547 bhp), W-18 엔진을 특징으로 했다. 파리 데뷔 후 1999년 제네바 오토쇼와 도쿄 모터쇼에서 다시 EB118 컨셉트를 선보였다. 부가티는 199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EB 218을, 199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에서 18/3 시론을 다음 컨셉트로 소개했다.[2]
베이론 시대(2005 ~ 2015년)
부가티 오토모빌리 S.A.S.는 2005년 9월 프랑스 부가티 몰샤임에서 첫 번째 정규 생산 차량인 부가티 베이론 16.4(터보차 4대를 탑재한 8리터 W-16엔진을 탑재한 1001PS 슈퍼카)의 조립을 시작했다. 2015년 2월 23일 부가티는 '라 피날레'라는 이름의 마지막 베이론 그랜드 스포츠 비테세(Veyron Grand Sport Vitesse)를 판매했다.
시론 시대(2016~ 현재)
부가티 시론은 부가티 베이론의 후속으로로 개발된 아킴 안시드(Achim Anscheidt)가 디자인한 중형 2인승 스포츠카다. 시론은 2016년 3월 1일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다.[2]
특징
동그란 전면 그릴
부가티의 차량들은 원래부터 뛰어난 성능과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부가티의 차들 모두, 심지어 EB110과 폭스바겐 산하 부가티에게도 공통되는 특징 하나는 특유의 동그란 전면 그릴이다. BMW의 콧구멍 모양 그릴을 키드니(신장) 그릴(kidney grilles)이라고 부르듯이 부가티의 이 독특한 그릴을 말발굽 그릴(horseshoe grille)이라고 부른다. 다만 실제로는 말발굽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달걀을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라고 칭송한 에토레의 아버지 카를로 부가티(Carlo Bugatti)의 영향을 받아 달걀의 모양을 본따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Type 13을 비롯한 초기 부가티 자동차들은 계란처럼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길쭉한 타원형 그릴을 하고 있었다. 이후 차량의 조항성을 좋게 하기 위해 차체를 낮추면서 타원형 그릴의 아랫부분이 땅에 닿지 않게 평평해졌고, 엔진 양옆에 컴프레서를 달면서 타원형 그릴의 윗부분이 넓어지면서 잘 알려진 말발굽 모습이 되었다.[1]
춤추는 코끼리 엠블럼
또 하나의 특징은 후드 위에 올라가있는 춤추는 코끼리 모양의 조각(Dancing Elephant)이다. 동그란 라디에이터 그릴과 달리 이 장식은 오직 부가티 클래식카에서만 볼수 있는데, 그마저도 스포츠카나 레이싱 모델에는 달려있지 않고 오로지 럭셔리 세단에만 달려 나왔다. 당시에는 롤스로이스의 유명한 환희의 여신상과 동급이거나 오히려 그 이상의 위상을 지녔지만, 부가티가 도산함에 따라 현재는 부가티 매니아만 아는 정도이다. 베이론의 마지막 한정판인 Les Légendes 라인업을 보면 전부 실내에 이 코끼리 조각이 붙어있는데,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1]
많이 생산되고 또 많이 팔린 브랜드
21세기에 접어들어선 생각보다 많이 생산되고 또 많이 팔린 브랜드이기도 하다. 물론 부가티 시론 항목에서 500대 한정 판매로 생산한 차량이 반도 채 팔리지 않았다는 내용을 본다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차량의 가격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베이론만 하더라도 150만 달러에서 시작되고 시론의 경우엔 아예 300만 달러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한다. 시론의 경우 슈퍼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의 엔트리급 차량들 가격의 거의 10배에 가까운, 하이퍼카라는 자칭이 어색하지 않을 만한 몸값이다. 이런 차가 200대가 넘게 팔렸으니 이는 절대로 적게 팔린 숫자라고 보기엔 힘들다. 물론 윗 문단에서 보듯이 베이론만 해도 1대당 60억에 가까운 손해를 보는 정신 나간 수준의 손익율 때문에 많이 팔린 것이 곧 많은 적자를 의미하기는 한다. 그래도 절대적인 판매량을 생각하자면 30억 짜리 차가 200대가 팔렸다는 건 결코 적은 숫자라고 볼 수 없다. 산수적인 계산만 해보아도 우라칸이 비슷한 매출을 내려면 2천대 가까이를 팔아야 한다. 생산량 역시 같이 하이퍼카임을 자부하는 코닉세그[36]가 22년간 130대를 생산한 것에 비해 부가티는 베이론과 시론을 합쳐 근 천대에 가까운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이 역시 1대당 수십억짜리 차량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생산량이다.[1]
8리터 16기통 쿼드러플 터보 엔진 베이론과 시론 모두 4리터 8기통 엔진 두개를 이어 붙인 다음 터보 4개를 꽂은, 8리터 16기통 쿼드러플 터보 엔진[37]이라는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탑재하고 있기에 차량 자체가 매우 무겁다. 두 차종 모두 아반떼와 비슷한 크기[38]임에도 공차 중량이 약 2톤에 육박하기 때문에 별명으로 돼지나 하마 소리까지 듣는다. 그나마 시론은 탄소섬유로 차체를 만들어 무게 증가를 줄였음에도 베이론보다 더 무겁다. 그래도 이 무게 덕분에 주행의 안전성이 높아져 차량의 운전 난이도가 급감하여 운전하기 쉬운 차라는 평가는 빠짐없이 듣는 편이다. 같은 수준의 고성능을 자랑하는 코닉세그의 차량들이 너무 가벼운 차체 때문에 전문 프로 드라이버들이라도 차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운행에 애를 먹는다는 점에 비하면 이는 분명한 특징이다. 그밖에도 무거운 차체가 주는 의외의 장점은 바로 편의 장비의 추가에 부담이 없다는 점. 극도의 경량화를 추구하는 차량이라면 빼버리거나 넣어도 고민할 만한 물건들을 어차피 무거운 부가티의 차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추가할 수가 있다.[1]
제품
과거 생산차량
- Automobiles Ettore Bugatti시절의 차량
- 부가티 Type 2
- 부가티 Type 5
- 부가티 Type 10
- 부가티 Type 13/17/22/23
- 부가티 Type 16
- 부가티 Type 18
- 부가티 Type 29
- 부가티 Type 30/38/40/43/44/49
- 부가티 Type 32
- 부가티 Type 35
- 부가티 Type 36
- 부가티 타입 41 루아얄
- 부가티 Type 45
- 부가티 Type 46/50/50T
- 부가티 Type 51
- 부가티 Type 52[40]
- 부가티 Type 53
- 부가티 Type 55
- 부가티 Type 56C[41]
- 부가티 Type 57
- 부가티 Type 64
- 부가티 Type 73C
- 부가티 Type 101
- 부가티 Type 251
- 부가티 Type 252
- Bugatti Automobili S.p.A.시절의 차량
- 부가티 EB110
하이퍼카
- 베이론(Veyron)
- 시론(Chiron)
- Divo
- Centodieci: 부가티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차. 단 10대만 판매하며 가격은 한화 약 105억 원.
코치빌드
- 라 부아튀르 누와르(La Voiture Noire) : 세계에서 단 한대 뿐이며 가격은 한화 약 213억원 정도이다. 부가티 브랜드 1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스포츠카로 차체는 차체는 검은색 탄소 섬유로 제작됐고, 1500마력에 16기통 엔진이 장착됐다. 2019년 3월 5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 팔렉스포 전시장에서 개막한 제89회 제네바 모터쇼에서 전시되었으며 포브스에 따르면 이 차는 모터쇼에서 공개되기도 전에 약 1890만 달러(약 213억원)에 팔렸다. 라 부아튀르 누와르는 1300만 달러(146억원)에 팔린 롤스로이스의 스웹테일(Sweptail)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차가 됐다. 독일 자동차 브랜드 포르쉐(Porsche) 창업자의 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가 이 차를 구매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그는 부가티를 소유하고 있는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Volkswagen)의 최고경영자(CEO)를 거쳤다. 라 부아튀르 누와르는 부가티의 창업자 에토레 부가티의 아들 장 부가티가 디자인부터 설계를 맡았던 부가티의 57SC 아틀란틱 쿠페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각주
참고자료
- 부가티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bugatti.com/?I=en
같이 보기
이 문서는 로고 수정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