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링컨 컨티넨탈(Lincoln Continental)은 미국의 자동차 제조 회사인 포드(Ford)의 고급 승용차 브랜드이다. 창업자인 헨리 릴런드(Henry Martin Leland)가 존경했던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에서 따왔다. 1923년 쿨리지 대통령을 시작으로 1939년에서 1989년까지 6번에 걸쳐 백악관에 특수하게 제작한 대통령 전용차를 납품하며 미국의 최고급차와 대통령전용차 제조업체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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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국 포드의 고급 브랜드인 링컨은 지난 1917년 탄생 이후 소비자들에게 꾸준하게 인기를 얻어 ‘아메리칸 럭셔리 카(American Luxury Car)’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링컨의 강점은 ‘스타일(Style)’과 ‘럭셔리(Luxury)’를 꼽는다. ‘아메리칸 럭셔리 카(American Luxury Car)’의 상징이 되어 왔다. 링컨은 아메리칸 럭셔리카 라인업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온 브랜드 헤리티지, 그리고 첨단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완성한 링컨만의 드라이빙 퍼포먼스(Driving Performance)를 더해 미국의 경쟁력 있는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으며, 최근에는 주행성능을 끌어올리고 다양한 첨단 기술을 적용하면서 링컨은 혁신적인 고급차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는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링컨의 대표 브랜드라고 말할 수 있는 모델이 링컨 컨티넨탈이다. 링컨 컨티넨탈은 당시 에드셀 포드(Edsel Ford) CEO가 1938년 파리 여행 중 유럽차들을 보며 받았던 느낌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에드셀 포드는 처음에는 자신이 타고 다닐 차로 링컨 컨티넨탈을 제작했으나 이를 본 주위의 반응이 좋아 양산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1920년대 이래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트루먼(Harry S. Truman) 등 미국 대통령의 전용차로 명성을 쌓아 온 링컨은 세계적인 명품 디자이너지방시(Givenchy), 구찌(Gucci). 까르띠에(Cartier) 뿐만 아니라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등 유명 할리우드(hollywood) 스타들의 러브콜을 받는 등 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선택한 미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자동차이다.
주요 인물
- 헨리 릴런드(Henry Martin Leland) : 헨리 릴런드는 링컨(Lincoln)의 설립자이다. 1843년 영국(United Kingdom)에서 이민온 소장수의 아들로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 버몬트(Vermont)에서 태어 났으며,[1] 12살때부터 정밀가공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릴런드는 24세 때 자신의 정밀가공공장을 디트로이트(Detroit)에 세워 부와 명성을 얻었다. 젊었을 때부터 익혔던 전문기술로 남북전쟁중에는 총 제작에 필요한 도구을 만들었으며, 그후 1/1000인치의 정확도를 낼 수 있는 기술로 이발용 기계를 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1867년에는 디트로이트에 기계공장을 세우고 올즈모빌(Oldsmobile) 설립자인 랜섬 올즈(Ransom Olds)에게 부품을 납품하기도 하였는데, 1/1000의 오차까지 잡아내는 정밀한 기어를 공급해 능력을 인정 받고, 올즈모빌로부터 엔진과 변속기 주문을 받아 기반을 다져나갔다. 1901년 10.25마력의 엔진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올즈가 받아들이지 않자, 정밀기술의 대가였던 헨리 릴런드는 같은 모델인 경우 부속품을 서로 바꿔 끼워도 문제없는 부품 호환성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헨리 포드가 세웠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자금난으로 매각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회사를 인수해 1903년 캐딜락회사를 설립하고 릴런드의 첫 자동차를 만들었으며, 이 자동차가 바로 그 유명한 "캐딜락 1호차" 인 것이다. 이차는 2인승 1기통 10마력 엔진으로 시속 48km를 달릴 수 있었으며, 캐딜락(Cadillac)은 부품표준화를 향한 릴런드의 노력으로 부품교체가 가능한 최초의 자동차였고, 자동시동기, 전기전조등을 선구적으로 채택하였다. 1908년 영국의 캐딜락 딜러인 프레드릭 바넷(Frederick Bannett)이 영국 황실자동차클럽에서 캐딜락 신차 3대를 분해하여 부품을 섞은 후 재조립해 800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하면서 캐딜락은 영국 황실이 수여하는 토마스 드와 트로피(Thomas Dewar Trophy)를 수상하는 쾌거를 올린다. 얼마 후 리랜드는 캐딜락을 제너럴모터스(GM)의 대표 브랜드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에게 매각한다. 그러나 1차대전이 일어나자 비행기 엔진 개발 문제로 듀런트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GM을 떠나고 아들 윌프레드(Wilfred)와 함께 비행기 엔진 회사를 설립하였고, 1919년에는 자동차 제작으로 업종을 바꾸고 회사 이름을 링컨이라 정한다. 이듬해에 정식으로 링컨사를 설립하고 첫차인 링컨 V8(Lincoln V8)을 내놓지만 1922년 헨리 포드에게 이 회사를 매각하였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시민 문제에 관심이 많아 디트로이트 시민 연맹(Detroit Citizen League)를 설립하고 수년간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후에 이 공로로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과 버몬트대학(University of Vermont)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핸리 릴런드는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2]
등장배경
링컨을 처음 만든 이는 윌리엄 듀란트와 제너럴 모터스를 공동 설립한 헨리 마틸 리랜드로, 자동차 부품회사로 캐딜락을 설립해 운영해 온 핸리 리랜드는 듀란트와 함께 GM그룹을 설립했으며, 지난 1915년 이들은 V8 엔진을 개발해 실용화에 성공하기도 했다. 리랜드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항공기 엔진 회사를 설립해 군수업체로 변신을 도모했으나, 비행기 엔진 제작을 원하던 리랜드와 자동차만을 고집한 듀란트의 대립으로 결국 리랜드가 캐딜락을 떠나게 됐다. 이후 리랜드는 자동차 엔진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링컨 대통령의 이름을 따 1917년 링컨 자동차 회사(Lincoln Motor Company)를 정식 설립했다. 리랜드는 1922년 포드에 링컨 브랜드가 편입된 후 줄곧 포드의 럭셔리카를 담당했으며, 링컨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모델인 컨티넨탈(Continental)을 통해 고급차 브랜드로의 이미지를 완성하게 된다.
역사
- 1920년대 : 1920년대 링컨은 프리미엄 아메리칸 럭셔리 카로 독자적 입지를 굳히는 시기였다. 포드의 주문 제작 차량 중 가장 유명한 모델은 아들 에드셸 포드가 아버지 헨리 포드를 위해 만든 1922년 링컨 타운카로, 타운카의 이름은 운전석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고 승객석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차체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링컨 타운카는 자동차를 교통수단이 아닌 고귀한 지위의 상징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토마스 에디슨, W.C 필즈, 허버트 후퍼와 같은 저명 인사들이 이 시절 링컨을 애용하였다.[3]
- 1930년대 : 1930년대 링컨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고급 승용차라고 각인되었고, 링컨 제퍼 출시로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제퍼는 유선형 라인을 가진 공기역학(aerodynamics)적인 디자인의 시초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으며, 에드셸 포드는 1938년 신차 링컨 컨티넨탈을 출시하기로 결정하고 신차 개발을 진행하여 소비자들로 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링컨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라고 평가했으며,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역시 '탁월한 디자인의 차로 칭한 첫 번째 자동차 브랜드'로 링컨을 소개했다.
- 1940년대 : 194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탱크 엔진, 수륙양용 차량 바디 및 14만대의 지프 바디의 제작을 위해 모든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어, 이 시기에는 미국에서 출시된 대부분의 차들과 마찬가지로 링컨 역시 2차 세계대전 전의 디자인을 리스타일링된 모델들을 출시했다.
- 1950년대 : 1950년대는 링컨에게 큰 변화의 시대였다.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파워 윈도우, 광각 앞 유리, 튜브가 없는 타이어, 자동 시트 등 옵션이 링컨 프리미어에 장착되기 시작했으며, 링컨의 디자인 또한 미래지향적으로 변화하였고, 컨티넨탈 마크 II는 링컨의 새로운 스타일룩을 만들어냈다. 당시 링컨은 세기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향력 있는 자동차로 평가받았다.
- 1960년대 : 1960년대는 그 당시 트렌드였던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심플함과 정교함에 초점을 두고 디자인을 한 뉴 컨티넨탈이 출시되어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차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1961년 컨티넨탈은 가운데에서 문이 열리는 코치도어 방식으로 하드탑 또는 컨버터블 모델이 있었으며, 이는 1939년 원조 컨티넨탈과 마찬가지로 링컨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뉴 컨티넨탈은 명성 높은 미국 산업디자인협회(IDSA: Industrial Design Society of America)에서 올해의 디자인 상을 받은 최초의 자동차가 되었다.
- 1970년대 : 1970년대의 링컨은 60년대의 트렌드와 반대로 다시 넓어지고 럭셔리 해졌고, 링컨 마크 IV 쿠페는 70년대 젊은 부유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74년 링컨 최초로 자동차 뒷 유리 서리방지 시스템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시, 구찌, 까르띠에 등 유명디자이너의 패션 트렌드를 도입하여 링컨에 명품 마크를 새겨 넣었다.
- 1980년대 : 1980년대 링컨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 시기였다. 1984년 마크 VII는 개인용 럭셔리 쿠페 부문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뉴 컨티넨탈은 링컨 최초의 전륜구동(FWD: Front Wheel Drive)차로 크게 주목 받았다. 타운카를 비롯하여 나머지 모델들이 계속 성공하였고, 링컨은 총 280,659의 판매 대수를 기록하며 자동차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 1990년대 : 1990년대에는 일본과 영국의 브랜드 자동차들이 미국 자동차 시장으로 진출하여 미국 제조업체와의 경쟁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링컨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다. 1990년형 타운카는 모터트렌드(Motor Trend)의 "올해의 차"로 선정되었고, 드라마틱한 외관과 운전자 중심의 인테리어를 갖춘 마크 VII을 출시하며 또 한번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1998년 최초의 풀 사이즈 울트라 럭셔리 LUV인 내비게이터를 출시했으며, 전통적인 링컨의 특성을 살린 웅장하고 럭셔리함으로 내비게이터는 '도로의 왕(King of the Road)으로 불리며 젊은 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4]
동영상
각주
- ↑ Henry_M._Leland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M._Leland
- ↑ 〈링컨 헨리 릴랜드 Henry M.leland〉, 《홀스레스바이클》, 2017-12-24
- ↑ 김성윤 기자, 〈링컨 "컨티넨탈은 아메리칸 럭셔리의 상징"〉, 《한국경제티비》, 2017-06-22
- ↑ 〈미국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링컨의 역사〉, 《카리브》, 2017-04-05
참고자료
- 링컨 컨티넨탈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lincoln.com/
- 링컨 컨티넨탈 코리아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lincoln-korea.com/vehicles/continental/
- 박홍준 기자, 〈미국 상징하는 車, 캐딜락⋅링컨..한국 시장 성적표는?〉, 《데일리카》, 2018-01-05
- 류강훈 기자, 〈美링컨컨티넨탈 80주년 '코치도어' 에디션 2일만에 매진〉, 《중앙일보》, 2019-01-22
- 김상환 기자, 〈(중국소식) 링컨, 中서 2만3978대 리콜…주행 중 문 열림 결함 발견〉, 《모토그래프》, 2019-05-02
- 김훈기 기자, 〈(중국소식) 링컨의 플래그십 세단 '컨테넨탈'의 운명은?〉, 《오토헤럴드》, 2019-08-20
- 김상준 기자, 〈코로나19 돌파구, 미국차 '파격할인' 최대 25% 깎아준다〉, 《미디어펜》, 2020-03-03
- 김혁수 기자, 〈링컨, MKZ에 이어 ‘컨티넨탈’ 폐지…SUV만 남는다〉, 《한국일보》, 2020-07-05
- 강홍구, 〈미국의 포드자동차 이야기〉, 《타고》, 2020-12-07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