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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홍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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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2월 25일 (금) 17: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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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홍치(一汽红旗)
이치홍치(一汽红旗)
이치자동차(第一汽车)

이치홍치(一汽红旗)는 1958년에 탄생한 이치자동차의 최고급 브랜드이다. 마오쩌동(毛澤東) 전 국가주석이 전용차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브랜드 한자 로고도 마오 전 주석의 친필로 알려졌다. 시진핑(習近平) 주석도 2015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홍치를 타고 사열했다. 브랜드 슬로건은 "이상을 펼치자(让理想飞扬)"이다.

개요

중국의 최고급 자동차를 제작하는 업체이다. 이름인 홍치(红旗, 한어병음 : Hóngqí)는 빨간 깃발이란 뜻이며, 빨강은 중국 공산당을 상징하는 동시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색이다. 브랜드 가치가 중국 내 최고인지라 대한민국의 제네시스, 미국의 캐딜락, 일본의 렉서스 같이 중국 주석들의 의전용으로 자주 사용된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모두 홍치를 애용했으며, 엠블럼의 한자인 红旗는 마오쩌둥의 친필이다. 시진핑 역시 홍치 L5를 의전차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승용차와 SUV가 있다. 1960년 홍치 CA72는 세계자동차연감에 수록돼 세계 명차로 분류되기도 했다. 홍치는 중국 정부 지도자의 전용차로 사용되면서 '국차'(國車)라는 명성을 얻었다. 당시 홍치는 자동차라기보다 하나의 상징이었다. 1958년부터 1981년까지 홍치는 개인용 자동차를 거의 판매하지 않았다. 시장경제 체제 도입 전까지 홍치는 대량생산으로 경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손작업이 대부분이었고 제조원가가 비쌌지만, 품질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81년 생산을 중단하기 전까지 중국인에게 홍치는 천안문이나 중난하이(中南海)처럼 경이의 대상이었다. 1996년 홍치가 생산을 재개하면서 '소홍치'와 '대홍치'로 구별했으며 소홍치는 몸값을 낮춰 관용차, 택시, 자가용 시장에 진입했다. 하지만 홍치는 자가용 시장을 겨냥한 판매망과 서비스체계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각 성의 정부가 있는 도시에 판매점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제12차 5개년 계획기간(2011~2015년)이 끝날 때까지 홍치의 연간 판매량은 5천 대를 넘지 못했다. 2017년 8월, 쉬류핑(徐留平, xú liú píng)회장이 이치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초고강도 개혁을 진행하면서 홍치의 판매량은 2018년 3만3,000대, 2019년에는 10만대를 돌파했다.

출시배경

중국 권력자들의 대표적인 자동차인 홍치의 역사는 중국 민족 자동차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중국에는 자체적인 기술로 제작한 자동차가 전무했고 미국과 독일 등 지에서 차를 수입하던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오쩌동 전 주석은 1956년 '10대 관계(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의 국가 건설 정책에 관한 이념과 구상에 대한 발표)'를 발표할 때 "언젠가는 우리가 생산한 승용차를 타고 대회에 왔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본격적인 자체 자동차 개발의 포문을 열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58년 동펑(东风)이라는 자동차가 개발되며 시운전에 성공하였으나 작고 가벼운 승용차에 불과하여 관용차와 의전차량으로는 쓸수 없었다. 그러자 동펑이 등장한지 한달 반이 지나고 홍치의 새로운 개발 계획이 세워졌다. 홍치는 미국 크라이슬러의 럭셔리 세단 모델인 임페리얼 C69를 바탕으로 베이징의 고궁, 베이하이(北海), 이화원 등 중국을 대표하는 건축 예술과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기술은 서구의 것을 따르더라도 외형만큼은 중국의 전통을 반영하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섯 차례의 시운전을 거쳐 드디어 홍치의 완성 모델인 CA72가 탄생하였다. 10주년 건국기념일 때 마오쩌동 전 주석이 CA72를 타고 퍼레이드를 펼쳤으며 1960년에는 라이프치히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호평을 이끌어 냈고 본격적으로 중국 자동차가 세계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1965년에 탄생한 홍치의 2세대 모델 CA770은 최고급 나무와 장식을 사용했고 내부는 중국 전통 문양의 마감재를 사용하여 중국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이 디자인을 맡은 수석 디자이너는 당시 나이가 고작 24살이었던 지아얜량(贾延良, jiǎ yán liáng)이다. 그는 중국의 우수한 미술교육기관 중 하나인 중앙공예미술학원(현 중앙미술학원) 출신이며 졸업작품으로 베이징 시내버스 디자인을 하여 운송 디자인계에서 유명세를 탔다. 졸업과 동시에 홍치를 제작한 이치자동차에 입사하였고 홍치의 2세대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홍치의 1세대 디자인에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했다. 차체 외장에 고궁의 창문, 중국의 길상문 등을 모티브로 사용하였지만 이는 미국 크라이슬러 외형에 중국적인 요소를 더한 것에 불과했다. 이에 홍치의 2세대 디자인 티은 기존의 디자인을 전면 개편하면서 럭셔리 세단의 위상을 잃지 않는 것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당시 구 소련의 자동차 전문가들이 홍치에서 전원 철수하면서 기술 도면이 사라진 데다 남아 있는 디자인 팀 인원도 고작 5명 뿐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중국 공산당 원수였던 천이가 당시 중국에 한 대 밖에 없던 벤츠 600Pullman을 이치에 기증하면서 홍치 디자인 팀은 활력을 얻었다. 그리고 홍콩에서 롤스로이스를 한 대 구입하며 럭셔리 세단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지아얜량이 이끄는 홍치 2세대 디자인 팀은 본격적인 디자인에 들어가기 앞서 명나라 가구들을 면저 분석했다. 가구들의 조형적인 디테일, 짜임새, 구성, 재료, 인체공학적 요소 등 많은 부분에서 자동차에 적용할 요소들을 추출하였고 이를 자동차 디자인에 도입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CA770의 프로토타입에는 차의 사이드라인, 차문 손잡이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중국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조형적인 완성도에서도 지아얜량은 양보가 없었다. 그는 홍치의 완벽한 비례미를 위해 CA770의 벨트라인(옆면 유리창 아래의 라인)이 100mm 더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적인 이유로 반대 의견들이 나오자 지아얜량은 회사 대표에게 직점 잘려가 자신의 주장을 가감없이 내세웠다. 이에 대표가 프로토타입을 살펴보았고 벨트라인을 80mm까지 내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치의 2세대 디자인은 지아얜량의 구상이 거의 완벽하게 표현된 디자인으로 탄생되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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